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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때로 자신의 삶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신기한건 사람들의 삶은 다 비슷비슷하면서 동시에 하나하나 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커닝햄의 이야기가 전해주고 있는 해답은 여러가지일 수도 있고, 해답이란 없다는걸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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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완벽한 사랑.. 완벽한 믿음. 완벽한 관계라는게 존재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히피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의 삶과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불안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이 느꼈던 행복은 어릴적 매체를 통해서 보았던 그런 가정의 행복과는 다른 방향으로 갔지만, 그들은 충분히 행복하다가 이야기 한다.
일부러 만든 관계는 아니었고, 순간 순간 그들은 솔직하게 그들의 관계를 만들어 갔고, 어쩌면 비정상 적인, 그러나 나름대로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 냈다.
겉은 화목한 가정내에서도 언제나 갈등은 존재하고,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나이는 먹어가고, 그들은 좀더 안정적인 관계를 찾고, 글쎄,....
가끔은 지금이 행복하다고 정의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결국 이렇게 끈임없이 고민하면서 사는게 우리의 젊음이요, 우리의 사랑이 아닐까?
책 마지막 부분 처럼 마지막 그 순간 순간 이 그저 중요할 뿐이다.
우리가 가는 끝의 마지막 안식처는 어디일까?
동성애를 하는 작가의 그의 사랑의 말하기, the hours에서랑은 다른 좀더 현실적인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다고 본다.
그리고 조나단과 바비, 클레어에게서 나의 문제를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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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렇게 괜찮은 책이 또 그새 품절되었네 (이렇게 안타깝게 기억나는 것만 해도 A.S.바이어트의 [소유]란 작품이 있는데...), 이런.
사실 5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기전 대하면, 다소 압도되는 면이 없지않은데 이 책은 도대체 어떻게 읽어갔는지 모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뒷 애기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마구 넘기는 제프리 디버 스타일의 페이지 터너는 절대 아니다. 무척 잔잔하고 대단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게다가 작가는 어떤 것을 묘사함에 있어 길게 '노란색이 어쩌고'하지도 않고 '낙관적인 색깔로 칠해진' 등 또는 나레이터의 말을 들어도 들어도 알 수 없는 속을 바로 옆의 인물이 정확하게 보고 집어주는 직접적인 묘사를 사용함에도 작가의 글은 매우나 매력적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이야기는 아마도 1970년대 미국 중서부 클리브랜드의 작은 소도시의 한적한 마을에서 시작된다. 각 장의 나레이션을 맡은 것은, 등장하는 이들 중 두 남자, 두 여자에 의해서이다. 일부는 겹치기도 하지만 거의 전적으로 이야기가 각 장의 나레이터에게 맡겨졌다. 남자, 여자라고 하기엔 소년부터 시작된 이야기.
바비. 이것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일단은 결혼도 하고 일단 아이도 낳았으니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특수교육 선생님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바비는 큰 형 칼튼와 함께 자라난다. 나이 차이는 9살로 그 사이에 있언 아이들은 이러저러하게 죽었고 태어나지 못했다. 전적으로 칼튼의 무질서, 자유분방함을 따라가던 그였는데, 어느날 형은 사고로 눈앞에서 죽고만다.
조나단. 서로가 멀지않은 곳에 살고 있었지만, 작은 극장을 운영하는 성실한 아빠와 어린나이에 남부에서 이사와서 아들만 바라보는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다정한 조나단은, 사춘기를 맞이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취향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주는 바비를 만나서인지 점점 더 부모에게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앨리스. 과연 남편을 정말로 사랑한 것은 맞는건지, 태어난 곳보다 더 추운곳에, 아무도 잘 모르는 곳에 와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약간씩 충족시켜가면서 교류를 하기엔 앨리스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첫아들인 조나단 외 다른 아이는 더 이상 필요치않았다는 사실이었고, 그리고 조나단이 자신의 영역이 아닌, 위험해보이는, 그러니까 범죄적으로 위험한게 아니라, 아들 조나단을 꾀서 영영 이 비젼이 안보이는 클리브랜드에 살게끔 꼬실 것만 같이 위험한 바비가 눈의 가시라는 점.
클레어.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한 부모를 보면서, 사랑을 갈구하려던 손을 접고 결혼을 했지만, 그 사랑 또한 갈증만을 남겨놓은채 그녀는 사랑이나 가정에는 관심이 없는냥 일종의 연기처럼 조나단과의 미래를 꿈꾼다. 남자를 사랑하는 조나단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아기와 미래의 집 인테리어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때 조용히 바비가 그녀에게 왔다.
에릭. (그의 나레이션으로 된 장은 없다. 하지만, 난 이 인물과 조나단과의 대화가 참 마음에 오래 남았다) 괜찮은 중류층의 집안으로 상위권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다가 연기자가 되겠다면서 뉴욕을 온 그는, 조나단의 눈의 보기에도 감탄스럽게 차근차근 하나씩 준비해나간다. 게다가 감정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할 것도 없이, 조나단과도 편한 거리만을 유지하던 그가, 나중에 그에게 던진다. 왜 우리는 연인이 되지못했을까?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까? 라고.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닌, 눈앞에서 사랑을 놓치고 언젠가 진짜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꿈만 꾸었기 때문에.
우드스톡공연에 실제로 갔다온 클레어가 이들의 환타지를 깨어주지만, 이들이 꿈꾸는 것은 그 공연에서 보여졌던 며칠내내 좋아하는 노래만 계속 들을 수 있고 가장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있고, 서로가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끼리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는, '세상 끝의 집 (원제가 [a home at the end of the world]이다)'일 것이다.
...우리 부모들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우리 부모들에게 집을 사면서 대출받은 돈을 갚고 집수리를 하며 사는 인생을 가져다 주었고, 보잘것 없는 직장에서 일을 하며 오후 2시가 되면 슈퍼마켓의 형광등이 켜진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는 인생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적 연약함을 잘 알고 그것을 용서해주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작게 축소시켜 버리지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다면, 겁에 질리지않는다면, 자극적인 도전과 따스함을 함께 갖춘 사랑이 나타날 것 같았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상상할 수도 있다면, 그런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었다.....p.291~292
작가 또한 동성의 애인을 두고 있고,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음악들과 이에대한 구체적인 느낌을 읽고있자니 어떤 부분은 작가와 겹치기도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고자하는 대안가족의 이야기라기 보단, 보다 개인적인 레벨의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에게 줄 편지를 손에 넣고있던 조나단이나 일종의 분신으로서 형을 잃은 뒤의 바비, 그리고 자라면서 사랑 등의 환타지를 꿈꿔보지 못한 클레어 등이 과거의 박탈감을 뒤로 하고 얼마나 사랑의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런지, 엔딩까지의 이야기는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해주지않는다. 과연 이 꿈꾸기 힘든 두남자와 한여자의 집, 아니 한 명의 남자와 아이까지 포함된 이 집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런지, 과연 레베카가 이 집의 문을 여는 비젼이 실제로 이뤄질지는 모른다. 마치 읽고있던 독자에게 이 질문을 배구공처럼 토스해버린 느낌이다. 여기서 대강 행복하고 대강 자리잡을 것인가, 아님 저기 세상의 끝까지 있는지 없는지 한번 찾아가볼 것인가란 질문을.
p.s: 200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트레일러를 보고있자니 내가 읽은 소설과는 분위기가 사뭇다르다. 소설은 마치 연기가 낀 듯한 뿌연색깔이라면 영화는 보다 밝고 상큼하다.
콜린 퍼렐의 바비 연기는 꽤 괜찮아 보인다. 순수하고 하나밖에 모르는, 사슴같은 이미지가 순간순간 책 속의 바비랑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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