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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위화 작가의 네 번째 장편 소설을 읽었다. 마음이 비로소 안도된다. 대개의 경우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 사람의 책을 처음부터 다 읽어보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그 가수의 곡을 다 들어보는 것처럼. 그런데 솔직히 말해 나는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들어도 그 작가의 책을 다 읽어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나는 예전에 브라운 아이즈라는 그룹이 <벌써 일년>이라는 노래로 1위를 하고 있을 때 그 노래가 참 좋다고 생각했지만 앨범에 수록된 다른 곡들을 찾아볼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가 생겨서 이 작가의 책을 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기대도 되고 흥분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꽤 조바심이 생기는 편이다. 왜 그러냐면 다음 책을 읽고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서를 여행에 비유한다면 이 작가 저 작가 가리지 않고 내키는 대로 읽는 것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걷는 여행과 같다. 반대로 좋아하는 작가가 생겨서 그 작가의 책을 다 읽어보기로 결정하는 건 목적지가 있는 여행과 비슷하다. 목적지가 생기면 계획이라는 걸 세워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안 그럴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계획을 세우는 일은 즐겁다. 실제 여행을 갈 때보다 갈 곳을 고르고 갈 곳의 순서를 정하고 경로를 만드는 일이 더 신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여행을 시작했을 때 뭔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면 들떴던 높이만큼 기분이 추락한다. <제 7일>을 읽고 안도감이 들었던 것은 이 이야기에서 이승과 저승이 서로 무관한 세상이 아닌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는다는 건 영원히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해서 의식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잠과 차이가 있다면 한 번 사라진 의식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정도랄까. 아마 죽으면 끝이라는 통념도 이런 생각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이 세상에서의 일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은 “만약 이 우주에 우리만 있다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라고 말했는데 그것처럼 저승이나 사후 세계, 평행 우주, 천국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무수한 세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겨우 현실이라는 공간이 전부라면 그건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낭비다. 한 손에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과 다른 한 손에는 이승이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를 상상한다는 건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제로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후 세계를 상상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런 세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어느 지점에서 끝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다르게 말하면 끝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이 말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끝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개인이라는 하나의 틀에 한정했을 경우에는 존재할 수 있어도 개인이라는 틀을 벗어나면 사실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제 7일>의 예를 들어볼까. 이 책에서 이승과 저승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승과 달리 저승에는 국가도 가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귀빈을 제외하면 저승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국가가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집이 철거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철거민이거나 직장이 없어 구걸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하층민들이다. 국가는 철거민들의 집을 부수고 하층민들을 지하 방공호로 밀어넣는다. 철거민과 하층민은 바로 국가가 생각하는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다양한 정체성을 중첩하게 된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행정구역에 속한 사람인지 누구의 자식인지 등등. 그런데 만약 국가가 버린 사람이라면 그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잃을 것이고 시가 버린 사람이라면 그는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잃을 것이다. 나아가 가족마저 그를 버리면 그에게 남은 정체성이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것밖에 없다. 만약 끝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모든 정체성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만 남았을 때일 것이다. 국가도 외면하고 시도, 가족도 형제도 친구도 외면해서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어디에도 내가 속해 있지 않을 때.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끝은 찾아온다. 양페이가 죽은 것도 슈메이가 죽은 것도 우차오가 죽은 것도 그래서다. 만약 우리가 언젠가 우리 모두는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은 곧 언젠가 우리 모두는 혼자가 될 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흔히 생각하는 죽음의 공포는 생명이 다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끝에 대한 공포이며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제 7일>에서 이승과 저승의 가장 큰 차이는 저승에서는 누구도 혼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승에서는 누구나 시간이 흘러 혼자가 되는 반면 저승에서는 빈의관에 가서 영원한 안식을 얻거나 아니면 영원히 다른 사람들과 지낼 수 있다. 여기서는 국가도 시도, 가족도 형제도 없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아빠이고 그 아이는 내 아이이다. 반대로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의 엄마이고 나는 그녀의 자식이다. 요컨대 <제 7일>의 저승은 누구도 혼자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곳이다. 류메이의 화장을 위해 모든 망자가 나뭇잎의 물을 떠온 것처럼, 쇼핑몰에서 죽은 일련의 타인이 가족이 된 것처럼, 리웨전 아주머니가 스물 일곱 아기의 어머니가 된 것처럼. 심지어 이곳은 서로를 살해한 원수조차 서로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화 작가는 이 책에서 집이 없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하층민들을 살해하는 이승을 비판하고 무정부주의적이고 원시공동체에 가까운 저승을 상찬하면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편을 가른 것일 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끝이 없다는 것은 이승 다음에 저승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승과 저승이 서로 무관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양페이는 어떻게 자랐는가. 그를 키운 것은 국가도 친부모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우연히 철로에서 그를 주운 젊은 철도원이었고 어머니는 철도원 친구의 부인이었다. 요컨대 십중팔구 죽을 운명이었던 양페이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무관한 타인의 호의 덕분이다. 사람에 대한 호의는 저승과 마찬가지로 이승에도 존재한다. 저승에도 재산과 권력에 따라 계급이 있듯이 이승에도 사람이 혼자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마음이 존재한다. 우차오는 이미 류메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신장을 팔았고 그로 인해 죽었다. 남들과 똑같이 해골이 될 류메이를 결혼식장의 신부와 같은 모습으로 영원한 안식 속에 잠들게 해준 것은 바로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우차오의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은 누군가를 홀로 놔두지 않고 그래서 누군가가 끝장나게 하지 않는다. <제 7일>의 서문에 위화 작가는 창세기를 인용했다. 인용한 글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 7일이 되는 날 모든 것을 이루고 쉬셨다. 양페이는 첫째날에 죽었고 저승에서 보낸 7일 동안 자기를 홀로 죽도록 내버려 두었던 세상이 사실은 자기에게 삶을 선물했음을 알았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가 혼자라는 생각이 죽은 다음 날부터이다.
2024년 8월 25일부터 2024년 8월 26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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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대표작 『인생』을 이제야 읽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처음 읽었고 이후에는 산문집을 주로 읽었다. 책은 작년에 미리 사두었다. 자고로 책은 사두고 잊어버리는 맛이 있다. 성공에 필요한 건 운이라고 밝힌 위화는 어느 날 시골 슈퍼에 갔다가 자신의 책 『인생』이 꽂혀 있는 걸 본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생』 덕분에 위화의 인생은 다르게 펼쳐진다. 『인생』은 위화가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책을 읽고 영화도 봤는데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결말로 끝난다. 소설 안에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부분을 걸러 내었다. 관객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 같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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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책상 앞에 한 장의 문구를 붙여두었다. '살아지는대로 살 것인가, 살아갈 것인가.' 열 여덟 살, 그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치열하게 공부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 전부였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성적만 잘 나오면 능동적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삶을 개척해 나갈거야,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보니 벌써 노년이 되었다는 어른들의 말이 한심하게 여겨지던 나이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지나치게 비장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도 때때로 저 말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삶을 살아 가고 있을까?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을까? 위화의 소설 『인생』은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급변하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부유한 지주의 외아들이었던 푸구이는 전문 도박꾼 룽얼에게 걸려들어 하룻밤 만에 전 재산을 잃고, 초가집에 사는 농사꾼 신세로 전락한다. 룽얼에게 땅을 빌려 생활하던 중 어머니의 병세로 성안에 의원을 부르러 갔다가 얼떨결에 국민당군에 끌려가 전쟁터를 전전하다 돌아오고, 어려운 살림에 학교를 보낸 아들 유칭은 현장의 부인이 출산 중 과다출혈로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수혈을 자원하는데 도리어 피를 너무 많이 뽑혀 과다 수혈로 인해 사망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말 못하는 딸 펑샤를 얼시에게 시집보내지만 펑샤의 임신 소식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아이를 낳던 펑샤는 유칭이 죽은 바로 그 병실에서 죽음을 맞고 곧이어 아내 자전도 세상을 떠난다. 그렇지만 푸구이는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 착한 사위 얼시와 손자 쿠건에 의지해 괜찮은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사위 얼시도 운반 일을 하다가 시멘트 판에 끼어 끔찍한 죽음을 맞고, 하나 남은 쿠건마저도 어려운 형편에 갑자기 삶은 콩을 많이 먹어 체해 죽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인생을 돌아본다면, 나는 내 삶을 뭐라고 회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푸구이처럼 스스로 '괜찮게 살았다'라고 여길 수 있을까?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알게 모르게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것이 옳은 것, 수동적으로 순응적인 것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푸구이라는 인물은 철저하게 실패한 순응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민족해방운동과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토지개혁과 인민공사,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 한가운데 있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중국 인민의 입장에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한 인물일 뿐이다. 그러나 푸구이는 뜻하지 않는 운명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비록 참담한 삶이었지만 도리어 '자기 손으로 먼저 가족들을 다 땅을 파고 묻어주었으니 이제 비로소 발을 뻗고 누워도 아무 걱정이 없는 다행스러운 일'(p.278) 이라고. 어떻게 푸구이는 고통스러운 운명의 무게에도 강인하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푸구이의 인생은 두 가지 큰 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숙명처럼 주어진 고된 노동과 가족이다. 『인생』에서는 삶의 어려운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을 가족이라는 끈끈한 사랑으로 극복해 나간다. 아내 자전의 힘든 노동을 안쓰러워하는 푸구이의 사랑, 전쟁터에서 돌아온 푸구이를 맞이하며 다시 태어나도 푸궤이의 아내가 되겠다는 자전. 호강 한 번 못시켜주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가지만 그들에겐 부부간의 서로를 위하는 애정이 있었다. 또한 벙어리 딸 펑샤와 그의 남편 얼시도 대물림처럼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펑샤의 곤한 운명을 성대한 혼례로 벗겨주고, 임신한 아내를 위해 자신이 먼저 모기에게 물린 뒤 아내를 편안하게 잠들게 하는 가난한 남편의 사랑, 아이를 낳다가 사경을 헤맬 때 아내를 먼저 살려달라며 울부짓는 얼시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 그들의 삶을 견디게 했는지 깨닫게 한다. 이 작품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었지만, 원제는 '살아 간다는 것'이다. 위화는 '살아간다는 것'의 힘은 절규나 공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p.8)고 말한다. 위화는 "곁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푸궤이의 인생이 고생스러운 일생이었다. 하지만 푸구이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그가 행복을 더 많이 느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올 한 해가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해였을지 모르겠다.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무엇도 이룬 게 없어 보이고, 고된 노동에 지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살아 간다는 것이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 행복과 고통, 무료함을 견뎌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꽤 잘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살아지는대로 살면 어떠한가. 그때마다 가족과 친구의 사랑과 위로가 있고, 누구보다 죽을 이유가 많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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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대혁명시기, 허삼관은 친자식이 아닌 아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려내고, 대자보 한장때문에 비판투쟁대회에 끌려간 아내를 위해 고기반찬을 숨긴 도시락을 싸 보낸다. 집안에 큰 일이 있을때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피를 팔아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가족을 부양한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피를 팔고도 자신을 위해서는 쓰는 것은 데운 황주와 돼지간볶음을 사먹는 정도이다. 이마저도 나중에 피를 팔기위해 허해진 몸을 위한 보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다보니 너무 오래 되어서 영화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중국의 유명한 배우인 이연걸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피를 뽑아 파는 장면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무척 인상적이였었다. 그 당시 황비홍으로 유명세를 얻은 상태에서 찍었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극중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뽑는 것을 보고 이연걸이 죽을까봐 어린 마음에 정말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허삼관매혈기의 허삼관마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피를 얼마나 많이 뽑는지, 소설을 읽다가 어쩐지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질 정도 였다. 피를 뽑다 저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책을 손에서 놓지를 못할 지경이니 뭐. 허삼관이 피를 파는 과정이 애잔하면서 한편으론 우스깡스럽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아버지의 자식과 가족들에 대한 깊은 사랑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절절했다.
그의 눈물겨운 고생을 보면서 가족을 위해 당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의 아버지와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아버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엄마에게 항상 살갑게 대해도 어쩐지 아버지란 존재는 살짝 멀게만 느껴져서 살갑게 대하기가 힘들었는데,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아버지인 허삼관 뿐만 아니라 < 허삼관 매혈기 >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매력이 빵빵터져서 어느 하나 빠지는 인물이 없었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함께 소설의 진행도 막힘없이 스피드있게 진행이 되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같은 문화혁명시기를 다루고 있는 모옌의 < 개구리 > 에 비해 < 허삼관 매혈기> 는 좀 더 위트와 풍자가 가미가 되어 있어서 읽기가 좋았다.
물론 내용만 생각해 보자면 정말 마음 아픈 내용인데, 그 슬픈 이야기에 재미와 웃음을 엮어 독자들에게 눈물흘리면서 웃게 만드는 작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이기도 한 작가라서 그의 책을 읽기도 전에 좀 책이 지루하지 않을까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의 선입견을 가볍게 박살내 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위화의 작품들 중 < 인생 > 이나 < 형제 > 를 추천하는 독자들이 많던데, 다음번 위화의 작품으론 < 인생 > 을 읽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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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다른 작품 허삼관 매혈기 형제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 읽고 나서.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는 동물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사후 세계를 궁금해하고. 어쩌면 사후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지금의 삶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허무한 생각을 몰아내고, 인생이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내 종교는 위화가 보여준 사후 7일과는 다른 사후를 이야기를 하지만, 소설을 쫓아가며 천국의 모습도 결국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는 7일간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배경이 현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저마다 힘든 사연을 안고 있는 망자들. 그들의 기구한 사연은 치열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을 너무나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다. 꿈을 좇아 사랑하는 남편을 버렸지만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손목을 그어야 했던 사연, 연인에게 짝퉁 아이폰을 선물 받았다며 투신자살을 결심하는 사연, 화재로 대피하는 와중에 돈을 내고 가라며 사람들을 막어 선 식당 주인, 의료 폐기물 취급을 받는 갓난아기들의 시체나, 죽었어도 윗사람들의 체면과 실적에 급급해 은폐되고 조작되며 존중받지 못하는 사연들. 그 모든 사연의 주인공들이 매장될 한평의 땅도 없어 한곳에 모여 서로를 위로한다. 일곱째 날, 양페이가 찾던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도 기다리던 아들을 만났으나, 아버지는 '이렇게 빨리 오다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 안에 모든 감정이 들어있는 것 같아 울컥했다. 그 모든 사연을 뒤로하고 마침내 만나 영원히 함께 할 거라는데 위안을 받는 부자가 안쓰러웠다. 어째서 살아있을 때는 그 작은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은 건지.. 중국의 현실을 소개했지만, 같은 혹은 다른 형태로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의 삶이 죽은 뒤에 에나 겨우 위로받는다고 하면 서글프지만, 한편으로는 삶 너머 어느 곳에선 존중받을 수 있다는데 위안을 받는다. 지금의 가난, 슬픔, 고통, 원한 모두 죽음이라는 한순간만 지나고 나면 다 사라질 거라는 위로는 지금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아니 조금은 유머러스한 어조로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 매력적인 소설. *밑줄 첫째 날 저들이 하는 말은 문장부호조차도 믿지 않아요. 둘째 날 그녀는 미모란 여자의 통행증과 같지만 자신의 통행증은 줄곧 회사가 이용했지,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신 눈빛이 나를 애도하는 것 같네.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런 기분이야. 우리 둘이 서로를 애도하는 것 같아." 셋째 날 아버지가 스물한 살 때 갑자기 아버지 삶으로 뛰어든 나는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장악해버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마땅히 누려야 했던 행복은 아버지 삶에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온갖 고생을 참고 견디며 나를 길러낸 그 아버지를 나는 나도 모르게 플랫폼에 내버린 것이다. 저녁에 가게 문을 닫은 뒤 우리 부자는 한 침대에 끼여 잤다. 나는 매일 밤 아버지의 한숨과 신음 소리를 들었다. 한숨은 내 앞길 때문이었고, 신음은 아버지의 병고 때문이었다. 넷째 날 "왜 저기 서 있대요?" "자살하려고요" "왜 자살하는데요?" "살기 싫대요" "왜 살기 싫대요?" "젠장, 그런 건 뭐 하러 물어요? 요즘 살기 싫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정적 속을 걸었다. 정적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억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의 기억이고, 뒤엉킨 과거이며, 허무이자 진실이었다. 나는 옆에 있는 쓸쓸한 표정의 여자가 소리 없이 걷는 것을 느끼면서 떠나간 세계가 자아내는 서글픔에 탄식했다. 다섯째 날 나도 웃었다. 10여 년 전 두 사람이 6개월 차이로 이곳에 왔을 때, 두 사람의 원한은 생사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원한은 저지당한 채 그 떠나간 세계에 남았다. "왜 죽은 뒤에 오히려 영원히 사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그는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죽은 뒤에 안식의 땅으로 가야 합니까? 내 물음에 그가 웃는 듯하더니 말했다. "모르겠소." "왜 스스로를 재로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건 규칙이라오." "묘지가 있는 사람은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어떤 게 더 좋습니까?" 내가 물었다. "모르겠소." 하얀 옷을 입은 아줌마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그 뒤로 스물일곱 명의 아기들이 줄지어 기어갔다. 햇빛이 케케묵은 노란색이었다. 그들이 떠들썩한 도시를 통과해 고요 속으로 들어가자 은회색 달빛이 맞아주었다. 그들은 고요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일곱째 날 그곳에 가서 돌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그곳이 추운지, 더운지 아무도 모르지요. 만일 날이 춥고 땅이 얼어 있으면 어떡해요. 유비무환이잖아요. "이렇게 빨리 오다니." "아버지,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여기서 매일 너를 그리워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정말 몰랐구나." "아버지, 이제 또 함께예요."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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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중국사람의 시선으로 쓴 책이 읽고 싶어서 고른 책이었다. 1월 1일 이 책을 읽다 펑펑 울었다. 푸구이의 가정에는 늘 슬픈사고가 찾아왔다. 읽다보면 참 기가막힌다. 그게 그의 운명이었고, 처한 역사적 현실이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가정에는 서로를 아끼는 사랑이 절절해졌다. 그 사랑으로 기쁨이 피어나기도 했고, 고난속에서도 살아간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살아가는데 원초적으로 필요한것은 사랑이다. 특히 가족간의 사랑, 이 책을 읽고나니 아이가 있어 더없이 행복하고,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 참 괜찮은 삶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푸구이의 삶과 함께한 역사, 궁금했다. 중국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소설속에 1958년 대약진운동이 인상깊었다. 토지가 국유화되고 집단으로 대열을 맞춰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농민들은 공산주의 생산방식을 새로워했고 처음에는 마을 공동식당에서 매일 고기반찬을 받을수 있어 좋아했다. 그 와중에 농민들이 어설프게 솥을 녹이며 철을 생산하는데 착출되는 모습(생산성은 제로에 가깝다), 당장의 끼니걱정은 덜었지만 곧 굶어죽을 지경의 가난을 겪는 모습, 거기에 더해진 자연재해, 나중에 찾아보니 대약진운동은 삼천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대혁명과 푸구이의 대사 / 우리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지. 나라 일에 관심이 없는게 아니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네. 우리는 대장의 말을 들었고 대장은 상부의 말을 들었지. 상부에서 뭐라고 말을 하면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 행동했다네. 책을 다 읽었는데 다시 읽고 싶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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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펴면 덮기 힘들어지는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중에 하나. '푸구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들려주는 형식의 소설인데 내가 꼭 직접 듣는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인생이 그토록 파란만장할 수 있을까? 푸구이 노인의 인생을 쭉 따라가다 보니 내 인생은 얼마나 편안하게 흘러가고 있었나, 그리고 요즘 느꼈던 여러가지 고민과 걱정들이 생각해보면 큰 일도 아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푸구이 노인은 젊은 시절 흥청망청 잘 살던 시간들보다 나중의 삶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파란만장 했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삶을 내 손으로 힘차게 꾸려나갔기 때문이겠지. 그런게 다 인생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는 것 같다. 힘들어도 진심으로 살아간다면 가치있는 것이라고.. 위화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아야 겠다. 아무튼 재미있으니.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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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를 읽고 제7일을 접하면서 위화 특유의 색깔을 다시 느낀다. 인간 사회의 밑바닥에서 부조화에 시달리며 이용되고 버려지면서도 서로를 끌어안는 이들을 바라 보는 작가의 따뜻한 눈길과 날이 선 분노와 넘치는 위트에 우리는 눈물 흘리고 껄껄 웃고 분노하고 그리고 사랑을 느낀다. 이전 작품과 달리 사후세계라는 비현실적이고 현대 중국이라는 익숙치 않은 배경 설정이지만, 다양한 인간 군상의 비극과 그 안에서 도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삶의 에너지들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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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인생>은 두 번째 읽는 소설이다. 사실 두 번 본 책이 많진 않은데 이 책은 조금 더 특별하다. 와이프와 함께 낭독한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낭독’은 삶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 관련 책도 읽어보고 교육이나 책 읽기 프로그램에 적용하고 싶은 아이템이었지만 한 번도 ‘낭독’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든든한 아군 와이프와 직접 해봤다. 처음 읽을 땐 어색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끝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 책이 끝까지 독서를 마칠 수 있게 했다.
위화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 준 <인생>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개정판을 내며 <인생>으로 바꾸었는데, 읽고 나니 ‘살아간다는 것’도 좋은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푸구이라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푸구이는 100묘가 넘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마디로 부자다. 그의 태생은 그를 망나니로 만든다. 결혼했지만 도박, 기생은 기본이고 취한 상태로 기생의 등에 업혀 장인어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기행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도박꾼 룽얼에게 걸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날리며, 초가집에 사는 농사꾼 신세로 전락한다. 모든 재산을 잃고 가족만 남는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성안의 의원을 부르러 갔다가 얼떨결에 국민당군에 끌려간 그는 2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다 해방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벙어리에 귀머거리가 되어있다. 시름시름 앓던 부인 자전은 불치병(구루병) 진단을 받고, 그의 둘째인 아들 유칭은 출산 중인 현장 부인에게 수혈을 해주다 어처구니없이 죽게 된다. 시간이 지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펑샤는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착한 얼시를 만나 임신도 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만 얼마 후 유칭이 죽었던 그 병실에서 아이(쿠건)를 낳다가 죽고 만다. 곧이어 자전도 사위 얼시, 손자 쿠건과 푸구이를 남겨놓고 죽는다.
사실 푸구이의 모습은 우리네 보통의 아버지와 닮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위해 일터로 나간 그들 말이다. 푸구이는 사회의 시류에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이런 삶을 통해 인생을 절실히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그에게 인생을 관조하는 시선을 갖게 한다.
63p 그러나 푸구이 노인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뚤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책을 다 보고 나면 저절로 제목이 생각난다. <인생: 살아간다는 것>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저자의 말이 머리에 맴돈다. |
| 위하 작가님의 제7일을 읽었어요. 주인공 양페이가 죽은 후 7일 동안 사후 세계를 여행하며, 생전에 만난 사람들과 다시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현대 중국 사회의 문제들도 함께 담겨 있어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답니다. 조금 무겁지만 의미 있게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