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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는 싯점이 오겠지.
이 소설은 폴 오스터가 자신의 끝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은퇴를 앞둔 노 교수 사이 바움가트너.
사고로 아내를 잃고 무기력하게, 해야 하는 일상만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던 그.
어느 날 한꺼번에 자질구레하지만 생각지 않던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고 그 사고 중의 하나인 타버린 후라이팬을 보다가 문득 아내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게 되는 과거의 일들.
그 과거로 점철된 자신의 삶, 관계들을 회상하는 바움가트너의 이야기이다.
회상 속에 시인이었던 아내 애나의 작품들, 그리고 자신이 썼던 작은 소품들이 삽입이 되면서 이야기 속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아내의 죽음 이후의 삶에서 그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보려 노력했고, 아내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대학원생을 통해 아내에 대한 또 다른 설레임을 느끼기도 한다.
잊고 있던 일들, 아니면 새삼 기억하지 않던 일들이 어떤 사물이나 어떤 계기로 인해 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걸 보면 그때가 생각나고, 이 상황이 되 보니 그 어떤 것들이 떠 오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그것들을 다시 복기해 보면 그때와는 또 다른 감정과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듯 내 삶은 많은 사람들, 그리고 많은 순간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의 드라마와 같은 것이다. 그런 삶을 어느 시점에서는 다시 돌아보고 그것을 다른 각도로 환기 시켜보는 시간을 갖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 책 속에는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운전대의 신비>라는 책이 계속 등장한다. 처음에는 이 책이 그와는 동떨어진 주제의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삶이라는 것이 각자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삶은 외로움과 잠재적 죽음이라는 고속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는 통제 불가능한 차' 라는 생각에서 쓰여지고 있던 책이었다.
책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비어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이 빼곡히 채워진 그의 글들은 상실과 회상 그리움과 후회 그러나 그것을 통해 다시 남은 생을 생각해보는 깊고 넓은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다.
바움가트너를 통해 폴 오스터를 마지막으로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 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 p. 77)'
'옳은 선택이냐 그른 선택이냐는 없고, 둘 다 결국에는 그른 것이 되어 버릴 옳은 선택만 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움가트너의 아버지의 경우 책임감이 자신을 위한 욕망을 이겼으며, 그 덕분에 그의 선택은 명예로운 것, 심지어 고귀한 것이 되었다. ( p155)"
'인간의 역사에서 벌써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 서로 의존하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심지어 가장 고립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일 뿐이었다. 로빈슨 크루소도 마찬가지인데, 만일 프라이데이가 나타나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p 171)'
'인간의 삶이란 잠재적 죽음이라는 고속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는 통제 불가능한 차라는 독한 비전으로부터. 그러다 자동차 automobile라는 단어에 관해 생각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생각이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결국 <운전대의 신비>가 되었다.
(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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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오스터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 이토록 쓸쓸한 소설이라니. 어젯밤에 이 소설 읽고 느껴졌던 묵직한 슬픔이 아침에 눈을 떴는데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바움가트너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폴 오스터의 마지막 고백처럼 느껴져서 더 마음이 아리는 것 같다. 미국 문학의 거장조차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노년의 상실감, 외로움인 것인가. 나이가 든다는 건 상실에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쇠퇴하는 몸의 기능에 순응하고(젊음의 상실), 주변인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고(장수의 복이 따라준다면),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겠지. 행복한 노년의 관건은 그게 무엇이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 ‘내려놓는 것’이라는 막연한 결론을 내렸었는데, 어쩌면 나는 틀렸다. 어떤 상실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어떤 상실의 경험도 결코 ‘습관’이 될 수는 없다. 노년은 상실로 인한 부재 자체가 나의 일부가 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지지 않을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하면 좀 나을까. 생각해 보면 결핍이나 부재, 불완전 속에서 살아가는 건 노년이든 청년이든 간에 모든 인간의 숙명이고,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젊어서는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면 노년기는 이 ‘인간의 숙명’을 맨몸으로 조우하는 시기인 것이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면 이 소설을 썼다. 나는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가 삶의 진실과 매우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다시 소설을 복기한다. 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을 혼자 던지고, ‘연결’이라고 답해본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상실과 부재 속에서도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어쩌면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다. 떠난 사람과 대화하고, 습관적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인연에서 설렘을 느끼는, 부재 속에서도 끝내 연결을 갈망하는 바움가트너를 떠올려보다가, 아직은 젊은 나의 나날과 오늘 내가 감사해야 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들을 떠올려 본다. P77 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P123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삶은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P 171 우리 모두 서로 의존하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심지어 가장 고립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일 뿐이었다. P242 이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폴 오스터를 생각하면 대학 입학 첫해 학교의 중앙도서관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에 책 한 권 읽지 않고 얼토당토않게 국문과에 진학해서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문학이란 걸 읽기 시작했던 때였다. 뉴욕 삼부작,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공중 곡예사.. 지금은 내용도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지만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 내 질렀던 감탄 같은 것들은 바움가트너의 말마따나 ‘기억 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우연히 마주친 덧없는 순간들’ 중의 하나로 내 장기 기억 속에 보관 중이다. 그 시절을 떠올려보다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폴 오스터를 생각하다가 쌉T 주제에 울컥해버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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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도 취향이란 게 있지 않은가. 난 외국소설보다 국내소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고 다행히도 취향에 맞으면서 좋은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었다. 취향은 아니었지만 워낙 많이 언급되어 추천받았던 밀란 쿤데라, 레이먼드 카버까지는 찾아 읽었지만 폴 오스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근데 또 하필이면 난 한정판, 유고작,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 이런 수식어에 한없이 약해서 일단 무턱대고 지른 것이다. 폴 오스터의 입문작으로는 너무 허들이 높았던 것일까, 울프의 의식의 흐름기법의 글들도 더듬더듬 따라가며 읽었는데 이 작품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뭔가 뿌연 안개 속에 갇힌 느낌으로 잘 읽히지 않았다. 숨은 함정이 있었나,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먼저 떠난 아내의 빈자리에 대해 환지통에 대한 서사를 예상하며, 미리 짐작하여 읽어서였을까. 어디서 이런 오류가 생긴건지 초반부터 화자는 누구인지, 작가가 말하는 것인지, 바움가트너라는 사람이 쓴 글인 건지, 시점이 바뀌고 인칭이 바뀌어 서술되는게 좀 헷갈렸다. 그리고 집중력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습관이 상실된 지금의 상태를 한심하게 여기면서 열었다 덮었다를 반복했던 것 같다. 모두들 이 작품은 아주 훌륭하고 좋다고 하는데 왜 나는 잘 읽어내지도 못하는지..폴 오스터의 다른 유명작을 찾아 읽어본 뒤 다시 도전해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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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전 이 책의 소식을 듣고 바로 구매. 공항에서 환승대기하는 동안 읽었다. 이별하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 중간 중간 쓸데 없는 이야기라 느껴지는 내용들도 다 읽고 나면 그 감정 마저 무소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다가온다. 또 읽고 싶다. |
| 뒤늦게 <4321>을 읽고 폴 오스터에 빠져서 마지막 장편소설이라는 <바움가트너>도 구매했어요. 더 빨리 읽지 못한게 후회가 될 정도로 문체도 너무 좋고 내용도 너무 좋아서 푹 빠져서 읽게 돼요. 작가의 나머지 작품들도 천천히 아껴 읽어봐야 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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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은지 10년이 된 프린스턴 대학의 노교수 바움가트너는 서재에서 키르케고르에 관한 논문을 쓰다, 인용할 책이 거실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책을 찾기 위해 내려간 거실에서 뜻밖에도 아침에 달걀을 삶으려다 깜빡 잊고 올려둔 알루미늄 냄비는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바움가트너는 급히 맨손으로 집어 들다가 화상을 입게 되고 때마침 가사 도우미는 남편의 사고로 오지 못한 상황에 이른다. 엉망으로 이름을 난도질한 초보 검침원을 도와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무릎까지 다친 바움가트너의 일상의 소란스러운 모습으로 시작한 첫 장을 지나면 40여 년 전, 찢어지게 가난하던 대학원생 시절 바움가트너가 처음으로 10센트 짜리 냄비를 사다가 만났던 아내 애나를 만났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폴 오스터가 투병 중 끝을 예감하며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작품 바움가트너는 마치 한 편의 소극처럼 펼쳐지는 일상의 소란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른 작가 폴 오스터의 마지막 흔적을 발견 할 수 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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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영원히 출간될줄 알았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슬프게 만든다. 왜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나 힘들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건 당연한데. 내가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들과 나이를 먹는건 똑같은데. 24년 그의 마지막과 함께 빨리 번역되어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의 유작. 한장한장 넘기기 아까워. |
| 폴 오스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서 아쉬움과 기대감으로 구매했습니다. 왜 찬란하고 행복한 시기는 찰나로 지나가면서 그 이후에 이별과 상실의 기간은 길게만 느껴지는 걸까요? 그러나 그런 시기를 견디게 하는 것은 과거에 느꼈던 행복한 경험과 현재 느끼는 소소한 행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다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고 살아가는데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도 많이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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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저, 바움가트너 리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1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바움가트너를 통해 상실과 애도, 기억과 현재, 시간의 흐름과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 깊이 이해가 되는 면이 많아 그 여운이 강하게 남았어요. |
| 아직 또래 친구들 중 배우자를 잃은 친구는 거의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친구들 중 배우자와 이별을 하게 되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저도 그런 날이 오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일과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입니다. 그 일을 겪기 전에 이 작품에서 간접 체험을 먼저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