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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천변풍경(川邊風景)>은 1930년대 청계천변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묘사한 소설이다. 여기서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의 “루공-마카르(Rougon-Macquart) 총서”를 1권으로 압축시켜 놓은듯한 기분이 든 것은, 한 이야기의 주변인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두드러지게 다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같은 방식은 아니다. 에밀 졸라가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딸 나나를 <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면, 박태원은 ‘제 1절 청계천 빨래터’에서 칠성어멈의 입에서 언급된 민주사를 ‘제 2절 이발소 소년’에서는 손님으로 등장시키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점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박태원이 청계천에서 빨래를 하는 ‘점룡이 어미니’와 이발소에서 일하면서 천변(川邊)을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을 소일로 여기는 ‘재봉’이라는 관찰자를 중심으로 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주로 취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지적 작가 시점도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다. “그날 저녁, 기미꼬는 문제의 하숙으로 딱한 여자를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제18절]에서, 하룻날 저녁 대체 어찌해야 옳을지를 모르는 채 그 좁은 가슴을 태우고 있는 금순이를 뜻밖에도 찾아온 손님이 하나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기미꼬였던 것이다……)” [p. 202]
“두 소년은 잠깐 그 시골 사람에 대하여 경박한 비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그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는 없다.” [p. 381] 마치 고전소설에서의 작가의 개입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세태소설의 대표적 작품이라는 <천변풍경>이지만, 이렇게 고전소설을 연상하게 하는 요소는 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우연의 남발이다. “그러나 우리 금순이를 좀더 감동시킬 일이 바로 사 층 아래, 거리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점원에게 배달을 명하고 문밖에 나왔을 때, 마침 문간 모퉁이 연초 소매부에서 담배를 사가지고 나가던 소년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금순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괴이하여 고개를 돌리니, “아.” 뜻 모를 부르짖음 뒤에, 두 사람의 손과 손은 굳게 붙잡히고, “누나!” “순동아!” 그리고 다음은 흡사 바보와 같이, 그렇게도 그립고 보고 싶어하던 이의 얼굴을 서로 멍하니 마주 바라보았다.” [p. 291]
물론 이 책에 실린 장수익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런 우연의 사용은 고전소설의 답습이 아니다. 박태원은 우연의 남발이라는 무리수를 동원해서라도 긍정적 인물의 일부라도 “근대적 일상성이 강요하는 비극의 운명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만드는 것” [p. 443]을 추구했던 것이다. 즉, 우연은 그가 근대적 일상성의 부정하기 위해 사용한 기법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이 우연이라는 기적이 없다면 비극을 피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것이 1930년대 모더니즘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말년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소설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세태소설의 대표격으로 평가되는 만큼, <천변풍경>을 통해 우리는 1930년대 청계천을 엿볼 수 있는 대리 경험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암살>이 1930년대 경성(京城)을 재현하여 그 당시를 느낄 수 있게 했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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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로 대표되는 박태원의 작품이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1920년대를 살아가던 온갖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좀 난해하게 느껴져서 같은 류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본 작품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펼쳐지는 사건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갈 뿐 그닥 모더니즘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세밀한 감정묘사나 행동을 묘사하는 걸 읽으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여러 사건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거의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걸 신기해하며 읽었다. 사람사는건 다 똑같더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