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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폭력에 노출된 근대주체의 ‘예수’ 인식 -- 김춘수 『왜 나는 시인인가』
김춘수는 역사적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끝내는 그것을 이겨낸 예수의 모습을 상상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형상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변용하는 시작(詩作) 방식은 시인이 예수를 통해 이루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요컨대 그는 유대 민중들에게 지독한 수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은 예수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죽이라고 외치는 유대 민중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졌다. 지상에서 가장 무력한 자가 실천한 절대적 사랑은 역사(이데올로기)의 폭력 앞에서 쉽게 무릎을 꿇은 시인을 ‘치욕’의 감정 속으로 빠뜨린다. 예수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사랑을 실천했지만,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시인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공포 속에 매몰되어버렸다. 치욕은 무엇보다 이러한 자존감의 상실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나는 그때 상상력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하얀 동아줄과 일본식 커다란 죽도와 욕탕에 가득 차 있는 찬물을 보았을 때, 내 머리에는 온갖 흉측한 장면이 다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았지만, 어떤 사태가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지기만 했다. 나는 아주 초보적인 고문에도 견뎌내지를 못했다. 아픔이라는 것은 우선은 육체적인 것이지만, 어떤 심리상태가 그것을 부채질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육체적 조건은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손을 번쩍 들고 만다. 사람에 따라 그 한계의 폭이 차이가 있겠지만, 그 한계를 끝내 뛰어넘을 수는 없다.(63쪽)
독립운동(비밀결사 조직)의 혐의를 받고 요코하마 헌병대에 끌려간 시인은 머릿속에 펼쳐지는 고문의 압도적인 이미지에 굴복하여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아니 하기는커녕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애매하기는 했으나) 시인하고” 만다. 김춘수가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듯 그는 독립운동 자체보다는 고문의 도구들이 뿜어내는 이미지에 속박되어 하지도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자백한 인간(개인)의 한계의식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문을 당하기 이전부터 그는 뇌리를 맴도는 고문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아픔’이라는 육체적 조건과 ‘공포’라는 심리적 조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 조건은 이성적 인간의 자존감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기제로 작용한다. “왜 나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이 강렬한 체험 앞에서 시인은 “그 한계를 끝내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말만 되뇌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시선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김춘수 문학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다. 위에 인용한 글의 뒷부분에서 시인은 유관순과 예수가 실천한 또 다른 삶을 이야기한다. 육체적 고문의 한계를 이겨낸 유관순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예수는 인간의 한계에 굴복한 시인은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실천한 존재들이다. 주목할 점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예수의 “초인적인 능력”을 다시 인간의 한계와 접맥시키는 김춘수의 독특한 사유방식이다. 그는 육체의 고통에 굴복한 인류의 한계를 씻어주는 비유적 사건으로 예수의 행적을 의미화한다. 돌려 말하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예수가 있었기에 인간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시인은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의 이러한 행적은 한편으로 시인처럼 육체의 한계에 매몰된 인간을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말 속에 김춘수의 ‘예수’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바, 그는 결국 인간의 한계의식을 이야기하기 위해 예수라는 절대자를 끌어들인 셈이다.
문제는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통해 김춘수가 타자들의 삶을 재단하고 있다는 데서 야기된다. 절대적 사랑은 예수와 ‘같은’ 존재만이 실천할 수 있는 역설이라는 점을 그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예수의 사랑에 이르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 받은 만큼 되갚는 대칭적 교환(증여)의 논리가 김춘수의 타자 인식에는 스며들어 있는바, 타자의 폭력을 절대적 사랑으로 승화한 예수의 (순수)증여는 여기서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물자체)의 영역으로 방출되어버린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신의 영역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예수에 버금가는 행적을 보여주어야 한다. 인간은 과연 그럴 수 있는가? 김춘수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예수의 행적에 육박하는 인간들을 ‘초인’의 영역에 가두고 하염없이 그 세계를 동경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춘수의 문학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원론적 세계인식은 무엇보다 예수의 삶을 향한 이러한 동경과 좌절 속에서 창출되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틈틈이 그를 힐끔거리곤 했다. 조금 있자, 사환이 갓 구운 빵을 서너 개 얹어들고 왔다. 노인 앞에 그것을 놓으면서 인사를 꾸벅 하고 잡수라고 한다. 노인은 아까부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는 듯하다. 이따금 불러내어 갓 구운 빵을 그에게 건네주곤 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집에서 보내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전쟁 중이라 아주 식량이 달릴 때다. 갓 구운 빵 따위는 특권층이 아니면 얻어볼 수가 없다. 그것도 자주 얻어볼 수 있다는 것은 그 노인이 자기의 사상과는 아랑곳없이 역시 인민 대중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모순을 그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인데 태연히 그것(빵)을 먹고 있었다.(66~7쪽)
김춘수는 노인을 “도쿄제국대학의 경제학 교수”이자 “인민전선파의 일원”인 진보적 지식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 생애를 뒤흔들어놓은 엄청난 순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노인과의 만남은 김춘수의 뇌리에 강렬한 이미지로 새겨져 있다. 서슬 퍼런 감옥에서 유유히 빵을 먹는, 그것도 옆에 앉은 자신을 외면한 채 ‘먹는 욕망’에만 충실한 이 진보적 지식인을 보며 시인은 ‘예수’의 지경에 이를 수 없는 인간존재의 한계지점을 다시금 확인한다. 김춘수는 노인의 행동에서 두 가지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우선 감옥에서, 그것도 전쟁 중에 갓 구운 빵을 먹는 노인을 김춘수는 “자신의 사상과는 아랑곳없이” 인민대중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엘리트의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또 하나, 배고픈 시인을 제쳐두고 ‘혼자서’ 세 개의 빵을 먹어치운 노인의 모습에서 시인은 민중의 행복을 열망하는 혁명가의 이중성(가식)을 발견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언뜻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듯싶지만 사실은 하나의 고리로 묶여 있다. ‘인간은 결코 하나의 이념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는 김춘수의 핵심적인 주장이 이 일화를 통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의 엘리트로 활동한 노인이 인민대중의 아픔을 뼛속 깊이 새기기는 힘들다고 시인은 강조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 한 예수에 비한다면, 노인은 감옥이라는 극한적인 공간 속에서도 민중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을 애써 무시하며 ‘혼자서’ 세 개의 빵을 먹는 “자기혐오의 역겨움”을 시인은 노인의 행동에서 발견하고 있는바, 김춘수는 노인의 이러한 행동(욕망)을 이념에 빠진 지식인(인간)의 한계로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숭고한 이념을 지향하는 노인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그늘은 교환체계로 움직이는 이 사회의 가장 내밀한 곳에 오롯하게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내밀한 욕망과 대차게 마주서지 않는 한, 이념은 한 인간의 삶을 포장하는 포즈에 불과할 뿐이라고 시인은 주장한다. 예수의 신성(순수증여)과 인간의 한계(증여/교환)가 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는 이 지점에서 시인은 고문의 치욕을 자신의 내면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치욕은 살아 있는 인간의 징표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욕망해야 하고, 그 욕망이 인간을 치욕의 구렁 속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의 시선이다. 누가 역사와 양심을 말할 때 그 시선이 나타나기도 한다.”(「나를 스쳐간 그․2」, 58쪽)는 진술이나, 혹은 “예수가 하나의 차원을 상징하고 있다.”(같은 글, 68쪽)는 진술 등은 정확히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김춘수의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예수의 시선은 역사의 바깥, 달리 말해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하나의 차원”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역사의 너머로 나아가야만 대면할 수 있는 예수의 시선은 따라서 이념(이데올로기)으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타자성)를 함유하고 있다. (순수)증여라는 예수의 행위가 이러한 잉여의 지점과 이어져 있다면, 김춘수에게 그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와 단절된 문학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허무와 구원의 시학은 이렇게 (순수)증여의 행위로써 김춘수 문학의 중심에 나타나게 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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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감수성이 그 아픈 시대를 만났기에... 더욱이 그러했을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도 너무나 아름답지만 수필 또한 그렇다. 어쩔수 없는 구시대적인 시각이나 종교적인 글이 있어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이것 역시 김춘수 시인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일 테다. 종교적인 부분은 시인이 빠져있어 예찬한다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예수와 제자들, 주변 인물들에대한 작가의 고찰을 적은 것이다. 김춘수 시집을 함께 읽으니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