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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효령대군의 재발견
지은이 이복규 선생은 기존에 소개됐던 역사적 인물을 다른 각도에서 톺아보기를 시도해왔다. 이른바 고정된, 굳어진 어떤 인물에 관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새롭게 조명해보는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책<효령대군>, 역시 그런 작업 중의 하나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책 구성은 태종 이방원이 왕좌에 오르기 전, 정안군의 사저에서 1396년 여흥민씨(원경왕후)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효령대군, 형 양녕, 동생 충녕(후일 세종)과 두 살 터울로 본명, 휘자는 보일시(示)변인 보(𥙷)였다. 당대에는 피휘법이라 하여, 왕은 이름은 잘 쓰지 않는 한자를 골라서 썼는데 이를 벽자라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효령
태종은 효령을 세자로 선택하지 않은 이유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리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효령은 이런 이유로 왕위계승에서 밀렸으나, 실록(태종실록과 성종실록의 배치되는 기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튼 세종이 세자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태종의 점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눈치챈 양녕이 거짓으로 광기를 부리고, 도망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면서 효령에게 이르기를 부왕의 마음은 정해졌으니,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효령이 이 말을 듣고 절로 달려가 밤새 북을 두들겨 북 표면의 가죽이 부풀어 올랐다고 하여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왕좌의 게임, 태종은 공성에서 수성으로 전환을 위해 “문민 통치에 적합한 충녕을”
태종은 왕좌 게임의 승자다. 두 번에 걸친 변을 일으키고, 그 칼에 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올라선 왕좌, 이제 공성은 끝이다. 수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조선에 필요한 것은 무관 풍의 양녕이나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심히 곧은 효령이 아닌 이른바 문민 통치를 기대할 수 있는 충녕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 나와 군사 등, 권력의 향배에 영향을 미치는 부문을 자기가 직접 챙겼는데, 이른바 세종의 안정된 통치기반 조성을 위해, 문제가 될 소지의 싹을 자르는 일을 직접 한 것이다. 이는 17세기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쇼군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식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닛코에 은거, 자식들의 세력 안정에 저해될 인물들을 닛코로 불러들여 처리해버린다. 시대 영걸들의 생각은 비슷한가 싶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는 조선, 독실한 불교 신자?, “불교 신앙”을 가까이한 효령
효령을 둘러싼 이야기, 6명의 왕을 거쳐 91세까지 장수한 효령, 양녕이든 효령이든 형제의 우의로 왕좌를 양보한 것일까, 글쎄다 이는 태종이란 인물을 잘 봐야 한다. 양녕을 꼬드겼다는 이유로 민무구, 무질 형제를 처단했다. 또 세종의 장인 심온 역시 외척 발호 예방 차원에서 싹쓸이를, 이럴진대, 왕좌를 놓고 자식들 사이에 시비가 붙는다면 기 경험자인 태종이 이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인가,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자는 누구인가, 조정의 신하들이다. 그들에게 주군 세종은 역사의 중심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의 우애를 미덕으로 강조하며, 삼강오륜을 중히 여기던 시대 질서와 이런 분위기에서 부모에게 효를 다했다고 하여 효령이요, 시묘 역시 정효군이었으니, 왕이 정한 일을 왈가왈부할 수 있으랴, 후일 양녕은 충녕, 세종의 장자 문종의 죽고 왕좌에 앉은 단종을 내치고 왕이 된 수양을 찾아가 축복했다는 말이 전한다. 양녕이고 효령이고, 효와 형제의 우애를 알았다는 이들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역모를 잘했다고 하고 또 침묵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복규 선생의 돋보기는 오롯이 이 책의 주인공 효령만을 들여다보지만,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주변도 볼 것이다. 역사적 사정도 살필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들은 꼬꼬무다.
효령대군 행적의 인문학적 가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약점을 지적했다던 남명 조식은 지금 학자들은 비로 먼지를 쓸고 물을 뿌릴 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하늘의 이치를 말하여 남을 속이여 이름을 도적질하려 하다 화가 다른 이에게까지 미친다고, 지은이는 효령을 효제충신의 실천자로 봤다. 이른바 삼강오륜을 실천했다는 말이다. 이를 오늘날의 가치로 바꿔보자면, 문화 다원주의 추구, 혈연중심주의와 학연중심주의의 극복이다. 이른바 위버멘쉬(니체가 말하는 초인)라는 말인가,
장수의 비결은 내 마음을 비운 덕이다. 물론 효령의 아내가 33년 동안 본디 허약체질이었던 효령의 건강을 보살폈다는 말이다. 술도, 음식도, 무엇보다도 세속에서 벗어나는 명상, 불교를 깊이 믿었다는 점이 스트레스를 덜 받게 했다는 것인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유학과 유교를 섞어 쓴 이유는 뭘까, 뭔가 개운치 않다. 효령을 효제충신=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우애, 나라에 충성했다. 불경을 해독하고 원각사를 지을 때 감독도 했다고 전하는데, 그가 남긴 글이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이야기, 왕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산속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됐다고, 그런데 후손들이 번창했다 하니...7남 2녀의 자손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을 잘 보면 또 다른 힌트가 있을 듯하다. 양녕과 효령의 조카 수양이 그의 조카를 죽이고 왕좌를 빼앗은 걸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종실 어른으로 이런 삼강오륜이 물구나무서는 일을 보고도. 그러니 이들은 천수를 누린 것이다. 동생의 손자면 이들에게도 손자였을 것이고, 그렇게 우애가 깊었다던 형제의 손자가 죽임을 당했는데, 이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이 대목에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일 뿐인가, 그 행간과 이면에 패자의 눈물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무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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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중 한 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효령대군이시다. 양녕대군이 스스로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말없이 책을 읽었다는 효령대군. 그러나 양녕대군이 성덕이 될 사람은 세종이라고 하자, 수긍하며 세종이 세자가 되었다. 첫째가 스스로 세자의 자리에서 물어나자 둘째인 자신이 세자가 될 줄 알았지만 첫째형이 일깨우자 미련없이 깨끗이 그 자리를 포기하였다. 그래서 위대한 왕 세종이 왕이 될 수 있었다. 효령대군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데 효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에게 각별하였으며 형제들간의 우애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중국 사신과 술자리를 갖는 도중 세종이 형에게 술을 서서 받았다는 설은 상당히 재미있다. 형이기도 하지만 신하이기도 해서 세종이 앉아서 술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 전에 천륜관계라 서서 술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중국 사신도 천륜관계라는 말에 수긍했다고 한다. 또한 양녕대군과도 사이가 좋았다는데 약간은 괴짜인 양녕대군을 진심으로 좋아한 듯 하다. 양녕대군이 짐승을 잡아 효령대군이 있는 곳에서 섭생을 하였지만 크게 나무라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종교는 불교이다. 효령대군의 글씨는 잘 썼다. 책에 많은 자료들이 사진으로 나와 있어서 책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효령대군은 스님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2세의 나이에 14세의 예성부인과 혼인하여 6남 1녀를 두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효령대군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누구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록을 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니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기록이 모두 정확하거나 옳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잘못된 정보나 판단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역사의 기록이지만 후세들이 그 기록을 잘 판단하는 것도 중요했다. 효령대군에 대한 잘못된 판단도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오해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있다. 세종대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알았는데 새로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서 무척 신선했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에 관해서 다른 시각으로 알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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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세종대왕은 존경하는 인물로 가장 많이 알고 있는데 세종대왕의 형님이야기는 또다른 역사의 재미를 가져다줍니다 효령대군은 91세 장수하며 백성의 존경을 받은 인물로 그 시대에 91세라니 그 점에서 이미 놀라울 수 밖에 없습니다 효령대군의 탄생부터 임종까지 그리고 효령대군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어요 책에는 한자로 뜻풀이 및 부연설명이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어린시절 부터 온화하고 아담하며 효도, 우애, 충성, 신의의 행실이 돈독하다고 알려졌어요 효령과 세종의 우애가 얼마나 진했는지 친밀한 사례를 동서양 어디에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천안 광덕사에 머무는 동안 부처는 사리의 분신하는 기적을 체험하고 종교활동에 진심이였어요 삶이 허무하다는것을 알게되고 사후세계관을 믿으며 종교심이 더 커지게 되었어요 91세 장수의 비결에 대해 부인의 보살핌도 한몫 하게 되어요 술을 절제하였기에 군왕은 부적절하다 판단되어요 불교의 신앙심으로 건강해졌음을 세종실록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며 마음의 평안을 갖으니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즐겁게 살았다는 점에서 장수의 비결 한부분을 차지합니다 효령대군은 승려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부인과 자녀들을 보아도 승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부록으로 효령대군의 연보로 나이대별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있어요 효령대군의 삶을 들여다보며 세종대왕 만큼 효령대군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 놀라운 이야기를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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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은 형 양녕대군 아래 충녕대군 성녕대군으로 원경 황후의 아들은 총 7명이었으나 먼저 요절한 3명을 제외하면 4명의 아들이 있었다. 4남인 성녕 동생이 일찍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대비도 뭄 져 눕고 이에 효령대군이 직접 한약을 달여 올렸다는 이야기고 있고 4 형제 중에서 가장 효심이 깊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양녕대군이 조선의 세자 체통을 지키지 못해 폐세자의 소문이 날 때 효령대군은 자기의 차례가 올까 봐 공부방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형인 양녕이 벌써 충녕으로 낙점 되어 있으니 불필요하게 고생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 이에 양녕은 그 이후로 사찰을 자주 찾은 듯하다. 태종 이방원도 정통을 중시하는 성격으로 둘째에게도 기회를 줄 주 있었으나 둘째는 사교성이나 붙임성이 좀 낮고 가장 큰 원인은 술을 하지 못하여 임금이 여러 신하와 같이 나라를 꾸려 가려면 꼭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하는 곳에 중점을 둔 듯하다.
양녕은 세자에 책봉이 되었지만 자기보다는 셋째 충녕이 왕의 감으로 생각을 하고 공부는 멀리 그리고 사냥과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넘겨짚은 이야기 아닐까? 왕이 되어 보려고 얼마나 많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는데 쉽게 넘겼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 이방원의 성격을 알기에 동생인 효령에게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방원도 본인이 왕이 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겪어 보았기에 민심이 두려워 둘째에게도 세자를 해 보겠느냐라는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든다. 효심이 깊은 효령대군이 조선의 4대 왕이 되었으면 더 나은 정치로 조선을 더 반석 위에 올려놓지 않았을까? 효령의 동생 성년 대군은 일찍 병이 들어 1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효령의 나이는 23였고 성년 대군이 죽는 바람에 원경 왕후는 병을 얻어 효령 나이 27세에 승하한다. 이후 태종 이방원은 2년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 효령의 장수 비결은 임금으로 올라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아 않았으며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였기에 편안한 생활을 한 셈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아나운서 이계진, 개그맨 이수근, 이휘재, 이경규, 배우 이정재, 가수 이상은 등으로 나오며 조선은 개국을 하면서 유교를 숭배했는데 효령대군은 불교를 가까이하였으며 한강에 무차회를 개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지체 높은 어른의 부인도 참여를 하는 큰 행사를 주관하여 '생불'이라는 호칭도 받게 된다. 신하들이 이는 고려의 불교가 다시 회생을 하는 단계로 더 번성하기 전에 제재를 하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지만 세종은 형을 많이 배려를 해주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보면 양반 53세, 임금은 47세로 보통 환갑 나이까지 살기가 어려웠다. 형인 양녕대군 68세, 세종은 53세, 막냇동생 성년대군은 일찍 병을 얻어 14세, 효령은 어릴 때 약골이었는데 91세로 그 시대에 최장수로 생각이 된다.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이후 효령대군이 이어받을 것 같은데 태종은 효령이 몸도 약하고 술을 하지 못하니 조선을 이끌어 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을 한 것 같다. 효령도 술을 마시는데 많이 마시지 않고 절제를 한 것이 이방원의 눈에 비친 것 같다. 이보 효령대군은 불교를 가까이하여 심신을 달래고 욕심과 권력을 내려놓고 아내의 지극정성으로 형제들 보다 장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이방원은 왕이 되기까지 도와준 처남 민씨 4 형제를 죽이고 또 스승이었던 장인 민제는 숙청 보내고 왕권 강화를 위해 세종의 장인까지 처형을 한다. 외척을 잔인할 정도로 없애고 아들 세종이 정치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 놓고 생을 마감한다. 시대의 삶을 추월하여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효령대군 권력은 세종보다 못했을지 모르지만 삶 자체는 여유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은 왕보다 더 많이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신하들 왕족의 어른으로 받들고 존경하니 따로 벼슬을 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술도 남들 만큼 하고 사람을 모으는 능력과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효령은 조선 시대 어른이었으며 아버지 태종이 생각하는 마음을 꿰뚫고 있어 맞춰서 살아온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 행동을 잘 알기에 행동을 조심하고 조신하게 살아온 이보 효령대군에게 수정과가 아닌 카페라테 음료를 올려드리고 싶다. 감사합니다. (제네시스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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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는 위로 두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그들이죠. 셋째인 세종이 왕위에 오른데는 양녕과 효령이 현명하게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기 때문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할수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않은 효령대군의 삶과 그의 업적을 살펴보는 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방배역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다보면 맞은편에 보이는 사당이 청권사입니다. 그 청권사가 어떤 곳인가 늘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곳이 효령대군의 무덤과 위패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그리고 그의 발자취는 예전에 자주 올랐던 관악산의 연주암에서도 찾을수 있으니 이제 다시 그곳을 찾게 되면 다른 감회를 느낄것 같습니다. 효령대군이라는 그의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는 효자였다고합니다. 아울러 유교사회에서 중시한 형제간의 우애라는 덕목에서도 그의 형인 양평과 동생인 세종과도 잘 지냈으며 그는 무려 91세까지 장수했다고 하니 그가 조선초 살육의 공포기에 잘 처신을 하고 욕심없이 소박한 생활을 했기에 장수가 가능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문화군주였던 세종만큼 그의 형이었던 효령대군 역시 백성의 존경을 받으면서 향약의 기초를 만들고 불경을 언해했던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