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모를 읽었던 기억에 그의 책이라서 또 그림의 삽화가 정말로 인상적이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모아 구입했다. 하지만 나의 느낌은 독자 리뷰를 좀더 꼼꼼히 읽어 보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감동적이었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삽화가 정말 근사하다는 그런 평가는 대부분 맞는 말이지만.. 나는 모모처럼 좀더 두꺼운 이야기를 생각했었는데 정말 짧은 동화였다. 긴 동화를 생각했는데 48페이지의 그것도 절반이 그림인.. 짧은 이야기는 좀더 많은 이야기를 바라던 나에게는 그림책 이외에는 아무 감상도 없었다. 물론 어려운말로 여러가지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으나 읽고 나서 후회하기 싫다면 종교적 색채가 짙은 책을 싫어하거나.. 괜스리 그림만 많은 책을 싫어하거나.... 좀더 많은 내용을 이 책에서 바란다면은(진리나 깨달음이 아닌 단지 글자의 수) 친구에게 또는 내게서 빌려보기를 청하는 바이다(아이들에게는 그림보기용으로만 사용해주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
| 도착한 4권의 책 중 미니스케치북 크기의 <그림책> 같은 책이 눈에 띄었다. 그저 덤덤히 책장을 넘기는 기분은 아이들 그림책을 훔쳐보는 느낌이랄까? 굳이 아이들의 그것과 다른 점을 찾는다면 글씨가 좀 더 작고, 그림이 사실적이며 세밀하여 마치 미술도감을 대하는 것같다는 정도뿐... 말 그대로 그림책이다. 선전 문구 그대로 동화책이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결혼 전날 밤 사랑하는 여인이 도망쳐버린 젊은이는 모든 일상을 탈피한 채 책에 파묻혀 그 속에서 진리를 갈구하게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책을 통하여 이야기 한다, "나의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처럼 부질 없는 것"이라고. 더이상 진리가 책 속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된 그는 학문으 덧없음을 깨닫고 숲으로 들어가 은자가 된다. 은둔과 칩거의 오랜 세월이 지나고 젊은이는 하늘로부터의 목소리를 전달 받는다. "내가 여기서 너를 만나리라." 계시가 실현될 날을 묵묵히 기다리며 묵상하고 수행하는 동안에 세상으로부터 따돌림 당한 한 떠돌이 도둑이 숲으로 찾아 들어와 그의 제자가 된다. 보름달 뜨는 날 성자가 출현하자 드디어 하늘의 계시가 실현되었다고 믿은 은자는 보름달 행사에 제자가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성자의 모습이 보이지않을 것이며 만남에 방해만 될것이라는 이유로...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린 도둑은 달빛 숲 속에 잘 숨어있다가 보름달과 함게 흰 마차를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자를 활로 쏘아 목을 꿰는데, 도둑의 무지를 질타하는 은자를 앞세우고 확인한 결과 들짐승(오소리)의 변신이라... 순간, 은자는 지금껏 닦아 온 <진리>가 헛되고 무위한 것임을 깨닿게 된다. 삶, 그 속에 드리운 허무와 진리의 허구를 생각하게 만드는 짧은 동화다. 긴 세월 동굴에 은거하며 스스로를 닦아 진리에 가까워진 은자와 성자가 되었다며 자위했을 자신 앞에 등장하는 도둑(세상의 온갖 나쁜 것과 고뇌를 짊어진 사나이). 그러나 성자의 목숨을 구하고, 그 길고 긴 달관의 깨달음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게 하는 쓸데 없는 인간(도둑)의 동물적 본능(직감)과 단순한 행동(화살 하나)... 동화는 우리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늘 옳지은 것만은 아니다"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 삶과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색해 볼 것을 강요한다. 동화의 잘 어우러진 글과 그림의 조화는 우리로 하여금 흔히 생각하기 쉬운 인도인들의 신비주의, '깨달음'을 갈구하며 스스로의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도닦는 사람들을 연상시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짧고 간결한 이야기를 통하여 사색의 공간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환상적인 그림들을 채워두어 글귀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특이한 해석이 보는 이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리라. <인도의 신비주의와 수피즘에 기독교의 교리가 적절히 복합된 참선주의>가 이야기에 나오는 은자의 구도법(求道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지나치게 짧은 이야기와 얇은 두께는 책의 가격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비록 얇지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미술도감 한 권과 그에 곁들인 사색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덤이라 생각하며 즐길 수 있는 독자에게라면 부담 없이 추천할 수 있을 것같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이런 유형의 책을 찾아보기 힘듯 탓도 있겠지만 잘 꽂아두었다가 틈날 때마다 꺼내 보며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책도 그리 많지는 않은 때문이다. 다 끝난, 그것도 지극히 짦은 이야기가 사색을 강요하는 것은 보기 쉬운 예는 아니다. 본 내용 보다도 옮긴이의 설명이 더 길게 느껴질 정도로 간결한 어른들의 동화! 과연 작가는 그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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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 전 살았던 은자는 젊었을 때 아름다운 여인을 죽도록 사랑했다. 두 사람은 영원히 서로 사랑하고 충실을 지키리라 맹세하지만 여인은 그를 배신한다. 젊은이는 지상의 모든 것은 허울뿐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성서를 연구하는 데만 전념했다. 여러 해 동안 공부에 매진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임종 무렵에 쓴 글을 읽게 되었다. 성자는 자신의 모든 책이 진실로 속이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젊은이는 자신의 공부방과 책을 버리고 떠났다. 오랫동안 정처 없이 떠돌다 어느 외진 산골짜기에 이르러 동굴에서 잠을 청하다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그곳에 머무르며 온통 영원을 향하게 된다.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세고 몸을 감쌀 정도가 된다.
도둑은 운명의 뜻에 따라 외딴 산골짜기에 들어온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내쫓긴 거친 사내다. 빨간 머리에 황소처럼 거세고 당나귀처럼 고집이 세었다.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지만 경외하는 것도 없었다. 산골짜기에서 어린 노루를 발견하고 뒤를 밟는다. 워낙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그인지라 먹잇감과 점점 가까워진다. 그때 갑자기 노루가 멈추어 서더니 그를 마주 바라본다. 그가 화살을 활줄에 걸고 다가가도 겁을 먹지 않고 지친 기색도 안 보이는 노루. 그는 화살을 날리지 못한다. 칼을 빼 들고 노루에게 다가가도 노루가 도망치지 않는다. 바로 앞에 서서 손을 뻗치는 데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동굴 입구가 보이고 살가죽과 뼈만 남은 채 하얀 머리털로 뒤덮인 노인을 만난다.
도둑은 오랫동안 그를 들쑤시던 가시가 없어진 느낌을 받는다. 걷잡을 수 없지만 평온하기 그지없는 피로도 느낀다. 몇 시간 뒤 은자가 숭고한 세계에서 불쌍하고 덧없는 이승의 육신으로 돌아와 빨간 머리 사내가 누워 잠들어 있는 것을 본다. 은자는 하느님이 보내 준 이 괴상한 도망자가 아들처럼 느껴져 그를 제자로 삼아 영원에 대해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도둑은 정말 은자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들려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도둑은 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스승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을 느끼고 있기에 자기 방식대로 스승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여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은자는 제자의 선의를 거절하며 먼저 속죄하라고 말한다.
은자가 제자에게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자신에게 온다는 것이다. 도둑은 성스런 것은 성스런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진실처럼 가브리엘 대천사가 오더라도 자신은 볼 수 없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예전에 은자를 따르던 동물들이 이제는 피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에 은자가 요구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 은자를 찾는다. 은자는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제자가 본 빛나는 형체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화살을 쏜다.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곱고 빛나는 형체의 목에 꽂힌다. 은자가 깜짝 놀라 도둑과 함께 화살 맞은 대상을 본다. 그것은 대천사가 아닌 오소리다. 은자가 꿰뚫지 못한 속임수를 도둑이 알아채 활을 쏜 것이다.
은자는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는 너에게 배우고 싶구나. 자, 돌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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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가 쓴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그림책! 바로 <보름달의 전설>이랍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연인에게 배신당한 후, 진리를 찾아 세상을 버린 은자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방탕하게 살아온 도둑이에요! 이렇게 대조적인 두 인물은 그 누군가가 예정해 놓은 운명의 힘에 끌려 스승과 제자가 된답니다! 철학적 사유가 답긴 글과 신비스런 분위기의 그림이 잘 어울리는데 이를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어요! 어느 날부터 스승은 제자에게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절대로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요? 스승에게 뭔가 불길하고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도둑은 보름달 밤 스승님의 말을 어기고 찾아가게 됩니다. <보름달의 전설>은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해답은 독자의 마음 속에서 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요! 성자가 온 평생을 바쳐 구했던 진리와 성스러운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을 버린 자가 세상이 버린 자에 대해 가지는 조악한 동정심에 대한 비판도 느껴지는 <보름달의 전설>은 섬세함 속에서 철학을 깨달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답니다! |
| 이 그림책은 옮긴이의 말에 나오듯이 "그림책을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림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뒤늦음이라는 탄식이 붙지 않아도 좋을 책으로 은자와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 아집, 편견, 집착, 고정관념 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믿음과 신뢰를 잃고, 몇 년 동안 뜻을 두었던 학문에서도 허망한 결과를 얻은 한 남자가 안식을 찾게 된 것은 어느 동굴 안에서 잠을 청했다가 그 곳에 머물라는 목소리를 듣고부터이다. 이후로 동굴에 머물며 '영원'을 향한 구도의 길에 들어선 남자는 명상에 잠기고, 그의 깊은 영혼의 평화는 숲의 동물들에게까지 감응된다. 세월의 흐름을 잊어버린 듯한 평온한 모습의 노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뒤편의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한그루를 보고 있자니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뇌하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수도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애쓴 것처럼 은자는 어느 날 숲에 찾아 든 도둑을 회개의 길로 이끌며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던 은자가 어느 날인가부터 변한다. 은자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자신을 찾아오는 존재의 말을 믿었으며 수행을 많이 한 오직 자신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도둑에게도 관찰능력과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것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것의 외양을 곧이곧대로 믿지 아니하고 과감히 화살을 쏜 것이다. 톨스토이 원작의 <구두장이 마틴="">을 보면 마틴은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 오시겠노라는 목소리를 듣고 하루 종일 그 분이 오시길 기다린다. 그 하루 동안 마틴은 추위에 떨고, 헐벗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행을 베푼다. 그리하여 밤이 늦도록 마틴이 기다렸던 예수님은 분명히 그 날 마틴에게 다녀가셨으되 머리에 후광을 두르고 천사를 거느린 휘황찬란한 모습이 아닌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마틴에게 대접을 받으셨던 것이다. 은자는 지나친 자만과 대천사의 겉모습에 눈이 멀어 주위를 살필 여유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혜안도 잃어버렸으나 도둑의 대답을 통해 꿈에서 들은 약속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연연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진실을 보아야 할 우리의 눈에는 이를 가리는 한 꺼풀의 장막이 드리워져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켜나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리나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높디높은 곳에서만 그것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팔십 노인도 세 살 먹은 아이한테 배울 것이 있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성자가 아니더라도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면서<끝없는 이야기="">로 나를 매료시켰던 미하엘 엔데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 반가웠고, <개구리 왕자="">에서 섬세한 묘사와 그림 곳곳에 비현실적인 것들을 내포한 독특한 화풍이 인상에 남는 비네테 슈뢰더가 그림을 그렸다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는데, 인물들의 변화에 따른 색채 대응도 차별화되어 있으며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공간을 들여다보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화풍이 잘 느껴진다. 개구리>끝없는>구두장이> |
| 선과 악의 구분은 무엇일까? 나는 늘 그 둘이 만난다고 생각했다. 극과 극은 결국 하나이니까. 나는 그것을 초월한 무언가를 갈망했다. 무관심이 아닌 무심의 세계. 은자는 선의 세계를 추구했다. 지고의 선, 더없이 깨끗하고 영광이 넘치는 그러한 신의 세계. 세속의 삶에 덧없음을 느끼고 진리를 알기 위해,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떠났다. 어떤 동굴, 그곳에서 그는 그가 원하는 삶을 가져다 줄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그 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갔다. 도둑은 악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가 정말로 악의 세계에 있는가는 잘 모르겠다. 사탄의 꼬임에 넘어갔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악인은 아니었다. 쫓기던 그는 우연히라기 보다는 신의 이끌림으로 은자를 만났다. 둘은 신의 섭리대로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이 곳에 머물라. 내가 여기서 너를 만나고 싶으니라." 왜 신은 은자를 그 동굴에 머물게 했을까. 신은 은자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 주고 싶어했다. 진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도둑을 만나는 순간, 은자는 그가 신이 보낸 사람임을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눈이 없었던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틀에 매여 도리어 도둑을 가르친다. 그리고 오소리의 환영에 눈멀어 그 오소리를 경배한다.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선이라는 틀에 갇혀 눈이 멀어버렸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어떤 절에 주지스님으로 계시던 큰스님 한 분은 평생 원을 문수보살을 뵙는 것이었다. 그 스님은 정말 열심히 수행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자 제법 원력이 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 스님덕에 그 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고관대작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문수보살을 청하는 그 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북적한 사찰에 왠 허름한 행색을 한 노파가 지치고 병든 개를 데리고 나타났다. 행자들은 그 노파를 맞이했다. 노파는 주지스님을 찾았다. 초라한 행색 때문에 행자들이나 사람들 모두 큰스님을 찾는 노파를 무시했다. 노파는 너무도 당당하게 마루에 앉아 밥상을 요구했다. 황당해하던 사람들은 그래도 절을 찾아온 노파를 쫓아낼 수는 없었고, 마침 그 옆을 지나던 큰스님 역시 자신을 찾는 노파의 행색에 얼굴을 찌푸리며 밥을 드리라 짧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파에게 나온 밥은 흰 쌀밥에 달랑 콩나물이 다였다. 노파는 개에게 먹일 것도 요구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자기 밥을 나누어 개에게 덜어주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노파와 개가 아무리 밥을 먹어도 밥이 줄지 않는 것이었다. 놀란 사람들은 그제사 노파를 다시 보았고, 노파는 어느새 정갈한 문수보살이 되어 개로 보이던 사자에 올라타 저 멀리 가 버렸다. 그 말을 들은 큰스님은 급하게 방에서 나왔지만, 문수보살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문수보살은 자신을 청하는 큰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직접 만나러 왔지만, 혜안이 어두웠던 큰스님은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천사, 보살 등 깨달은 분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테레사 수녀는 아름답게 차려입고 주위에 후광을 뿌리면서 지내지 않았다. 오히려 없는 자 곁에서 같이 고생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을 보살폈다. 원효대사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들과 똑같은 거지 차림을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들에게 불법을 전했다. 신은 은자의 혜안이 밝아지길 원했다. 그랬기에, 오히려 은자보다 더 순수하면서도 무지했던 도둑은 은자가 진리에 더 가까워 지도록 도와줄 수 있었고, 진리에 가까워진 은자를 통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었다. 선과 악은 인간이 만든 건지도 모른다. 도대체 선은 뭐고, 악은 뭘까... 어릴 때는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했다. 하지만 자라면서..'이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선과 악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짧은 내용이지만,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 책을 만나게 되어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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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버림받고, 끝없이 추구하던 세상의 진리로부터 버림받은 청년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산속으로 들어간다. 많은 것들로부터 절망했고 또 다른 진리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곳에서 진리에 관한 꿈을 꾸고..새로운 명상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등진 죄를 뒤집어 쓰고 살고 있는 한 명의 도둑이 나온다. 둘의 모습은 사뭇 대조가 된다. 책 속에 보이는 삽화 속에서도 은자는 머리가 하얀 산속의 신령의 모습이고 도둑의 모습은 빨간 머리에 사나운 눈을 지니고 있는 세상의 악과 같이 생겼다. 그럼 이 둘의 만남은 어떨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은 서로의 만남 속에서 도둑은 은자의 진리를 좋아하게 되고, 은자는 도둑을 그의 제자처럼 아끼게 된다. 은자의 진리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말임에는 분명하다. “이건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삶을 바꾸려 하지 말거라. 오히려 삶을 바꿔야 할 사람은 나다. 그렇지 않으면 넌 사탄의 먹이가 될 거다. 네가 진실로 나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면, 구세주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돌리고 이제까지 지은 죄를 회개하라. 오로지 기도에만 몸 바치며 육신을 죽이고, 정신의 침잠 속에서 마음을 닦도록 해라! 그러면 어느 날 너에게 이야기해 준 저 숭고한 세계에 너를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저 속죄해야 한다.” 은자가 도둑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이다. 도둑에게 늘 그의 진리들을 하나씩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은자는 도둑이 모르게 천사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다. “ 아무튼 나는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네 자는 너에게서 배우고 싶구나. 자, 돌아가자.”
이것이 은자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진리란 언제나 절대적일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은자처럼, 나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남이 보기에는 헛된 망상이지는 않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신념이 맞다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외치고 있지만, 나의 헛된 욕심들이 아닐까 나는 어떻게 나를 되돌아 봐야 할지 의문이 드는 책이다. 난 도둑처럼 누군가가 내게 나의 신념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있는데도 귀를 막은 채 그 이야기를 못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섭기까지 하다.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내가 은자처럼 산속에서만 나의 진리를 위해 명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은자의 어리석은 모습에서 내 모습을 찾아야 한다. 동화책이란 그 여백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래서 난 동화책을 참 좋아한다. 어른들의 책들이란 왠지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도로 늘 작은 책 속에 가득가득 활자로 꽉 채워서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책이란 어린아이의 무궁한 가능성만큼이나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만큼이나 여백과 그림과 짧은 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동화책이 쉽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그 여백을 채울 만큼 더 많은 감상을 불러 일으키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동화책을 끊을 수 없는 나의 변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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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모터라는 월간지를 받아 보고 있는데 2월호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소개되었기에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목을 검색해 보고 나서야 학창시절에 읽었던 <모모>라는 책의 작가가 썼다는 글을 읽고 아! 그 작가 이름이 미하엘 엔델 이였구나 어렴풋이 떠오른다. 정작 책을 받아보고는 너무 놀랐다. 동화책이 아니라 무슨 화보집인 걸로 착각이 들 정도로 큰 책 사이즈 때문에. 아마 비네테 슈뢰더의 몽환적인 그림을 제대로 표현해내려고 한 노력인 것 같다. 이 책은 내용이 적고 그림이 많다고 해서 대충 읽으면 절대로 이해가 안된다. 최소한 두세번은 제대로 읽어야 비로서 그 맛을 알 수 있다. 요즘 흐름이 현실적이고 경제에 관한 책이 유행인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이런 책을 대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라고나 해야할까.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은자는 도둑에게 깨달음을 가르치려 하지만 결국은 악마에게 현혹당하는 은자를 도둑이 구해준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결론은 아마 책을 읽은 사람들 스스로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누구나 은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도둑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림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없기 때문에 주의 깊게 봐야 하나 책 뒤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 부분에 약간의 설명이 있으므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아직 어린 나의 아들이 책을 읽을 나이가 되면 이 책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때로는 아이가 어른의 스승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들이 나에게 내가 깨닫지 못한 또 그 무엇인가를 알려주지 않을까 한다. [인상깊은구절] 그런데 성자의 마지막 말은, 자신이 쓴 모든 책은 진실로 속이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당장 자신의 공부방과 책을 버리고 떠났다.모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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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은자의 말을 옳다고 확신한 것은 그 특별한 냉혹함 때문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신에게 떠오른 진실 때문이었다. 성스런 것은 성스런 사람들에게만 보일 수있다는 것, 그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진실이었다. - 본문 중에서
* 성스런 것은 성스런 사람들에게만 보인다. 그것은 도둑이 스스로 찾아낸 혹은 깨달은 하나의 진실이었다. 진실을 찾아 온 생애를 헤맨 은자와 그에게 깨우침을 얻으려 했던 도둑. 그러나 진실은 은자의 눈이 아닌 도둑의 눈으로 찾아온다. 도둑은 거짓없는 눈으로 순수한 눈으로 진실을 맞이한다.머릿속으로 고민하고 계산하고 생각만 하는 은자의 눈이 아닌 도둑의 눈으로 맞이한 진실의 의미란 그런 것이 아닐까. 진실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순간이란 바로 그런 때일 것이다. 아무런 의심도 없는 때, 아무런 계산도 없는 때, 아무런 거짓도 없는 때, 어떤 눈으로 지금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을까? 계산하고 머리를 쓰고 거짓말을 건내며, 바로 이게 진실이라고 포장하고 감추고 거짓말을 내밷고 있진 않은지. 미하엘 엔데가 글을 쓰고, 비네테 쉬뢰더가 그림을 그린 멋진 동화 <보름달의 전설>이다. 그냥 읽으면 이제 뭐야 하는 생각이 들지만 찬찬히 음미하면서 읽는다면 그 진가가 보름달의 그림자처럼 분명 찾아올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짧은 동화인 이 이야기는 내가 그의 장편들에 익숙해서인지 읽는 내내 긴 시 하나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특히 그림또한 몽환적이라 읽는 내내 더 그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은 (혹은 이런 류의 책들은) 동화로 출판되어 아이들용 서가에 꽂힌다. 그러나 이 책은 내용도 그림도 의미도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어렵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단지 이 책이 동화라는 이유로 또 읽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읽히지 않는 다는 점. 그것이 이런 동화들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 다락방서허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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