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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산문으로 생각하고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읽기에 어려웠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여자’ ‘모래’가 주는 이미지가 ‘약자’ ‘상실’로 읽혀 혹시 오독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그냥 한풀이는 아니겠지 문학을 하는 여자들의 상투적인 주장은 혹 아닐까 의심이 들면서 저도 꼴에 남자라 선입관이 있음을 인식하고 놀랐습니다. 20대와 30대가 여성들에게 갖는 원한과도 같은 반감을 들을 때마다 설득당하지 않았던 저로서 깜짝 놀랐습니다.
작가가 소개한 차학경, 아니 에르노, 한강, 다와다 요코, 소피 칼, 올가 코카르추크, 김혜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모두 글을 쓰는 여성들입니다. 제가 읽은 작가는 아니 에르노와 한강 뿐입니다. 다른 이들의 글을 읽지 않았기에 이 책을 읽기에 더욱 힘들었던가 봅니다. 제가 조금 읽었던 아니 에르노에 관하여 작가가 쓴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봅니다.
여자에게 글은 하나의 육체라고 설명합니다. 자기 언어를 허락받지 못한 여자의 유일한 발화로 배설, 내뱉음, 쏟아냄, 토해냄으로 비유합니다. “저기, 곪아가는 여자의 몸 밖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신음은 여자의 육체를 뚫고 나온 구멍의 말이고, 봄의 새순은 식물의 살을 뚫고 튀어나온 연두의 말일지니.” (59쪽)
이렇다면 글은 고통입니다. ‘왜 이야기의 고통을 되풀이하는가’ 작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쓴다는 것이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구원이기를 바라며, 여자는 매번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붉은 고통의 심장 속으로,’ 소녀 아니 에르노를 구원할 것은 오직 문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문학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까요
“아니 에르노의 여자는 성별만큼이나 사회적 출신이 글쓰기의 양상을 결정한다고 했다. 지배하는 세계의 사람에게는 지배당하는 사람과 지배의 양식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배당하는 세계에 살아본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68쪽) “여자가 한때 자신이었던 여자를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여자가 벼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몰린 자신의 여자를 보는 벼랑. 여자는 푸른 벼랑이다.” (70~71쪽)
시골집을 탈출하기를 갈망하던 여자(빈 옷장)는 자유를 찾아 결혼하지만(얼어붙은 여자) 거기에는 여자가 없다는 것을, 오래전 여자는 죽고, 얼어붙은 껍데기 여자가 그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알게 됩니다.
아니 에르노를 보면서 작가는 백 년 전 한 여자의 기억을 나의 거울처럼 바라본다고 하면서 “사랑으로부터 구원을 바랐으나 사랑은 언제나 수난의 고통이었고 수난은 언제나 열정의 뒷면이었으므로, 사랑의 고통을 말하려는 열정으로 스스로 구멍 뚫리는 수난에 처한 한 여자를, 나는 나의 뒤면처럼 본다.”라고 말합니다. 동화된 작가의 소망은 마지막 글에 나타납니다.
“여자는 사랑을 멈추지 않고, 사랑의 고통을 멈추지 않고, 사랑의 쓰기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고통을 멈추지 않고, 끝내 자신의 글을 사랑의 거처로 삼으리라. (중략) 그리하여 여자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고 버려진 이름 없는 여자. 한 여자인 동시에 모두인 여자.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타오르는 여자의 초상을 마주하리라.” (77쪽)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해설하면서 벼랑 그 자체였던 여자는 사랑으로 구원을 바랐지만 언제나 그 열정은 수난으로 육체가 구멍 뚫리는 고통을 겪으며 그 모든 과정에서 글쓰기를 했고, 그 행위는 아니 에르노에 머물지 않고 거울이 되어 타오르는 여자의 초상을 보게끔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가벼운 산문으로 생각하고 달려들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조금은 설명이 되어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여자들이 유독 더 민감하게 느낄 ‘여성’이 이토록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단어로 설명할 정도였던지 이해를 못했기에 저에게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다는 인식을 갖게 했습니다. 백 년 전의 아니 에르노의 거울. 그 녹슨 거울을 보며 작가의 뒷면을 보았다는 주장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는 이유가 저의 좁은 시야의 증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의 글이 쉽게 읽히면서도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푹 빠져 공감을 할 수 있는 글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센 펀치를 맞아서 그런지 작가가 소개한 작가들의 글을 읽으려니 부담스럽습니다. 이건 제가 남자이기 때문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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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보자 두려움이 앞섰다. 다와다 요코나 한강, 올가 토카르추크를 제외하면 생소한 작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제목 탓이었을까, 〈모래의 여자〉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그것은 완전한 나의 착각이었다. 이 책은 아홉 명의 여성 작가를 탐구하며, ‘여성’이라는 존재가 문학 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드러냈는지를 조망하는 한 편의 에세이이다. 생소한 작가들이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 생소함 때문에 이 책을 더 진정성 있게 읽었다. 이미 이 작가들을 잘 아는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저자의 감상을 따라 읽다 보니 그 생경함에 이끌리고, 주인공이 된 그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기에 결과적으로는 흥미로운 독서였다고 하겠다. 각 장에서 말하는 ‘여자’의 언어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다. 가령, 차학경의 언어는 식민지 국민과 이민자로서 겪은 모국어 상실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소재이며, 아니 에르노의 언어는 당대 여성에게 부여된 금기를 향한 도전이다. 다와다 요코의 언어는 세계의 경계를 오가는 한 마리의 새이며(공교롭게도 ‘번역’을 의미하는 ‘飜’은 ‘날 비(飛)’ 자를 품고 있다), 옐리네크의 언어는 남성 중심의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어떻게 대상화하는지를 통렬히 지적하는 무기이다. 남성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에 드러난 여성 작가들의 삶과 그들의 글쓰기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그리고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을 드러내 왔는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세상의 주변부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언어를 통하여 어떠한 목소리를 냈으며, 어떻게 세상에 그 흔적을 남겼는지. 어쩌면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이 바뀌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자는 왜 ‘모래’로 쓴다고 했을까? 모래는 오랜 시간 자연의 풍화를 겪으며 만들어진 하나의 물질이지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바람에 쉽게 날려버리곤 하는 미약한 존재이다. 결국, 모래로 쓴다는 것은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끝끝내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용기이자, 그들의 존재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흔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