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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싯다르타>(1922)는 고대 인도의 한 청년이 깨달음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힌두교의 전통적인 교리와 수행만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여겨 부모의 반대를 뒤로 하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의 길을 떠난다. 사문들과 함께 금욕과 단식을 실천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고타마 붓다를 만나 설법을 듣는다. 당신께서는 죽음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터득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독자적인 구도(求道)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명상을 통하여, 참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각성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설법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어느 누구도 설법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당신 자신의 깨달음의 순간에 일어난 일을 언어와 가르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일러주고 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p.50) 붓다를 만난 고빈다는 불교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설법을 인정하면서도 가르침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느껴 스스로 삶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강을 건너 속세에서 기녀 카마라와 상인 카마스바미를 만나 세속적 성취를 이루고 점차 향락에 빠져든다. 쾌락과 부와 권세. 만족스런 생활이었지만 어느 순간 깊은 허무에 사로잡혀 절망한다. 또다시 모든 걸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난 싯다르타.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자살을 결심하지만 강을 보며 각성하고 젊은 시절 만났던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 그와 함께 살아간다. 한편 싯다르타가 떠난 뒤 홀로 아들을 낳아 키우던 카마라는 붓다를 찾아 순례하던 길에 뱀에 물려 죽고 만다. 졸지에 아이를 맡게 된 싯다르타는 잠시 아버지가 된 기쁨을 느끼지만 아이는 그를 따르지 않고 반항하다 결국 집을 나가버린다. 이로 인해 깊은 고통에 빠진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수데바의 조언과 강물의 가르침을 통해 마침내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친구여, 그런 의문은 강에게 물어보십시오! 강이 웃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당신은 당신 아들이 당신과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가 지금껏 그 모든 어리석음을 저질러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당신은 아들을 윤회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요? 대체 어떻게 보호하겠습니까? 가르침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훈계를 통하여? 사랑하는 친구여, 대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언젠가 바로 여기 이 장소에서 나에게 들려준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완전히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누가 사문 싯다르타를 윤회에서, 죄악에서, 탐욕에서, 어리석음에서 지켜주었단 말인가요? 그의 부친의 깊은 신앙심이, 그의 스승의 훈계가, 자신의 지식이, 자신의 탐구심이 과연 그를 보호할 수 있었던가요? 스스로 삶을 살고, 스스로 업보를 짊어지고, 스스로 쓰디쓴 잔을 마시고,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으려는 것을, 어떤 아버지가, 어떤 스승이 막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당신은 그 누군들 이 길을 걷지 않고 살아갈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친구여, 혹시나 당신의 어린 아들만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의 그애의 번민과 아픔과 실망을 덜어주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 줄 아십니까? 비록 그 애를 위해 열 번씩 죽는다 한들, 그것으로 당신이 그애의 운명을 손톱만치라도 덜어줄 수는 없습니다.” (p.153)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싯다르타는 강을 통해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던 어느날 아직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구도의 길을 걷는 옛 친구 고빈다가 찾아온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설법이 아닌 행동과 호흡과 표정에서 그가 완성자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경외심을 갖는다. 그리고 또한 고빈다는 보았다. 이 흐르는 형체 위의 가면의 웃음을, 단일의 웃음을, 몇천의 태어남과 죽음을 동시적(同時的)인 것으로 보는 웃음을. 이 싯다르타의 웃음이야말로 바로 저 고타마, 붓다의 웃음이었다. 고빈다 자신이 한없이 외경(畏敬)의 마음으로 우러러 보던, 고요하며 기품 있고 꿰뚫을 수 없는 웃음, 자비한 것도 같고 비웃는 것도 같으며 현명한 붓다의 몇천 가지 웃음, 바로 그것이었다. 완성자들은 그렇게 웃음짓는다는 것을 고빈다는 깨달았다. (p.190) 6월 독서모임의 지정도서였을 뿐 아니라 평소 관심 있던 책이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진리를 찾아 멀리 떠나기보다 현실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삶을 완성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방향을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고전으로 평가하며 호평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깊은 사유와 유려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에게는 다소 멀게 느껴졌고 아쉬운 점도 있었다. 첫째,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작가의 다른 작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겹쳐 보였다. 체험형 인물 싯다르타와 골드문트 vs 지성형 인물 고빈다와 나르치스, 금욕과 향락, 이성과 감성, 두 세계를 모두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길을 제시한다는 점, 그리고 남성간의 우정과 존중. 기독교와 불교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유사한 주제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졌다. 둘째,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철학서에 가깝다. 실제로 철학소설이나 사유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사유’보다 ‘소설’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몰입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다보니 초기작인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에 비해 재미도 덜하고 훨씬 난해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감정적 몰입이 힘들다는 점은 이 작품 뿐 아니라 서사보다 관념이 앞서는 헤세의 후기작 전반의 특징인 듯하다. 셋째, 남성 주인공의 구도가 중심이 되다보니 여성은 철저히 타자화된다. 그들은 주인공의 깨달음을 위해 홀연히 등장해서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주고, 그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순간 조용히 사라진다.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훨씬 이전에 활동했던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을 통해 새로운 여성관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작가의 무신경한 남성주의는 못내 아쉽다. 수많은 고전을 섭렵한 헤세라면 밀의 저서 또한 분명 접했을 텐데 말이다. 사실 문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거장의 작품을 읽고 비판적 시각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부족해서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도 인정하는 작품을 내가 뭐라고 지적하나?’하며 자책하고 주눅도 든다. 독서모임에서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그러나. 권위에 눌려 이해도 못하는 작품을 좋게 좋게만 받아들이기보다 비록 조악할망정 솔직한 의견을 표현하고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거장의 작품도 결국 독자의 눈으로 완성되는 법이니까.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문예출판사 #서평 #책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