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찰스 디킨스는 토마스 칼라일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사상가, 작가. 그는 [영웅론]에 대한 책도 썼다)을 존경해서, 그의 대표작인 [프랑스 혁명사]를 400번 정도 읽었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토마스 칼라일 쪽에서 보면, 영국에서의 인기를 넘어서 (셰익스피어 이래로 가장 많이 읽힌 작가였으니), 유럽과 신대륙인 미국에서 확고한 인기를 다져놓은, 재능있는 작가였으니 많이 가르쳐주고 자기의 쪽으로 이끌고 싶었을 것이다 (뭐, 화가이자 사상가이자 빅토리아시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존 러스킨도 이런 방면에서 꼭 객관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지켜보자니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제도비판적이었지만, 결말은 인간적인 인간의 희생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뭐랄까 일일드라마스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칼라일은 그를 수제자(?)에서 탈락, 버린다. 뭐, 그래도 인간적으로는 여전히 찰스를 좋아했다나.
![]()
그 여파에서 탄생한 것이 찰스 디킨스의[두도시 이야기]였다. 닉혼비는 자신의 독서노트에서 (흠흠, 그 책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었다), 인간은 자신과 가까운 과거에는 관심이 없어 아주 먼 과거나 먼 미래에 흥미를 가는 속성이 있어, 전자로는 그의 매제인 로버트 해리스가 [폼페이]를 썼으며, 후자로는 SF 장르가 있다 (사실 후자는 내가 지어냈다 ^^;;; 닥터 후를 보고, 이런 팬덤이야 말로 스타트렉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고 했다...만,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꼭 가까운 과거에서 시작된다.
두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전의 1770년도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영화가 소설, 음악, 춤 등을 이은 종합장르라고는 하지만, 일찌기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의 예는 손꼽을 정도라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데이비드 셀즈닉 감독의 [두 도시 이야기 (1935, 여기 movie 카테고리에 있음. 이제 알았는데 셜록 홈즈역의 원조격인 바질 래스본이 이 영화에 나왔네 그려, 싸가지없는 귀족으로.]보다 원작소설이 어찌나 대단한지.
![]()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선 1775년. 프랑스에는 루이16세와 오스트리아에서 건너온 황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 통치하에 재판없이 바스티유에 갇혀 18년간 갇혀있던 프랑스 의사 마네트가 풀려난다. 프랑스에 지점을 두고 있는 텔슨 은행의 로리씨는 긴 옥고로 인해 약간은 정신착란과 발작을 일으키는 그와 딸 루시의 상봉을 돕는다.
시간이 흘러 1780년 샤를 다니는 영국의 중요정보를 프랑스에 파는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어 바새드 일행 등의 증언으로 중죄에 처해질 위기의 재판에서 유능한 변호사 스트라이어와 시드니 카턴의 도움으로 극적인 무죄판결을 받는다 (뭐, 이부분에선 법정스릴러의 대가인 존 그리샴도 박수를 칠만한 명장면이다). 그로 인해, 루시와 샤를 다니 간의 애정은 깊어지고, 시드니 카턴은 그녀에 대한 플라토닉한 감정을 키우게 된다.
프랑스에선 왕족, 귀족들은 서민들의 정서에는 관심없이 여전한 폭정을 행사하고, 에브레몽드 후작의 악행에 과거 마네트 의사의 하인이던 여관주인 드파르주 부부가 주시하게 된다.
무언가를 도모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 후작은 살해당하고 결국 바스티유감옥은 습격당한다. 마네트 의사가 18년간 갇혀있던 독방에서 드파르주는 무언가 문서를 발견하고...
한편, 루시와 샤를은 행복한 가정을 꾸며살고 있지만, 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몰려온 망명객들이 텔슨은행을 반사무실화 삼는 상태에서 샤를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간절한 도움의 편지를 받게된다.
자유, 박애, 억압에 대한 저항이란 혁명 속에서도, 과거의 고통과 복수만을 꿈꾸며 박애와 동정, 연민을 거절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악마인양 잔인하고 기요틴은 억압을 푸는 정도를 벗어나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미치광이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샤를은 귀족의 혈통으로, 모든 재산권을 영지의 평민에게 넘겨주었으나 선대의 악행으로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해지고...
느리게 살기..를 주장하는, 제목이 갑자기 생각안나는 어떤 책에서는 감질나고 하루에 후딱 읽어버리고 싶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빅토리아 시대에 신문, 잡지에 발표되는 순서와 시간차대로 읽기를 실행했다는 얘기가 있다.
맨처음에 전체의 구성을 정하였어도, 발간에 따라 독자의 반응을 감안하여 여러가지 요소를 섞었음에도 이야기는 긴장감을 잃지않고 이어진다. 불안과 호기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미스테리가 풀리면서 설마했던 것이 이어지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사랑, 애정, 숙명, 복수 등 거의 모든 것들이 총동원되었어도, 넘침이 없이 가장 최선의 결과를 위해 조화롭게 합해졌다.
그럼에도 번역서인 이 책은 그닥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다. 사실,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남성작가의 문체, 단어, 문장구조 등은 여성작가의 그것과는 상이하여, 그의 영문학 작품은 그리 부드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뭐, 그렇다고 여성작가의 작품을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읽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필수조건과 충분조건의 차이를 생각해보시길). 그 탓도 있거니와, 솔직히 번역이 매끄럽지는 않다. 가끔 걸린다. 그래서 이 책이 절판되도록 일찌기 사두고 일다가 던져두고 이제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찬찬히 마치 신문잡고 화장실에서 널널하게 연재소설을 읽는 것처럼, 하나의 장을, 문장을 그림을 그리듯 읽어보시라 (달을 가르킨 손가락의 손톱에 때있다고 달이 더러운 것이 아니므로). 장황하고 무슨 묘사가 이리 길냐고 한탄하시기 전에, 그의 무성영화 연사적 나레이션을 즐기게 되고, 원작에서의 인물들의 대사묘미를 번역이 무참히 깎아버렸어도 간혹 말투가 웃겨 읽어보게 될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인물들은 2D적 인물이다. 악당은 악당이고, 인간적인 사연은 뭐 조금 있을지언정 나쁜 놈이고, 착한 사람은 그지없이 착해서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하늘의 천우신조로 악당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원래 차지했어야 했을 것들을 되찾아 행복하게 산다. 이걸 가지고 현대적인 입체적 인물이 아니라고 깎아내릴 수는 없다. 죽는날까지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쓰다가 돌아가셔서 그 엔딩에 대한 구구절절한, 많은 작가 일반인의 이어글쓰기...도 있다) 글을 썼다는 것을 감안하면, 작품 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닌데도 그의 인물들에 대한 사전까지 있으니, 그의 인물들은 각자 하나가 완벽한 하나가 아니라 서로 합해져서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모습으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서는 프로스부인이 뭐랄까 희극적이고, 맨날 똑같은 모습을 연출하지만 그녀의 인간성과 희생에 공감하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마치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뭔가 흐뭇한 광경이 연출될때 같이 보는 이들과 같이 비슷하게 흐뭇한 미소를 흘리게 되는 것과 같다. 찰스 디킨스의 인물들은 매우 사랑스럽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의 비평에 따르면,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백치미의 백발미녀만 좋아했다는 비난과 비슷하게, 찰스 디킨스의 여주인공은 존재감없이 맨날 넘 착하고 넘 연약하고 맨날 희생한다고 하지만, 아마도 그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엄마에 대한 감정이 찰스 디킨스의 경우와도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시절 찰스(히히히히)의 아버지 존은 포츠머스항의 해군에서 일하는 하급직원이었고 지출이 수입보다 많은, 그렇다고 무능하다고 일축하기엔 그런 아버지였지만, 어린 막내아들인 찰스를 데리고 주말이나 휴일이면 여기저기 경치좋은데 낚시를 가서 좋은 집들을 보고서,
"너도 열심히 일하면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어"라고 격려해주었다. 마샬씨채무자감옥에 가족이 갔을떄 (감옥이라고 했지만 낮에는 돌아다닐 수 있다. 일시적인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다) 찰스의 엄마는 12살의 어린 아들을 구두약공장에 보냈고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척의 유산을 받아 전가족이 다시 나왔어도, 학교에 보내기는 커녕 생활비 벌어오라고 공장에 보내려 했다 (그당시 아동에 대한 노동법은 나오지 않았고, 몸집이 작은 애들은 굴뚝청소를 해서 아이들 등쳐먹는 상인들에게 돈을 주고도 제대로된 빵이나 포도주 못먹고 딱딱하고 물탄 것들만 먹고, 추운데서 자고 그랬다). 감정이 섬세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뭐랄까 야망이 있었던 찰스는, 아들의 괴로움을 아는 아빠의 덕분에 학교에 가게되었고, 그는 데이비드 커퍼필드에서도 무능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인물(음, 이름이 기억안나)을 등장시키는 등 아버지를 사랑한다. 당근 그랬으니,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상을 동경했을 뿐.
그럼에도, 남자주인공을 단두대로 보내고 사랑하는 남자랑 떠나는 루시나,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참 뭐랄까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반대급부로 희생하는 남자주인공은 정말 눈물찍 감동스러울 정도.
사실, 혁명이나 제도고발 등은 성장시기 동안 근처에도 가지말라는 세뇌교육 탓에 뭐랄까 아무런 이물감없이 읽기엔, 이 작품은 다소 사회적 고발작이다. 혁명이나 전복을 운운하는 단어를 입에 담아도, 물건 하나 훔쳐도 (빵 하나 훔친 장 발장이 연속 탈주로 인해 오래 감옥살이 했을뿐, 영국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니까. 영국에선 그냥 사형이었다) 가혹한 처벌을 받는 법제도, 각종 세금을 거둬서 먹을 것도 없는 백성이 분노를 느껴 도끼를 드는 것은, 꼭 볼테르의 계몽사상 등등의 영향보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빵없으면 라면먹어(ㅡ.ㅡ)"처럼 아이를 치고도 돈을 던져주는 하나의 직접적인 자극이듯, 자극적인 장면이 많다 (아이의 죽음에 울부짖는 아버지 장면은 읽으면서 정말 슬펐다).
찰스 디킨스는 그러나, 역시 칼라일과 갈라서는, 혁명을 통한 우려 또한 보여준다. 제도의 장점 중 하나인 인간본성의 억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다친 동료를 보살펴주고 강자가 약자의 먹이까지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간혹 착한 유인원들은 돌봐주지만)인데, 혁명이 시작되자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터져나와 살인, 사기, 박탈, 위협 등등이 사람들을 지배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어린나이로 고색을 하면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돕고 사는 것보다 서로 빼앗으려는 모습을 트라우마처럼 경험한 뒤에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기존 제도권에 합류하여 간혹 기존기득권자들의 경멸 속에 비판의 칼을 갈았음에도, 그 제도에서 성장 출세한 것에 대한, 자신의 기득권까지는 다 포기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갖은 입김을 풍기며 피고를 주목하고 있는 관중들의 흥미가 고결한 인류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다 덜 무서운 판결의 위기에 직면해있고, 그 잔인무도한 처형의 라나라도 모면할 기회가 있다면, 피고의 매력은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갈기갈기 찢기어 죽는 그 치욕적인 운명에 처해질 꼴을 보는 것이 구경거리요. 난도질을 당하고 능지처참을 당할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 기만의 몇몇가지 기술과 능력에 따라, 가지각색의 군중들이 제아무리 화려한 흥미를 품고있다 할지언정 그들의 흥미란 그 근본에 있어 '악마'와 같은 것이었다....p.112
와우, 2D적이란 등장인물이란 비판이 무색하게도 인간의 저 가장(disguise)에 대한, 중계카메라를 꿰뚫는 10점의 양궁화살처럼 예리한 통찰이란!!!
아님, 대체로 그의 작품을 읽으면 감동하고 눈물흘리게 만드는 부분인, 인간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낙관적으로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첫사랑의 여인을 꼬셔서 농락하고 버린 귀족아들이지만, 폭풍속에서 꼴까닥하고 바닷물을 먹으며 죽는 것을 보고는 다른 이보다 솔선수범해서 거친 바다에 뛰어들어 그를 구하고 죽는 청년이나 ([데이비드 커퍼필드]에서), 힘들게 대장장이 노릇을 해서 먹여살렸더니 신사가 되겠다고 런던에 가서는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이 볼까봐 부끄러워 했던 아내의 남동생 (음...뭐라고 부르지)이 다 잃고 고향에 돌아오자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저씨나...흉악범인데 그래도 자신을 무서워하면서 빵을 훕쳐다 준 아이가 고마워서, 유배된 땅에서 돈을 벌어 모아서 그 아이의 교육을 시켜주려도 돈을 부쳐주는 사람이나([위대한 유산]에서)..
근데, 왜 이리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요즘의 세태와 비슷한지 통감하게 되는 것일까?
최고의 세월이요. 또한 최악의 세월이었다. 지혜와 우둔의 시대요. 광명과 암흑의 계절이요. 신임과 불신임의 기간이요. 희망의 봄이요,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들 앞에는 온갖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한 아무것도 갖추어져있지 않았다....선이니 악이니 하고 당대를 규정짓는데 있어 서로 극단의 대조를 이룰 만큼 복잡하고 모순에 찬 세상이었으며, 또 그점이 현대와 너무도 흡사한 시대였다.
과연 찰스 디킨스는 칼라일이 포기할 만큼 비겁하고 추상적으로 낙관적이고 현실과 타협하였던 것일까? (물론,그가 대놓고 저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아직 못찾았다 ^^;;;) 다시 한번 뒤돌아, 이 책의 줄거리를 잊어버리고 보면 과연 최고의 세월이니 지혜과 광명, 신임, 봄이며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세월이기도 했다니.. 적어도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결론인즉,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다며 존중을 생략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발언이 남발하는 감정적 발언이 넘쳐나는 현실과는 멀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이고 싶으면, 먼저 인간이 되야하지 않을까.
Recalled to Life(소생하다)는 1부의 제목이었고 엔딩에서 자기 희생의 죽음을 보여주는 남자주인공이 그 이후로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그러니까 사람들 마음속에 소생한 이유는, 지나친 감상주의나 낙관성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고로 이래서, 클래식이 시간이 지남에도 여전히 읽히고,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리라. 과거에 그리하였으나, 앞으로는 그러하지 않기 위해.
|
|
거의 10년간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제까지나 "두도시 이야기"였다고 대답할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가장 감동을 받으며 읽었던 책이라고 들어서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뒤로 절판이 되었는지 발간 된 책도 없었고 헌책으로도 구할 수 없었다. 간혹 찾아내면 영화 "두도시 이야기"를 번역한 대본이거나, 원서였다. 이런 식이니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쉽게 포기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읽을 수 있을 날이 올 것 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뭐, 솔직히 못 읽어도 별다르게 후회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두도시 이야기"가 재번역 되었다는 소식을 책방에서 접하고 번역된 책을 보면서 구입을 당연히 하게 되리라 생각하게 되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막상 구할 수 있게되니 그 희소성이 떨어져서 별다르게 구입하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 욕망을 이룰 수 있게 되면 그 욕망은 더이상 욕망이 아니거나 한없이 미루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쨌던 번역된 책은 구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을 정해서 만나기로 했던 자리에 가다가 우연히 시간이 남아서 들린 헌책방에서 90년대 초반에 번역된 책을 구하게 되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크게 번역의 문제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그다지 문제삼으며 읽을 정도로 대단한 독자는 아니다) 가볍게 구입하게 되었고 1년이 넘은 시간 뒤에 이렇게 읽게 되었다.
감상은? 물론 당연히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너무나 많은 상상과 기대를 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심드렁하게 읽히게 되었고 결말까지 조금은 느린 구성과 디킨스 특유의 하층 계급의 모습을 장황하게 설명하고(예전에는 흥미롭게 읽혔는데 "두도시 이야기"는 이상하게 흥미롭지 않고 애정어린 시각보다는시궁창에서 뒤엉킨 모습들로 묘사하는 것 같다. 조금은 실망하는 듯한 시각이랄까?) 그답지 않은 무거운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요즘의 감각적이고 유머넘치는 책들을 읽는 사람들은 정떨어지게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번역도 그다지 잘 했다고 볼 수 없어서 중간 중간에 다시 앞장을 훑어보는 수고를 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집중해서 읽지도 않았고.
줄거리는 특별히 설명하고 싶지 않다. 검색으로 실컷 알 수 있을테니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시기를 다룬 소설 중에서 손꼽히고 혁명에 대해서 애매한 위치에 있는 듯한 책으로 소개하고 싶다. 그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지만 그들의 벌인 이후의 행동과 광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디킨스는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추가를 하자면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위대한 유산"을 제외하고 가장 감동어린(희생어린) 사랑을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말로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적다(솔직히 없다). 하지만 작품은 진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과정을 감동어리게 묘사한다.
뭐, 짝사랑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주인공 카터의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는 치기어린 감수성일지 몰라도 진지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지막 대목은 곱씹어서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완전 낚였다! 라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작품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소녀였다는 것이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작품 자체보다는 그런 다양한 감정이 오고가는 시간이 더욱 많았던 작품. 하지만 디킨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그렇게 나쁘지 않은, 그의 매력을 충분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짜임새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동안의 그의 작품은 막판에 가면 다들 가족이었고, 숨겨둔 자식이나 애증어린 관계였다는 식의 (한국 드라마 식의) 결말은 아니었으니까.
간만에 고전을 읽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더욱 나답지 않은 책을 읽는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