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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런 나이에서 저는 이제 한참이나 멀어진 듯합니다. 하기야 그 무렵에도 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를 만한 용기도 없었고, 섣부른 판단으로 누군가로부터의 꾸지람을 자초할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저는 아이에서 갑자기 애어른으로 돌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를 뛰어 넘는 것은 언제나 그에 합당한 고통이 따르는 법이지요.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가늘게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여느 아침보다 조금 더 어두웠고,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날아갈 듯 부풀었습니다. 빗속에서도 도토리를 모으느라 분주한 청설모 가족과 왠지 쇳소리가 섞인 듯한 까치의 울음 소리가 조용한 숲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단비인지요! 말못하는 짐승들도 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저리도 분주한데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난 난민들은 다가올 겨울을 어찌 날런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제 시리아 난민 돕기 성금 모금에 작은 정성을 보탰습니다. 터키 해안에서 익사한 채 발견돼 전 세계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던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어린이의 시신을 뉴스에서 본 후,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 있는 저로서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엊그제 뉴스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있었다더군요.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결혼식장 공습으로 예멘의 무고한 시민들이 백 명 넘게 죽었다지요.
오늘 아침부터 저는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소설이지요. 이 소설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작가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합리적 이유는 없고 잦은 런던 공격에 대한 보복성의 상징적 의미만 가지고 있었던 1944년의 잔혹한 '드레스덴 폭격'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3,900여 톤에 해당하는 폭탄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13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민간인이었다고 합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한 희생자 수가 7만을 조금 상회하였을 뿐이니 '드레스덴 폭격'의 참혹함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체험을 메타픽션의 기법으로 소설화한 <제5도살장>에서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의 참전 내용은 보네거트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검안사 빌리 필그램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는 스무살에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커트 보네커트와 마찬가지로,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후송됩니다. 이야기는 빌리 필그램이 트라팔마도어 우주인에게 배운 순간이동기술법에 의해 자유자재로 시간 이동을 하면서 진행되는 까닭에 시간적 혹은 공간적으로 순차적 진행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몹시 혼란스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심하게 병들고 심히 무력한, 거대한 힘의 노리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대단한 인물이 될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p.191)
이와 같은 해체적 배열이 갖는 특징은 정신 분열증입니다. 작가는 빌리의 의식 속에 끼여드는 무의식적 상흔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방식을 의도적으로 도입한 듯 보입니다.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 때문에 작가도 어쩌면 빌리처럼 정신 분열증을 겪었었는지도 모르지만 분열증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는 참상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이미 병들어버린 현실에 대한 잔혹한 냉소, 선량한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 그를 통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작가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테구요.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p.77)
이 책에 등장하는 위의 시는 많이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커트 보네거트가 누구인지, <제5도살장>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일체 알지 못했던 독자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작금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런지요.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을 기원하기보다는 저는 '내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염원하고 싶습니다.
"뒷날,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빌리에게 이와 같은 선택적 집중이 가능했더라면,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햇볕을 듬뿍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택했을 것이다." (p.228)
가을비가 종일 하염없이 내립니다. 단비가 내리는 오늘 같은 날에도 이 세상을 떠나는 이가 있겠지요. 작가는 소설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모든 이들에게 후렴구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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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 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p31) 화자의 입을 통해 작가 보네거트의 전쟁에 대한 확실한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제5 도살장]은 작가가 직접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공상과학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이 포로로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압송되어 '제5도살장'에서의 대량 학살을 경험하지만,작가는 지하 저장고에 있었던 덕분에 참사를 면했던 그때의 절망감과 분노가 이 글을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제5도살장]은 이야기의 화자가 자신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빌리 필그림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빌리 필그림은 이 소설에서 시간여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독일에서의 전쟁에 참전하는 중에, 자신이 검안사로 생활하고 있는 미국에서의 생활도 보여준다. 빌리는 자신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우주인을 만나고부터 4차원의 시간관을 배우고 돌아와 지구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지구인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을 한다. 그러면서 중간중간에 빌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쟁을 묘사하지만, 작가는 끔찍하게 전쟁 상황을 묘사하기 보다는 담담하게 그러한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이야기 배경이 들쑥날쑥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왔다갔다하고, 더구나 빌리가 경험한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의 생활 모습도 보여줘서 어리둥저할 수도 있지만, '갈라파고스'의 읽기에서 경험했듯이 읽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나가게 된다.
빌리는 시간 여행을 통해 많은 죽음들을 목격하게 되고 자신이 이미 경험했던 일들이 과거의 시간여행에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시안까지 가지게 되며 그러한 상황을 빌리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많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거나 듣게 될 때마다 빌리는, "그렇게 가는 거지." 라고 말한다. [제5도살장]은 전쟁이라는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빌리의 시점을 따라 과거, 현재, 미래를 다니다보면 그러한 끔찍한 상황들이 전혀 끔찍하거나 낯설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빌리의 말처럼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체념 혹은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낯설음을 경험하게 된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의 빌리의 생활을 통해 작가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피할 수 없이 우리가 순차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우주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일까? 이에 대해 역자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라고 권한다"고 해석한다. 그러한 역자의 해석을 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들을 통해 행복한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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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ughterhouse-Five :: Kurt Vonnegut 어느 집안에나 한두개쯤 있는 것이 전쟁에 관한 에피소드여서인지 나는 우리 집안에 대한 전쟁 이야기도 별반 흥미롭지가 않다. 이를테면 친정 쪽 집안이 원래 이북 출신이라는 등, 할아버지대의 어느 분이 공산당이 되셔서 집안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등, 덕분에 작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남한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는 등, 여섯 형제 중 넷은 이북에 남겨두고 갓 태어난 여동생은 용산 폭격 때 잃었다는 등, 그 때 파편에 맞아 평생 다리를 절룩 거리게 되셨다는 등, 증오를 견딜 수 없었던 작은 할아버지는 군인이 되어 5공 시절까지 주요 직책에 있으셨다는 등, 나름 이야기화 하면 드라마틱한 내용이라 해도 어렸을 때나 좀 귀기울였을 뿐 집안 행사 자리에서 바뀌지 않는 식탁 메뉴만큼이나 자주 듣게 되면 더이상 드라마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쓰러운 개인의 초상만 보이게 된다. 도대체 과거의 이야기를, 그것도 괴로웠던 이야기를 반복하며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같은 연장선에 두고 봐서인지, 최근에 전혀 성격이 다른 시위나 집회를 두고 좌파니 반공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를 갖다 붙히며 성을 내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답답할지언정 별로 화는 나지 않는다. 개중에는 하루 밥벌어 먹기 힘들어 일당이라도 절박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고, 노년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잠시나마의 연대감을 느끼러 나온 분들도 계실지 모르고, 또 정말로 세상 움직이는 것에 기겁해 뛰쳐 나온 분들이 계신지도 모른다.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세상은 자기네들을 버리고 떠난지 오래라고.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숫적으로도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아서 더 역정을 내는 거라고. 그래서 '미친 노인네들' 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젊은이들의 말을 함께 따라할 수가 없다. 그들의 절박한 트라우마가 너무 안쓰러워서. 똑같은 것을 겪어보지 못해 공감할 수는 없어도 아픔만큼은 어렴풋이 느껴져서.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쩌면 내 노년의 모습을 보았기에. 어쩌다 그들은 그렇게 되버렸을까. 시대의 흐름이 바뀌어 많은 체제가 변했는데도 왜 그들은 여전히 그 시대에 느꼈던 공포를 느끼고 있을까. 그때 얼마나 끔찍한 것을 보고 얼마나 진절머리 나는 것을 겪었기에, 왜 아직까지도 그 환영이 남아 스스로를 괴롭히고 기만하고 바뀌어버린 세상에 조롱을 받고 있을까. 녹슬어버린 훈장을 꺼내어 자랑하듯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사라지지 않는 상처자국을 끌어안고 낫게 해달라, 보상 해달라, 알아달라, 감사해달라며 절규하듯 호통치는 그들은 사실 잃어버린 자기 존재를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한테 당해 이리 되었는지,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할지조차 몰라 그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세상에, 변해버린 사람들 앞에서 슬프게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리 만들었는가. 전쟁이다. 흔히 그들은 말버릇처럼 자기네 세대의 노력으로 지금 세대가 누리고 산다고 댓가를 요구하듯이 떠벌리지만 윗세대의 과오로 아랫 세대가 갚아나가야 할 일도 있다.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이 시대에 분열의 코드를 유산으로 남겼다. 전쟁은 스스로를 상처입힘과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도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주범은 누구인가. 깨우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일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 국익을 가장한 소수 집단의 이익을 앞세운 국가는 일개 국민들을 호도하여 분열의 코드를 생성하고 거기서 흘려진 피를 빨아 배를 채운다. 그러니 반발과 비난은 오로지 저들을 향해야 할텐데 왜 이땅에선 우리끼리 싸우고 우리끼리 피를 흘리고 있는가. 여기엔 사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없다. 보상받지 못한, 치유받지 못한 희생자들의 한맺힌 절규만이 있을뿐이다. 1945년 드레스덴의 무차별 폭격으로 공격 대상이었던 독일군은 물론 포로로 잡힌 수많은 미국, 유럽인들이 함께 몰살당했다. 거기서 운좋게 살아남은 미국인 주인공은 만신창이가 된 채 진정한 적을 찾지 못하고 평생토록 정신적 분열을 거듭한다. 처참한 현실을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그가 이해하기도 전에 세상이 먼저 그를 내쳐버린다.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살려하지만 그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들조차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과연 세상엔 이해할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가령 우주인이라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겠는가? 말도 안되는 것도 버젓이 존재한다고, 작가 보네거트는 공상적 은유를 통해 그 부조리한 현실을 최대한 전달하려 한다. 그래도 그것이 과연 제대로 전달될까?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겐 그저 짹짹거리는 새들의 울음소리 마냥 들리지는 않을런지. 나는 솔직히 전쟁을 겪으신 분들께 나라를 지켰다는 이유로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지금 주어진 환경이 전적으로 그들 덕분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들이 없어 다른 환경이 주어졌다한들 그것이 반드시 나빴을거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이 내게 환경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여기에 자리지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고 무조건 윗세대만 비난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지금이 최상의 환경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건 그저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지금'을 제공했다는 믿음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찾고싶어할 뿐이다. 좋은 것만 제공하고 나쁜 것은 적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하면서. 그런 그들을 비난하지도,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자기 가치를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에 안통한다한들 그렇게라도 아픈 상처를 잊고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짹짹 소리로밖에 듣지 못하는 아랫세대로선 연민밖엔 더 드릴 것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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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초자연적인 근원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혼자 모든 악을 행할 수 있다(The belief in a supernatural source of evil is not necessary. Men alone are quite capable of every wickedness) - 조셉 콘라드(Under western eyes중에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포어의 소설은 드레스덴 폭격을 체험한 할아버지와 9.11 테러에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잔인한 반세기를 다루고 있다. 사실 그 때 그 책을 읽고 난 나의 감상은 일시적인 값싼 동정심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오히려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의 트라우마나 일본의 원자폭격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드레스덴 폭격의 역사적 잔인성을 문제삼기보다는 포어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행한 그의 얄팍한 실험성에 더 화가 났었다. 그가 의도한 실험성은 나에게 진한 아픔도 상실감도 그 어떤 것도 느끼게 해주지 못했다. 포어가 의도한 소설 실험은 잔인한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없었다. 많은 리뷰어들이 그 책의 실험성이 아름다웠다라고 평가내리는 것을 보면, 포어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결론내려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지고 핏물이 웅덩이로 변하는 그 잔인하고 비참한 전쟁과 사건을 다루면서 아름답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포어가 말하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피로 얼룩진 역사를 다루기로 마음 먹었다면 독자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실험적 형식에 가려 역사의 비극이 묻혀 버리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잔인한 역사앞에서 아름답다라는 수식어를 독자로 하여금 끄집어 냈다는 것은 그 작품이 박제된 슬픔과 형식적인 위안만으로 가득 찼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유럽 역사상 최대의 대량 학살이라고 일컬어 지는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아니 전쟁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그리고 미친 듯이 말하고 있는 작품중 하나가 아마 제 5 도살장이 아닐까싶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나의 사고 시스템은 작동을 멈추고 가슴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심지어 내 안에 쌓인 답답함이 담배연기와 배출될 수 있다면 담배 한대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답답함과 묵직함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가벼운 일본소설을 읽으므로써 그 답답함을 날려보내려는 나의 심산은 허공 속에 붕 떠버리고 말았다.
소설의 2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36p). 빌리의 비극의 시간 여행(사실 그의 정신분열이지만)은 젋은 시절의 전쟁 경험과 동시에 킬고어 트라우트(보네커트가 이 소설속에서 만들어 낸 허구의sf소설가)의 허접한 sf소설에서 촉발된다. 그의 시간 여행을 따라 읽어 내는 것은 더러운 기분을 동반한다. 살아 남기 위해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추위를 모면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아군인 자신의 동료들에게 병신또라이 취급을 받으며, 이 생고생을 하며 끌려다니는 것보다 마침내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참혹한 전쟁터의 현실이라는 것을 고발하며, 자신들이 절대악과 싸우고 있다는 긍지(139p)로 여학생들을 한무더기로 통째로 삶고 고요하고 편안한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수십명의 생명을 앗아간 후에도 드레스덴 폭격을 역사속에서 숨기려고 한 미영국가의 권력자들에게 과연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지 의문을 던진다. (물론 전쟁가해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안했겠지만) 전쟁은 이기고 지는 승패의 싸움이 아니고 모두 다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 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쟁의 진리인데, 왜 우리는 수천년 동안 되풀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교과서 속에서 묘사된 전쟁은 그저 발발년도나 외우는 암기를 위한 지식 그 이상을 설명하지 않지만 보네커트는 집단 광기의 현장을 체험 한 후 우리들에게, 그 전쟁으로 인해 정신 세계가 망가진 한 정신분열증 환자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 살육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긴 제정신 갖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 우습지!
필그림의 정신분열 세계인 전쟁 시절의 시간의 문과 우스꽝스러운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킬고어 트라우트의 sf소설들이 고리인 것처럼 보인다. 보네커트가 언급한 트라우트의 소설은 터무니 없는 망상적인 요소가 많은데, 전쟁의 비참함과 그 SF적 망상연결은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한 때 사회적으로 부와 명성을 획득한 사람의 정신이 망가지고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 보는 것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제 보네거트가 말하는 전쟁은 교과서 속의 지식으로 담아두기엔 그의 상상력은 너무나 리얼해졌다.
보네커트가 필그림의 정신분열을 촉발하게 한 킬고어 트라우트의 SF 소설을 정리해보면, <4차원의 미치광이들>은 사람들이 정신병에 걸렸는데 병이 원인이 4차원에 있어서 3차원인 지구인 의사들은 그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치료를 할 수 없다는 내용(125p)이고, 돈나무에 관한 책을 한권 쓰기도 했다. 그 나무의 잎은 20달러짜리 지폐였다. 꽃은 정부 공채였다. 열매는 다이아몬드였다. 그 나무에 인간들이 꼬여들어 나무의 뿌리 근방에서 서로 죽였는데, 그 시체가 아주 좋은 비료가 되었다(194p). <배알 없은 놈>은 입냄새가 심했지만 구취증을 치료한 뒤로는 인기를 끌게 된 로봇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소설에서 정말로 주목할 점은 1932년에 썼는데도 연소성 가솔린 젤리가 인간에게 사용될 것을 예견한 사실이었다. 가솔린 젤리는 비행기로 사람들 머리 위에 낙하하였다. 투하하는 일은 로봇들이 맡았다. 그들은 양심이 없었고 지상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살 수 있게 해주는 신경회로가 없었다는 내용(195p)이다. <대형게시판>은 외계인들에게 납치된 지구인 남녀에 관한 책이었다. 그들은 저콘-212라는 행성의 동물원에 전시되었다(235p).
이 소설 한권을 쓰기 위해 보네커트는 2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다. 1969년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 소설들이 출간 되자 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보네커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반미국주의자가 되었다. 역자 후기에서 역자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는 슬픔, 전쟁의 정신적 외상으로 흘리는 빌리의 눈물인지도 모른다"라고 적고 있다. 빌리가 정상적인 삶에서 정상적으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분열을 통해 참혹함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때문에 읽는 내내 묵직할 수 밖에 없었다. 놀이터에서 총을 들고 전쟁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람보와 코만도 같은 전쟁 영웅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누군가를 죽도록 때리고 사살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고 전쟁을 단지 게임으로만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쟁이 이렇게 비참한 것인지 난 이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보네거트의 소설이 처음 발간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보네커트를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처음 그 친구를 통해 들은 보네커트를 귓등으로 흘려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 때 그를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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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는거지!"
이 말은 68년 이 책이 출판되고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어로 퍼진 말이다. 그리고 [제 5 도살장]에서는 무수한 죽음이 아무런 애도도 없이 "그렇게 가는거지!"란 말로서 담담하게 조롱당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1944년 12월 22일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에게 생포되어 드레스덴의 도살장에서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게 된다. 운명이란 그에게 전쟁의 무모함을 전달하라고 13만의 드레스덴 사람들이 죽어간 연합군의 소이탄 폭격에서도 그의 생명은 앗아가지 않았다. 그는 '제 5 도살장'이라 칭하던 도살장 내의 지하 창고에 있었다. 운 좋게도 말이다. 아니 운이 더럽게 없었던게지...
그는 전쟁의 외상을 무려 24년간이나 마음에 품고 살아야하는 트라우마를 겪었을테니, 어찌 감히 운이 좋았다라고 그의 살아남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전쟁은, 그리고 대학살은 그에게 깊은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있음이 분명할텐데 말이다.
그는 여든 노구를 이끌고 부시의 애국법에 반대하여 연애인 스타들과 함께 이라크 반전 운동에 나선다. 그의 캐치 프레이즈는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살아있는 현존작가로서는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미국인임을 거부하고, 반전 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그에게는 전쟁이란 것이 그 어떤 이유로도 당위를 인정할 수 없는 잔인한 반인륜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커트 보네거트는 오리지널 미국 작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인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문명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엽기 발랄한 유머를 날린다. 그의 글들은 진진한 주제를 메타 픽션과 공상 과학과 패러디와 블랙 유머의 기법으로 버무려져 있다. 글쎄.... 이런 종류의 소설읽기는 아주 낯설다. 읽는 내내 사실 '뭐 이딴 것이 다 있담.'을 열 번 정도 내뱉게 된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로서의 이름을 얻기까지 SF 작가로 활동한 경력을 이해해야한다. 그가 자못 진진해야할 사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진지해질 수 없는 형편은 그의 세계관은 본래부터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그가 딸의 결혼식에 트라팔마도어라는 행성에 납치 되어 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들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운명같은 질서에 의해 펼쳐져 있는 4차원적인 동시성에 의해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자신의 운명을, 세상의 운명을 미리 알고 바꿔보려고 한다해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으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라팔마도어 식으로 표현하면 세상에 존재했던, 존재하는, 존재할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공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를 틀어놓을 수 없도록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는 것이란 것이다.
보네거트는 낙천주의자이다. 하루키가 지적한 바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본래 인생이라 더러운거지."하는 체념에 젖어있다. 그의 작품 속에 깔려있는 인생에 대한 심각하지 않은 태도, 조롱에 가까운 가벼움은 역설적으로 누구의 인생이든 결코 쉽게 파괴할 수 없다는 인류애를 담고 있다.
1945년 2월 13일과 14일에 걸쳐 영국과 미국 항공기 800대가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4월 17일까지 지속되었다. 커트 보네거트가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대로, 폭격기들은 먼저 고성능 폭약으로 건물을 해체한 다음, 그 위에 소이탄을 퍼부어 도시를 녹여버렸다고 한다. 무엇을 위해 도시 전부를 녹여버렸는가에 대해서 [폭격의 역사]를 쓴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이 폭격은 상징적 의미 이외에 전략적 목표는 실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부 전선에서 이미 독일군은 무너졌고, 연합군이 밝힌바대로 그 독일군의 동쪽으로의 진군을 맞고자 했더라면, 엘베강 위의 철교를 무너뜨려야 했을턴데 고스란이 철교는 놔두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가는거지"
소설 속의 검안사 빌리 필그램은 작가의 분신이다. 그는 스무살에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커트 보네커트와 마찬가지로,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로서 드레스덴에 후송된다.
이야기는 빌리 필그램이 트라팔마도어 우주인에게 배운 순간이동기술법에 의해 자유자재로 시간 이동을 하면서 진행된다. 따라서 이야기는 시간적 혹은 공간적 순차적 진행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몹시 혼란스럽다.
해체적 배열이 갖는 특징은 분열증이다. 즉 빌리의 의식 속에 끼여드는 무의식적 상흔들을 환기시키는 방식으로서 작가가 선택한 전략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작가 스스로 드레스덴의 공습을 이야기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정신이 분열되는 증세를 겪었었는지도 모를 노릇이긴 하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내 아드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가마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p.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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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책>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10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북클럽 회원들 가운데 아내를 여윈 존이 선택한 책입니다. 아내와의 인연을 엮어준 책이었기 때문에 존은 인생의 최고의 책으로 <제5도살장>을 꼽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았고, 나는 그 때문에 그녀가 좋다. 얼마나 인간적인가’라는 대목을 뽑아 10월의 글로 삼았습니다. 한편 작가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무명의 SF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어준 소설입니다. 아마도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사회를 휩쓸고 있던 반전 분위기 덕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티프는 스무살이 되던 1943년 징집되어 유럽전선에 투입된 작가가 1944년 12월 22일 벌지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수용소가 바로 ‘제5 도살장’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종전이 되었으면 이 특별한 책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 800대가 대대적인 폭격을 가해 무려 13만명이 죽고 아름다운 도시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보네거트를 비롯하여 <제5 도살장>의 등장인물들은 지하의 고기 저장고에 있었던 덕분에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드레스덴의 참사를 목격한 보니거트가 평화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내 인생 최고의 책>에서는 <제5 도살장>에서 주목해야 할 장치가 바로 빌리 필그림의 ‘시간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빌리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가 트라팔마도어 행성입니다. 지구로부터 500만km 떨어진 트라팔마도어행성의 사람들은 4차원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시간은 시간일 뿐 변하기 않습니다.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순간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곤 합니다. 트라팔마도어행성은 드레스덴의 충격으로 PTSD를 앓게 된 빌 리가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려고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일뿐입니다. 작가는 빌 리가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제5 도살장>에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작가로서는 드레스덴의 충격적인 학살을 정리하기 위하여 많은 글을 쓰고 버렸던 것인데, 드레스덴의 수용소생활을 같이한 전우 버나드 V. 오헤어의 부인 메리가 ‘당신들은 그때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어요’라는 비난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철부지였을 10대에 겪은 참상을 어른의 시각에서 재구성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각에서 작품을 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제목이 정해진 것입니다. 물론 제목이 되지는 못했습니다만.... ‘십자군’이란 단어에 숨어 있는 의미는 그들이 단지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동기 역시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신앙이었으며, 그들이 지나는 길은 피와 눈물의 길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00만 유럽인들이 수백만의 재화를 투입한 십자군전쟁에 나서서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팔레스티나를 100년여를 소유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사실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활자로 옮기면 책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이 읽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저자 역시 이런 점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입니다. “23년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드레스덴 파괴에 대해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목격했던 것을 그대로 보고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 그것이 명작이 되거나, 그렇게까지 못 되더라도 큰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제가 워낙 거창했으니까(1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리 많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취재 끝에 썼다가 버린 원고만도 엄청났던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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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드레스덴을 잠시 들렀다. 프라우엔 교회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강변이 인상적인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곳에서 발생했던 과거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다. 히로시마 원폭을 능가하는 재래식 폭격의 재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차마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없어서 정신분열자의 기행을 빌러 간접적으로 재현하였다. 짧게 짧게 끊어지는 구성이 다소 산만하지만 읽기엔 편하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문구가 재미있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가는 거지. So it goes"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 라인홀트 니부르, 7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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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선입견이란.... '제 5도살장'의 내용이 이러한줄 알았다면 이렇게 늦게 읽지 않았을텐데. 책 제목만 보고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을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물론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이야기를 실어 놓아 결코 평범한 내용을 다루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의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 씨를 여기에서 또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이러니 꼭 '제 5도살장'이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의 다음 권인 것만 같다. 빌리 필그림과 엘리엇 로즈워터와는 전쟁이 끝난 후 한 정신병원에서 만나게 되는데 엘리엇으로 인해 빌리의 삶도 트라우트를 빼 놓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시간여행을 하는 빌리는 트랄팔마도어와 지구를 왔다갔다하며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죽은 후에도 다시 살아나 과거, 현재, 미래를 돌아다니는 그를 보면서 알고 있는 삶을 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가 사고나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타고 가는 빌리, 이로인해 장인이 죽게 되는데도 장인을 살리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여기에서 죽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일본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보다 드레스덴에서 죽어간 이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죽은 사람은 71,379명, 드레스덴의 폭격으로 죽은 사람은 무려 135,000명이라고 한다. '제 5도살장'은 작가가 직접 겪은 드레스덴에 있었던 폭격을 말하고 있는데 드레스덴으로 간 빌리의 곁에 작가도 함께 있어 자전적인 소설임을 곳곳에 드러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하는게 좋을까. 끔찍한 상황을 그대로 전하는 것보다 이렇게 작가가 간간이 던지는 유머속에 녹아있는 전쟁의 참상을 보는 것이 더 참담하게 느껴지는데 책을 읽으면서 피식피식 터져나오는 웃음을 잘 참아내는 것이 문제긴 하다. 웃지 마라고? 웃으면 안된다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짹짹.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마다 작가는 그들을 애도해준다. '그렇게 가는 거지'라며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글을 보면서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폭격속에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일일이 애도하지 않음에 더 큰 슬픔이 차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그저 하나의 죽음처럼 보여진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쟁으로 어떻게 될지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작가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을 툭 뱉어내며 타인의 인생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나의 죽음도 그에겐 결국 이렇게 결론 지어지겠지. '그렇게 가는 거지'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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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40년 전에 발표된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마더 나이트>(1961)를 읽으면서 커트 보네거트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십대 초반에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그 유명한 벌지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드레스덴 대폭격을 경험하면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 작가의 본능과도 같은 경험치로 자신의 드레스덴 경험이 창작의 소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 거의 20년간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보다도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드레스덴 공습을 글로 표현해 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도 정신분열증적인 소설이라는 말을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제5도살장>의 구성은 참으로 독특하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재구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빌리 필그림이라는 얼치기 사병을 내세워서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투영시킨다. 전혀 전쟁과는 맞지 않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나 들어맞을 인물이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같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빌리 필그림은 집안 좋은 와이프 발렌시아를 맞아 검안사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구조라면 얼마나 좋겠으련만, 보네거트는 SF 작품을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과 트랄팔마도어라는 외계행성에 납치된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으로 뒤죽박죽으로 버무리기 시작한다. 하긴 전쟁이라는 미치광이 놀음을 단순하게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빌리 필그림에 대해 세상에서는 미치광이로 판정을 내린다. 아내는 비행기 사고가 난 자신을 보러 오는 도중에 일산화탄소로 사망하고, 시집간 딸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트랄팔마도어 타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빌리 필그림을 이해할만한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리라. 블랙유머의 대가답게, 빌리 필그림을 따라가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시선은 건조하고 냉랭하기만 하다. 물론 전혀 전쟁에 나선 병사 같지 않고, 전쟁을 희화화하는 것 같은 빌리 필그림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포로수용소의 연극무대에서 신데렐라가 신었던 은색 장화를 신고, 여자들이 하는 외토시에 커튼을 로마시대 토가처럼 두른 어릿광대 빌리 필그림의 모습은 “웃기지도 않는 전쟁”에 대한 보네거트의 조롱으로 다가온다. <제5도살장> 읽기는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처럼, 경이로운 순간들을 한 순간에 보는 경험이었다. “반전”(反戰)이라는 빤한 주제를 과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예상을 단박에 부숴버리는 작가의 엉뚱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전쟁이라는 현실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내고 있었다. 전작 <마더 나이트>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카메오 등장 또한 주목할만한 설정이었다. 전쟁포로로 도급노동을 위해 드레스덴의 시럽공장에 끌려와 있던 빌리 필그림은 나치의 선전요원으로 포로들의 생활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다는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개발해낸 캐릭터를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을 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국의 소설가, SF작가, 에세이스트, 풍자가, 불가지론자, 유니테리언, 포스트모더니스트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 세계에 너무 늦게 발을 들여 놓게 돼서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그의 작법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을 섭렵해 나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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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거트의 "나라 없는 사람"을 읽고 나서 주문한 책이 "제5도살장"이다. "나라 없는 사람"에서도 나오지만 저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낙오하여 전쟁 포로로 드레스덴 공습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종전 후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보네거트의 책을 읽기 전에는 드레스덴 공습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어, 책을 읽기 전에 드레스덴 공습에 대하여 검색을 해 보았다. 이런 끔찍한 일이.... 1945년 2월 전쟁의 막바지 속에서 연합군으 폭격기가 작센지방의 공업도시 드레스덴에 15시간 동안 3차례의 공습을 통하여 7천여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13만명의 사상자와 도시전체를 날려 버렸단다. 문제는 의도된 것이든 실수이든지 간에 투하된 폭탄의 종류에는 대량의 소이탄이 포함되었으며, 투하된 곳이 민간인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드레스덴 공습은 보네거트의 삶에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으며, 종전 후 이 경험을 책으로 엮으려 했지만 오랜 기간을 완성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후 20여년이 지나서 "제5도살장"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보네거트를 주류작가로 성공시켰다.
하지만 드레스덴의 참상을 그리려고 했다는 저자의 전쟁소설은 언뜻 전쟁소설 같지가 않다. 이 소설은 작가처럼 전쟁 포로로 드레스덴 공습을 경험한 빌리 필그림(작가의 분신)이라는 검안사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자유자재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소설은 빌리의 시간 여행을 따라 과거 및 미래 현재를 넘나 든다. 그 와중에 잠시 전쟁과 드레스덴 포로수용소 이야기가 나오지만 직접적인 묘사는 분량이 매우 적으며 빌리의 전 생애를 그의 시간여행을 쫓아 묘사한다. 이처럼 외계종족에게 납치되었었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빌리의 주장은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케 한다. 그리고 그의 허황된 이야기를 읽으면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다가도 책장을 덮고 나서는 괜히 서글퍼 짐을 느낀다.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을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고 피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이 책의 부제처럼(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이 책에는 수많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전쟁 중의 죽음, 교통사고 후 일산화탄소 질식으로 숨진 아내, 비행기 사고, 그 밖에 기타 등등... 그 많은 죽음을 이야기 하면서 그 때마다 빌리는 "그렇게 가는 거지"하고 죽음에 대하여 애도를 표한다. 자칫 조롱조로 들리는 이 말은 이 소설의 주제이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전쟁에 대한 강력한 반대구호다. 책에서 '트랄파마도어'인은 모든 순간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어 바꿀 수 없으며 행복해지려면 즐겁고 좋았던 순간에만 집중해서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처럼 숙명론적인 세계관을 내 비친 저자는 전쟁터에서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으나 행복하게 살다 즐겁게 죽으나 어차피 맞이할 죽음인데 인류가 서로를 미워하며 전쟁으로 인간의 생명을 쓸모없이 희생시켜야 하겠느냐?는 강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빌리가 생각한 자신의 묘비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아무것도 상처입지 않았다.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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