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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폐부를 깊숙히 찌르는 말은 아플 때가 있다. 더더욱 진실에 가까울수록 그가 찌르는 창끝은 매섭게 다가오는 법이다. 해방 후 21세기에 접어든 요즘에도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뉴스를 들어보면 색맹화 사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흑과 백으로 분명하게 갈라서 있다. 하나의 똑같은 사건도 보수와 진보에 따라서 보는 시점이 각각 다르고 이들이 나누는 말도 분명하게 엇갈린다. 진실은 하나 밖에 없지만 어느새 갑론을박 속에서 본질이 흐려져 버린다. 요즘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 말을 다른 말로 포장하여 애둘러 포장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점들을 최강민 작가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쓴소리들은 정치와 문학 그리고 사회를 넘나든다. 4년만에 낸다는 평론집은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처럼 이 사회에 번져있는 부조리함을 파헤쳐낸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공지영 작가의 '의자놀이'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하다'가 앞부분에 나오는데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던 쌍용자동차 사태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내부고발을 다루고 있다. 분명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이다. 의자놀이는 쌍용자동차 사태를 르포 형식으로 쓴 책이다.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공권력과 노조문제에 대하여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책수입을 쌍용자동차와 관련된 분들에게 돌아가도록 한 의도도 보수의 공격과 내부적으로 하종강, 이선옥 간의 논쟁으로 인해 모두 상처를 받았다는 부분은 생각해볼만한 점들이 많다.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은 거대한 기업은 삼성의 부조리함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지만 모두들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했고, 나중에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연대하여 폭로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고야 말았다. 그 후 '삼성을 생각하다'라는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사회를 쥐어잡은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서는 모든 진실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 허무하게 다가왔다. 2000년대 들어서 문학계도 출판자본에 휩쓸려서 순수문학은 무너져버렸고, 경제상황을 반영하듯 실용서 위주로 유행하듯 몇몇 아이템들이 몰려서 나오는 상황이다. 69 작가선언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 하고 있지만 11월 21일 도서정가제 이후로 어떻게 변화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아직도 실업률은 여전하며, 20대의 취업률도 낮은 상황이다. 빈곤에 대한 문제처럼 이 사회를 다루는 글들은 제목처럼 참 고독한 말이다. 누군가는 이런 문제점에 대하여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본래 정곡을 찌르는 비평은 아픈 법이다. 이를 통해 사회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비평과 저항의 말들이 더욱 필요하다. 주류에 편입하여 달콤한 자본권력을 빨아댈 것인가? 아니면 비주류에 머물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힘을 보탤 것인가? 평론집을 읽으면서 이 사회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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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에 문학 평론으로 등단한 전문 평론가가 쓰신 책이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무겁거나 딱딱해 보일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대하게 된다. 고독한 말, 이 책은 저자가 두 번째 평론집을 낸 후 4년 만에 낸 세 번째 책이라고 한다. 시기적으로는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 문학판과 텍스트, 세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라고 한다. 고독한 말이라는 의미는 저자는 스스로 현실 인식에 있어서 소수자의 편에 위치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문학판에도 ‘갑’과 ‘을’이 있다면, 저자는 ‘을’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해가 된다. 누구를 또는 무엇을 평가하는 일이란 결국 그 대상되는 것에 대하여 따뜻한 시선보다는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고 지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따뜻한 말보다는 시니컬한 말을 할 수 밖에 없고, 꼬치꼬치 캐어서 시시비비를 가려서 말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 주지 않는 즉, 고독한 말이라고 아예 독립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무엇을 평가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평가자는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이 균형감각을 유지해야하고, 자신이 평가하는 사안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정리된 글을 읽으며 부분적으로 아쉬움을 느낀다.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저자의 주의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저자의 시각이 편향되지 않았다는 신뢰가 확립되어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미흡하다는 것이다. 평론이나 비평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감의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객관적인 시야가 확보되어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에 몰입되고 집착하게 되면 균형감각을 상실한 아전인수식의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 진보임을 자처한다. 그러다 보니, 보수적인 글을 쓰는 신형철과 이광호 두 평론가에는 주례사 비평이라고 혹평하는 데 반하여,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연관된 하종강, 이선옥, 전성욱 제씨에 대하여는 제 식구 감싸는 식의 글로 합리화시키려는 인상을 받게 되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문학을 향한 열망이 뜨겁게 느껴진다. 저자는 독자를 대신해서 악역을 담당하는 평론가다. 저자의 열망이 뜨거워질수록 악역도 더 심해질 것이다. 그 악역은 결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니 독자들이 저자와 같은 분들을 위해 협력하는 것은 의무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완독하면서, 이 책 제목을 [다정한 말]로 바꾸어 출판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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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겉무늬만 화려하고 요란만 잔뜩 풍기고 있음을 몸과 마음으로 뼈저리게 느낀다.그것은 물리적,환경적,정신적인 면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속칭 속 빈 강정과 같은 꼴이라는 것이다.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단면을 정밀하게 해부할 처지와 입장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되면서 사회는 소수계층 위주로 돌아가고 대다수 중산층 이하는 소수계층이 짜놓은 사회제도,사회시스템이라는 카르텔에 종속되고 말았다.정치 민주화가 되었으면 뭐 하냐,생각과 감정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려는 상생의 설계도가 빈약한데 어떻게 경제민주화를 입에 담을 수 있고 보편적 복지시스템을 외칠 수가 있단 말인가.게다가 작금 세수(稅收)확보<우회 증세> 차원에서 물가를 올리고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는 졸속 행정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어느 계층을 위한 일이고 어느 계층을 죽이는 일이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한국 사회와 국가가 발전하기 위한 길로서 흑백논리를 떠나 다양성이 존중받고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마음으로 바란다.386세대로서 대학시절 4월만 되면 대학가는 정치민주화를 요구하기 위해 투석과 최루탄이 난무했다.간절히 바라면 된다고 하듯 결국 정치민주화가 대학생 및 뜻있는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성취되었다.어느 덧 27년이 흐르고 사회의 모습도 상전벽해와 같이 변했다.그런데 정치 민주화의 본모습은 어느 곳에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국가를 대표한다고 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 본모습을 찾을 수가 없으며,지역 일꾼이라고 하는 의원들 조차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도 하듯 색깔과 이념도 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왜 이렇게 되었을까.모두가 자본의 권력 즉 '밥그릇 챙기기'라는 생존 본능으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일까.그래서 정치하는 사람,정치 얘기는 신물이 날대로 나버려 아예 관심 밖이 되버렸다.김지하 시인이 1970년 발표한 오적(五賊) 즉,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將星),장차관이 생각난다.높으신 신분,지체로 조직과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오적에다 언론,사법권은 어떠한가.모두가 밥그릇 쟁탈전에 극(極)몰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 평론계의 어제와 오늘의 풍조에 대해 분야와 사례를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는 최강민 평론가의 《고독한 말》을 읽으면서 한국사회의 힘은 자본에 있다는 것을 새삼 피부로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자본의 힘은 누구나 소유하고 싶은 선망이고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자본이 있어야 사람 행세를 할 수가 있으며 행복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실상이다.20세기 초반 한국 사회에 태동하기 시작했던 동인지,문학 평론지를 비롯하여 해방후 시대별로 평론지는 정권의 코드의 부합여부에 따라 생멸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현재는 출판 자본을 기축으로 문예지는 난쟁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겨우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평론지도 베스트셀러 위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학창 시절 많이 접했던 월간지,계간지,주간지는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정도이다.설상가상으로 온라인 웹진 시대의 발흥으로 오프라인 평론지의 운명은 암울하기만 하다.
권력에 저항했던 작가들의 쓴소리,바른 소리는 정권에 빌붙은 계층에 의해 흑백논란으로 번지고,우상으로 받들어졌던 인물들이 생각과 이념이 바뀌면서(개인적,사회적 환경) 변절(變節)로 개인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또한 신자유주의가 기업의 유연화를 내세우면서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시대의 돌연변이를 낳았는데 그 피해자는 오갈데 없는 철거민의 참상이었다.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용산 철거민 대참사>의 처음과 끝 모두 철거민의 아픔과 고통,애환의 연속이었다.법정에서 언도된 판결도 철거민의 편이 아니었다.게다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거대 자본,인지도가 높은 출판 자본을 바탕으로 좋은 학벌 모시기에 급급하면서 작가의 잠재력,능력보다는 판매부수,영업력에만 모든 것을 거는 출판업계의 실상을 접하니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전의(全疑)로 전락하고 말았다.이제 출판업계,평론지도 자본력,시대의 흐름에 맞춰 나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장될 것이라는 것이다.교수사회,작가 사회,출판 업계,현실 정치와 사회 모두가 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되어야 하고 맞춰 나가지 않으면 토사구팽 당하는 것이 불문율이다.자신의 소신과 색깔을 낼 수가 없게 되었다.이에 굴하지 않고 소신과 색깔을 잃지 않고 대쪽과 같이 나가려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자본의 힘에 굴복하여 마지 못해 따라가는 천민(賤民)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초상화가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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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보는 평론집이다. 혼탁한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하고 보수와 진보라는 파당적인 모습도 쉽사리 볼 수 있는 시대이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기도 어렵고 힘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평론 역시 정답은 될 수 없지만 올바른 생각을 견주하도록 할 수 있는 도우미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사회의 총제적이고 부실한 문제들을 문학평론에서 문화평론으로 시야를 넓힌 작가의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하고 비판한 그의 사유를 담고 있는 평론집이라고 하겠다. 달고 디단 소리보다 쓰디 쓴 소리가 많겠지만 그 범주는 정치와 문학 그리고 사회를 넘나 들며 우리사회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조합 문제에 있어 아직도 독보적이고 왕국적인 위세를 떨치는 삼성의 실태를 김용철 변호사를 통해 파악해 보려하지만 거대 '갑'의 횡포는 일개 개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한탄스럽고 실망감에 어린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비단 삼성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한 올바른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진실을 알고도 외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나의 조그마한 이익 때문이 아닐까? 바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노예적 근성의 지배가 빚어내는 행태는 아닐까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개인 만의 힘으로는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노력을 한다면 분명 사회는 바뀔 것이다. 경제적 논리와 결탁한 자본주의의 수 많은 폐단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과 그에따른 이익 분배의 불균형에 따라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빈곤은 어느 누가 해결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가 해결 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함께'라는 생각을 널리 전파하고 현실속의 쓰라린 가슴에 콕 찌르는 정곡처럼 될지라도 유유히 지켜가야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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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임스 볼드윈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탐구하는 내용이었는데, 1950년대에 집필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시사점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볼드윈이 그런 자신의 생각을 말로 남기었다면, 시간의 흐름에 흩어지겠지만, 글로 남기고 긴 시간이 흐르고 또 아시아의 한 도시에 있는 나도 그 글을 읽으면서 인종차별의 뿌리깊은 편견과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편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이런 글들이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거나 혹은 다른 평론을 전개하면서 담론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는 이런 평론이라는 장르의 글들이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담론문화라는 것이 다양하게 형성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읽은 <고독한 말>도 그런 느낌을 더해주었다. 어찌했든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 고독해지면 참 슬픈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고독한 행위로 느껴진다니…… 처음부터 차분히 읽어보고 싶었지만, 목차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김지하의 이야기를 찾아보게 되었다. 물론 덕분에 ‘기득권’으로 편입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갖고 책을 읽게 되었지만 그게 영 틀린 접근방식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김지하하면, 이 전에 박경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사위였던 김지하와의 일화를 접하기도 했고, 박정희정권의 저항의 상징으로 사형을 구형 받은 반체제투사라고 기억한다. 또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도둑이라 칭하며 비판하는 오적으로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 2012년 당시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선언한 것이 꽤나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지하가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변절’의 입장에 되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쭉 이야기를 읽다 보니 그의 변화를 옳고 그름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던가? 체 게바라가 20세기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40이 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던 친구의 말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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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이란 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일이었으면 책의 제목을 '고독한 말'이라고 붙였을까?
문학평론집이란 그 한 단어에 꽂혀 반갑고도 반가운 마음에 오랫만하고도 오랫만(한 십 년은 되지 않았을까?)에 펼쳐든 책이건만 내 마음이 깊숙하고도 아득한 저 아래로 툭하고 떨어진다.
프랑스 유학을 거치시고 서구 이론으로 무장한 채, 문학 평론이란 것은 자로고 엘리트들을 위한 언어로 써야 제맛인듯이 우리 문학을 평가해주시던 천재라 칭송받던 문학평론계의 거인 김현을 감히 비평하고, 그의 거룩한 계보를 잇고자하는 죽은 김현을 불러내에 평론계의 좌편향을 정리해주고자 고군분투 하시는 정과리를 감히 디스하는 젊은 평론가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문학비평계가 죽지 않았다 기뻐해야 마땅하다.
내가 <마이너리그>를 읽고 나서 완전 반해버렸던 은희경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는 어느덧 '뭔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의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새로운 옷을 입었다'고 추천사를 쓴 어느 작가의 말을 보면서 출판계의 상부상조를 강요하는 권력의 쓴맛의 원인이 이 책의 저자 최강민의 용어, '주례사 비평'이었던 모양이다.
공지영의 첫 르뽀작인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룬 <의자놀이>에 대한 비평은 이 책을 좀 더 많은 이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미끼 정도로 봐주는 센스는 갖자.
평론계의 거두 백낙청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김현에 대한 글이나 반체제 저항 시인으로 추앙받던 김지하가 노망난 우상으로 추락의 원인에 대한 그의 분석은 문학가의 삶이란 대체 어떠해야 하는가를 꼽씹게 된다.
고정일의 '불굴혼 박정희'는 굳이 이책에서 언급할 만큼의 가치도 없거늘 왜 굳이..... (딱 인터넷 언론에 스쳐 지나가는 글 혹은 팟케스트 책 코너에서 언급 정도로 그치기에도 시간 낭비적인 가치의 정도? 그 작가와 그책이 그렇게 유명해?)
아직도 철저한 약자들의 삶을 담은 빈곤문학이 '체제 저항의 강도가 약하다고 빈곤의 절박함이 강렬하지 않다'고 쓴소리를 날릴 수 있고 그 원인이 작가들이 중산층의 계급적, 계층적 기반에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가진 비평가가 있을까?
오늘의 문학평론가는 생계와 문학적 열정과 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뇌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81~82쪽--
생계를 택했다면 그 역시 주례사 비평을 생산하고 있거나 김현의 후예로 줄을 섰을 것이나 윤리와 문학적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외로움과 배고픔 속에서도 고독한 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최강민의 네번째, 다섯번째 평론집을 기다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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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것 자체가 자기 자신보단 상대방을 향해 발화되는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