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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함께 글공부하는 벗들과 함께 한강 작가 독서모임을 했다.
초기작인 <여수의 사랑> 부터 시작하여 10권의 책을 함께 읽어나갔다. 한강 작가의 글은 쉽지 않았다. 고통과 불행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인물들. 그 고통 속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한 줄기 바람을 찾으며 파란 돌을 찾는 걸 보며 우리의 인생이란 고통 속에 피어나는 희망을 보곤 했다.
그래서일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이 함께 수록된 에세이 ?《빛과 실》의 결도 다르지 않다.
먼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중 우리는 작가의 질문 중 하나를 뺴놓을 수 없다.
<소년이 온다> 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혹한 현실을 쓰면서 한강 작가에게 떠나지 않았던 질문.
인간이 인간을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 이토록 쉽게 폭력적일 수 있고 그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어떻게 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구 건너편에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어떻게 이토록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지, 그토록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여놓고 큰 소리 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인간의 역사는 전쟁이 비극을 초래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기는 하는 걸까라는 탄식이 나오곤 한다. 정말 인간의 역사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 질문 속에 한강 작가는 말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남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한강 작가의 인물들은 그 고통 속에서도 파란 돌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죽고 싶지만 파란 돌을 잡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했던 <바람이 분다, 가라>의 삼촌처럼 고통 속에서도 끝내 파란 돌을 줍지 않았던가. 한강 작가에겐 파란 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김광석의 ?노래 「나의 노래」 였던 것 같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마시고 노래하리란 김광석의 노래 가사처럼 살아 있는 한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한강 작가의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래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서도, <채식주의자>에서도 <노랑무늬 영원>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희망을 선택한다. 이게 뭐 희망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른다면 희망이 되지 못할 게 없다는 작가의 글을 보며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빛과 실》의 표지와 본문 사진들이 한강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다.
글을 읽기 전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책을 읽고 난 이후 이 사진들을 다시 보게 된다.
거울로 식물을 비추고 있는 모습. 집을 이사하고 햇빛이 들지 않는 북향에 위치한 화단을 키우면서 조경사님은 힌트를 준다. 해가 잘 들지 않으니 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빛을 주면 도움이 될 거라고. 그래서 여러 거울을 사서 빛을 비춘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거울의 각도를 바꾼다. 북향에서도 끝까지 빛을 비추는 일. 그것도 역시 하나의 희망이 아닐까. 햇볕이 잘 닿지 않는 북향에서도 끝까지 거울의 각도를 시시각각으로 바꾸며 빛을 비추는 건 한강 작가의 인물들과 닮아 있다. 빛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작가 역시 빛의 리듬으로 바뀌어간다. 식물들도 끝내 꽃을 피운다.
한강 작가는 질문한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란 무엇일까. 나는 한강 작가가 화단에 빛을 연결해주는 거울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햇볕이 잘 안 드는 북향 화단에 빛을 반사해주듯,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인간의 인생길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인생길에서 서로에게 빛을 반사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북향의 화단의 식물들은 스스로 햇볕을 받지 못한다. 작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거울이란 도구가 필요하다. 그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우리 스스로 빛을 비추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빛을 반사해주는 거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냘프고 연약한 나무가 끝내 울창해지듯 우리도 비로소 희망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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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역사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고통과 참담한 상처는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통절하게, 그 이해를 지닐 수 있는 지극한 살핌의 능력을 일깨웠던 작품으로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기억한다. 그건 아마도 작가의 물음처럼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네의 삶에 와 닿은 고뇌어린 과제요, 각성의 문제일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답하는 듯하다. “어떤 한 순간에는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건너 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우리 둔감한 자들은 어렴풋 작가의 글을 통해 그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 이후, 작가 내면의 풍경에 보다 다가가고 싶었다. 어쩌면 이 작은 책이 이러한 내 욕심을 조금은 충족시켜주었다고 해야겠다.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기(旣) 출간된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 계기나 동기. 의도했던 글의 방향이나 그 여정에서 작가가 지녔던 감성과 생각들, 쓰기의 행위 자체로부터 파생되었던 사념들을 통해 작가와 작품의 숨결에 보다 더 다가가는 읽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북향 방」, 「(고통에 대한 명상)」, 「소리(들)」 등 몇 편의 시(詩)들과, 산문 「북향 정원」과 「정원 일기」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구해지는 부수적 결과”였음을 말하듯, 작가의 글쓰기가 생명 쪽으로 가게 되었음의 증거들로 이해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럼에도 작가의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은 ‘햇빛 아래 고요히 마주 앉아 있을 때조차 비명 소리와 신음, 울부짖음 속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하루 더 사는 자신(詩「소리(들)」,Ⅰ 단성부에서)’을 매 순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산문 「출간 후에」에서 말하는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생명을 말하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이후의 글쓰기는 작별 할 수 없는 고통의 목소리에서 연원하는 사랑에 대한 희망이라는 고된 작업일 것 같다.
그것은 詩 「소리(들)」 ‘Ⅱ 이성부’의 마지막 연(聯), “살아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의 산 자로서 가지는 희망에 대한 상상,「정원 일기」속 벌레에 괴롭힘을 당하면서 기어이 일곱 송이 불두화를 피어내는 그 경이로움에 이르는 손길인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잎사귀를 마르게 하는 응애를 없애기 위해 잎사귀 하나하나의 뒷면에 약을 뿌리고, 닦아내는 손길, 그것이 곧 생명의 이야기이고, 희망이 아닐까?
열다섯 평 대지의 열 평의 집, 작은 마당(중정)이 있고, 옥잠과 불두화, 호스타, 소나무가 심겨져 있는 북향집, 그래서 빛을 주기 위해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 여덟 개를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맞추어 각도를 조절해주며 함께 속도의 감각을 배우는 대지와 일체가 된 한 섬세한 존재를 보게 된다. 작가의 글쓰기와 닮았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 씀으로써 빛을 느끼는 작가의 행위가 곧 독자와 이 세계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세계의 리듬과 일체가 되어 수시로 반사해 사각의 빛을 쬐어주는 그것일 것이다.
【산문 「북향 정원」, 97쪽에서】
그것이 곧 생명의 얘기이지 않겠는가?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둥글레에서 싹이 트는 것을 보면서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아날 수 있음을 알게 되듯, 네 평 짜리 정원이지만 들어 올만한 곳이라고 새들이 생각했음에 으쓱해지는 작가의 기분처럼, 2021년 3월의 어느 날에서 2023년 5월에 이르는 정원일기는 외부, 하늘로 열려있는 작가의 내향적 집에 온전히 흐르는 평화의 기분을 공유케 된다. 처음에 들어선 순간 작가가 사랑에 빠진 집의 온화함, 그 태곳적 안전함과 고요는 시인이 말하는 ‘북향의 사람’, 바로 그만이 아는 변하지 않는 빛,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 바로 그것 일 것이다.
작가의 소품 집이라 표현할 이 빛 같은 책자는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 거의 근원적이라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작가는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거울이 되어 우리네에게 반사시켜준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도록, 생명의 힘을 넘겨준다. “절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임을 아는(詩, 「(고통에 대한 명상)」)” 시인은 그래서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기다린다.(詩, 「북향 방」)” 이제 독자인 나는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생명을 말하는 작품을 기다리게 되었다. 고통을 함께 앓을 수 있게 된 많은 독자들 또한 작가가 온 정성을 다해 시시각각 빛의 각도를 조절함으로써 쬐어주는 거울, 그 거울의 글을 기다릴 수 있을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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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캄한 불빛의 집 ]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거울 저편의 겨울 ]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름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 서시 ]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 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작해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저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서울의 겨울 ]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 첫새벽 ]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 어느 날, 나의 살은 ]
물과 같았다가 그 다음 날 눈 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토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 쓴
어느 날 눈떠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와가
[ 저녁 잎사귀 ]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솥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 소/라/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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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베스트 송 모음
소설가 한강은 몇 차례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어울리는 단아한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무엇인가 결핍된 인물들 때문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정확한 실체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창조한 인물, 예를 들면 <채식주의자>의 영혜나 <희랍어시간>의 주인공들인 말[語]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등이 현실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자신을 일부라도 투영(投影)한다는 말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간의 유사성을 찾고, 괴리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한때 내가 그녀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활동하면서 엮은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를 찾아본 이유가 아닐까? 책 소개에 따르면, 노래에 담긴 그리운 지난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본다고 하니 뭔가 좀더 감상적인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가 직접 만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 10곡의 노래가 궁금하기도 했다. 불행히도 2010년대 초반에야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종로에 있는 대형 서점 몇 곳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절판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우연히 들린 대형서점에서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보고, 집에 돌아와 주문을 했다. 시는 시인의 영혼을 담아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했었고, 이 시집이 그녀가 20여 년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엮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베스트 송 모음집인 셈이다.
소리도, 빛도 없는 어둠을 넘어
새벽에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pp. 12~13]
이 시는 혹시 <희랍어 시간>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일까?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은 <희랍어 시간>의 남자처럼 시력을 잃어가는 것을, 혀가 녹지 않아 입술을 닫은 것은 같은 책의 여자처럼 모국어를 말할 수 없는 것을 각각 그린 것이 아닐까 혹시 <희랍어 시간>과 아무 상관 없다면 왜 시인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녁의 소묘 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p. 85]
시인은 왜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것이 ‘부스러질 것들’이라고 했을까? 이 또한 소설에서처럼 ‘결핍’을 나타내기 위해서일까? ‘부스러진 것’이 아닌 ‘부스러질 것’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마치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암시하기 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저녁일까’ 였다. 서랍이 무엇인가를 넣어 두는 수납공간인 것은 맞는데, 아침도, 점심도 아닌 저녁을 넣어 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결국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저녁의 소묘’, ‘거울 저편의 겨울’. 이 시집에서 실린 연작 시(詩)들의 제목들이다. 뭔가 검은 아우라(Aura)가 살짝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제목들이다. 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시(詩)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詩)는 읽기 어렵다. 고등학교 국어시간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분석해보려는 마음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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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일 만에 받아 본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 글자라도 놓칠 세라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보았다. 시는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더 크게 와 닿는다. 바람 소리와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내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진다. 곱게 물든 가을 나무 아래서 읽는 한강의 시, <새벽에 들은 노래 2>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 새벽에 들은 노래 2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내 마음 누더기, 너덜너덜 넝마 되었을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 행과 행 사이 띄운 공간 속으로 바람이 넘나들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다람쥐가 포르르 움직일 것만 같다. 푸른 입술을 열어 상처받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나무. 언젠가 작가도 나무로부터 작은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었을까? ● 몇 개의 이야기 6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 이 시를 읽는 동안 가슴이 시려오고 눈물이 났다. 아직 <소년이 온다>의 여운과 통증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소년이 온다>의 동호, 정대, 정미, 은숙, 선주, 진수의 모습이, <작별하지 않는다>의 두 친구 경하와 인선이 떠올랐다.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는 가혹함과 슬픔. 작가가 쓴 시에서처럼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을지 모른다. ●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중략) . . * 새벽에 깨서 한 시간 넘게 악을 쓰며 울어 대는 두 살 배기 아이를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안아줘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결국 나는 아이와 함께 엉엉 울고 말았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보며 무기력한 엄마인 내가 너무 미워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지긋지긋한 일상이 싫어서 울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이 말로 나를 다독이고 위로했다. '곧 괜찮아 질 거야. 크면 나아 질 거야. 아이가 피곤해서 그런거야' 기적처럼 아이는 커갈수록 새벽에 깨서 우는 일이 점점 줄었다. 거짓말처럼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었다.'괜찮아' 이 시는 지난날 지치고 힘들었던 초보 엄마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 같다. 위로가 되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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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한강 작가가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고 2023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에 선정되는 등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했을 때도 사회, 역사적 무겁고 어두운 주제로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이유로 책을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24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전국에 독서 열풍을 불러왔고 작가의 작품에 관심이 없던 내 마음도 움직여서 자존심(?)을 버리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주문했다. 주문 폭주로 몇 주만에 어렵게 내 손에 닿을 수 있었던 책은 제주 4.3 사건을 담은 주제도 묵직했지만 현실과 꿈을 오가는 듯한 전개에 책을 완독 했으면서도 리뷰 쓸 엄두를 내지 못 했다. 봄 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4월말 노벨문학상을 수상 후 한강 작가가 처음 펴낸 신작인 「빛과 실」이 출간했을 때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주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책은 초판 2쇄였다. 신문 기사를 찾아보니 인터넷 서점에서 온라인으로 판매를 시작한 지 24시간 만에 총1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독자들이 한강 작가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겠지. 「빛과 실」에는 총12편의 글이 실려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비롯해 시 5편, 산문 등이 담겨 있는데 한강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는 다음 소설이 나오기까지 한줄기 빛과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가 8살에 썼다는 시다. 시 전문은 이렇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짝팔짝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8살이라는 나이에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두 행 짜리 연들로 구성된 시를 쓸 수 있는 8살 저자의 문학성에 떡잎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의 과거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작한 동시는 버린 지 오래라 기억이 잘 안나지만 수업 시간에 '아기'라는 제목의 동시로 반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던 기억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한강 작가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가 구두 상자에 넣어 두었던 8살 때 쓴 시를 우연히 찾아 사십여 년의 시간을 건너 저자는 물론 독자들에게 금실(빛을 내는 실) 연결해 주었으니 이 짧은 시는 작가만의 사적 기록이 아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한 우리나라에 소중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그건 그렇고 6학년 때 내가 쓴 동시는 보관하지 않기를 잘 했다). 책을 펼치면 처음 만나게 되는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은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는데 각 작품들이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작품을 쓸 때마다 작가가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며 겪었을 고통과 울음은 내게 오롯이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어느 작가나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책 한 권을 완성하기까지 한강 작가가 쏟은 노력은 상상 이상이었음 느끼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하기까지 7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한강 작가의 차기작을 빨리 만나고 싶다고 작가를 너무 보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빛과 실」에는 이밖에 5편의 시와 미발표 산문 3편을 만날 수 있는데, 작가가 4평 짜리 북향의 정원이 딸린 집을 산 후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담은 '정원 일기'를 통해 식물의 생리와 빛의 존재 의미를 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북향 정원에서 남쪽에서 비치는 빛을 식물에게 골고루 쬐게 하기 위해 여덟 개의 거울을 차례로 구입 해 15분마다 거울의 각도와 위치를 옮겨가는 모습에서 식물에 대한 애정과 함께 지구가 공전하는 속도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작가를 만나게 된다. 「빛과 실」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가가 처음 펴낸 신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강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만 다소 짧은 산문은 보다 많은 작가의 글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실망을 줄 수도 있으나 어릴 적 설레게 했던 종합선물세트처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시, 미발표 산문 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작지 않은 행복을 전해 줄 것이다.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한강 작가. 앞으로 작가의 묵직하고 깊이 있는 울림을 기다리는 이유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빛과 실 #한강 #(주)문학과지성사 #에크리 #과거 #현재 #산 자 #죽은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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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시집도 펴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고 구매했던 시집.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시집까지 펴낸 것일까. 한승원 작가가 아버지라서 모태 신앙처럼 문학을 배웠던 것일까. 시집은 한강 작가의 문장처럼 간결하고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붉은 것 없이 저무는 저녁
앞집 마당 나목에 매놓은 빨랫줄에서 감색 학생코트가 이따금 펄럭인다
(이런 저녁 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65~66페이지, 저녁의 소묘 3, 전문)
제목이 정말 좋아, 몇 번을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시인의 시선은 소설가의 시선 과는 또다른 것이려니 생각은 해보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시어들에서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중략)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126페이지, 회상, 중에서)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시집을 펼쳐 시를 읽을 수 있는 감성을 갖는다는 것. 그걸 부르는 시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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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나를 많이 괴롭게 하는 누군가의 말과 태도가 어느날 나에게 행하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가. 그는 왜 자신의 말과 행동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는 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가. 그는 왜 자신의 폭력으로 타인의 마음이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 그는 왜 자신의 폭력으로 아파하는 이에게 쿨하지 못하고 뒤끝이 있다고 하는가.
나는 왜 그것을 폭력으로 느꼈는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런 기준은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폭력을 행하는 자와 폭력에 맞는 자. 폭력에 동조하거나 방조하는 자와 폭력에 맞서는 자. 나는 폭력을 행하고, 동조하고, 방조하는 자로부터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며 흘러가던 생각이 가닿은 곳은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던 때의 기억이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과, 그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해 거부하는 사람의 결말.
작가님의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거나 적어도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발견한 작가님의 신간 <빛과 실>.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아프고 감격스러웠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글 쓰는 사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쓰는 사람이자 식물이라는 생명을 가꾸는 사람의 사색이 담긴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혼란스러움과 함께 노여웠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작가님이 '삶과 폭력'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질문하고, 치열하고 끈질기게 고민하고 찾은 답에서 다시 나아가 다음 질문을 견디며 그 안에 살아오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감사했다. 그렇게 끝까지 파고들어 폭력을 마주하고 견디어 끝내 글로 써준 작가님의 글과 이야기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가 마주하는 폭력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 속에 끝까지 함께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 안에 담긴, 그 끈질김 속에 담긴 사랑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그 빛나는 실을 통해 너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견디려 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식물이 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종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서로 다르기에 크고 작은 폭력이 필연적인 인간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지 않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삶과 세계를 끌어안고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없이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면 그래도 조금은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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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이사 준비를 하면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쓴 오래된 일기장, 그림, 상장 등이 있었다. 들춰봤더니 아이만이 가진 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 웃고, 멀리 있는 아이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소중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반면 나의 어렸을 적 추억거리는 없다. 가난한 살림, 수많은 좁은 집을 거치면서 우리의 공책 같은 건 남겨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뜰하게 챙기는 부모여야 가능한 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책, 문지 에크리 시리즈로 나온 한강 작가의 글을 보고 있으니 감동이 밀려온다.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들 사이에 ‘시집’이라고 적힌 책자 한 권을 발견하며 글이 시작된다. 썼던 시를 엮은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벌써 작가의 싹이 보였나 보다.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고 떠오르는 마음을 글로 쓴 거다. 유명한 시인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한 시어다. 아래의 문장을 보라.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10페이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을 비롯해 작품을 펴낸 시점의 마음을 담은 강연, 산문, 그리고 소설의 글감이 되는 메모장, 작가만의 북향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이로써 다음 작품을 기다렸던 마음을 잠시 달랠 수 있다. 장편을 쓰면 짧게는 1~2년, 길게는 7~8년 동안 쓰는데, 그에 따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독자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출간된 책 한 권을 휘리릭 읽은 후 다음 작품을 그저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고만 여겼다는 게 독자로서 조금은 미안하다.
집과 텃밭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다. 이사한 후 전보다 좁아진 발코니에 제라늄을 키운다. 제라늄들도 새집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는지 잎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봄이 되자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조금 주었더니 어느 정도 적응 후 잎과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혹시나 햇볕이 부족할까 봐 집에 있을 때마다 혹은 출근 전에 화분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주었다. 북쪽 정원을 가꾸는 작가의 산문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햇볕이 들지 않은 쪽에 정원을 가꾼다는 것 자체가 독특했다. 작가가 부른 조경사는 거울을 이용해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거울 몇 개를 들여와 햇볕을 식물에 쏘아두고 햇빛이 움직일 때마다 옮겨주느라 하루를 보낸다는 작가였다. 그 애틋함이 공감되었다. 미스김라일락이 꽃필 때, 단풍나무의 키가 자랄 때, 불두화에 진딧물이 올라 잡아주느라 쪼그리고 앉았을 작가를 그려보았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일기로 담아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통찰을 바라보게 했다. 보살피고 지켜보아야 잘 자라는 인간의 삶처럼 말이다.
지난 주말에 텃밭에 갔더니 한 달 전에 잘라준 장미는 금방 꽃 피울 듯 풍성하게 자랐다. 7월에 피는 목수국 아래 잔가지를 잘라주고 꽃망울이 맺힌 불두화 가지도 정리해주었다. 꽃양귀비는 일주일쯤 뒤에는 꽃이 필 것 같다. 늦은 오후엔 오이, 고추, 참외,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자연에서 나는 식물과 꽃, 채소가 점점 더 귀하게 느껴진다. 키우는 즐거움이 있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9페이지)
작가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다. 글쓰기로 인생을 껴안아 보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충분히 살아냈다고 표현한 작가의 글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하루하루 정원을 지켜보며 자라는 나무를 보는 즐거움, 사회에 일어난 폭력을 글로 풀어내야 하는 고통과 부담감, 그럼에도 작품을 완성하고 출간하는 순간을 기다려온 것들의 감정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 폭력에 대처하는 명확하고 명징한 시선이 담긴 글이었다.
#빛과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책 #책추천 #문학 #에세이 #에세이추천 #한국에세이 #한국문학 #문지에크리 #문지에크리시리즈 #노벨문학상수상작가 #언어의힘 #작가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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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자마자, (네 권을 주문했다. 나 혼자만 읽어서는 안 되므로)한강의 ‘빛과 실’을 받자 마자 단숨에 읽었다. 금요일 오전은 봄빛이 완연하게 익어가고 있어 책 읽기에 더욱 좋았으므로,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빛과 실’을 포함해, 미발표 시를 담은 ‘작은 찻잔’ 등 열두 꼭지의 글을 차례차례 읽으며 사색을 겸하였다. 책을 덮은 뒤엔 여덟 살에 쓴 시 한 편만 남았다, 아주 매우 선명하게.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한강은 여덟 살 때부터 쓰기의 천재였다. 시든, 단편소설이든, 장편소설이든 그 소질을 전생으로부터 타고난 이였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 빛을 내는 실.’을 가진 존재였다. 너무 부럽다. 한강은 하나의 글을,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고 말하였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 – 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다시 바라보니 한강은 자주 아플 것 같아 안쓰럽다는 마음도 든다. 더구나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라니, 한강은.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의 사진첩’을 다시 떠올리며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깊숙이 천착하게 된 것이다.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도 덩달아 돌아온 것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강은 1980년 5월의 젊은 야학 교사를, 그의 일기를 만난다.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 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의 마지막 밤을 만난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은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상하게도 묘지에 갈 때마다 날이 맑았으며,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는 경험도 고백한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그러므로 생명은 살고자 하며 생명은 따뜻하다는 말도. 한강은 다시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를,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를,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그 질문이 아직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라고도 들려준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혼잣말, 한강은 분명 금실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이 구절이 증거다.)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다고,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서 감사 인사를 나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 들어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다고,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도 밝힌다. ‘출간 후에’라는 꼭지를 읽으면서 한강이 얼마나 자신에게 얼마나 독할 수 있는지도 슬쩍 엿볼 수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페이지를 쓴 날로부터 완성하기까지 거의 칠 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사이 퍽 많은 양의 메모를 – 얇은 노트로 열 권이 넘는 - 스스로 묻고 답하고 길을 찾으려 더듬어간 세월이라니.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쓴다 …… 쓴다 …… 울면서 쓴다니.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하고,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니. 그 메모에는 ‘그러나 살아 있으므로 아름다운 것들 지독하게 무정하게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내 노트에 메모해 둘 수밖에 없는 무정하게 아름다운 구절도 있다. 미발표 시인 ‘코트와 나’를 읽다 보면 ‘코트는 나를 안고 / 나는 코트를 업는지 (중략) 나는 오십 년 늘고 / 코트는 이십 년 늙어 / 어느 날 헤어질 서로를 안고 업고 / 겨울볕 속으로 걸어가네’라는 따뜻한 구절도 만난다. 한강은 마흔여덟 살에, 내 명의로 온전히 갖게 된 최초의 집을 장만한다. 열다섯 평 대지에 딸린 열 평 집을. 다만 북향이라 햇볕이 잘 들지 않으므로 정원에 봄이 되면 뭘 심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한강이 심고 싶어한 살구나무, 모과나무, 모란, 능소화와 장미는 모두 햇빛을 필요로 하므로, 거울을 이용하는 방안을 조경사로부터 배우게 된다.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그렇다. 햇빛, 그리고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반사시켜 주는 거울을 여덟 개나 준비하는 걸 볼 때, 한강은 배려하는 마음도 넉넉한 게 틀림없다.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허락된다면 다음 소설은 이 마음에서 출발하고 싶다니, 한강의 빛과 실은 생명임도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