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화한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어둠이 이미 나를 삼키고 스스로 함몰되듯 찾아드는 하얀 봄밤을 맞는다. 마치 봄이 開花 한 듯 겨울을 잊으려 든다. 기미없고 動搖없이 지나는 그 동안의 침묵들이. 겨우내 무료의 시간만이 흐르지 아니하였기에 대지의 꿈틀거림으로 스스로 일어서려 한다. 무료한 空虛가 아닌 스스로의 充滿에 들기까지 얼마를 가야 할 지 모르지만. 아직 소멸 돼지 않은 가쁜 숨으로 바스락 거리는 영혼의 숨결을 부르고 있다. 바람이 다시 새로운 기운을 채우려나 보다. 시련으로 얼어붙은 江을 깨우고 유유히 자신의 스침과 흐름을 내 주며 인도되어가는 상흔(想痕)들... 왠지 낯설어 머물던 언덕도 보이고 모르는 길을 헤메인 자욱의 흔적이 흥건하다. 겨우내 세찬 바람이 깊이 패인 가슴을 가르지 않고 남긴 溫氣를 온화한 화병에 담을 순간을 기다리며. 시련과 시름없는 아름다운 꽃을 그리고 있다. 화병에 시들지 않은 痕就로 세상에 뿌려지길 바라며 어두운 心氣를 추스려 보려한다. 나에게....... 알면서도 다가서지 못하는 두려움이 결국은 빈 空虛에 메달린 노끈 같지만 같은 아픔을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몸부림 일지 모른다. 세상의 생물은 순간의 감동과 감성으로 全部를 소화 하려는 고질적 妄想과 시작이 마치 끝과 같은 듯 묵인된 자신을 순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이기스러움이 무섭고 두렵다. 고통 중에 끝없는 고통은 마음에 고통이다. 시작과 끝이 같지 않으리라는 豫感을 애써 부인하고 자신을 合理化하여 버린 쓰레기통의 꽃은 시들고 만다. 지독한 이기와 기만인 것이다. 아무리 숭고한 채 한 들 순간의 慾望과 유혹을 져 버릴 수 없는 것이 人間이다. 아무리 값지고 소중한 것도 언젠가 퇴색하여 잊혀지거나 소멸되는 것이기에 순간만이 선호 한다. 永遠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는 허실로 세상을 기만하여 나로부터 고통에 들게하기까지 남겨진 삶을 소외시 모른채 하는 교활한 기만자 일 지도 모른다. 그렇치 않은가? 시작이 없다면 아픔과 시련도 빗길 수 있으며..... 밋밋한 네모 상자에서 낮은 의자아래 네모진 생각으로 초라해 가는 것이 最選의 방어인가? 스스럼없이 合治되는 것은 그만한 자신의 체념으로 최선의 先澤을 하여야만 갈등의 時間을 넘길 수 있다. 그만한 스밈을 이루기엔 경제적이지 않은 想念들..... 내가 생각하는 상념과 내가 行하는 모든 것이 다음엔 절대 부인치 않고 거둘 수 있음이 확신만 있다면 이것은 명료하고 지혜로운 想念이 될 것이다. 오직 눈앞에 무료와 공허 앞에 모면키 위한 상념들은 바람의 잔재들 뿐이다. 혹여 잘못 든 길이라도 수만길 낭떠러지기를 다시 손을 잡고 되돌아갈 상념의 매직을 부릴 순간이다. 인간은 항상 아름다운 꿈만을 꾸는 나약한 영혼. 화려함과 유희는 항상 단순, 달콤하지만.... 환상의 純間이 지나면 다시 접어드는 現實앞에 없는全部를 貪慾할 인간의 이기스러움이 무지하기만 하다. 世上이 우리도 가고 너도 가면 무엇이 남는가? 우리가 남긴 잔재는 휘날릴것이고 우리보다 더욱 지독한 이기로 세상을 살아감이 용기처럼 비친 허울들이 곁에 서성이며 가르치지 않아도 그리 살 것이다. 모든것은 시간을 놓쳤다. 변화을 서두른 탓이다. 변화가 어쩜 우리를 먹어 치운 것 인지 모른다. 사람이 영원치 않는다 하여도 진리도 이치도 서서히 변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찍 개화한 조숙한 꽃은 시간과 시기를 낯설어 한다. 급류처럼 밀려드는 변화와 동요에 적응키 어렵고 과도기적인 자신을 희생으로 생각키 쉽다. 그래 인생이 더욱 무상 해지고 조율되지 않은 想痕에 휘날린다. 봄밤의 흔혼은 새로운 기운을 차리려 헤매인다. 이미 꺽힌 화병의 꽃이지만 시들지 않은 生命으로 너을 바라다 볼 수 있으면 나의 마음 想念은 변치 않을 것이고 화급한 두려움에 변화의 動搖에 들지 않을것을.... 세상에 變化하지 않은것이 없 듯..... 변화는 흐르는 물처럼 충분히 예고된 시간에 이루어져야 함에도 세상은 모른채 한다. 그것이 시들어 일찍 개화한 꽃의 눈물로 시들어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이 그러함에도 여유와 틈을 주지 않고 한치도 추스릴 여백을 내어 주지 않으면 우린 남김의 여유를 부릴 시간을 잃는다. 그래 모른채 하는지도 모르고 시작을 허실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상념의 끈이되어 인연을 이루고 다시 운명이나 희생으로 세상을 사는 혼신의 세상이 부럽다. 무엇으로 사는가? 당신의 영혼을 내팽겨치고 허울과 가면으로 사는가? 영혼과 진실은 엉뚱한 무뢰한이 된지 오래 오직 가리지 않은 그림자만을 밟을 생각뿐이다. 두려워 끝은 가려지고 번듯한 이기와 기만이 판치는 세상... 그럼으로 변화는 더욱 亂望하여지고..시간의 남김을 기다리는 흔혼은 헤메인다. 항상....... 변하지 않는것.... 마음이다... 자기 자신이 모르는 일을 하기엔 힘든 일이기에.... 자신의 마음만은 지켜야 한다. 그럼 어젠간 자신과 허울은 만난다. 그럼으로 자기 자신이 승리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여한을 담지 않은 용기로 세상을 살면 조금은 앞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시련의 길을 가거나 희생을 할 경우에도 후회나 회한을 갖어선 안된다. 그 마저도 마음이시켜 한 일 이라면.... 내 마음이 부리는대로 여한과 회한을 줄인다면 그리 손해 볼 세상도 아니다. 아픈만큼 나의 마음을 충만으로 부리면 될테니.... 간직함과 충만함으로 끝을 맺으면 다시 새로운 시작은 내가 아닌 다른 痕魂으로 살아 남을지 모르니. 봄밤은 이렇게 하얀색인가? 화사한 벚꽃도 목련도 개나리도 한얀 회한에 젖어든다. 낮의 기온보다 냉냉하다. 바람의 잔재들이 매직을 부린다. 주말은 다시 비가 온 다는데... |
| 탄생과 죽음의 순환은 자연의 순리이기에 봄은 시작이고,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침이면 새들의 아름다운 합창이 울려 퍼지던 마을에 기묘한 정적만이 감돌기 시작한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나오는 ‘내일을 위한 우화’는 서서히 호러가 된다. 대니 보일의 ‘28일 후’의 한 장면이 스쳐간다. 새들의 침묵. 생명의 잠적. 죽음이 가까이에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서서히 뒷목을 조르지는 않더라도 내 몸으로 스며드는 그것은… 아니 인간의 기만적인 배설물 아닌가. 벌레를 잡겠다고 뿌려댄 살충제가 어디 벌레만 잡겠는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제거 대상이다! 박멸! 지구 끝까지 쫓아 가서라도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터미네이터마냥 인류의 무시무시한 번식력은 식량 증산, 수명 연장을 위한 전투적 행위의 전리품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인류의 밥그릇에 다른 어떤 개체의 숟가락도 들이대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나의 몸을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그들을 말살하는 것. 그러기 위하여 완벽한 독극물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완벽한 독극물이란, 1. 곤충에게 큰 독성을 나타낼 것. 2. 효과가 빨라야 한다. 3. 포유류나 식물에게는 영향을 덜 끼칠 것. 4. 불쾌한 냄새를 내지 말아야 하고, 5. 작용범위는 광범위 해야 하며 6. 효과가 오래가고, 화학적 안정성이 뛰어나며 7.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가격이 싸야 한다. 이 놀라운 조건들을 만족시키려는 인류의 노력은 로또 당첨보다는 쉬운 일일지라도 백수에, 키 작고, 뚱뚱하고, 직업 없고,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만 하는 남자와 문근영이 결혼하는 것보다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비과학적인 계산 방법에 의한) 무릇 많은 이들의 추억 속 방역차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환상’과 ‘재미’를 주기 위해서 여름이면 동네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묘한 향(?)과 몽환적 분위기를 어찌 피해갈수 있을까. 방방거리며 뒤쫓아 다니던 추억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거짓말을 조금 붙이면, 내가 들이마신 경유와 살충제 혼합물을 재활용하게 된다면 부산을 갈만한 연료와 xx킬라 몇 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정도로는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아직도 멀쩡한 나와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실 방역차의 살충성은 제로에 가깝다. 아이들을 취하게 하듯, 벌레의 활동성을 저하시키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방역차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싸고, 죽이는 데에는 확실한 성능을 가진 것이 있으니 이름하야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 페스트를 옮기는 벼룩, 이외에도 파리, 나방 등을 죽이니 나름대로 인도적인 화학물질로 각광을 받았다. 전쟁 중에 흰 가루를 뒤집어 쓰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졸업식에서 자주 보여지는 ‘밀가루 뒤집어쓰기’의 유래가 DDT라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신빙성 없음). 아무튼 미물의 죽음에는 둔감할지라도 새, 물고기의 떼죽음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중들에게 환경은 중요한 사안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지구상의 먹이사슬은 물론 남 북극에서도 DDT가 검출되는 사태를 맞이하니 환경,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환경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태풍의 눈처럼 그 중심에는 레이첼 카슨이 있었다. 그녀의 책, 그녀의 사상은 생태학이란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에코 페미니즘의 원조가 되었다. 이 책은 레이첼 카슨의 사상이 담겨있고, 환경운동의 역사도 담겨 있으며, 화학물질로 이득을 보는 자와 그것에 맞서 자연을 지키려는 자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레이첼 카슨의 소극적인 저항에 대한 은밀한 비판도 내비치고, 미국 정부의 이중적인 환경 정책(살충제 수출 장려, 국내 사용의 금지) 또한 비판의 대상으로 올려 놓고 있다. 물론 ‘침묵의 봄’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DDT의 역할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DDT 사용으로 말라리아에 의한 어린이의 사망률을 20%나 줄일 수 있다 하지 않은가. 하지만, 잔류성 오염물질에 의한 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지구의 상황 또한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내분비 교란 물질은 남성의 ‘힘’을 약화시키고, 임산부에게서도 검출되는 온갖 화학 물질들은 그대로 태아에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지구상에서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유기농 채소를 가족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벌레의 건강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공존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연 통제에 대한 인류의 과학적 맹신을 깨는 전환점이 되었던 ‘침묵의 봄’은 현대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랑으로 대지의 생명을 품은 대지의 여신들처럼 여성의 모성애는 지구를 품에 안을 만한 힘을 보여주었다. 지구의 딸, 생명의 어머니 레이첼 카슨은 인류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
| 어제 주말농장에 다녀왔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난 주에 가질 못했는데, 그 사이에 상추와 엔디브(endive), 열무, 시금치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열무는 그 뿌리가 총각무만큼이나 커졌고, 엔디브1)는 쌈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질길 정도로 자랐습니다. 쑥갓은 드문드문 조금 자라있었고, 방울 토마토는 버팀목을 세우지 않아 힘겹게 처져 있었습니다. 가지와 고추는 아직 열매를 맺기까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할 것 같았습니다. 깻잎은 잎 넓은 것으로 서른 장 정도 따왔습니다. 겨우 세 평 될까말까한 곳에 참 여러 종류를 심어놓았음을 새삼 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배불리 쌈을 싸먹었습니다. 우리 식구 한 주 내내 쌈 싸먹을 만큼은 충분한 양입니다. 열무는 버무리 김치나 물김치로 담궈 먹어야겠지요. 가족과 주말을 유익하게 보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또 다른 맛은, 다들 아시다시피 농약을 치지 않은 깨끗한 채소를 먹는 데 있습니다. 씨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놓고, 오로지 물만 줘서 기른 채소라, 비록 벌레 먹어 이파리에 구멍 쑹쑹 나있긴 하지만, 그래서 더 안심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상추와 쑥갓, 깻잎으로 배불리 쌈 싸먹고 나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해설한 《세계를 뒤흔든 침묵의 봄》을 읽었습니다. 그린비에서 출간한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 《공산당 선언》과 《시민 불복종》을 소개드렸는데 그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이 시리즈는 말 그대로 ‘세계를 뒤흔든 선언’의 등장 배경과 인물, 그 내용과 여파에 대해 해설한 책입니다. 레이첼 카슨은 우리에게 비교적 생소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만, 오늘날 미국 어린이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과학자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해리엇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UNCLE TOM'S CABIN)》이 노예제도의 실상과 죄악을 알리고 남북전쟁의 불씨를 당겼다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신비화된 과학기술 이데올로기를 맹신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을 일으킨 불씨라고 평가합니다. 1970년에는 그녀를 기려 ‘지구의 날’이 만들어졌습니다. 과학자와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카슨은 《침묵의 봄》 이전에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그 꿈을 이룬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암과 투병하면서까지 이 책을 집필하다가 출간 2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사명감을 가지고 이 책을 써야만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의 출간으로 수많은 화학 업체로부터 고소 고발을 당할 것을 염려해 기업명이나 제품명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써야 했고, 출간 후에는 남은 체력을 다해 적극적으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를 알려 나간 그녀의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왜냐고 물을 것도 없지요, 그녀가 죽고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환경을 둘러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으니까요. 시장에서 어디 마음 놓고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어디 하나라도 있나요? 비록 그녀로 인해 DDT 사용이 금지되고 수많은 독성 살충제 사용 규제 조처가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안다면, 2002년 9월, 부산의 과학영재학교 개교를 앞두고 10여 개 국의 영재교육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미국 영재교육의 대부라는 조지프 렌줄리(Joseph Renzulli) 박사가 그녀를 일컬어 21세기 영재형 인간으로 소개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빈틈 없는 과학지식과 시적언어로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독성 살충제 DDT 사용을 중지시키고, 카슨의 그림자임을 자처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국 환경부를 탄생시킨 그녀야말로 자신의 영재성으로 사회적 책무를 다한 진정한 영재일 것입니다. 참, 왜 ‘침묵의 봄’이냐구요? 하늘에서는 대량으로 살충제가 뿌려지고, 이로 인해, 곤충이 죽고 새가 죽고, 그나마 살아남은 놈들도 먹이사슬을 통해 서서히 독성 물질이 농축되어 죽어가고... 이로 인해, 봄이 오면 응당 함께 있어야 할 새가 사라졌으니 봄이 침묵할 수밖에요...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고, 가을 밤에 우렁차게 울어대는 귀뚜라미도 돌아오고, 시장에서 산 채소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그런 날이 다시 돌아오기는 하는 것일까요? 고요한 새벽, 귀뚜라미가 살지 못하는 곳이라면 사람조차도 살지 못하는 곳이 아니겠냐는 이선관 시인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 1) 엔디브, 엔다이브, 앙디브라고도 합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아직 표준어로 정해질만큼 두루두루 쓰이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 영어로 치커리라고 한다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치커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영어 사전을 찾아보니 우리말로 ‘꽃상추’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미국에서는 치커리(chicory)의 어린 잎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네요. |
|
하리하라 과학카페1을 읽다가 아무래도 공학을 전공했으니까 이참에 과학고전을 읽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읽었던 침묵의 봄이 생각나서 다시 꺼내보았다. 그리고 침묵의 봄으로 검색해보니 이름이 같은 책이 하나 더 나왔는데, 그게바로 세계를 뒤흔든 침묵의 봄이었다. 도대체 뭘까? 궁금해져서 읽기시작했는데, 침묵의 봄 해설서쯤으로 보시는 분도 계시고한데.. 물론 해설서 같기도하다. 침묵의 봄이 레이첼 카슨이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를 하는거라면 세계를 뒤흔든 침묵의 봄은 '침묵의 봄'이 세상에 어떻게 퍼져나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안타깝게 유방암으로 자신의 주장의 결과물을 보지못하고떠난 레이첼 카슨을 대신해 그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보면 된다. 침묵의 봄이 환경관련이라면 세계를 뒤흔든 침묵의 봄은 좀더 사회적이라고 해야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