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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간단히 풀어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착하니 <조금만> 도덕적으로 노력해도 선해질 수 있다'와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 <웬만큼> 도덕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선해질 수 없다'로 풀이할 수 있다.
한편 <법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는 대개 순자의 <성악설>을 예로 들곤 한다. 왜냐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도덕과 윤리만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굳이 <법>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개 갈등과 대립의 끝은 다툼과 싸움으로 이어지고, 그 때문에 이 문제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풀어내기 위해 <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서론은 이쯤해두고, 진짜로 하고픈 것은 <구제불능인 재소자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해보고 싶다.
살인을 저질렀다. 강간을 저지른 놈도 있다. 법정에 선 것이 처음이 아니다. 형량이 짧지도 않다. 최고 25년 이상을 받을 수도 있다. 선처를 한다해도 10년 아래로는 받기 힘들다.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할 형량이다. 단지 이들에게 우호적인 면을 보일 이유라곤 아직 10대라는 것뿐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평가하면 순진무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이라도 수틀리고 어수선해지면 난폭해지고 사고치기 일쑤다.
이런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까? 아니 도움이 된다고 쳐도 법정은 이들에게 용서를 하지 않을테고(초범이라면 몰라도 재범은커녕, 삼범, 사범이 대부분이니까) 기적적으로 감형이 되고, 가석방까지 가능하다해도 10년에서 15년 이내에는 사회로 복귀하기 힘들다. 나이로 치면 최하 30대에나 출옥할 것이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글쓰기>조차 사치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들은 <글쓰기>를 배운다. 써먹기 위해서? 아니다. <자신과 나누는 대화>를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며 자기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아울어 잘못도 반성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글쓰기> 수업이 이런 도움이 된다면, 가르치는 선생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보수도 없다. 아이들이 진정 반성하고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다하여도 무죄선고는커녕 감형조차 되지 않을 뿐더러 자칫 아이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줄 수도 있는 수업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엇나갈 우려도 있음을 주위 사람들마저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글쓰기> 수업을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
사실, 이 모든 사실은 수업을 받는 아이들도 알고 수업을 하는 선생도 알고, 주위에서 수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도관들이나 수녀님도 안다. 그런데도 수업은 꾸준히 진행된다. 마치 시지프스가 올리고 또 올리는 바위덩이처럼 아이들도 뒤늦은 자아발견을 한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절망같지만 아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기에 참으로 놀랍고 대견했다.
살인범이자 강간범인 소년소녀들인데도 책 속의 아이들은 참 순진무구하다. 글을 보면 안다. 아이들의 글은 마음의 창인양 솔직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목마름 사슴이 물을 마시듯이, 그동안 쌓였던 것이 많았는지 하고픈 말들을, 쑥쓰러워 차마 말로 하지 못한 말들을 글에 쏟아 낸다. 이 글에서 아이들이 처한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엿볼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다면 이 아이들을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진짜 원인은 바로 <불우한 환경> 때문이었으리라. 안식처가 되지 못한 부모님. 이혼도 한 몫.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 혹은 엄마. 학교에서는 애저녁에 소외 당했고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로 지내다가 이들에게 다가온 것은 <갱단>뿐이었으리라. 그리고 이어진 범죄, 범죄, 범죄.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될 것이다. 나이가 몇 살인데. 알면서도, 알면서도 거부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조직의 그늘>이란 <어둠>이 이들의 발목에 족쇄처럼 매어진 <슬픈 존재>가 되어 버렸던 걸게다. 이들에게 <성악설?>, 도덕적 훈육만이 선함으로 이끌 수 있을 거라고? 택도 없는 소리. 차라리 <성선설>이 옳다. 애초에 담은 그릇의 깨끗함을 믿고 더러운 때를 벗겨주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이다.
감형. 선처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결과에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버거운 짐일지라도 책임을 지고 이겨내야할 것이다. 힘을 실어준다는 것도 허울 좋은 말뿐일 것이다. 그저 너희들이 쓴 글에 감동을 했노라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난 <성선설>을 믿으며 너희들의 불우했던 환경과 과거에 안타까움을, 다시 사회에 복귀했을 때 자신의 그릇이 깨끗했음을 잊지 않길 바란다. 세상 어느 누구든 그러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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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잘즈만은 소설을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