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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뭔가 있는 척 포장하여, 예술영화인척 하는 것이 난 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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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기 전에 보다만 영화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감상했다. 무성한 소문에 비해 큰 충격(?)은 없었다. 도입의 낯선 남녀가 만나자마자 펼치는 다소 폭력적인 섹스 장면은 조금 파격적이었다. 지난해 봤던 <정사 (2001)>와 겹쳐졌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남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색감이 인상적이다. 낡고 누렇게 바랜 벽 같은 색조가 영화 전반을 흘렀다.
스스로 지을 수 없는 이름은 타인에 의해 불리고, 타인에 의해 정체성을 확인받게 된다. 주체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사코 이름 불리길 거부하는 그 남자 폴은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녀 잔을 사랑하게 될까 봐 겁났다. 익명의 만남은 무거운 인간관계와 만남을 싫어하는 현대인의 특징이다. 가끔 인터넷 공간에서 <닉네임>이란 또 다른 익명이 오프에서 연장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관계에 대해 얼마나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지 짐작된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던 잔도 어느새 서로에 대한 정보 없이 그저 몸만 섞는 관계에 익숙하고 편해졌다. 폴을 만나는 공간은 비교적 안온하게 살아온 그녀의 삶에 일탈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다. 약혼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폴과의 만남도 저버릴 수 없는 잔은 폴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가 그리워 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폴이 나타나서 과거와 이름을 밝히며 당신과 살고 싶다면서 탱고홀로 데려가자, 그녀는 변한다. 그에 의해 약혼자와 약속된 미래가 깨어지는 게 겁났을 것이다. 남녀가 육체적 쾌락만을 위한 만남을 갖다가 부지불식간에 감정이 개입되고 감정이 균열을 일으키다가 관계의 영속성이나 소유를 논할 때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더구나 만남의 성격에 대해 서로의 이해가 어긋날 때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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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또 충격.
마론 브란도가 고독한 삶을 말로 표현하는 방식에서 충격받고,
몸으로 마리아 슈나이더와 표현하는 방식에서 충격을 받았다.
남편과 아내, 장모와 사위, 주인과 세든 사람...
모든 관계가 엉망으로 뒤엉켜 어디가 정상인지 모를 영화.
18세 이상이 보도록 되어 있으나,
마론 브란도가 마리아 슈나이더와 잠자리를 하는 장면은
착한 사람은 안 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충격을 받으면,
보통의 상식과 다른 남녀간의 행동을 보게 되면,
결혼이나 이성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틀어지고 외로운 외로운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오로지 서로 누군지 모른채 사내와 계집이 어울러져 몸으로 푸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입이 벌어진다.
이름도 사정도 모른채 몸으로만 겪으며 지내다,
오히려 이름과 사정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끝으로 치닫게 된다.
사랑과 삶의 아이러니. [인상깊은구절] 아내의 주검 옆에서 삶의 비애를 뇌까리는 마론 브란도의 표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