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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이라는 의미 형식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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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독문과에서 소설이론 수업을 청강할 때, 해석학과 체계이론을 연습하면서 선생님께서 내주신 단편 하나가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이었다.그때 선생님은 "단편소설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당시 "짧은 이야기short stories"라는 의미형식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흘려들었었다.그러나, 대부분의 설익은 오만함이내게 자신에게 주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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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독문과에서 소설이론 수업을 청강할 때, 해석학과 체계이론을 연습하면서 선생님께서 내주신 단편 하나가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단편소설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당시 "짧은 이야기short stories"라는 의미형식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흘려들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익은 오만함이내게 자신에게 주는 결과가 그렇듯이, 그 짧은 번역본은 얼마나 나를 떨게 했던지.

그의 단편들 대부분이 정리된 이 책 덕분에 작품을 좀 더 접해볼 수 있었는데 수년 전 당시의 충격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이것이 그의 전 작품은 아닐테니 전반적인 규정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읽은 몇몇 작품을 통해 두번째 인상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 * *


클라이스트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세계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당시의 서구는 그것이 비교적 신비주의이든 아니든 기독교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반하는 세계가 교리나 기독교 윤리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특별하다.

 

요컨대, '성 세실리아 혹은 음악의 힘'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소재를 차용했지만 테마는 정통 기독교의 것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기괴한 것이며, 플롯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 역시 당시 사람들의 모럴이지, 형이상학적 기반을 갖춘 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길러준 은혜마저 져버리는 한 인간의 내면적 사악함을 통해 통념과 위배되는 모순된 도덕률을 그렸다고 생각되는'버려진 아이'의 경우에도 클라이스트는 죄와 벌의 의미를 한껏 비틀어 종교의 장에서 튀어나와 한 인간이 독립된 인간으로서 기존 사회와 부딪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진짜 나쁜 놈'을 결정짓는 일에 혼란을 느끼게 되는데, 이들이 짓는 죄의 카테고리가 오늘날의 경우처럼 현대적으로 세분화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사회에서도 그러한 세분화된 규정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틀을 갖추고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상당히 선구적인 사유라는 생각이다.

 

'칠레의 지진'과 '버려진 아이'에는 공통적으로 재난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선뜻 양육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간결하게 표현된 것은 당시 가족 모럴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라 보인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앞서 '버려진 아이'를 이야기 할 때도 잠시 얘기했었는데, 이 양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게 고찰할 가치가 높은 테마임은 분명하다. 길러준 은혜, 보살핌을 받는 자식으로서의 도리, 버려질뻔한 운명에서 가족을 이룰 기회를 가진 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그럼에도 품게 되는 오만함, 길러준 자식에게 품는 의심 등등, "이상적인 양부모-자식 관계"라고 일컬을 도덕률을 비틀고 또 비트는 복잡한 이야기가 탄생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비일상적 관계와 갈등 속에서 교조적인 도덕률을 벗어던진 실제 세계의 모럴을 체험하고 자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 속에서 실제로 살을 부딪히며 사는 사람들의 실체임을 깨닫는다.

 

'칠레의 지진'은 상당히 동양적인 이야기로 느껴진다. 읽고 나면 '業'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문전박대했다가 죽은 노파의 혼령이 주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또다른 짧은 이야기('로카르노의 거지노파')는 좀더 기계적이고 노골적인 업을 말하고 있다. 이럴 때의 클라이스트는 잠시 전통적 도덕론자와 혼동되는 감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과율을 적용시키기도 모호한 것이, 이런 작품에서 일어난 죄나 사건들은 대부분 우발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惡漢에게 악덕을 선사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 * *

 

클라이스트의 작품은 주제가 독특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지만 사실 이야기를 꾸미는 방식과 문체도 일품이다.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서술과 스피디한 장면 묘사는 모든 장면을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믿어질만큼 생생하다. 너저분하고 복잡한 장식은 일체 없는데도 구체적이다. 요새 이미지즘의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 서사 문학이 한번 연구해볼만한 미덕이다.

a*****a 2007.06.1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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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 복수를 정의하다
"미하엘 콜하스, 복수를 정의하다" 내용보기
모든 예술 영역을 통틀어 동서고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모티프를 하나 꼽으라 하면 단연 복수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복수극의 미학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선 아이러니하지만 그 진정성을 얼마나 구현하느냐에 있다. 복수의 당위성에 힘을 싣는 갈등을 어떻게 묘사하는 지가 핵심이라는 말이다.   복수의 키워드를 문학작품으
"미하엘 콜하스, 복수를 정의하다" 내용보기

모든 예술 영역을 통틀어 동서고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모티프를 하나 꼽으라 하면 단연 복수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복수극의 미학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선 아이러니하지만 그 진정성을 얼마나 구현하느냐에 있다. 복수의 당위성에 힘을 싣는 갈등을 어떻게 묘사하는 지가 핵심이라는 말이다.

 

복수의 키워드를 문학작품으로만 한정해 본다면 그 최고봉은 역시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이다. 수치심과 더럽혀진 명예는 복수가 복수를 낳는 칼부림의 챗바퀴에 속도를 올리고 보복의 정당성을 웅변하고 있다. 그것은 <햄릿>에서도, <모비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학자가 지적하듯 이같은 복수극이 말하고자 하는 원리는 '사적 구제와 무질서의 이성적 제도화'에 있다. 법의 일차적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주제 의식을 통해 정당한 복수에 대한 인간의 절제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한 공국의 성공한 마상인 미하엘 콜하스가 귀족에게 명마를 강탈당하며 사단이 난다. 흔한 말로 '정치권력의 시녀'에 불과했던 법원의 결정에 상심한 그는 아내마저 잃고-파이아!-복수의 화신으로 변신하게 된다.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폭력을 일삼던 그에게 결정적인 회심의 기회가 오고 다시 공법의 절차에 의탁하게 된다. 하지만 복수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콜하스는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 끝에 왕과 세상을 조롱하며 최후의 선택을 감행한다.

 

짧은 소설이지만 우리가 복수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작품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공적인 구제가 불충분할 때 사적 복수가 정당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 의식을 분명하게 담고 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를 위한 실천의 동기가 뚜렷할 때 그 복수심을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지에 대한 주제는 언제나 논의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억울한 심정이 기댈 곳을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슬픈 시대인가. 그럼에도 갈등을 다루는 개인과 사회의 간극은 여전할 것이고, 복수의 동기는 도처에 안개처럼 깔릴 것이다. 그걸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한 의식을 점검하는 바로미터이다. 그리고 수많은 병적 징후를 보며 우리는 현명한 어른이 되거나 무감각한 식물인간의 길을 선택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미하엘 콜하스는 분명하게 복수를 정의하고 있다.



w******1 2010.02.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