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과 표지가 끌리면 책을 구매하는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중 한 사람인데 이 책은 나를 끌리게 만들었다. 안개 자욱한 곳에 손을 뻗어 책과 닿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책은 이렇게 다가왔다. 줄거리는 밑에 실린 것과 같아 생략하기로 하고 나는 이 책을 어떤사람들이 읽으면 좋을까 또한 이 책의 느낌은 어떠한지 말하고 싶다. 그야말로 슬픔에 배신당하고 슬픔 때문에 힘든 사람이라면 그냥 읽어보면 어떨까? 슬프다면 기쁜 무언가를 찾으라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더 슬퍼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책과 슬픔을 나누면서 줄여가길 원한다. 그리고 어두 침침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또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프랑스인 작가의 생각도 느껴보고 표현 방법같은것을 같이 느껴보는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거의 시종일관 어둡기 때문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고 밤새면서 읽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
| 모든 것이 단순화되던 시대가 있었다. '옳음과 그름', '선과 악'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었다. 20세기의 문학은 근대성에 대한 도전으로 출발했다. 20세기 문학의 문을 열어재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 실존을 고민했던 사르트르와 까뮈 등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그러나 그들의 문학은 한동안 맥을 잇지 못했다. 대중 또한 인간 사유의 심연 혹은 영혼의 실체를 궁구하려는 문학적 고뇌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세대쯤의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누군가 홀연히 나타났다. '혜성처럼'이라고 해야 할까. 다소 거창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립 클로델'에게 이 정도의 찬사는 오히려 부족하다. 인간의 영혼은 무슨 색인가, 흑인가, 백인가? 필립 클로델 역시 이분법을 거부한다. 필립 클로델은 소설 『회색영혼』(media2.0)을 통해 인간의 영혼 그 깊은 곳을 파고든다. "성자도 개새끼도 없다. 인간의 영혼, 그것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회색이다. 똑같은 회색 진흙이 하얀 대리석 판 위에서는 검게, 검은 대리석 판에서는 희게 보일 뿐이다." 회색은 야누스의 색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의 얼굴을 가진 악이며, 범죄자의 얼굴을 가진 선량한 소시민일 뿐이다. 삶의 조건이 어떠한가는 중요치 않다. 부패한 권력가일수록 썩은 영혼의 냄새가 더욱 지독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자와 권력가 못지 않게 가난한 자들 역시 죄악의 구렁텅이를 배회하는 회색영혼의 소유자이긴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 신의 계기다. 문제는 죄가 아니다. 죄를 대하는 태도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있는 반면 죄를 인정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악행을 거듭하는 버러지 같은 인간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그 모든 죄인들이 모여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거늘. <회색영혼>은 수사관인 주인공이 훗날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며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억은 자기고백을 통해 완성된다. 사건에 대한 기억의 주된 대상이 타자들이라면 고백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속죄와 회한의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진실을 찾아 나선 수도승의 고행이기도 하다. 전쟁(1차 대전)의 광기가 휘몰아치던 때, 프랑스 중부의 외딴 마을 P.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죽은 아이는 '벨 드 주르'.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된 소녀다. 그녀의 아버지는 V.에서 식당을 운영한다. 소설은 식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성채의 주인이자 근엄함을 잃지 않는 검사, 뚱뚱보인데다 인간성도 글러먹은 판사, 주인공인 수사관, 기타 마을 사람들. 그들은 소녀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소소한 인연으로 엮이고 뒤엉켜 있다. 더불어 그들은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저마다의 뚜렷한 캐릭터로 시종 꿈틀댄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사건(혹은 소설)의 내적 구성요인이라면 외부적 환경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전쟁 중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소녀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여교사의 자살사건이 있었다. 소녀 살인사건의 서곡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소설의 주제의식이 담겨있기도 하다. 여교사는 전장에 나간 연인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머물기 위해 P.까지 달려온 사랑의 화신이었다. 그리고 연인의 전사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받고 이내 자살해 버린다. "좋은 의도와 동정심이 넘치는 단순한 편지 한 장도 무기만큼이나 확실하게 죽음을 부를 수 있다." 그게 소설의 복선이다. 뒤이어 어린 소녀('벨 드 주르')가 강둑 옆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 곳은 검사의 성채와 맞닿아 있는 곳이다. 더구나 전날 저녁 소녀와 검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자도 등장한다. 이쯤 되면 한번쯤 검사의 엽기적 살인행각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 검사는 엄청난 부자임에도 불구 일찍이 요절한 젊은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재혼도 하지 않고 성채에 칩거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수사관은 판사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이어 숱한 의혹들이 그의 내면에 엄습한다. 그러나 때는 전시다. 사건은 탈영병 두 명에게 살인죄를 추가하는 것으로 상황종료.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통해 여론을 무마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한 시장, 판사, 타락한 드레퓌스주의자의 야합, 그리고 검사에 대한 끈끈한 동료의식에 의한 암묵적 묵인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였던 셈이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가짓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범인을 체포하든가, 범인으로 몰리는 사람을 체포하든가." (159쪽) 전장에서 다소 비껴나 있는 작은 마을은 축복 받은 곳일 수 있다. 적어도 전장에 나가 팔과 다리가 잘리고 코가 달아나고 안면의 반쪽이 사라져버린 부상병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서 그곳이 곧 평화스러운 곳인 건 아니다.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의 이해가 얽혀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부패와 패거리주의와 부조리가 싹틀 수밖에. 인간이 하는 행위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게 전쟁이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회색영혼들이 빚어내는 비열한 암투와 부조리와 부패 역시 전쟁 못지 않은 어리석음이다. "슬픔이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죄의식도." 필립 클로델이 보는 회색영혼들의 운명은 그렇게 잔혹하고도 부조리하기 만하다. 작가의 영혼은 하얀 대리석 위에 놓인 까만 회색이다.회색영혼> |
|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하지만 V.라는 이 마을에서 전쟁을 실감하기는 힘듭니다. 간간이 언덕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가 전쟁의 전모입니다. 마을은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군수공장이 있기 때문이죠. 일손이 달리고 되레 전쟁 이전보다 활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런 마을을 배경으로 온갖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해 갖가지 사연들을 풀어놓습니다. 대다수 서평들이 이 작품을 소개하며 살인사건이니 탐정소설식 구성이니, 반전 등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건데 그런 건 모두 잊어주세요. 물론 소설 서두에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주인공 나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주요 서사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 위주에서 오는 독서의 즐거움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작가의 스타일에 충실해 보세요. 분노를 기본에 깔고 냉소와 유머로 버무려진 작가의 문장 하나 하나에 젖어보시는 편이 훨씬 값진 일입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죠. '마치예프가 한 짓을 들으면 그를 개자식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개자식은 지상에 가장 많은 부류이자 바퀴벌레처럼 왕성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자랑하는 부류다.' 추운 겨울의 어느 아침, 벨 드 주르라는 마을의 어린 소녀가 강가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후에 나(경찰)는 검사 데스티나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이미 애송이 탈영병 두 명이 범인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후 입니다. 진범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작가도 밝히지 않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차차 나의 불행한 개인사가 드러나고, 나가 이 사건에 미련을 갖는 이유도 자연스레 해명이 됩니다. 메인 스토리를 진행시키면서 작가는 중간중간 마을사람들 개개의 사연을 들려줍니다.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는 듯한 구성은 자칫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문장을 읽는 순간,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장황한 횡설수설처럼 가닥 없이 얽히고설킨 이 모든것이 사실은 내 인생의 모습이라 할수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자 비로소 이 소설이 온전히 이해됩니다. 마을을 지나쳐가는 부상병의 행렬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기 초죽음이 되어 들것에 누운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전쟁이 빗겨간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비교적 행복한 일상으로 1차 대전이라는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들 또한 나름대로 전쟁을 겪었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 또한 그들만의 전쟁이었습니다. 회색은 흰 바탕에 놓고보면 검게 보이고 검은 바탕에 놓고 보면 희게 보입니다. 주인공 나는 검사의 무덤 앞에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살인자인 동시에 피살자다! 작가가 작중 인물인 조세핀의 입을 빌어 말한 그 '빼도 박도 못할 회색'이 난무하는 이 소설을 정중히 권하는 바입니다.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동시대 프랑스 문단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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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런 날들이 있다. 열망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생은 모든 정열을 소진하여도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 않아, 우리는 때로 좌절하고, 때로 쓸쓸하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아름답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도 문득 ‘삶이,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다. 그저 손으로 스윽 닦아내고 다시 살아내야 할뿐. 인생은 이 사람과의 관계로 시작해 저 사람의 관계로 다시 넘어간다. 마치 박지성의 응응캔버스 광고처럼, 삶은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돌려보고돌려보고 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입에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를 닮지 않았나! 실상, 이렇듯 눈만 뜨면 만나고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 흰 놈도 검은 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리핀 애들과 인도네시아 애들을 구별 못하듯 영혼도 그저 이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저놈일 뿐이라고. 이 기막힌 생의 아이러니, 영의 아이러니를 발견해 낸 자가 바로 아무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더러운 한 여인이라니, 이 또한 재미있는 파라독스. 데스티나 검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쓸쓸한 무채색의 얼굴로 어느 오래된 벽화의 흐릿한 그림처럼 하루하루를 보냈을 사람. ‘사랑과 범죄가 그에게서 하나가 되는’ 고결한 모습이라니... 그의 아내와 여교사와 벨드주르의 흑백사진이 눈앞에 현현하다. 그 여인들과 데스티나 검사의 뒷모습에 가슴이 벅차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의 양이 돌연 증가한다. 전쟁을 간신히 비껴간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어린 벨드주르의 싸늘한 시체의 입술만이 푸른빛일 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형상은 흐릿한 회색이다. 토악질 나오는 판사와 그의 동종, 그들을 떠받드는 시종들, 경악하는 사람들, 도덕적 관념으로 자신을 합리화 하는 주민들, 알코올중독자 여인, 탈영병,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의 화자 자신조차... 누구하나 벨드주르의 보랏빛 입술보다 선명한 영혼을 지닌 자가 없다. 심지어 신을 섬기는 신부조차 벌거벗고 아귀처럼 음식을 씹어 육체를 살찌운다. 벨드주르를 죽인 자는 정말 남들보다 더러운 영혼을 가졌을까? 이곳의 살인은 마을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살인보다 지독한 것인가? 필립클로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관념상의 살인에 비해 진짜 살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병든 욕망과 절대적 현실 사이의 평형이 이루어지는 때는 사실 전쟁 때 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며 표현할 수 없는 악행을 행하고 사는가. 누군가의 머리가 부숴지기를, 누군가의 인생이 초토화되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 당신과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작가는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도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생의 이면을 날카롭게 포착해낸 작가가 놀랍다. 무릇, 우리는 헤헤호호 웃는 낮으로 생활의 모든 이들을 대하고 존경하고 우러르나 돌아서면 어떠한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관념의 살인과 실재의 살인, 너머의 살인과 지척의 살인, 이 모든 것의 경중을 따질 수 있을까? 죽음의 이미지 또한 다르지 않아. 너와 나를 포함한 모든 죽음의 모습도 그러하다. ‘범죄자와 희생자가 모두 순교자가 된 살인. 그건 흔치않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검사가 범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작품에서의 범인은 작품의 특성상, 작품의 구조상, 인물의 설정상, 주제상 순교자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연민을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짜맞춘 말 그대로 소설이고 픽션이라고는 하나, 책을 읽는 내내 순교자의 뒷모습에 쓸쓸해하고 가슴이 아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끊이지 않는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진 피의 형제! 당신의 영혼이 그러하듯 나의 영혼도 그러하다. 색도 명암도 없는 흐린 회색의 빛깔... ‘개새끼들이 개새끼들이라서가 아니다. 아마도 우연이란 없으리라,. 나는 곧잘 그런 생각을 했다. 모두들 각자의 드라마 안에서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들이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끝도 없이 만들어 내는 완전하고 완벽한 구(毬). 필립클로델은 ‘짜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하며 둔기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정신이 아득하고 눈앞은 온통 회색빛... 마지막까지 떨리는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내내 놀랍기도 하고 그 치밀한 구성과 인간과 인간의 미세한 감정까지 이리저리 마음대로 부릴 줄 아는 능력이 부러울 뿐......................... 헌데, 너와 내가 같다면, 너와 내가 어찌 생을 살아내든, 영혼의 색은 같은 것이라면 우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 내야 하는 걸까? 우습지 않은가! 하늘 꼭대기에서 날고 뛰는 인생일 지라도, 진흙을 뒹구는 더러운 인생일 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모두가 같다는 것. 마지막엔 결국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나저나, 그것을 좋아해야하나.. 싫어해야 하나... 때론 참,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생이 느껴져 몹시 쓸쓸할 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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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렸다고 해야 하나, 느낌에 끌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책을 샀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마냥 '모모'와 같은 동화적인 어떤 면을 기대했던 나에게
이 책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을 이루고 있는 회색처럼.. 책은 우울하고 침울하고 불투명한 그 무언가에 대해서
우울하고 침울하고 불투명하게 말하고 있다.
탐정소설이나 추리소설과 같은 소재일지 몰라도, 그것과 같은 긴장감이나 명쾌함은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이 풀릴 듯 하더니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은 우리네 삶의 이야기였다.
잊지 못할 구절들, 잊고 싶지 않은 구절들이 참으로 많았던 책...
"사람은 어느 땅에 속해 살 듯,
회한 속에서도 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 중얼거리고, 진정을 되찾고, 진지함, 권태, 공허도 다시 밀려온다. 떨려오는 손으로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켜며 생각한다. 사람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하루는 너무 길고, 아직도 살아야 하며, 살아나가야 할 나날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병나발을 불며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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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들고 내가 간 곳은 해남 땅끝마을이었다. 슬픔이 차고 넘쳐서 도저히 서울의 내 방에서 멍히 있을 수 없는, 바로 그때였다. 가방을 싸면서 딱 한 권,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5년 전, 해남 땅끝마을을 찾았던 그때도 나는 슬펐다. 보름달이 뜬 어느 여름, 나는 친구와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 땅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나를 안심하게 했고, 그곳의 아담하고 예쁜 돌담집의 게스트하우스가 우리를 반겼다. 2층 사각형의 고요한 방. 사람이 잠잘 때 필요한 것들, 이불, 베개, 자그마한 텔레비전이 전부인, 딱 고만큼의 방에서 우리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마지막회를 보았다.
그날의 여행과 이번 것이 다르다면 혼자 떠났다는 사실뿐, 마음의 슬픔은 설핏 비슷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쩔 수 없는 상처랄까. <회색영혼>은 내 상처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전쟁이 벌어지던 시대의, 그럼에도 전쟁의 위험에서 동떨어진 한 자그마한 마을에서 벌어진 영원한 이별에 의한 분노와 상처 그리고 죄책감을 그려내고 있었다. 작가의 간결한 문체와 절제된 감정 사이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감탄했고,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얼마 전 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라는 영화 때문이다. 그 영화의 감독이 바로 이 책의 작가이고, 나는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감독이 써낸 소설이 궁금했다. 어렴풋이 그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의 여자주인공의 섬세한 눈빛과 절제된 감정 표현은 여자 감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내 예감은 빗나갔다. <회색영혼>의 날개에 박힌 사진은 머리가 벗겨진 남자 작가의 것이었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나는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내가 믿고 있었던 사실이 어쩌면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회색영혼을 띄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은 어찌해서 먼저 죽는다.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개자식들만 오래 오래 잘 살아간다. 양심의 가책 따위 절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면 나는 정말 어떤 형태로도 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있다면, 정말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감히 인간인 내가 그 악함을 설명할 수는 없을 듯했다. 이제는 슬픈지조차, 마음이 아픈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나는 땅끝마을의 한 자그마한 방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덩그러니 앉아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아직 좋은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 역시 회색영혼을 지닌 사람일뿐이다. 언젠가 더 나이 먹은 어느 날, 내 회색영혼이 어느 쪽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알게 될 날이 오겠지.
<우리는 지금 우리가 속한 세계가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상이 지겹다고 가끔 생각할지라도 그 한없이 반복되는, 변하지 않는 일상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게 결국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한 순간 무너진다. 그게 인생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공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진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떤 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존재가 우리라는 것을 인정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쉬워진다. 결국 정해진 운명에 따라 고분고분 닥치고 있는 게 가장 옳다는 것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순간이 일생의 단 한 번이 아니라 한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 사람만이 인생을 그나마 순응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슬픈 코미디이다. 인생이라는 슬픈 코미디, 비극이라는 말조차 붙일 수 없는, 영원히 반복되는 악한 생生. 그럼에도 희망이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내게 그 따위 말을 해놓고 어떻게 희망을 논하는가, 미친년, 이라고 말할 테지. 하지만 또 미치기란 얼마나 어렵고도 쉬운가, 인생을 살면서…….>
by pEPe+ 2010.2.18. 땅끝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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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긴 했는데, 존재감이 기이하게 지워지는, 흐릿하게 그냥 책장을 넘기고 그냥 잠들어버리게 되는 그런 느낌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갸우뚱, 하다가 나중에, 오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기억날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는 전쟁에서 벌어지는 이름없는 무수한 죽음 대신, 세 여자의 죽음이 중심축을 이룬다. 식당 주인 부라슈의 세째 딸 '벨 드 주르'(해님 같은 예쁜이라는 뜻. '메꽃'을 뜻하기도 한다.)와 검사 앙주 데스티나의 집에서 자살한 젊은 선생 리지아 베르아렌과 검사 데스티나의 아내이자 대저택의 초상화의 주인공인 클레리스 뱅세다. 데스티나를 중심으로 해서 이 세 여자의 죽음이 기묘한 미스테리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늙은 경찰관의 고백을 통해 '벨 드 주르', 클레리스, 리지아는 동일한 영혼의 세 가지 현현처럼 보였다. 하나의 영혼이 한결같은 미소, 다정함, 어떤 것에도 비견할 수 없는 열정을 간직한 채 각기 다른 육신을 입고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동일한 아름다움이 왔다가 돌아가고, 태어났다가 소멸되고,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넘어가도 보이는 것은 같은 얼굴, 세 얼굴에는 모두 청순하면서도 악마적인 무엇이, 평온과 공포를 동시에 자아내는 그 무엇이 서려 있었다. 그 불변성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아름다움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외귀하게 마련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고 말해지는데,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비참하게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피를 쏟으며 죽어간 아내인 클레망스를 여기에 연결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죽음이란 아름다움처럼 회귀하는 것, 죽음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전쟁도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사는 소도시는 전쟁 소식만 접하고 실제로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쟁 덕에 먹고살았다고 해야 옳다. 전쟁은 공장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마을 주민 전체가 전투가 아닌 공장에 투입됐다. 그러니 이 소설의 배경은 전쟁과 가장 가까운 동네이면서 전쟁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구경할 수 있는 동네다. 작가는 이런 공간적 배경을 통해 전쟁을 물끄러미 냉정하게 말해준다. 잘린 팔을 자랑하며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군인이나 내장이 갈라져 터진 시체나 무수한 불구나 부상병이나 전사자들의 주검더미에 대해서는 딱딱하고 건조하게 말할 뿐이고, 작가는 계속해서 폭풍의 눈처럼 아늑하고 평온하게 보이는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에 대해서, 방탕한 마을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서, 얼어 터진 시체를 보면서 완벽하게 요리된 달걀 반숙을 먹으며 감탄하는 판사에 대해서, 탈영병을 발가벗겨 고문하고 조롱하면서 사치스런 만찬을 즐기는 인간들에 대해서만 강조하면서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전쟁이 아니라, 전쟁에 둘러싸인 한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다. 환타지처럼 일그러진 현실이다. 작가의 이런 말하기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라 하겠다. 변죽을 울림으로써 중심의 떨림을 멀리 전달해낸다. 전쟁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자신의 소설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감정을 담아내어 말할 수 있는 구성이다. 인간의 역사가 죽음의 역사이기에 인간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회색일 수밖에 없다. 비극은 운명적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벗어나려고 해도 원죄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마을로 도착하는 무수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함부로 술에 취해 자신의 삶을 안도하는 마을 사람들은 과연 불행을 피한 것일까. 죽음과 전쟁을 짓밟고 솟구친, 이 기괴한 마을의 '행복'한 상황이야말로 또 다른 고통과 비참이라는 작가의 웅변은 담담하고 낮다. 전쟁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은, 침묵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전쟁에 대해 큰 소리로 말하는 자의 진실성은, 실성한 인간의 비명처럼 다가올 거다. 전쟁은 우리의 영혼에 곧바로 스며들어 영혼의 일부가 되었기에, 우리는 피부를 찢고 심장을 꺼내는 고통으로 우리의 '회색 영혼'을 만나야 하리라. |
|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온통 회색빛의 영혼들. 이 소설은 인간이 지닌 추악함과 선함 사이를 오가며 관조한다. 오로지 검은색일수도 차라리 흰색일수도 없는 이들의 회색빛 삶. 선전문구를 봐서는 프랑스 내에서는 유명한 상도 많이 받았나 보다. 사실 그만한 상을 받을만한 재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 쓰여지기는 했는데 임팩트가 없고 좀 질질끄는 면이 없지 않아서.... 책의 시점은 형사로 일했던 한 남자인데, 그 탓인지 시제가 뒤죽박죽이라 집중이 안되는 점이 있다. 계속 언급되는 '사건'이 얼마나 크고 대단하다는 것인지 묘한 반발심까지 일으켜 추리에 대한 역효과를 보이기도 했고. 인간의 회색빛 칙칙한 심리를 잘 표현했지만 그로 인해 인간을 다시 조명해 본다거나 반전같은게 있는 스릴이 있는 소설은 아니다. 딱히 대단한 '검은 영혼'을 본 것도 아니고... 뭐랄까, 특별함이 부족한 평이함이랄까? 책의 가장 중요한 '재미'라는 면에서는 기대에 못미치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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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는 않다. 콘라드의 책 - darkness는 어둡지만 이 책은 그냥 회색. 그것도 눈오는 날의 회색빛 정도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포근함?을 느낄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기괴한 소설보다는 기괴한 현실을 흥미진진해 하는 사람이라서 이 책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첫부분에서 이야기의 흐름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고...
그런데 읽다보니....이거 꽤 매력이 있었다.
재미 있게 읽고 있었는데 어느덧 마지막, 내가 음모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된 결말이었다.
이 작가 충분히 상 탈만하다.
뭐랄까 소문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남자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지금도 소설 속의 관찰자인 남자에 대해서는 좀 생각하게 만드는 면으로 보자면 별이 5개도 거뜬하지만
하지만 음모론자가 아닌 사람이 읽거나 이 소설의 관찰자인 남자 같은 사람이 읽으면 별 숫자가 추락할 것같아서 별은 최종 4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