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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꿋꿋이 삶을 살아가는〉
공간과 장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과 감정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던 곳이 과연 어떠한 역사와 경험을 통해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좀 더 사람들의 삶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고자 했던 이유였다. 다리에 얽힌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도 어느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흔하고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것도 다리에 얽힌 약 400년 가량의 대서사시를 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무수한 역사도 살필 수 있었기에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인간들의 욕망과 감정들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던 것이었다. 한편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다리‘라고 흔히들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소설의 주역은 다리와 더불어 그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꿋꿋이 영위해 간,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이지 않을까 싶었다. 후대에 널리 이름을 떨친 지도자나 하물며 다리를 조성한 건축가가 아닌, 오직 피지배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바치며 때로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무수한 생명들 말이다. 특히 초반부에 총독인 베지르에 의해 파견된 다리 건설관인 아바다가의 혹독한 동원 방침 속에서도 자신만의 신념으로 다리를 밤마다 다리를 파손한 농부인 라디사브의 일화는 다리를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특히 공감했던 장면과 구절은 “역사가 흐를수록 사람들은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다리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과 고통, 아픔들(사형, 홍수 등)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비셰그라드의 주민들은 ‘카피야’라는 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치유를 받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그들의 아픔을 망각하기도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비셰그라드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모든 고통을 옛날에 체험하던 그 커다란 고난의 회상 속에 떠내려보낸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경험한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과 기억들은 그들의 정체성이나 다름없을 뿐더러, 잠시 잊고 살아가더라도 언제금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삶과 경험들을 어느 정도 함께 기억해줄 수 있는 것이, 과거를 살아가는 당시 사람들과 점차 축적된 기록으로 타자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오늘날의 사람들과의 차이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그들을 기억한다고 해서 무수히 많은 비셰그라드의 사람들을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호텔을 운영하는 로티카와 이슬람교도 상인인 알리호좌였다. 뛰어난 사업 수완을 지니며 빼어난 미인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로티카의 경우 호텔을 운영해가는데, 이마저도 제1차 세계대전의 폭격 속에 호텔이 파괴되면서 역사 앞에 ‘힘없는‘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야 이러한 역사 속에 무력하게 놓인다는 것이 어떠한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나라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아니 그럴 수밖고 그것이 역사라고 딱히 느낄 새 조차 없을 정도이지 않았을까? 상인 알리호좌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일찌감치 오스트리아 군대가 쳐들어옴에 따라 시련을 겪어야 했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며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힘쓴다. 그럼에도 그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라예보의 황태자 암살 사건 이후 초라하게 파괴된 다리를 발견하고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한 평생 비셰그라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오며 삶을 영위한 사람에게 가장 상징적인 것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렸을 때의 상실감과 허무감은 실로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상상하는 것조차 그들에게 실례가 될 정도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역사 앞에 놓인 개별 인간에 대한 고찰 외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이방인과 토박이들 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사이에 끼인 것과 더불어 다리가 놓인 뒤로 활밸해진 이동 덕분에 각기 다른 종교와 인종을 가진 사람들(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들 등)이 한데 모여 삶을 영위해나가며 그 과정에서 서로 화합하기도 하고 공동의 시간들을 보며 추억을 쌓기도 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듯(그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세태를 보여주듯),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은 민족끼리의 불화를 부추기고,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 지역을 차례로 쳐들어와 지배를 함에 따라 이방인들과 토박이들이 서로 단합하면서도 결국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갈등을 빚는 상황을 여과없이 소설에서 잘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이방인들의 경우 지배를 하는 이방인들과, 그낭저냥 주변 이웃처럼 살아가는 이방인들로 나뉠지라도, 결국에는 그들만의 정체성이 때로는 중요해지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이를 보며 공통된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할 없는 요인인지, 세계시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조차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요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며 슬라브인들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삶의 현장을 목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나와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공감대 덕분에 오히려 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그곳에서 삶은 끊임없이 닳고 소모되지만 그러면서도 역시 지속되고 ‘마치 드리나 위에 다리처럼‘ 단단하게 서있다“는 구절은 변하지 않는 장소 속에서 꿋꿋하게 각자만의 삶의 영위해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응원과 나에 대한 위로로도 들렸다. 물론 “모든 인간의 가장 슬프고도 비극적인 약점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한 치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데 있었다. 인간은 재주도 많고 기술과 지식도 많았지만 앞을 내다보는 능력만은 도무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굉장히 슬프게 들린 것은 나 역시도 이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사람일 것 같아서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리석음조차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으로 받아들여 앞으로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다리와 함께 살아간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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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보 안드리치의 대표작을 보고 싶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드리나 강의 다리는 그 자리에 세워져서 지리적, 종교적으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이 교류하게 된 이후로 요동치는 인간사를 지켜보는 관찰자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별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 약간 역사책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인종, 종교로 인한 피의 투쟁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