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5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8.0
  • 50대 10.0
리뷰 총점 종이책
세상을 보는 방법
"세상을 보는 방법" 내용보기
한권의 책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1년전에 구매하고 의도치 않게 중단한 후 미루던 완독을 마쳤다. 한달을 부지런히 읽었는데도 쉽지 않은 분량이다.만약 누군가 "삶은 행복하고 추구할 만하다는 생각은 기만적인 것이고 사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다면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이 말이 담고 있는 심각성은 세상을 보는 방법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고, 막연하게나마 밝게
"세상을 보는 방법" 내용보기

한권의 책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1년전에 구매하고 의도치 않게 중단한 후 미루던 완독을 마쳤다. 한달을 부지런히 읽었는데도 쉽지 않은 분량이다.


만약 누군가 "삶은 행복하고 추구할 만하다는 생각은 기만적인 것이고 사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다면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이 말이 담고 있는 심각성은 세상을 보는 방법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고, 막연하게나마 밝게 느껴지던 삶 자체가 우울하고 허무해질 수도 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책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과 이의 부록 "인생을 생각한다", "삶의 예지"와 한권의 잠언록 "세상을 보는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에 있어 행복(향락)은 소극적이지만 고통은 적극적이다. 쾌락은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욕망의 노예이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곧 또 다른 욕망이 생기고 결코 만족하는 일 없이 존재 자체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가난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고통을 유발한다는 유명한 말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고통이 적극적이기 때문에 그나마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단촐하게 원하는 것을 줄이고 사는 것인데, 이럴 경우 삶은 김빠진 맥주처럼 갈증때문에 마시지만 맛은 없는 허무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또한 삶이 허무라면 왜 노력하고 살아가야할까라는 맥빠짐의 연속이 된다.


인간이 쾌락은 추구하고 고통은 회피하려는 것은 본성이며 아주 오래된 철학적 주제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때부터 육체적인 향락이 아닌 정신적인 향락을 추구하면 더 나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듣지만 감각으로 둘러싸인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육체적인 향락에서 오는 단맛을 외면할 수만도 없지 않은가? 집착까지는 아니라도 육체적인 향락에서 오는 단맛은 삶을 활기차고 그래도 살만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것이 비록 허상이며 허무일지라도…


이 개념은 삶이 한가닥 밧줄에 매달려 있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아래에는 맹수가 득실거리고, 이 밧줄을 흰쥐, 검은쥐(밤낮)가 갉아먹고 있는데 그마나 옆에 있는 벌통의 꿀로 잊고 산다는. 상황이 이러할진데 어찌 당장 꿀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아래 있는 맹수는 실체가 아닌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며 그림자인가하는 것은 또 다른 철학적 고민거리이지만...


삶은 좋은 것이라는 개념하에는 조울중에 빠지게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지만 이에 대한 부재로 또한 고통스러우니, 기쁨과 고통의 진폭만 커지는 듯 하다. 반면 소극적인 행복보다는 적극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덜 고통스러울 방법을 추구하면 조울증은 벗어나지만, 암울한 저음이 깔리듯 낮은 진폭의 우울이 계속된다. 어찌하란 말인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마음도 심란하고, 생각도 혼란스러웠다. 책의 제목처럼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꾼다는 건, 살아온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일이기에 그만큼 여파가 크다. 책의 앞부분에 있는 "인생을 생각한다"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보다 뒤에 부록으로서 쓰인 글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입문서에는 분명하다. 다안 책을 끝까지 읽기전에는 그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이 계속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4권으로 오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며 머리의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하는 이 철학서는 마지막까지 의미 심장하다. 왜 세계가 표상이며 의지(우리가 쓰는 일반 용어의 뜻과 다름)의 객관화인가를 알게 한다. 이 의지의 부정이 곧 불교에 말하는 해탈과도 일맥 상통하니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 잔향이 너무나도 진하다. 


책의 무게상, 독서와 운동이 병행(?)되는 책이다. 두 손으로 들고 읽는데도 버겁다. 한권이 눈에는 좋지만 실용적으로는 2권으로 나누어 구성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운동이 부족한 현대인을 위한 출판사의 숨은 배려(?)인가?


책의 머리글은 책을 다 읽고나서 한번 더 읽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밀도감이 높은 천페이지가 넘는 책을 줄여서 말로 전하기가 사실 벅차다. 내 표현력이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이해와 공명이 가능하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6/3/2013


a***k 2013.06.04. 신고 공감 4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도서] 세상을 보는 방법
"[도서] 세상을 보는 방법" 내용보기
인간은 지적 수준이 낮을 수록 상대적으로 삶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지혜가 많으면 고뇌가 많고, 지식이 많으면 우환(憂患)이 많다. 아이러닉하게도 지능이 높거나, 현실인식이 예민할 수록 삶에 대한 고뇌의 덧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아는 많큼 세상이 보인다.”고 들 한다. 또한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속어도 있다. 지식과 세상을 보는 지혜가 깊어지면, 삶의
"[도서] 세상을 보는 방법" 내용보기

인간은 지적 수준이 낮을 수록 상대적으로 삶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지혜가 많으면 고뇌가 많고, 지식이 많으면 우환(憂患)이 많다. 아이러닉하게도 지능이 높거나, 현실인식이 예민할 수록 삶에 대한 고뇌의 덧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아는 많큼 세상이 보인다.”고 들 한다. 또한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속어도 있다. 지식과 세상을 보는 지혜가 깊어지면, 삶의 허무주의적 고독 속에 침적(沈積)하게되고, 점차 혼자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속절없는 피상적 낙관주의를 저속한 인간성의 표현라고 폄하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써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냉혹하게 ‘충족이유율’에 기인된 자연이치의 큰 흐름을 해석할 수 있어야 인간으로써 삶의 겸손함과 무상함을 견지(堅持)할 수 있을 것이다. 염세주의라고 하여 무조건 의도적으로 기피하기 보다는 한번쯤 부디쳐서 삶의 깊이를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간이 철학적인 사색을 통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이 괴로움과 불행에 빠져 있을뿐 아니라, 인간은 반듯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친구가 많다고 해서 그가 역량과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인간학(人間學)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인간을 교묘하게 다루는 기술을 상대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고독을 참아 나가거나 고독 속에 자기를 가누어 나갈 만한 능력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충실할 수록 비례적으로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의 가치가 작아 보이게 된다. 반면에 자신에 충실하지 못한자는 자신의 가치가 작아보여 컴플렉스가 무의식 속에 쌓이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 항상 신경을 쓰게 되므로서 사교적이며, 타협적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본질과는 다르게 가식적인 행위를 하거나,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결국 자아가 풍부한 사람은 진정한 고독 속에 있을 지라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거나, 행복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충분히 공명(共鳴) 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길에서 머러질 것을 두려워하며, 의존적이 되고 불안과 고뇌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사교의 범위가 커지면 커질 수록 무미 건조해지며, 결국은 의지할 곳은 자기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인생을 다 소진한 후에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에 자유로우며, 온전히 자기 일 수 있다. 고독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연애로 결혼을 하거나, 우정으로 아무리 인관관계가 가까와져도 오직 자기 자신을 상대해서만 정직하게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독설적이지만, "실제로 훌륭한 사람은 세상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도 언급하고 있다. 사회에서 환심을 사려면 평범하고 세속적이며 어리석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이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하게 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신적으로 각성되어 있거나 뛰어난 지적상태이면, 그는 그 사회에서 혼자가 되거나, 아니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세속사회에서는 인격적으로 우월한 자가 오하려 열등한 자에게 용서를 빌어야하는 상황이며, 정신적인 우월한 가치가 오히려 사회의 획일화된 감정(통념)을 해치게 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상류사회일 수록 이러한 상태가 더더욱 심화된다고 한다. 자연은 인간의 정신의 질적가치에 따른 엄연한 차등을 두었으나, 인간사회는 평등이라는 구실로 무시하고, 자연이 만든 차등과는 반대로 계층과 서열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사회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득세하고, 비범한 인간은 고립되게 된다. 다만 시간이 흘러서 시대가 바뀌어야 그 천재들의 가치를 조명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을 보는 방법>에서 여성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많이 나타내 보이는데, 그것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의지하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지만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인생 내내 보듬고 살아간다. 반면 아버지가 죽고나서 어머니의 세속적인 태도나 생활방식에 반감을 가지게 되고, 그 것이 여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발전하게 된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보면 여성을 비하하고, 남성의 우월주의를 찬양하는 듯한 내용으로만 오해될 수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지적 능력의 단순성과 너무나 현실주의적인 특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위대한 사상가나, 인류사에 빛나는 예술가가 되기어렵다고 한다. 또한 여성은 변화에 민감하고, 마음의 기복이 심하며, 남성들 보다 열세한 육체적 조건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이중적인 성격 구조를 갖게된다고 한다. 여성으로써 일국의 국가수반이 수두룩한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난받기 딱 좋은 언급이지만, 19세기 사회적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그렇게 이해되지 못할 내용도 아닌것 같다. 항상 모든 관념은 그시대의 사회성 또는 시대성을 배경으로 해석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고 생각된다.

j******6 2016.05.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