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론과 관련한 21세기 과학계의 화두는 공진화(co-evolution)다. 공진화란 서로 적대적인 종들이 실은 협동을 통해 함께 진화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대중독재' 등의 개념을 들고 나와 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논쟁을 불러왔던 임지현 교수가 또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서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최근 '적대적 공범관계'라는 생소한 개념이 담긴 책 <적대적 공범자들="">(소나무)을 내놓은 것이다. '적대적 공범관계'란 어떤 의미에서는 진화론의 공진화 개념을 역사학에 접목시킨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는 무관하다. 임 교수에 의하면 '적대적 공범관계'라는 개념은 이미 세계의 역사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운위되고 있는 일반화된 개념이다. '적대적 공범관계'의 단적인 예는 미국의 '9.11테러' 사건이다. 9.11테러가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부시의 재선 성공이며, 그것 뒤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열린 민족주의에서 닫힌 민족주의로 돌아서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미국 국민들의 '합의 혹은 동의'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이른바 '대중 독재(mass dictator)'를 현실화했다. 다시 말해 "9.11테러의 승자는 미국과 이슬람의 민족주의 세력이며,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이나 아프간, 이라크의 죄 없는 인민들은 공히 패자"라는 것이다. 즉 이슬람 민족주의와 부시 정권은 서로의 존재에 대한 상호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미 대선 직전 빈 라덴이 갑자기 나타난 것의 시사성은 매우 싱겁게 정리된다. 임 교수는 민족주의(자) 간의 공범관계가 드러난 경우는 9.11테러외에도 비일비재하다고 본다. 한반도의 박정희와 김일성이 적대적 공범자였으며(남북한 인민 혹은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했다는 의미에서 공범자), 나치즘과 시오니즘,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적 민족주의와 주변부 국가들의 저항적 민족주의 역시 공범관계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라는 자기 완결성을 갖지 못한 2차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라는 것은 도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특히 서구중심의 대표적 근대 이념으로 자리 잡은 '민족주의'를 '탈근대'와 '탈오리엔탈리즘'을 부르짓는 주변부의 국가들이 맹신하고 있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그럴 듯하다. 그러나 임 교수의 주장을 찬찬히 좇다보면 어디선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고 싶은 느낌이 들게 된다. 특히 통일 문제나 한-일간의 민족문제,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그의 지나친 학문적 접근 혹은 냉소주의적 자세를 접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그는 통일 지상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민족주의의 한계에서 나온 억지스런 비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임 교수는 한-일간의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 즉 우리의 민족주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커녕 거꾸로 일본의 민족주의를 부추겨 상호 대립구도만 공고히 할 뿐 별반 도움되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야기한 고구려사 논쟁에 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이 부분에서 그는 새로운 사관을 제시한다. 이른바 고구려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말고 이른바 변경사(Border history)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가장 민감한 주장은 역시 국사의 해체를 주장하는 부분이다. 이쯤되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입에서는 "이제 거의 막가자는 겁니까"하고 막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용인즉, 국사는 발생론적으로 봤을 때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가 목적이 된 목적론적 서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사의 해체는 궁극적으로 개별 민족국가, 동아시아, 유럽 세계를 잇는 국사의 대연쇄 고리를 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간 '갸우뚱'한 표정으로 중간중간 다시읽기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읽고난 뒤 잠시 고민해 본다. 그의 주장에서 별반 나무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분명 평소의 내 생각과 전혀 다르고 차이가 분명한 주장들이 허다한데... 평소 문제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역사의 문외한이기 때문일까? 그도저도 아니면 그저 그의 주장에 살포시 포섭당했기 때문일까? 그의 주장이 만고의 진리이고, 통일과 해방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 탓에 리뷰가 늦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매우 모호한 결론을 내고 만다. 나름대로 '합리'를 가장하고 약간은 '타협'적으로. 역사학자로서, 특히 우리의 역사를 보다 넓은 틀에 놓고 세계사적 흐름에 견주어 학문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그의 시도는 참신하고 의미 있는 일로 보인다. 더구나 학자로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은 존경할 만하다. 또한 지식인의 기본 책무가 비판의식의 실천이라고 봤을 때도 그의 모습은 존경스럽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역사를 세계사의 일반적인 틀 속에 옭아 맬 수는 없다. 지나친 일반화야말로 자칫 인식의 오류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 교수의 역사 연구에서 한반도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는 별반 없어 보인다. 그 특수성에는 사회 전체의 지적 지형과 내용, 그리고 그것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컨센서스에 대한 존중도 포함된다. 무릇 전문가라면 일반의 인식적 오류를 도려내기 위해 과감하게 메스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역사적 타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현실 내부인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학자로서 현실에 투사된 우리 역사의 속살 벗기기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부인으로서 우리의 현실과 학문적 합리성 사이에서 보다 치열하고 진지한 고민의 과정을 거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기엔 그의 주장들은 너무 거시적이며 앞선 것들이고, 너무 현란하고 화려하고 자유롭고 가볍고 무책임해 보인다. 끝으로 그가 인용했던 에릭 홉스봄의 말을 재(再)인용 해본다. "역사학은 핵물리학만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정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죠."적대적> |
| 2005. 1. 24 (월) - 2005. 1. 29 (일) 서프라이즈에서 글을쓰는 김동렬이라는 필자의 과도한 비난때문에 적대적 공범자란 책을 예상보다 빨리 읽게 되었다. 원래는 사놓고 한참후에 읽을 생각이었는데... 적대적 공범자들이란 책은 김동렬이 지적했듯이 그리 신선한 책은 아니다. 적대적관계를 가지는 자와 서로 공생관계를 가진다는 이론은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있었던 것이었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예는 김일성의 공산중의를 토대로 한국의 반공주의를 정착시키고 그것을 이유로 독재를 했던 전형적인 적대적 공범관계었다. 또 한가지는 이책의 구성 자체가 예전에 임교수가 썼던 글을 편집한 것이었기에 임교수의 글을 관심있게 읽어본 독자라면 별로 새로운것이 없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적대적 공범관계라는 해석틀을 가지고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생각. 즉 서로 대립하던 두개의 세력이라는 인식을 가부한다. 그들은 궁국적으로 공범관계를 가지며 진정한 피해자는 그들의 공범관계에 희생되는 민중들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테러와의 전쟁의 승리자는 부시와 극단적 이슬람 민족주의자이고 패배자는 미국과 중동지역의 힘없는 민중들이라는 것이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우에는 한반도의 민중들이 희생자가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동안 임교수가 했던 주장의 근거가 된다. 민족의 틀을 거부하고 국사를 해체하는 것은 결국 적대적 공범관계를 부정하는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해볼때 김동렬의 주장은 이상하기 짝이없다. 김동렬은 적대적 공범관계라는 틀을 선과 악을 흐려 회색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교수는 모든것을 회색으로 만드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좋은 우리와 나쁜 너희라는 틀 자체를 거부하고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했던 자들과 그것에 희생당한 민중이라는 새로운 도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식민지시대 일본의 극단적 민족주의자와 조선의 독립운동을 했던 자들이 민족과 국가라는 같은 목적을 같고 있었고 그들에게 조선과 일본의 민중들이 희생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이해된다. 고구려사에 대한 임교수의 주장은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사논쟁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 사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이다. 엄청나게 오래전에 있었던 고구려라는 국가를 지금의 기준으로 누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디로 코미디라는 것이다. 이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고구려는 중국의 고구려도 아니고 한국의 고구려도 아니다. 그저 고구려가 있을뿐이다. 따라서 고구려를 변경사로 보아야한다는 임교수의 주장은 대체로 수긍이 간다. 또 이것은 임교수가 주장하는 국사의 해체를 해야하는 이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고구려사를 변경사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은 중국과 싸우는 과정에서도 실효성을 확보한다. 거대한 중국과 싸우기보다는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교수의 책은 별로 신선하지는 않지만 임교수가 주장하는 민족의 틀 거부, 국사의 해체등의 주장을 이애하기에 도움이 될것 같다. 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민족, 국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볼수도 있을것 같다. |
| 역사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책. 그러나 기존 역사관의 대안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은 한계가 있다. 물론 그가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는 변경(frontier) 역사학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온전히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는 파악이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각은 우리의 '국사'(國史)가 곧 진리임을 당연시 한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적대적 공범관계 = 독도에 얽힌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확인해 준 계기였다. 당시 인터넷에 뜬 관련 소식의 댓글에는 '쪽발이', '왜놈' 등 감정적인 어휘로 거의 도배된 바 있다. 그것만 봐도 희생자로서 '절대적으로 선한' 우리를 괴롭히는 '절대악'에 대한 반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임지현은 그 감정의 내재적 위험을 일깨운다. 우리의 이러한 감정적 한이 적의 보수성을 오히려 강화시킨다는 논리를 '적대적 공범 관계'의 역학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우익 목소리는 우리의 반발로 더욱 사회적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일본인과 개 출입금지'라는 가게의 푯말은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지는 행위인가 생각해보자. 그것은 일본인 전체를 적대시함으로서 한일의 적대관계를 이슈화해 우익들의 입지를 강화해준다. 그것은 우익의 생각을 일본인의 보편 감정으로 재범주화 하는 작업을 한다. 점점 우경화되어가는 일본의 성향은 우리의 드높아진 '애국심'(?)에 비례한다. 점점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상황이 벌어진다. 민족이라는 이름의 허위의식 =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근대적 역사 서술의 특징을 '전도돼 있음'으로 규정한다. 국사, 즉 내셔널 히스토리(National History)는 '지금'의 국민 국가를 정점으로 하고, 과거의 역사를 지금의 국가가 만들어지는 발전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는 현재를 설명하는데 필요가 없는 사실들이 왜곡되거나 삭제되는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 우리의 국사도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 때 오희문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에서 주목할 내용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정'이라는 다소 비상식적인 글이다. 이런 글이 국사 교과서에 실릴 수 없음은 한 눈에 판단 가능할 것이다. 농민군 진압하던 관군 포수들이 의병장 밑에 용병으로 들어간 경우들도 상당수 발견되었다는 사료도 이러한 종류이다. 또한 1910년 한일합방시 지방 양반들이 상놈들과 호형호제하기 싫어 밖에 나오기 꺼려했다는 내용도 사실대로 서술이 힘들다. 우리가 독립신문을 만든 애국지사로 알고있는 서재필이 스스로는 언제나 미국시민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신문지상 그의 필명(필립)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민족 개념을 절대시하는 허위 의식이 적대적 공범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임지현의 종합적 결론인지 모르겠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망언 등으로 고통받는 우리 '민족'이 여전히 신경쓰이는 것은 왜 일까. |
| 고백하건데 이 책을 정독하지 못했습니다. 두툼한 분량이나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백과사전을 곁에 두고 읽어야 할 만큼 생소하고 뻣뻣한 어휘와 이오덕 선생이 보셨다면 버럭 화를 내셨을 번역투의 문장이 마지막까지 책 읽기를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문 역사학도가 아닌 제가 이 책을 정독하기에는 힘에 부칠만큼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대중을 위한 글쓰기가 이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요즘 많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그의 시선 - 민족주의나 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에 관한 그의 주장에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습니다. 혈통/종족 민족주의의 오류와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해오던 터였습니다. 국사國史 해체를 주장하는 그의 의견에도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국사 인식에 인이 박여서인지 해체 후의 허전함을 채워 줄 그 무엇이 없어 여전히 뒤끝이 개운치 않습니다. 《적대적 공범자들》-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이미 임 교수의 다른 책들이나 매체를 통해 임 교수의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모르겠으나 일반인에게는 매우 생소한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현상적으로는 서로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간의 동맹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그 예를 부시와 빈 라덴, 박정희와 김일성, 나아가 한·중·일 간의 민족주의 역시 그러하다고 지적합니다. "9·11 테러의 진정한 승자는 미국의 국가 권력과 탈레반 민족주의이며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이나 아프간의 죄 없는 민중들이나 패자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자신의 시민적 권리와 복지를 자발적으로 유보했고, 탈레반 민족주의의 반동 아래 신음하던 아프간의 민중들은 다시 미군의 폭격 아래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하는 현실을 보면 분명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아니 이 정도로 대충 인정하기보다는, 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단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적대감이 이들의 동맹 관계를 은폐했을 뿐입니다. 미국 대선 직전에 빈 라덴의 등장으로 인해 그 사실 관계가 명확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은폐된 동맹 관계를 저자는 '적대적 공범 관계'라고 규정합니다. 저자는 나아가 일본의 제국적 민족주의나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저항적 민족주의 역시 '적대적 공범 관계'에 있다고 규정합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가 자기완결적 논리 구조를 갖지 못하고 여타의 사회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나타나는데, 역사는 민족과 민중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국가 권력에 의해 민족주의가 이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대개의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합니다. 이에 대해 임 교수의 생각은 명쾌합니다.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적은 '게임의 규칙'을 뒤엎는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제국이 되기를 원하면서 앞서간 제국을 비판하는 민족주의적 비판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저항 민족주의를 자동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저항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가 제국주의를 반사적으로 비판한다는 발상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논란의 여지가 되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논란의 여지라는 부정적 표현보다는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긍정적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친일파 청산에 대해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투 주교가 이끄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모델을 본받자고 합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친일파의 청산보다는 범죄 행위자들의 고백과 참회를 통해 사건을 진상을 밝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서도 기존의 시각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고구려가 어째서 한국사냐고 반문합니다. 고작해야 100여 년 전에 생긴 민족의 개념으로 2000년 전의 역사를 민족의 개념에 포함시키기 위한 엉뚱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는 한국도 중국도 없었으며, 그저 '고구려'였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작금에 고구려를 두고 서로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사國史의 속성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국사 자체가 국가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사의 역사 서술은 거꾸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즉 현재의 대한민국을 두고, 거꾸로 일제시대, 조선시대, 고려시대....그리고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재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고구려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이에 대해 임 교수는 변경사Border history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즉 하나의 국민이나 민족 국가의 단위에 넣지 말고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을 의미하는 변경사로 바라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일관된 주장의 결론은 국사 해체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한계가 많음을 인정합니다. 해체한 다음의 대안에 대해서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만들자고 말합니다.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하였지만, 대단히 파격적일 것이라는 기대로 이 책을 샀으나 결론적으로 그리 파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차적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는 그 자체보다는 언제, 왜, 그러고 어떻게 다른 사회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 또한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고구려사에 대한 논쟁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사례에서 보듯이 서로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고구려가, 혹은 발해가 정말 '우리'의 역사인지에 대한 제 오랜 의문은, 이를 '변경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한다는 임 교수의 주장으로 명쾌해졌습니다. 다만 서양사를 전공하고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려하는 그 시선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수긍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 교수 스스로 '정신적 망명자'라고 정의했듯이, 내 고향을 타향으로 보는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실천을 규정하는 것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현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실을 인식하는 틀이 바뀔 때 실천의 방식이 달라지고, 그것이 다시 현실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국어사전을 옆에낀채 책을 읽은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나가던 동생마저 "한글로 된 책읽는데 국어사전이 왜 필요하냐?'며 의야해했으니깐~ 하지만 어쩌랴? 줄기차게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들중 많은 것이 낯설고, 뜻을 몰라 문장을 이해할 수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더 중요한것은 사전을 찾아봐도 안나온게 많아 그냥 넘어간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지만 말이다. 어찌되어던 그렇게 며칠간 소용돌이같던 책읽기를 마치고, 가만히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려고하니 생각할수록 정리는 커녕 더 엉켜버릴것 같아서 부랴부랴 서둘러 리뷰를 적으러 왔다. 책읽으면서부터 리뷰적을 생각에 조바심치긴 처음인것 같다. 그만큼 책 내용은 흥미롭고, 신기했다. 제목부터 그렇치 않은가?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니.. 이 책의 가장 큰 핵심은 임지현 교수의 조금의 삐딱하게 보자와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모든걸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자인것 같다. 물론 나에겐 두가지다 받아들이기 만만치않았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나를 비롯해 내 주위에서만 봐도 대화의 주된 화제는 '앞으로 뭘 먹으며 어떻게 살것인가?'던가 아니면 소소한 연예계 뒷담화뿐이다. 누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고구려사가 어떻고, 대북공정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며, 부시정부와 북한의 행보에 관해 토론을 하겠냐 말이다. 물론 뉴스보도나 신문에서 보고, 들은 세상사에 관해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토론이 아닌 1차원적 정보공유의 의미가 더 크기때문에 몇 마디이상 대화를 끌어가기 힘든게 사실이다. 그러기에 개개인의 의견을 궁금해하기보단 항상 같은 시선의 정보더라도 놓치지않으려 노력하는것조차 벅찰 뿐이였다. 그렇기에 이 책의 내용은 특별했다. 우린 아주 어릴때부터 영화나 만화를 볼때도, 친구들이랑 놀이를 할때도 우리편=착한편, 상대편=나쁜편으로 편을나누는것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던것 같다. 그러다보니 커서도 그 습관이 사라지지 않는것인가? 뭐든 먼저 이분법으로 가르고본니 말이다. 자본/민주주의와 진보/보수주의, 미국, 탈레반/후세인과 미국,아프간/이라크의 힘없는 국민들, 한국과 일본등등 그렇다보니 그 나뉨과는 상관없는 주변화된 소수자는 언제나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크게 나눠 와닿지 않는다면 아주 작은 예로 들었던 노동자 운동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정규직/남성/한국인 노동자가 주가 되었고, 비정규직/여성/외국인 노동자처럼 주변화된 소수자의 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역시 여성으로 사회에서 느끼는 차별이 많았지만 노사갈등이 보도되면 어느새 노동자의 입장에 가깝기에 그들을 지지했던게 사실이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이분법이 소수자를 흡수함으로인해 더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하고있는것이다. 여지껏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아주 다른 시선이였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또한 크게 화두가 되었던 <고구려사 왜곡문제=""> 역시 미디어의 보도와는 조금 다른 의견이였다. 물론 나역시 역사란 시대상황에따라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역사의식을 고구려사 왜곡에 대입해본적은 없었다. 그저 연일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나와 침을 토하며 고구려가 왜 우리의 조상일 수밖에 없는지 이유와 그런 역사를 중국이 뺏어가려하니 정신차리고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며 국가차원에서 기필코 막아야하는 중대한 과제라는 보도를 보니 정말 중국 나쁜놈들이고, 가만두면 안될일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비틀어보기보단 받아들이기 급급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모든 뉴스와 신문에서 약속이나 한듯 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딱지가 않도록 하는데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또 딴지를 건다. 고구려를 주(主)로 놓고보면 중국과 한국의 편가르기에 희생자가 아니냐고? 과거 고구려인들은 몇 세기후 자기들의 역사가 두 나라간 싸움의 도마위에 오를줄 생각이냐 했겠냐고.. 그저 고구려는 고구려일 뿐인데 왜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와서 땅을 가르고, 자기편을 만드려하느냐고 말이다. 이 역시 생각지도못한 입장이 아닐 수 없다. 왜 어느 한곳에서도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일까 궁금증이 생긴다. 현대 사회와 체제, 집단들은 갈수록 적대적 관계로 모든 사안을 놓은채 개개인 생각하기보단 편을갈라 힘없는자의 희생을 실은채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하려고만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를 내듯 더 큰 소리를 내기위해 개인의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우를 범하기전에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반박을 하고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그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섣불리 옹호할 수도 없다. 그저 내가 생각치 못했던 관점외의 부분에 대해 눈돌리게 해주었고, 모두 '예'라고 대답할때 '아니오'는 커녕 가만히 있어도 혼나기 일쑤인 이 나라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의 용기만을 높이 사고싶을 뿐이다. 앞으로 예의 주시할 사람이 더 늘어났다는 반가움과 함께 말이다. 고구려사>적대적> |
| 읽는 이에 따라서 거북한 느낌이 드는 책일 수 있다. 학자다움이 물씬 풍기는 뻣뻣한 한자 어휘들(외국 학술 용어의 어색한 ‘한국화’)과 문장들은 매우 건조하다 못해 지식인들의 고매한 정신까지 풍부하게 담아냈으니 반은 실패했다고 본다. 게다가 이 책은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연구 결과물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쓴 글이라면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술적이지 않으면서도 대중적이지도 않은 어정쩡함은 주석과 각주의 인색함과 더불어 여기저기에 실렸던 글들의 난잡스러운 짜집기 구성에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은 이 책을 위해서 쓰여진 글들이 아니라, 이 책을 내기 위해서 급조된 스크랩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동의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감내할 수 있다면 나머지 반의 성공은 인식의 재발견, 전환이라는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킬 만큼의 파괴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공론화 되어(어느 정도 되어있긴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반 대중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로 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컨텍스트가 양적으로도 풍부하고 질적으로 양질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거북한 느낌이 드는 진짜 이유이면서 이 책의 중요한 화두는 일반 대중에게 침투되어 있는(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에 오염된) 권력 담론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불감성과 종교적인 맹신에 대한 질타에 기인한다. 제 기능을 못하는 심장에 전기충격이 필요하듯이 의식의 흐름이 정체된 것에도 뼈아픈 질타와 자각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죽어가는 육신을 깨우는 전기충격이며, 죽어가는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다. 따라서 그의 국사 해체론과 반민족주의 외침에서 ‘한민족 반만년 역사’만을 가르치는 국정 교육에 대한 반란이며, 그러한 교육을 받고 그렇게 믿어온 대다수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내 안의 민족주의’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 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내 안에 있는 그것이 무슨 짓을 하길래 이 책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뺴곡하게 적어놓았는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국제 사회의 관계,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한 국가 내에서의 다층적 구성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담론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서구적 근대화에 종속되고, 억압 받는 주체들의 자각과 해방을 촉구하며 그 당위성을 역설한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의 반발로 일어난 저항 민족주의는 서구식 근대화 논리 안에 존재하여 서구 중심에 결국에는 인정 받고 편입되려는 욕망을 분출한다. 그러면서도 상대 진영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려고 한다. 따라서 서로간의 적대감의 증대는 각자의 논리와 힘에 정당성을 획득하여 동반 증대를 의미 하게 된다. 같은 논리 위에 같은 목표를 가진 이원적 관계이기에 시오니즘과 나치즘,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슬람의 테러리즘,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김일성식 사회주의, 일본과 한국, 중국에서 보이는 민족주의 등의 모든 것들의 공통분모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는 용어로 함축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의 근본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집단에 대한 의지와 목표의 획일화를 통한 권력의 획득. 그것을 통한 인간 욕망의 충족에 있다. 그렇게 탄생한 인간 사회는 구성원들의 욕망의 총체적 결정체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커다란 힘은 더 커다란 공동체의 응집력에 달려있다. 기본적으로 권력은 성장을 지향하고(거대성이 주는 거대한 영향력), 인간들은 그것에 지지를 보낸다. 권력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추구하는 욕망의 충돌은 우리 사회와 인류 문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복잡도를 증가시킨다. 복잡도와 인지 능력의 반비례성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비판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서 있는 논리 자체를 부정하여 새로운 대안을 세우려는 노력은 우리의 상식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커다란 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사생아’인 민족 분쟁의 끝은 보이질 않고, 일본의 식민지로 영원히 남고 싶어하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노예가 되어버린 ‘민족성’에, 위대한 반만년 역사는 그 속에 민중을 파묻어 버린, 서구적 극단적 근대화인 ‘세계화’에 맹렬하게 돌진하는 한반도의 오늘은 말 그대로 ‘적대적 공범자들의 종합세트’이다. 특히 약소국의 위치(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보면 꼭 그렇지 않은)를 끊임없이 재확인함으로써 민중의 집단 의식을 고착화 시켜버렸다. 집단 의식은 권력의 좋은 먹잇감 아니던가.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은 순수함을 추구하고, 혈통에 대한 집착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억압의 당위성을 이미 내포한 상태를 지닌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냉전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외부의 적을 내세워서 내부의 결속을 다져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결속에 의해 잘려나가고 무시되어 온 담론들이 많을수록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한다. 나치즘, 시오니즘은 이를 증명했고, 그 결과는 참담한 역사를 낳았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일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국가, 민족, 인종의 신성화, 집단에 대한 헌신과 적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 대중의 열광적 지배자 숭배’ 이 낯설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 박정희의 망령들은 아직도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선동을 이끌고, 대중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놀이판을 장식한다. 인종, 민족, 젠더의 소수자들을 냉철하게 타자화하고 배제시키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쯤에서 권력 담론의 본질적인 성찰과 물음이 왜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국가와 국민,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분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변종을 생산해내어 곳곳에 파고드는 권력의 식민화를 쉽게 떨쳐낼 수는 없다. 도리어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참여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건 정부의 과거사 청산이 가진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권력의 영향력은 대중의 암묵적 또는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발휘될 수 없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오직 국가 권력에만 물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정부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어, 경제 개발이나 국가 안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일반 대중과 합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었다는 점에 있다. 집단적 유죄를 묵과하고 소수에게 그 역사의 짐을 맡기는 것은 권력 본질에 면죄부를 주어 좀 더 세련되고, 은밀한 대중의 억압기제의 출연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 논리의 틀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동원된 대중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합리화하고 키우고 있는 참여정부를 향한 대중의 비판적 시선이 요구되는 시대적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획일화의 강요를 통한 권력 담론의 폭력성은 내 안에서부터 국제 사회에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외부에 드러난 것은 강력한 저항으로 소멸하기 쉬우나, 전산학에서 말하는 ‘은닉화’, ‘추상화’와 같은 가공을 거치면 그것은 영속성을 띠게 된다. 이 책은 해체논리를 펼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실효성을 논하지도 않는다. 다만 ‘타자화 된 시선’의 폭력성을 알리고, 각자의 삶 속에 스며든 권력의 헤게모니들 속에서 무엇을 성찰해야만 하는가를 깨닫게 할 뿐이다. 같은 논리 위에 존립하는 이상 우리는 모두 공범자이다. 그러한 틀을 깨기 위해서는 감춰진 것을 드러내어 해방을 위한 다각적인 대안을 모색하여 다층적 사회의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지현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은 격찬을 받아야 한다. |
| 나는 이런 방식의 글을 좋아한다. 편하고, 자기 생각 강하고, 그러면서도 납득될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한 그런 글들...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그런 글이다. 그래서 더 사람들에게 나쁜 평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좋은 그런 글. 누누히 말해왔으나, 고구려사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 현재의 국토개념이나 현재의 생각과 이념으로 그 시대를 묶으려고 하는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학자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냥 고구려사 일뿐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원한다. 전 세계가 조금의 이익이라도 갖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이제는 싸우기만 하지말고, 세계사적인 입장의 그러면서도 중국, 일본, 한국 모두가 생명, 자유, 평화와 같은 더 큰 가치를 위해서 노력할 때이다. 그게 이 책의 가치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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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양 국이 스포츠에서 맞붙게 되는 경우가 있다. 축구나 야구, 또는 요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김연아 대 아사다 마오의 경기 정도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한일전’이 벌어지는 날에는, 양 국 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하게 된다. 감독의 목엔 핏발이 서고, 국민들의 응원은 격렬하다. 설혹 지기라도 하면 네티즌들의 온갖 비난이 감독과 선수에게로 쏟아지게 된다. 임지현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한 일 양 국가 권력은, 책 제목처럼 <적대적 공범자들>이며, 양국 국민들은 그 국가주의 아래 놓여있다. 적대적 공범관계란, 서로를 적대시함으로써 오히려 서로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동맹관계를 의미한다. 적대적 공범자들의 대표적 예는 표지 사진에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박정희와 김일성, 나치즘과 시오니즘, 부시와 빈라덴의 사진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적대적 공범자라는 이 용어 자체도 낯설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허구적 민족주의의 실체’는 더욱 새롭다. 사실, 어딜 가든 민족주의가 스며들어 있는, 민족주의자들로 그득한 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그의 외침은 새로움을 넘어 충격 그 자체이며, 분에 겨워 발끈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만든다. 그는 국가 권력과, 민족주의적 사고에 갇혀있는 사람들, 스스로를 역사적 희생자나 가해자로 보는 사람들,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왔던, 나 같은 이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주저 없이 들이대고 있다. 국경을 넘고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지식을 책 전반에 보여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발 좀 우리,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자.” 그의 주장은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여러 사학자들이 그의 의견에 반대표를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난 주저 없이 이 책이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민족에 관한 일이면 금세 숭고해지거나 열이 올라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이 한국이란 나라의 특성 때문이며, 그 비판의 목소리가 바로 같은 한국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안이 아닌 밖에서 앵글을 잡은 이 한국인 역사학자의 외침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다. 그는 한국 진보계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들 역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 안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이 역시 신선한 주장이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국가권력에 저항해 왔던 습관을 답습하는 한국 진보세력이 발상을 전환할 수 있게 하여, 이들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는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도록 그 나름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를 심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기억을 구상하는 것이 필요하다’든지, ‘역사의 결박을 묶은 자가 아닌 묶인 자가 먼저 풀 때 진정한 해방의 동력이 발생한다’라는 의견이 바로 그것이다. 논의 대상 자체가 추상적이라서 해결방안도 추상적인 것이 단점이긴 하나, 기존의 한국 역사계에서 나왔던 대안들과는 또 다른 방안이기에 눈여겨볼 만하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오기 힘들다. 가정의 영향으로 구성된 생각의 틀도 깨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국가 전체적으로 오랜 세월 간 ‘주입된’ 사고는 어떠하겠는가. 이처럼 이 책은, 일종의 편견처럼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우리의 기존 사고의 틀을 박차고 나와,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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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일본정부의 진짜 속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어째서 일본은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을 무시하며 그들의 주장을 계속해서 전개해 나갈까?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 참된 과거의 역사는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현재의 이익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세력들에게 역사는 단지 자신들의 약화된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종전 이 후 일본집권세력의 장기집권은 부패와 권력누수로 이어졌고, 그로인해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계속 좁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주변국과의 영토분쟁과 역사분쟁을 선택한 것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박물관 개관식에 일본이 원폭피해를 같이 전시하기 원했던 사실에서도 현재 일본 우익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다시 쓴 역사를 주입하기 위해, 가해자의 역사를 피해자의 역사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영토 분쟁 시도와 역사왜곡에 대해 주변국들이 강하게 반발하면 할 수록 그들은 오히려 내부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혜택을 입게되었다.
정치와 역사에 무관심했던 세대들을 민족주의에 기대어 다시 불러모으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강경한 대응은 일본 극우 세력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어주는 역설를 만든다.
그럼 한국의 입장은 어떤가? 한국의 입장은 일본의 입장과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낸다. 현상황이 일본에서는 기존 수구세력의 강화를, 한국에서는 기존 수구세력의 약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국은 16대 국회에서부터 추진되어 왔지만, 강력한 친일보수세력들의 거부로 지금껏 흐지부지 되었던 과거사 문제 해결에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계기를 얻는 것이다.
신진 세력의 입장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는 구세력의 약화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구세력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것은 뿌리깊은 친일 잔재인데, 그것을 청산하는데 있어 이번 일본의 도발을 활용하는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는 영토문제와 왜곡역사교과서 문제로 촉발된 외교적 신경전이 한창이다. 이런 시기에 '적대적 공범자들'은 강하게 다가온다. '적대적 공범관계'는 이렇듯 이분법적 분류에 의한 중심세력과 주변세력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각각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적대적 공범관계에서 한국 사회의 친일수구세력의 위치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전에 그들이 정권을 차지했을때, 즐겨이용하던 적대적 공범관계는 북한과의 체제경쟁 모습이였다.
때문에 그들은 북의 집권세력과 함께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그들의 친일 전력을 은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안정적 위치를 상실한 상태이다. 심지어 북핵문제를 이용하기 위한 국민적 관심까지도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일본 우익의 생존을 위한 도발이 현정부의 취약한 기반을 강화시키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현 정부는 과거 친일세력에 기초한 국내보수세력을 극복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까지의 조용한 대일본 외교를 적극적 외교로 전환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편 저자는 과거사문제를 단순한 처벌이 아닌 역사의 '사회적 기억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철저한 처벌보다 중요하며, 그러한 역사의 사회적 기억화에는 당대 주도세력의 역사만이 아닌 소수자의 역사 또한 포함해야 하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역간 대립을 조장하는 국가주도 국사의 해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몇몇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만으로 그 밖의 다수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줘버린 오류가 지금까지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주도 국사의 해체는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진정 자신들의 역사를 되찾는 길이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 지역 민중들의 발전적 교류와 연대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깊은구절] P.241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의 정치성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다.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 살아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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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있던 상식들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있다. 그가 다시 책을 냈는데 그동안의 주장들에 대한 묶음 형식의 책이다. 이런 구도를 우리나라에서도 찾을수있는것이 바로 박정희와 김일성이다. 사실 이책은 보통 인문서적처럼 그리 쉽게 쓰여진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