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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과학의 관계는 어디쯤 있을까? 좀 더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 이 질문을 바꿔 본다면,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은 서로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을까? 불면으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5섯명중 하나라고 한다. 그럼,신경정신과 의사선생님들은 사람의 우울증, 신경증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런 우리 삶속에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재밌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여러 통찰을 준다.
창조과학을 접하고 유신진화론을 만나면서, 과학과 신학은 서로 이용하고, 무시하고, 그 어디쯤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은 유신진화론을 맹렬히 비판하고,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몽매한 열심당원이라고 놀리고 있다. 그 와중에 이 책은 우리에게 신학이라는 연역적 주제와 과학이라는 귀납적 주제가 서로 만나 얼마든지 소통하고, 서로의 보완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세상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고, 실제적으로 인식된다면(65) 우리는 얼마든지 과학의 귀납적 결론을 수용할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과학과 신학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1장), 서로 연관이 되는 것도 아니다는 이분법을 벗어나(2장) 과학안에 발견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하나님의 영역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자고 이야기 한다.
신학과 과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심있어하는 의료과학에도 이 책은 인사이트를 준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영혼의 깊은 본질에 대해 과학은 영혼이란 신경정신 활동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지금도 대부분의 정신과 선생님들은 인간에게는 영혼의 활동은 신경정신의 활동의 일부라고 말하고, 영혼이라는 존재를 부정한다.
몸은 악한 것이고 영혼은 선한 것이라는 극단과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자연적이고 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극단 사이에 빠지는 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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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종교 개혁파의 관점에서 본 『신학과 과학의 화해』를 읽고
우리 모두는 우주라는 공간속의 지구위에 발을 딛고 살고 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부터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주공간의 크기는 가늠할 수 있는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은 얼마나 많은지? 혹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공간 같은 것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끝이 없다.
우주탄생의 비밀을 가설을 통해 입증하면서 정의해 놓은 것이 과학 분야다. 현대인들은 이 과학을 신뢰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주역사를 만든 것이다. 128억 년 전 빅뱅(과학자들의 추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가 만들어졌고, 생명체들이 생겨났고, 인간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내용이다.
과학이론은 가설을 통해 원래 있던 것들을 하나씩 발견해 내는 과정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 이전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뉴튼, 아인슈타인, 케플러 등의 과학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론들이 발전하면서 오늘날의 과학이 정립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과학자가 나타나 새로운 이론을 밝혀내면 또 과학은 바뀔 것이다.
기독교는 우주탄생의 기원을 설계자가 창조한 창세기 이론을 주장하고 믿는다. 여기서 과학과 신학은 갈등한다. 가설로부터 시작한 과학적 설명은 무신론자들에게는 절대적 신뢰다. 상대적으로 신학은 주관적이며 비과학적이고 초월적 상상이라고 여긴다. 신학을 과학의 대척점에서 과학은 사실에 근거하고, 종교는 극히 주관적인 신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신학과 과학의 관계, 과학으로서의 신학, 우주의 미세 조정과 설계, 신경과학과 영혼, 기독교와 진화론으로 총 6장으로 구성 되었다. 이것을 통해 상호 주장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비갈등적이고 상호 긍정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142쪽). 과학과 종교는 서로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보완적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 낸시 머피는 신학을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왜 옳은지를 설명한다. 신학과 과학은 공히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탐색한 결과다(62쪽). 신학을 모든 과학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계층 모델의 최상부에 둔다. 과학의 계층 모델은 하위부터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그 위 한편에 심리학, 사회과학, 윤리학을, 다른 한편에 우주론을 두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최상위에 신학을 둔다. 하위 계층은 상위계층을 설명할 수 없지만 상위계층은 하위계층을 설명할 수 있다.
“수학을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하고 철학을 하자면 신학을 알아야한다” 어느 티브이 프로에서 세계 수학경시대회에 나가 1등을 한 한국의 수학천재가 한 말이다. 미국대학에 입학하면서 가장 좋아하던 수학과를 포기하며 한 이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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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그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하나는 끝까지 죽어라 싸우는 것이고, 하나는 서로 상종도 안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론 그러한 극단을 벗어나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내와 겸손함으로 끝까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 누군가는 영 통하지 않을 두 영역이라고 말한다. 신학은 영적인 것을 말하고,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영역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서로 자신들이 옳다며 서로 싸울 것인가? 아님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서로 완전 거리를 둘 것인가? 아니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인가? 인간관계도, 신학과 과학의 관계도 극단으로 가는 것은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다. 자신의 생각만을 고수한다고 싸우거나, 아예 손절하는 것으로는 그 갈등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 시작점이 다르고 걸어온 길이 다른 만큼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러한 노력에 하나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인 낸시 머피는 신학과 과학이 서로 화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신학과 과학 모두 어떤 해석적 차이, 또는 현상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하고, 그 가설 중 가장 적절한 가설을 신학적 해석으로 또는 과학적 이론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신학과 과학 모두 학문으로써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가장 적절한 이론을 가져오고, 과학도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적절한 이론을 추론해가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학의 방법론이 비슷하다면 둘의 대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신학을 모든 과학을 포괄할 수 있는 상위 층위 안에 둔다. 모든 과학적 설명과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이 부분은 결국 신학의 도움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의 미세 조정과 신경 과학, 진화론, 사회 과학에 있어서 이들이 답하지 못하는 것, 혹은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부분을 신학으로 설명해 나가며, 신학과 과학이 어떻게 대화해 갈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모든 관계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안목은 더 커진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적 발견과 신학적 통찰이 함께 만나 대화한다면, 우리의 식견은 훨씬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과 신학은 대화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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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과학을 사용하실 수 없는가
래리 노먼은 1972년에 기념비적인 노래를 발표한다. 바로 저 유명한 노래 “Why should the devil have all the good music?(왜 마귀가 좋은 음악을 다 가져야 하나?)이다. 록 음악이 사단의 음악으로 치부받아 많은 반대를 받던 시절 노래 한 곡으로 록 음악 반대론자들의 기를 눌러주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어도 록음악, ccm을 반대하며 거룩한 찬송가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최근 모 선교단체에서 수련회에서 EDM 음악을 사용했다가 격렬한 논란에 휩싸인 것을 보면서 아마 이 논란은 세상 끝날까지 가겠다 싶었다.
이와 유사한 영역이 있으니 바로 ‘과학’이다. 이 책의 저자 낸시 머피는 과학에 대한 두 가지 모델을 소개한다. ‘갈등론’과 ‘두 세계론’이다. 그러나 현재, 그리고 여전히 ‘갈등론’이 대세이다. 두 세계론만 제시해도 이전과 다른 시선을 각오해야 한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창조과학’이라는 이상한 모델이 한국 교회에 퍼져있다. 이미 반론이 증명되었거나, 고리타분한 과거의이론을 바탕으로 성경의 모든 것을 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아마 이것 때문에 한국 교회는 과학과 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낸시 머피는 이 두 모델을 다 거부하고 새로운 ‘계층 모델’을 제시한다. 저자는 신학과 과학의 유사성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설득해 간다. 신자들의 신앙 탐구 과정을 과학의 가설연역적 방법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감탄을 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과학자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렇게도 볼 수가 있구나라는 고개 끄덕거림속에 설득이 되었다. 영성가는 영성가의 시선으로, 성서 학자는 성서 학자의 시선으로, 과학자는 과학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후 저자는 이런 바탕 하에 창조, 영혼, 부활, 진화에 대한 자신만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이 책을 비록 얇지만 가독성이 좋은 것이 아니다. 평소 과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 기독교 출판계에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까닭이다. 그나마 국내 학자에서는 우종학 교수가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중간 단계의 책이 없이 갑자기 점프해서 새로운 논지를 읽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의 출판이 무척 반갑다. 얼마 전 한 초등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목사님, 카오스 이론은 진짜에요? 그럼 성경을 믿을 수 있나요?” 정체되어 있는 윗세대와 달리 다음 세대는 이미 새로운 선을 넘었다. 이들에게 신학적 과학의 시선으로 납득을 시켜야 하는 시대가 이미 지났다. 물론 신앙은 신비다. 신비의 바다를 과학이라는 도구로 다 항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많은 항해의 도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이 초딩에게 그럴싸한 대답을 해주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집어 들고 정독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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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기독교는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 힘으로 철학을 신학의 하녀로 취급했었다. 과학이 신학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KO승을 거두었다. 갈릴레이는 살기 위해 그의 과학적 주장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처럼 신학은 모든 것 위에 군림했었다. 그러나 그 후,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교는 과학의 펀치들을 맞기 시작했다. 그래도 헤비급이었던 기독교는 아직 저력이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스코프스 재판에서 기독교는 과학에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과학이 헤비급 챔피언이다. 과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최고의 지식의 자리에 올랐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성경에서 과학을 찾아내고 그것을 근거로 현대의 과학을 무시해왔다. 그런 기독교를 비과학적이고 몰상식한 종교집단으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자 기독교는 ‘틈새의 신’처럼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찾아내 거기에서 신학의 명분을 주장한다. 삶의 고통의 문제, 사후의 문제, 심지어 축사와 신유의 능력으로 기독교의 능력을 과시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과학의 시대에 신학은 설득력을 잃어갈 뿐이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가장 흔한 두 견해는 ‘갈등 모델’과 ‘두 세계 모델’이다. 갈등 모델은 서로 옳다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결국 최후 승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두 세계 모델은 서로 독립성을 인정하고 갈등하지 말자는 것이다. 서울대 우종학 교수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단체를 통해 말 그대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과학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고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통합 모델이 있는데, 이는 과학 이론이 신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수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풀러 신학교 교수인 낸시 머피는 <신학과 과학의 화해>에서 통합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하나의 과학과 또 다른 과학의 관계”로 말한다. 그래서 신학을 “과학으로서의 신학”(2장)으로 명명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상호 존중과 배움을 주장한다. 과학의 진보에 따라 때로 신학을 수정해야 하고, 때로 신학은 과학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무신론의 세계관보다 일관성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16쪽)고 주장한다.
이 책의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급진적 종교개혁파’의 관점이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여느 종교개혁파들이 ‘칭의론’을 강조한 반면, 급진적 종교개혁파들은 ‘제자도’와 ‘평화주의’를 강조했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성을 고려할 때, 급진적 종교개혁파가 그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가 생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 진리의 포괄성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기독교와 과학의 대화를 시도한 여러 저자들에 비해 이 책은 신학이 과학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역자 후기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역자의 간결하고 쉬운 설명은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역자의 입장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의 주장에 대해 무조건적인 동의와 수용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편안하게 저자의 주장을 볼 수 있게 한다. 그 다음에 1장을 읽으면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얇지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목표로 한 어느 책보다 무게감이 있다. 또한, 여느 책들의 접근과는 다른 차원에서 신학이 과학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상호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강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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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과학의 시대를 사는 신앙인들에게 늘 혼돈스러운 지점이 있었다. 마치 신학의 원수는 과학인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다. 사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둘 사이는 별문제가 없었다. 16세기 이후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설계>에서 “철학은 죽었다. 철학이 들고 있던 진리의 횃불을 이제 과학이 들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지금의 과학은 진리의 영역까지도 넘보고 있다. 이에 따라 어떤 진영에서는 과학이 승기를 잡고 있고, 또 다른 진영에서는 더욱 전통을 고수하며 과학을 향해 날선 검을 치켜들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대치 속에서 신앙인들이 혼란을 겪어야 할까? 이 고민에 대해 답해줄 귀한 책이 나왔다. <신학과 과학의 화해>라는 책이다. 저자인 낸시 머피는 신학과 과학을 향해 ‘화해의 아이’로서 말한다. “나는 여기서 기독교 신학과 현대 과학이 조화를 이루는 몇 가지 방식을 개략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신학과 과학 사이의 흐름은 양방향이다.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는 때때로 신학을 수정해야 한다. 또한 과학이 신학을 수정하듯, 때때로 신학도 과학의 결점을 보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적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순수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통합하는 효과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이 때에, 과학과 신학의 이러한 화해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신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무신론의 세계관보다 일관성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낸시 머피의 말이 신학과 과학은 원수가 아니라 ‘돕는 베필’이라는 말로 들린다. 둘은 각각의 발전에 따라 서로 균형을 맞추며 수정 보완하는 관계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신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만약 좀 더 생생한 신앙, 눈에 보이는 신앙을 원한다면 <신학과 과학의 화해>를 일독해보면 좋겠다. 사이가 안 좋은 두 친구를 화해시키는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 창조 세계가 아니라,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창조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화해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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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열 다섯살이 되는 아들이 물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근거가 어딨어? 창세기에 적혀 있으면 우리는 무조건 믿어야 하는 거야? 진화론을 믿는 건 하나님을 부정하는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엄마가 교회 가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 나섰던 순수(?)한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머리가 크고 굵어졌다는 증거를 이렇게 무거운 질문으로 보여준다. 모태신앙인 나에게 아무런 의심없이, 질문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걸 아들이 알려주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어떻게 지혜롭게 말해야 할까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왔나보다. 신학과 과학은 그 자체로 아직 온전하지 않다. 오랜 시간 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켜켜이 다져진 이론은 새로운 증거기반이 나오면 다시 수정된다. 따라서 온전하지 않은 각각의 무기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위험이다. 맹목적인 신앙으로 천동설을 포기하지 않았던 중세 사람들에게 과학은 신을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선하게 사용되어야 할 과학적 성과가 윤리적 고민없이 사용될 때 신의 창조질서를 해치기도 했다. 양극단에 서서 상대를 공격하는 건 서로에게 모두 손해가 된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바로 진화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진화론을 단순히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의 한 문장으로 단정해 버리면 신학과 과학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포기가 아니라 창조의 질서를 밝혀가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해할 때 과학의 발전과 신학의 성숙을 이뤄나가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적 사건의 자연 과정에서 선행 사건을 찾으면서 사건의 고리 속에 있는 유형들을 탐색하고, 신학자들은 동일한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성취라는 관점에서 기술’(119쪽)하면 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연구한 방대한 내용을 자칫 한 단어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거나 찬성과 반대의 이원화로 만드는 것은 배척과 혐오 독선만 낳을 뿐이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며 다른 자료들을 더욱 찾아보게 되었다. 이 책의 매력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독자로 하여금 기존에 신앙으로 알고 있던 고집을 하나씩 흐트러 뜨리고 다양한 설명들을 통해 고집에 가려진 허점을 메꾸도록 애쓰게 만든다. 김상욱 물리학자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과학적으로 인간과 돼지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우월하다 판단하는 건 종교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고 전제하며,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합의를 갖고 있는 측면이 있어 과학이 종교를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김학철 연세대 교수는 ”어둠과 공허와 혼돈과 깊음이 주는 무의미와 허무에 굴복하지 않고 이 삶의 질서를 지켜내고 분간하며, 빛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이 창조 이념이며 이것을 우리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창조 신앙“이라고 말한다. 나는 김상욱 교수가 말한 사회적 ‘합의’가 바로 이 책의 제목과 연결선상에 있다고 본다. 또한 김학철 교수가 말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바로 과학과 신학의 화해라고 생각한다. 아직 아들에게 이 책을 권하기는 어려우니 내가 깨달은 바를 나누고자 한다. 부족하지만 우리의 대화가 아들의 질문에 어른으로서,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화해’의 제스쳐가 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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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과학은 신학을 더 이상 주인으로 모시지도 않고, 신학도 과학을 노예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신학을 무시하고, 신학은 과학을 적대시한다. 21세기 안에서 신학과 과학은 철로처럼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듯하다. 서로 멀리하면서도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애증(愛憎)의 관계가 되고 말았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 해디엔딩이 될 것인지 막장이 될 것인지를 두고 볼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신학과 과학의 화해를 화두로 삼았다. 하지만 이 주제는 굳이 낸시 머피가 아니더라도 과학자 출신의 신학자들이 몇이 있다.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알래스터 맥그라스가 있으며, 국내에서도 김기석 교수의 <신학자의 과학 산책>이나 장회익 교수의 <지질학과 기독교 신앙> 등은 각자의 관점으로 신학과 과학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저술된 책들이다. 수년 전부터 왕성한 활동한 우종학 교수는 신앙을 가진 과학자로서 신학과 과학을 화해시키려 많은 노력을 했다. 2014년에 저술한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를 비롯해 <과학시대의 도전과 응답> 등은 이러한 시도들의 유용한 저술들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최근 서적은 비아에서 출간된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이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로서 활동했던 존 폴킹혼이 신학을 하게 되면서 자신만의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을 접목시킨 것이다. 저자는 어떤 관점으로 과학을 바라보며, 화해시키고자 하는 걸까? 가장 중요한 장은 1장으로, 이곳에서 앞으로 전개될 신학과 과학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제시된다. 학문의 방법론만 보자면 과학과 신학은 서로 닮아 있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여 가설을 증명해 나가는 방식이다. 신학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1장에서 이것을 계층 모델(hierarchical model)로 제시한다. 가장 아래에는 물리학이 존재한다. 그 위는 화학이, 그 위는 생물학이, 그다음은 심리학이 자리한다. 가장 상층부는 사회학이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은 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최근 학자들은 이러한 구분이 모호하기도 하거나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피력한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으로 보게 되면 결국 인간은 화학반응으로 밖에 해결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이해가 위험하다고 말한다. “인간 행위를 전적으로 화학적으로 환원할 수 있고 화학은 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물리학의 모든 법칙이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되고,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한탄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31쪽)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창발적 실재론’ 등과 같은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것을 ‘비환원적 물리주의’ 부른다. 계층 간의 분명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최소 물질 단위인 원자(최근은 쿼크로 본다)만을 실재로 보는 것과 다양한 분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책상이나 나무 등도 고려야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동일한 원자와 분자를 가진 물질이 왜 전혀 다른 종이 되기도 하는 걸까? 오직 실재를 원자로만 이해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화학자들은 유기체 안에서의 화학 반응은 항상 동일하지 않으며, ‘생태학은 환경이 다르면 유기체들이 다르게 작동’(33쪽)하여 다른 반응을 일으킨다. 저자는 과학 계층의 최상에 신학을 자리 시킨다. 심지어 우주론보다 더 위에 둔다. 신학을 종교 또는 신앙으로 바꾸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여튼 결국 모든 과학 이론은 종교의 문제, 즉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2장인 ‘과학으로서의 신학’으로 끌고 간다. 이후 전개되는 주장들은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과학과 비교하면서 흥미롭게 끌고 간다. 저자는 메노나이트답게 4장 영혼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 형태의 교리로 제한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는 동시에 몸의 부활을 견지한다 마지막 6장인 ‘급진적 종교 신학과 사회 과학’은 저자의 신학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짧은 글 안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으나 칭의론적으로 접근하는 개혁신학과 다르게 메노나이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무게 중심을 둔다. 결론이 약간 모호하지만 저자는 결국 과학은 신학과 서로 공조하여 사회의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공역자인 김기현 목사의 역자 후기는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으며,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으면 책이 좀 더 쉽게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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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과학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충돌, 혹은 최소한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사골 우려먹듯 꺼내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갈릴레이의 재판인데, 잘 각색된 대중판에 의하면 이 재판은 이성적 사고보다 맹목적 믿음만을 강조하던 권위적이고 전제적인 교회 당국에 의해 오직 진리가 무엇인지를 합리적 사고와 관찰로 추구하던 한 과학자가 입틀막 당한 사건이다. 그러나 마침내 시대는 변했고, 이제 억압받던 과학자들이 마음껏 종교를 무시할 수 있는 날이 왔다는 것이 이 동화의 결말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이의 재판에 관한 대중적 각색에는 그 재판이 당대의 과학적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이라는 점이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그냥 망원경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뚝 떨어지는 이론이 아니었고, 두 이론 모두 관측된 데이터를 해석하는 데 충분히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하나의 과학 이론과 다른 이론 사이의 충돌이었고, 당시 교회는 그런 종류의 과학을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했다.(당장 천문학자들 중에 성직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이런 식의 대립적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싸움은 이전과는 좀 다른 양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이번에는 교회 내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도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이해만을 고수하는 이들은 최근의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면서 성경을 과학책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엔 정말로 과학과 신학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
이 책은 이 두 분야의 갈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간다.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후에 신학도 공부한 저자는 이 주제에 관해 의미 있는 말을 할 위치에 있어 보인다. 현대 저자는 종교개혁 급진파라고도 불리는, 재세례파 전통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 몸을 담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신학과 과학의 형식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른바 “과학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한다. 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설을 세우고 연역적 추론을 사용해 이론을 정립해 나간다. 둘 모두 데이터가 필요하고, 이 경우 신학의 데이터는 성경과 그 해석사, 그리고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이 주된 데이터다. 과학 역시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 진리’를 도출하는 단순과정이 아니라는 점 또한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오늘날의 과학이론은 증명이 아니라 확증을 추구한다. 그럼 과학과 신학은 어떤 형태로 서로 관계를 맺을까? 이 부분 또한 인상적인데, 저자는 과학의 제 분야들의 계층 모델을 제시하면서, 하나의 계층에 속한 과학은 그 상위 계층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이 계층 모델의 가장 기저에 있는 물리학은 그 상위의 화학적 설명으로 해석되는 면이 있고, 다시 화학은 생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저자는 여기에서 최상위에 신학의 자리를 마련한다. 우주론과 사회과학적 연구를 설명하는 데 신학적 이해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뿐 아니라, 심리학과 사회학, 윤리학 같은 사회과학 영역까지 통합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서로 다른 학문 분야 사이의 통섭적 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는 현재 딱 맞는 설명인 것 같기도 하고. 저자는 자신의 이런 모델이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우주의 미세조정이나 영혼, 진화론 등의 주제를 가지고 입증하고자 시도한다. ![]() 사실 서로 다른 분야를 통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양측의 장점만을 취하는 게 쉬울 것 같지만, 결국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결과물일 수도 있다. 이번 경우 저자의 입장은 전반적으로 과학의 설명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라는 느낌이다.(당연히 이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과학과 신학이 하나의 계층적 모델을 이루고 있다는 저자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같은 대상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서의 설명이라고 보면 그리 무리한 입장은 아니다. 과학의 일원론적 견해와의 유사성(조화)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재세례파의 영육일원론을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도 어느 정도나 설득력을 가질까 하는 의문은 든다. 물질 말고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과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은 외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그 함의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대화, 그리고 조화를 위한 노력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다. 신학과 과학의 통합적 이해 역시 분명 의미가 있어 보이고.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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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과학의 화해을 읽고 낸시 머피 지음 / 김기현,반성수 옮김 / 죠이북스 나는 문과 출신으로 ‘수포자’(수학포기자)이며 동시에 ‘과알못’(과학을 알지 못하는)이다. 수학뿐만 아니라 숫자 그 자체가 너무 싫어서 문과를 선택했고, 학력고사 때도 지구과학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리와 상업, 세계사를 선택했다. 그 이후 신학대학을 다니며 오직 신학공부만 10년을 했다. 그 당시엔 ‘인문학’이란 말도 없었고, 과학과 신학은 완전히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으며, 함께 논의조차 될 수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대였다. 물론 교회 역사를 통해 중세 대학에서 여러 학문들을 기초 과목으로 배우고 - 거기에 과학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 가장 상위 단계의 학문으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알고는 있지만, 나는 아쉽게도 학부부터 신학의 길만을 걸었다. 그러다가 처음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소위 ‘창조 과학’ 때문이었다. ‘과알못’인 나에게 그 분야를 전공한 학자들과 박사들이 나와서 창세기를 과학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여러 자연의 현상들을 성경과 연결해서 설명해 주는 강의는 나에게 신세계와 같았다. 어쩌면 신학과 성경이란 주제를 가지고 10년 넘게 공부도 하고, 그것을 가지고 매 주마다 설교를 했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들과 질문들, 그러니까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역할을 했기에 순식간에 굉장한 매력을 느끼고 그 주제에 푹 빠지고 말았다. 얼마 동안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너무 매력적이었고, 상당히 지적이었다. 특히 20세기 사람으로 성경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간극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허니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금방 권태기가 찾아왔다. 전지전능할 것만 같았던 그녀에게서 매우 허술한 부분들이 보였고, 그런 과학의 이론들, 가설들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신학의 이론들을 가지고 과학을 검증할 수 없는 것처럼, 과학의 다양한 가설과 이론을 가지고 신학적인 이론을 세우는 것이 매우 위태롭게 보였고, 근본적으로 성립 자체가 가능한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나에게 찾아왔다. 이제 그녀에게 이별을 고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실 내가 자란 토양에서 신학과 과학은 절대 사랑할 수 없는 가문 출신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특히 현대 과학은 무신론과 진화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부정한 학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서로 복수의 칼만 갈고 있어야 하는가? 이제 용서와 화해를 시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본서의 제목(신학과 과학의 화해/Reconciling Thelogy and Science)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화해’라는 말은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서로 가지고 있는 나쁜 감정을 푸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해’라는 말에 ‘조화’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얇은 책이다. 하지만 절대 쉽게 보면 안 된다. 신학과 과학과의 관계(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신학을 과학으로 살펴보는 2장, 과학과 신학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는 우주의 미세 조정에 대한 이야기(3장), 뇌 연구와 성서가 말하는 인간에 대한 연관성(4장), 가장 예민한 기독교와 진화론에 대한 문제를 5장에서 다루고, 마지막 6장에서는 급진적 종교 개혁파인 메노나이트의 신앙과 신학이 윤리학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며, 다시 그것이 과학과 어떤 연관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다룬다. 먼저 꿀팁을 하나 제시하자면, 저자의 머리말 보다는 책의 끝부분에 첨가되어 있는 역자의 후기를 먼저 읽는 것이다. 역자 중에 한 분인 김기현 목사가 친절하게 책을 잘 요약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역자의 의견도 함께 포함되어 있으니 그 부분은 주의해서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나 역자의 의견일 뿐이고(충분히 동의가 되고 고려할 부분이긴 하지만), 잘못하면 독자가 책을 읽기도 전에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기에 조심하라는 말이다. 아무튼 얇은 책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과알못’에게는 생소한 단어들과 개념들이 자주 등장하기에 속도를 급하게 낼 수 없는 구간들이 곳곳에 있다. 그 구간에서 책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나 주장이 파악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저자가 친절하게도 매 장 끝부분에 요약을 해주기 때문에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꿀팁인데,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요약 부분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유익했던 것은, 모든 학문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저자는 그것을 ‘경계성 질문’이라고 부른다). 그때 인접 학문이나 타 학문의 도움을 얻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신학도 그런 상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고, 반대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문들을 신학이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있기에 신학과 과학이 과거의 갈등과 대립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화해뿐만 아니라 통합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듯하다. 어느 정도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교회가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루어 놓은 결과물을 거부할 수 있을까? 세상은 코로나로 인해 4차 산업혁명에서 논의되고 있는 수많은 기술들이 빠른 속도로 우리의 삶에 파고들고 있다. 교회가 그런 세상의 변화를 어느 때까지 밀어내면서 현실의 변화를 부정할 수 있을까? 이젠 화해를 시도할 때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책이 필요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읽어야 한다. 특히 신학만 공부한 나는 같은 ‘과알못’ 목사들이 모르는 개념들과 단어들을 찾아가면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수고와 노력이 없이는 미래 목회의 청사진을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책이 출판되어 감사하다. 누구보다 번역에 수고해 주신 김기현 사부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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