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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단짝이 서울로 전학을 가버린다. 한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것처럼 야단을 떨었지만 결국 떨어지게 되었고, 서울로 전학간 아이에게서 이제나 저제나 연락만 오길 기다리는 데 좀처럼 오질 않자 남은 아이는 그새 자신을 잊어버린거라며 서운해 한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지칠 즈음에 도착한 <통신>. 둘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에 드디어 전학간 아이의 <통신>이 도착했던 것이다.
서운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남은 아이는 그 <통신>을 읽고 또 읽는다. 그동안 연락 못했던 까닭이랑 새로 전학간 학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남은 아이가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듯 울먹이며 쓴 안부 내용 들은 남은 아이의 마음에 생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렇듯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둘만의 비밀 이야기를 속닥속닥 이어간다. 그런데 서울에 전학간 아이에게서 전해지는 또 다른 아이의 이름이 남은 아이에게는 눈에 거슬린다. 그애 이름은 '진휘'. 거듭해서 부르면 휘파람이라도 부는 듯한 그애 이름은 독특한 것은 둘째치고 살짝 눈에 거슬린다. 전학간 아이가 전해주는 '진휘'란 아이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독특하고 기이해서라기보다는 둘도 없는 단짝 사이에 금이 갈 것만 같은 은근한 불한감 때문이었으리라. 이것도 여자의 직감이랄 수 있을까? 아직 초등학생일 뿐인 여자애들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휘'는 독특한 아이다. 언뜻 보기엔 성격이 괄괄하고 말썽 꽤나 피울 듯한 문제아로 보이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정말 진국인 아이다.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은 애초에 씨알도 먹히지 않고 같은 여자아이들의 왕따는 가뿐히 즈려 밟고 넘겨 버린다. 또 할 말은 꼭 하고 마는 성미라서 꽃무늬 장식이 달린 실내화가 예쁘다며 학교에서 신고 다니고 싶다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이에 가르치미(선생님)이 단정치 못하다고 꾸지람이라도 할라치면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누구에게나 자유가 보장되었으니 학교에서 금지한다면 우리 교실에서만이라도 신고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이에 대한 배우미(학생)들에게 찬반투표를 해보자'고 되바라지게 맞불을 놓기도 한다.
배우미가 이리 당당할 수도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당당한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왜 우리는 배우미는 가르치미의 권위에 도전해서도 안 되며, 가르치미의 독재가 가까운 권력 남용에 순순히 복종을 강요당해야만 하는 걸까? 요즈음 <학생인권조례>를 시행을 앞두고 찬반 논란이 거세다. 논점은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배우미들의 폭력과 인권유린 등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관점'과 '지금도 혼란스런 교육 현장에 섣불리 조례를 시행하면 '교권'이 무너져 교육 현장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될 거라는 관점'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휘'와 같이 가르치미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배우미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면 나타나도록 가르치는 것이 정말 시기상조일까? 아니면 꼭 시행해야만 할까?
분명한 것은 가르치미와 배우미가 대립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인권'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아무런 관계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면 혼란만 더할 거라고 보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아마도 배우미들은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인권'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인권'을 보장받은 배우미들은 수업중에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제 멋대로 뛰쳐나갈 경우 가르치미가 교권을 상실하면 배우미가 교실을 뛰쳐나가도 제재할 '도구'가 없을 거란 얘기다.
분명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막을 제재가 '교권' 밖에 없을까? 교실을 뛰쳐나가려는 배우미를 다시 붙잡아다 앉힐 방법이 '교권'밖에 없느냔 말이다. 그건 아니라고 본다. 또 교실을 뛰쳐나가려는 배우미들이 몽땅 '문제아'일 까닭도 없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 가르치미가 제격이 아닌데도 머물러 있는 무능한 가르치미들도 있으며, 아직도 물리적 체벌을 일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언어폭력과 성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는 미성숙(?)한 가르치미들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이야기 속 '진휘'는 학교에서 쫓겨나듯 전학을 가야만 했다. 다름 아니라 서울로 전학 간 아이의 어머니가 착실히 공부하던 자기 아이에게 나쁜 물(?)을 들였다며 온동네 어머니들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한바탕 난리를 부렸기 때문이다. 급기야 교장선생님은 '진휘'에게 전학가길 정중히(?) 부탁하기에 이르렀고, 자기가 떠난다는 사실에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은 교장선생님을 본 '진휘'는 학교에 남기를 청하려던 말을 목구멍 속으로 다시 참아야만 했다.
허나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조차 '쿨~'하게 받아들이는 진휘. 그러나 서울로 전학 간 아이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대체 진휘가 잘못한 것이 무어란 말인가? 다른 배우미와는 달리 배움터(학교)의 규칙에 따라 군말 없이 순응하기만하는 배우미가 아닌 죄? 가르치미의 부당한 처사에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밝힌 것이 괘씸한 죄? 온갖 억압과 강요를 당하며 착실하게 학업을 이어가기는커녕 순진한(?) 배우미들을 나쁘게 물들인 죄? 서울로 전학 간 아이는 혼란에 빠진다. 아이가 보기에 '진휘'는 나쁜 짓을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비록 '진휘'와 말다툼을 할 정도 심하게 싸웠던 일조차도 '진휘'가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진휘'처럼 부당한 처사를 부당하다고 외칠 용기조차 없음을 깨닫고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자신은 학교에 아무 문제 없이 다니고 있으며, '진휘'는 학교에 남고 싶어도 떠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된 걸까?
이 책을 한 마디로 무어라 얘기할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곱씹으며 음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진휘 바이러스> 외에 다른 두 편의 단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 또 나름대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만 이 첫 작품이 준 큰 충격과도 같은 감동 때문에 다른 두 작품에 대한 언급을 뒤로 미루게 된다. 그래도 짤막하게나마 소개하자면, 두 번째 작품은 한 가정에 닥친 어려움을 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잔잔하게 전해주었고, 마지막 작품은 왕따 문제와 관련하여 교실 한 귀퉁이 청소함 옆에 찌그러져 있는 학생과 전교 회장을 할 정도로 잘 나가는(?) 학생 사이에서 벌어진 일종의 헤프닝 속에서 자신이 나아가 길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반전 성장드라마(?) 쯤으로 소개하면 어떨까 싶다.
유독 '물음표'가 많은 리뷰가 되고 말았지만, 그만큼 읽는이에게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주는 책이다(") 아마도 다시 쓰면 또 다른 리뷰가 나올 것만 같다.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어린이책인데도... |
| 진휘의 바이러스를 읽고 난 나 자신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난 늘 내 현재의 고민이 가장 크고 또 심각하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내 아이의 고민은 작은 것이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치부했는지 모른다. "쓸데 없는 것으로 다 고민을 하고 사네"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어른들만 고민이 있는 건 분명아닌데도 말이다. 진휘 바이러스는 재미있다. 아... 요즘 아이들의 컴퓨터로 소통을 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 단순한 생각일 뿐이다. 아이들은 분명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 그 언어로 사랑하고 또 서로 관계 맺고 또 감염되는 것이다. 감염이라는 것, 그건 너무도 순수하고 진실하기 때문에만 가능한 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고서는 쉽게 감염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닌 것 같다. 난 이 책을 통해 이런 생각을 했다. 서로를 확실이 보여주고, 또 서로의 고민에 마음을 내 주지 않고서는 어떤 관계도 쉽게 성립되지 않을 거라는 것... 연주와 승아는 둘도 없는 친구다. 그러다 연주는 서울로 전학을 간다. 그래서 연주와 승아는 홈피에서 서로 소통을 하고 모범생이던 연주는 문제아 진휘를 통해 변화된다. 아니 변화의 요소는 연주 자신에게 있었고, 진휘와의 짦은 소통으로 감염이 된다. 하지만, 부모의 눈에서는 걱정이 되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의 갈라놓는다. 문제아라는 진휘.. 하지만, 진휘는 훨씬 더 진실하고 누구보다도 삶에 대해 적극적인 아이였다. 정말 좋은 책이었다.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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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카페 <소설가의 방> 회원님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작가 방영주 문체의 미학. 장편소설을 마치 단편을 쓰듯 칼로 조각한 듯한 문장. 간결, 정확하여 군더더기 없는 문장, 하여, 담백하면서 속도감 있는 하드보일드의 문체. 씹을수록 묘미가 있는 문장. 그리고 단편처럼 꽉 짜여진 구성. 그런 것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주제 의식. 주제에 대한 날카롭고 탁월한 해석. 이런 것들은 소설가 방영주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는 것을 많은 평론가와 동료 소설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각종 서평이나 월평, 또는 계간평 등을 퉁하여. 그래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평론가 교수들로 구성된 한국비평문학회에서 2005년을 대표하는 문제 작가로 선정된 바도 있습니다. 이 작품(카지노 가는 길)은 KBS FM에서 극화 방송되었습니다. 어디 만화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그리고 만화가의 소설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올 추석 연휴에는 방영주 장편소설 <대무신왕>을 보세요. 주몽의 손자, 그리고 유리왕의 아들 무휼의 일대기를 그린 방영주 장편소설 <대무신왕>을 권합니다. 민족사학적 측면에서 동북공정에 대처하고, 우리의 자존심과 자부심, 그리고 정체성을 확인하세요. 의미 있는 추석 연휴가 될 것입니다.
다음 카페, '작가 방영주 펜클럽 카페' <소설가의 방> 운영자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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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내가 평소처럼 대들지 않자 한숨을 쉬더니 방을 나갔다. 대들지 않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면 엄마들은 오래된 풍선처럼 저절로 기운이 빠지는 모양이다. 엄마도 열세 살이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나보다는 잘 안다고 말한다. 열세 살이었던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엄마는 내가 못마땅할 때마나 하는 말이 정해져 있다. “지금 엄마가 왜 이런 말 하는지 한 20년 지나 봐. 더도 말고 꼭 너 같은 딸 하나 길러 봐야 엄마 마음 알지.” 20년이 지나면 나도 엄마처럼 얘기하게 될까? 자기 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를 부리게 될까? “어른들은 우리더러 어려서 인생을 모른다고 하잖아. 우리가 왜 인생을 몰라? 지금 사는 건 인생이 아닌가?” (「청소함 옆 자리」,138 - 139쪽 발췌) 과연 완전한 소통이 가능한 것일까, 설사 부모와 자식이더라도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지켜 가는 열세 살 인희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우리 딸아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듭니다. 「진휘 바이러스」의 진휘의 말 - “어느 날 보니까 난 구제불능 불량아가 되어 있더라. 참, 웃겨. 엄마는 학교 친구들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난리지, 선생은 가정교육이 엉망이라서 이 모양이라지. 예전 나랑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자기들끼리 막 싸우고 말이야.” - 을 읽다 보면 사정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틀에 박힌 모범생과 문제아로만 내모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턱수염」의 승권이처럼 아버지와 소통하려는 아이가 있다는 것에 위안이 갑니다만 『진휘 바이러스』에 실린 세 편의 열세 살 성장 동화는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문제작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