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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도 대의원대회를 앞두고는 여성지부장이 연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기숙사에 못질을 한 다음 비밀리에 대의원대회를 강행하여 회사 측 사람을 지부장으로 뽑아버렸다.
지부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이 계속되자 회사에서는 수도도 잠그고 전기도 끊어 버렸다. 심지어 화장실 문까지 잠가 버렸다. 그래도 농성을 풀지 않자 회사에서는 공권력을 동원했다. 출동한 경찰들이 농성 중인 400여 명을 포위한 채 5분 안에 해산하지 않으면 모조리 연행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 여성노동자가 “우리 모두 옷을 벗읍시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거기에 동조했다. “옷을 벗고 저항합시다. 우리들의 결의를 표합시다.”
이렇게 해서 여성노동자들이 하나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은 반나체 여성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해갔다. 그때부터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 조화순, 「나는 그때처럼 폭력을 저주해본 적이 없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날
선거 한번 민주적으로 해보자 기대에 부풀었던 날 새벽
낯익은 동료들
술냄새를 풍기던 보전반 박씨의
촛점 없이 하얗게 변색된 얼굴을 뒤따라
대의원 선거장은 똥물로 아수라장
“똥 먹고 싶지 않으면 싹 나가!”
부라리며 고함지르며 덤비던 광란의 눈동자
“아저씨 진정해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뜨거운 눈물 애절한 호소
“비켜! 니년들이 뭐 잘났다고……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고 까부는 년들에게는 똥물이 약이야.”
폭력 남발
악성범죄의 현장
- 정명자,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위 두 인용문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사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민주노조 설립 과정에서 일어난 큰 사건 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읽은 것은 뒤 인용문이 먼저였는데, 이른바 ‘똥물 사건’이라 부르는 그 현장에서 깡패들과 직접 싸웠던 노동자의 시입니다. 1985년의 엄혹한 시기에 출판된 시집을 통해 동일방직의 사건을 알게 된 뒤 큰 충격을 받고 자료를 더 찾아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 산업선교회였고, 산업선교회가 참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일방직이 한국 여성노동자운동사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바탕에는 산업선교회의 헌신적인 밑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20여 년이 지난 오늘, 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님 글로 동일방직을 다시 만났습니다.
정명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는 산업선교회가 하는 일 같은 일을 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화순 목사님 글을 읽다 보니 당시 육체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노동자에게 배운다는 각오 아래 들어간 동일방직에서 감당해야 할 작업량은 기력과 인내심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오면 몸은 물에 젖은 솜 같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고 다리가 팅팅 부어오르는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비로소 노동자를 가르치려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배우러 들어간 것이라는 선배 목사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가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 개개인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만으로는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으며,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진정한 구원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조화순 목사님의 이후 행적은 감동입니다.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회사와 싸우는 모습,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산업선교회의 여성 차별에 대해서도 결연히 맞서는 모습, 서슬 퍼런 안기부에 붙잡혀 가서도 당당한 모습 들을 읽으며 시대의 정신을 만나는 감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동 깊은 것은 떠나는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18년간 몸담았던 산업선교회나 반석에 올려놓은 달월교회를 홀연히 떠나 태기산 자락으로 스며드는 모습 말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도 사랑을 나누며 오늘도 새로운 일을 벌리고 있는 그이에게 겸손과‘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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