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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진중권'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당연히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 '진중권'이라는 사람은 다양하게 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두가지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 /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발언하고 논쟁하는, 어느 한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진중권'일 것이다. 이러한 진중권의 모습은 그를 싫어하던 말던 그리고 관심이 없던 그에 대해서 조금만 노력해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고 최근의 '디 워' 논쟁은 그가 여전히 지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체력이라도 길렀는지 더더욱 독종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리고 둘째는 '미학자'로서의 진중권일 것이다. 미학자로서의 진중권에 대해서는 세상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 언제 미학이나 예술을 논한적이나 있나?(그전에 먹고 살기 바빠죽겠는데... 라는 말이 꼭 앞에 붙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이니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싸움닭으로서의 진중권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미학자로서의 진중권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어쨌던 그는 미학과를 나왔고 석사 학위도 취득하였으니 우습게만 생각할 것은 아닐 것이다(물론, '하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석사'에 대해서 별로 대단하게 보지 않게 되었으며, '신정아' 덕분에 학력은 무조건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EBS에서 미학에 대한 강의까지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 성격에 대충 공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진중권 본인도 두가지를 결합시키거나 동시에 진행시키기 보다는 미학이면 미학, 시사면 시사로 나눠서 활동하는 것을 택한 것 같기 때문에 두가지는 철저히 나눠진 느낌이다. 이런 것으로 따지고 들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던, 내가 생각하는 진중권은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발언자로서의 진중권보다 미학자로서의 진중권을 보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의 발언들이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이고, 최선 현안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발언하기 때문에 많은 생각할 꺼리들을 제공하는 것도 사실인데... 솔직히 게을러서 일일이 그의 글들을 보고 이슈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귀찮고 그렇게 하는 것도 바보같은 생각도 들어서 그런 쪽으로는 포기했고, 그의 미학에 관한 책들은 학자로서 내용도 충실하고 미학에 관심은 있어도 뭐부터 해야할지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좋은 지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에(지극히 초보자로서의 생각이다) 보다 편하면서도 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글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항상 한국사회에 대해서 의미있는 발언을 하는 발언자이기도 하면서 꽤 대중적인 미학자이기도 할 것이다. 전자에 가려서 후자가 별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미학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기 때문에(난 여전히 마르셀 뒤샹의 변기통을 보면서 감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는 척 하려고 별짓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앤디 워홀의 작품을 보면서 저건 미술관에 돈쳐발라서 걸게 아니라 만원짜리 티셔츠로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꼴통이고. 난 고전 미술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최신의 현대 예술은 왜 좋아해야하고 대단한 것인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물론 항상 얘기하지만 '전부'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감탄하게 만들고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대체적으로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술은 점점 더 퍼포먼스가 되어가는 것 같다. 예술조차 '순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미술부터 현대예술까지 깊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최소한은 알아먹을 수 있게 설명해주는 그의 책들은 언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까지 '미학 오디세이',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으면서 조금씩 주제를 바꿔나가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미학과 관점의 변화에 대해서 좋은 글들을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헌책방에서 싸게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냉큼 집어들어서 읽기 시작한 '춤추는 죽음'은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죽음에 대응하며 살아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주제를 갖고 두권이나 되는(합해서 700페이지 정도? 물론 꽤 많은 그림들이 있어서 어렵게 읽을 필요가 없이 아주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책을 써냈기 때문에 그도 어느정도 야심작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에서 계속 거론하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진중권 본인이 얼마나 그의 영향권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행히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읽었기 때문에 대충은 아리에스가 어떤 관점을 갖고 있었는지 알고 있어서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진중권은 충분히 엘리아스를 의식하면서 아리에스가 말한 죽음 앞에서의 인간들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충분한 자료들과 그의 다양한 지식들을 통해서 독자들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최근의 젊은 학자들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요란한 유럽 학자들의 이름들을 덜 들먹이면서 말이다(개인적으로 외국 학자의 이름이 페이지마다 있는 책들은 조금 짜증나게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대책없는 이론들의 놀이터는... 정말... ㅠㅠ).
아직은 1권까지 읽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은 평가는 잠시 미뤄둬야 할 것 같다. 1권은 '중세'로 분류되기 직전의 시대부터 '르네상스', '바로크'로 분류되는 시대까지 '죽음'에 대해서 당시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과 시대의 지배적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당연히 당시는 기독교(라기 보다는 '하느님을 믿는 일신교'라고 말하는게 더 적합할 듯?)가 세상을 지배하고 당시의 일반인들의 의식구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많은 힌트는 '종교'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저자인 진중권은 다양한 그림과 도판을 통해서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분석하려고 했고, 중세시대에 대한 아날학파들의 몇몇 작품들을 읽은 나로서는 틀린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그들이 보았던 것 이외의 새로운 것들을 보지는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 점이 있기는 했지만.
학자로서의 진중권은 파격보다는 철저히 안내자의 역활에 만족하고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친절한 설명을 통해서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미학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수없이 문화라는 산업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문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고 관심도 갖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가장 적절한 전략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뭔가 아쉽다는 느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이런 면에서는 의외로 모범생과 같은 느낌이 들게 되는데, 그는 철저히 그리스 / 로마 미술과 유럽의 미술에 국한되서 설명을 하고 있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이 관심을 갖던 주제를 풀어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가 동서양의 미술과 넓게는 제3세계의 미술까지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조금은 다른 것들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초보자치고는 너무 과한 요구일 수 있겠지만.
아직은 읽고 있는 2권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얘기는 2권을 다 읽은 다음에 해야할 것 같다. 그래봤자 별로 할 얘기는 없이 이렇게 불필요하게 길게 써내려가고 있지만.... -_-;;;; 어쨌던 다른 평가는 다 필요없을지라도 그가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인해서 좌절하게 만드는 미학과 미술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을 써내준 그에게 고마울 뿐이다.
나같은 일자 무식도 읽어낼 수 있게 만들기 쉽지는 않을테니까. |
| 진중권이라는 글쓴이의 이름을 보며 책을 고르다가 “춤추는 죽음”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인데 춤을 춘다니 죽음이 춤을 춘다는 말의 뉘앙스가 묘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참 오래도 붙들고 읽어왔다. 자극적인 것을 즐기지도 않고 오싹하자고 공포물을 보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오로지 저자가 진중권이기 때문이었고, 미학오디세이에서 느꼈듯이 이것이 진리인지 알 수 없고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어딘가 명쾌하고 논리적이어 보이는 그의 글에 다시 한 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문체에 빠져있을 때 옆에 있던 친구가 ‘자극적인 그림’들을 찾아가며 책장을 넘기던 것이 기억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이해를 돕게 위한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글과 동등하게 이야기한다. 그림 없이 글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표제 그대로 ‘서양 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다룬 그림들을 다루고 있고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만큼 끔찍한 묘사로 이루어진 그림도 많은데 막상 그림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안겨주지 않는다. 이는 죽음이 그림 안에 들어있다는 자각 때문에 대상화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는 달리 어떤 시대에는 죽음이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중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오면서 죽음이 사람에 의해 통제되기도 하고 반대로 죽음이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죽음은 아직도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이지만 ‘행복’과 마찬가지로 마음먹기에 따라 희망을 줄 수도 있고 두려움을 줄 수도 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죽음을 다루었어도 먼 옛날 중세의 죽음에 대한 그림보다 현대의 죽음에 대한 그림이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림 속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진부한 진리를 다시 한번 끌어내며 이 책은 마무리된다. 요즘 들어 유독 다시 기침이 심해지신 아버지, 밤늦게 일하고 낮에는 졸려서 눈이 잘 안 떠질 정도라는 엄마를 보며 언젠가는 나에게도 부모님과 ‘분리’되는 경험을 할 때가 오겠지 하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정작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같다. 철학자들 말대로 과연 죽음 자체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두려움을 주는 것 같다.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문제를 배제하고나면, 죽고 나면 나는 없으므로 죽음 자체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죽음에 의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이 오고, 그것은 삶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아등바등 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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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가까운 분들이 연달아 돌아가셨다. 그런 일을 겪게 되면 늘 잊고 살았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미학오딧에이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은 차에 '그림으로 본 죽음'이라는 인상을 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그 많은 미학적 관점을 다 읽은 후에 내린 결론은 '죽음'은 누구에나 오는 것이고 나만 겪은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고 마음의 평정을 다시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단편적으로 보았던 서양미술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주제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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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묘한 느낌의 제목이다. 서양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 -뭔가 어렵고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부제. 약간 긴장된다. 우리의 죽음 나의 죽음 멀고도 가까운 죽음 너의 죽음 반대물로 진화한 죽음 현대의 묵시록 -목차를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결론은, 친절하고 쉽고 재미있다.. 글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림이 말하려는 죽음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짚어주며 설명해주는 글을 따라가다보면, 이제 이 그림은 죽음에 대해 무얼 말하려는 걸까. 글을 읽기전에 내가 먼저 맞춰볼까?..류의 재미도 있다. (뭐 결국 못 맞추더라도 말이다..;;) 그림을 보고.. 감탄사 이외의 감상을 표현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그림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했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잊어버리곤 했던 서양 중세이후의 역사를 그림과 함께 다시금 공부한 듯한 반가움?도 있었다. 책쓰는 데 들일 시간을 자료 모으는데 소비해 버린 것 같다는- 저자의 노력 덕분에,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림을 보기위해 다시 책을 펼쳐들게 만드는 많은 그림 자료도 좋았다. 그러므로, (책을 구하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빌려보기보다 소장하는 편이 훨씬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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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을 읽고...
이렇게 많은 그림으로 화가들은 즉음을 표현해 왔다. 거기에 연옥와 심판은 그림에 대한 사회적 상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강력한 화가의 메시지에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죽음을 주제로한 그림이다 보니 각장이 파격적이다. 이렇게 많은 화가들에 의해 삶과 죽음이 묘사되고 같은 천지 창조, 최후의 만찬이 그려 졌는지를 알수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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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보는걸 좋아한다.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떠올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내 그림 실력은 비록 초등학교 4학년에서 멈췄고, 낙서조차 글씨로 표현하는 나지만, 좋아하는 화가는 있다. 나는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들을 좋아한다. 다른 여타의 이유처럼 미술전시회에서가 아니라, 우연찮게도 타로카드때문에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그림을 거진 다 알고 있으며,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지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예쁘다" "멋지다" 식의 유치원생도 내뱉을 수 있는 형용사만 입에서 맴돈다. 그래서 나는 책의 저자의 말에 동의 한다. 그림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 ! 나는 그림을 보고 그냥 그 상태로 느낄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뒤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저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음에 얻는 느낌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 생길 수 있을뿐더러, 그림에 나타난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감각 또한 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땔레야 땔 수 없는 마치 우리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죽음을 주제로 서양미술에 나타는 미학을 다루고 있다. 책에 실린 저자의 설명이 첨부된 그림들은 컬러로 인쇄되어있으며 굉장히 또렷하고 예쁘게 인쇄되어서, 직접 그림을 보고싶은 욕구를 계속해서 불지폈으며, 읽는 내내 미술작품을 내가 소장이라도 한듯 기분이 좋았다. 죽음, 해골, 시체, 사신등을 떠올리면, 아니 단어만 봐도 꺼려지는 기분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죽음의 의미는 나에게 있어 존재의 해체이자 사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위의 단어들이 좋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해골로 집안을 장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아마 조금의 언어순화과정을 거쳐서, 미치광이라고 하거나 돌+아이라고 할 확률이 적어도 90%는 된다. 그렇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이런 죽음에 관한 관념도, 오랜 역사속에서 생성된 하나의 시대적 특수한 유형에 불과하다. 머리말에서 이 말을 처음 접하고는, 그럴리가!를 외치며 뜨악하는 표정을 짓던 나도 여러가지 미술작품을 대하면서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저자는 이러한 죽음의 테마를 5가지 시대로 나누어구성했다. 1.우리의 죽음(중세 초기부터 중세 전성기) 2. 나의 죽음(중세 전성기에서 르네상스) 3. 멀고도 가까운 죽음(르네상스에서 바로크) 4. 너의 죽음(낭만주의 시대) 5. 반대물로 전화한 죽음(현대) 그럼, 이 죽음의 역사 소게서, 차갑고 공포스럽고 생각만해도 끔찍한 죽음이라는게 사랑스러웠을때라도 있다는건가? 물론 있다. 사랑스럽다고까지 하기에는 조금 거한 친절인것 같기도 하지만, 적어도 죽음이 공포스럽거나 잔인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적이 분명 존재했다. 미학의 'ㅁ'자도 모르는 나는 실은 역사 또한 골치아파한다. 역사라는 놈은 왜이렇게 복잡한 얘기를 품고 있는건지, 그래서 처음에 서양역사의 시대적 구분이 나왔을때 흠칫흠칫거리면서 책에서 일미터 떨어지는 본능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굉장히 쉽게 그림을 '읽어'준다. 그림의 왼쪽을 봐라, 어디어디를 봐라, 하면서 그 색체와 형태와 질감과 느낌들을 세세하게 짚어준다. 마치 1:1 과외 선생님같은 느낌이었다. 또 저자가 얼마나 말을 재밌게 써놨는지, 나는 '춤추는 죽음'이라는 웅장하고 섬짓한 제목을 단 책을 손에 들고서 버스안에서 얼마나 웃어댔던지,, -,.- 미학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손을 뻗지 못했던 내게 더더욱 흥미를 키워준 책이었다. 많은 그림과 세세한 설명들이 서양 역사의 이해라는 즐거움까지 전해줬다.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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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펴기 전, 내 기대치는 별 다섯 만점에 별 다섯이었다. 1권 제3부, <데이비드 베일리- 바니타스 상징이 있는 자화상>을 눈여겨 봐주길 바란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아님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인지... 놀라운 그림 속 숨겨진 비밀을 봤다. 나 말고도 본 사람이 있다면 이게 화가가 일부러 넣은 바니타스 상징중의 일부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에 이 책을 보던 난 덕분에 악몽까지 꾸었으니 말이다.
원래 기독교 문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왔고 그래서 ‘자살’이라는 주제는 서양미술에서 금기시 되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사랑을 위해 제 목숨을 끊은 인물들이 당당하게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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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밌다.. 진중권 교수의 책이야.. 원래 재미 있지만.. 특히 이 책은 더 재밌다. 여러 미술작품에서 나타나는 타나토스를 통해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보여준다. 제목도 너무 재밌지 않은가.... 춤추는 죽음... 책분류는 미술일반/교양 으로 되어 있지만.. 인문학으로 미술사학으로 혹은 사회과학 서적으로 가도 전혀 무리가 없다.. 책 살 돈이 있다면 꼭 사서 소장할 만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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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이라...
죽음이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인가.. 실감이 나지 않아도 '죽음'이라는 2글자는 세살박이 어린아이들조차도 얼굴을 찡그릴 만큼 결코 환영받지 않는 불유쾌함이 가득한데.. 그것이 춤을 춘다니.. 이건 무슨 아이러니한 제목인지..
저자는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누구나 모두 읽지 못하는 그림을 통해 이것을 얘기하고자 한다. 특히나 나와 같이 미술에 대한 어떠한 식견도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을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그림을 읽어내는 훈련을 통해
하여, 이 책은 중세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인간들과 죽음의 관계를 총 5종류로 나누고 있다. 중세 초기 ~ 전성기 : 우리의 죽음
각각의 종류별로 저자는 그 시대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그림과 더불어 설명을 한다.
1. 우리의 죽음 공동체 운명이었던 그들이 죽음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죽음 이후 부활의 날까지 육신은 단지 '잠을 잔다'라고 믿는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은 어떤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단체 심판에서 개인적 심판으로 발전하기까지의 단계를, 그리고 그런 이들이 가장 두려워한 죽음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한 설명과 당시대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들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 했던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닌 등 뒤에서 갑자기 덮쳐와 미처 회개할 시간도 주지 않는 죽음의 특정한 방식이었다. 또한 비세라더 복음서 삽화인 <부활>에서 보듯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죄인들은 따로 벌을 받지 않았다 한다.
중세 초에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는 날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즐거운 날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
2. 나의 죽음 개인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사후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이로 인해 '썩어가는 시체'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함이 예술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 볼 수 있다.
중세 전성기가 넘어가면서 이제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보편적 사실보다 '나도 죽는다'라는 특수한 사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라마니 기도서의 <임종의 침상>에서 보면 중세 초기와 별반 다르지 않듯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자의 곁에 머물러 있지만, 이로 인해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인해 썩어가는 시체에 대한 묘사(마카르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 후 다른 2개의 중세 마카르브의 장르인 '죽음의 승리'와 '죽음의 춤'에 대해 설명한다. 죽음의 맹목성, 죽음의 부조리를 표현하는 <죽음의 승리>는 마지막으로 <죽음의 춤>은 1374년 독일에서 발생하여 프랑스까지 이어진 실화가 바탕이 된다. 춤은 삶의 표현이다. 이렇듯, 중세 마카르브의 3대 장르를 비교해보면,
이제 죽음은 아무 소리 없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없이 몰래 찾아온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일상생활의 한가운데로. 미리 알리고 찾아오든 아니면 기습을 하든, 원래 중세의 마카브르(썩은 시체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태도는 비교적 순응적이었다.
[ 3인의 생자와 3인의 사자]
[ 죽음의 승리 ]
[ 죽음의 춤 ]
3. 멀고도 가까운 죽음 그 다음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시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작품이 설명된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개인주의화가 완성되어 더이상 공동체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개인'이 죽음에 맞서는 방식이 다양한 방식의 예술적 표현의 바탕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가 있다.
근대 자연과학이 막 발흥하는 시기로 대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 즉 시체의 해부가 활발히 이루어짐으로 발생한 작품들. 영생의 환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남은 '삶의 무상함'에서 파생된 '멜랑콜리'. 마지막으로 16세기 초부터 서서히 시작되던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이 바로 그것이다.
4. 너의 죽음 드디어 낭만주의 시대가 되었다. 이름에서부터 감출 수 없는 아름다운 시대인만큼 '죽음'에 대한 시대상 역시 변화할 수 밖에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너'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죽는다'라는 사실을 망각하게도 하고, '나의 죽음'이 타인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하게 보이느냐에 대한 태도 역시 절실히 볼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성 아가다의 순교>에서부터 <히야신스의 죽음>까지
5. 반대물로 전화한 죽음 & 6. 현대의 묵시록
아름답고 화려한 낮이 지나면 어둡고 무서운 밤이 오듯, 그토록 아름답고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낭만주의 시대가 지나고 현대로 넘어오면서 죽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현재 지금 우리들에게 '죽음'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아름답고 달콤한 타인의 죽음은 이제 더이상 가슴 뭉클한 감동의 드라마가 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는 건 신의 일이었다. 중세인들은 도덕적 악과 죽음을 연동시키는 전략을 알고 있었다.
[ 병상의 발렌틴 ] [ 병든 발렌틴 ] [ 죽어가는 발렌틴 ]
중세 시대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에 '죽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었다. 끔찍하고 무서운 죽음이어도 결국은 자신의 장래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듯이, 화가 자신이 작품속에 들어가 있어 마치 죽음이 은밀히 화가의 창작을 이끌고 있는 듯한 모습을 받는다.
바로크시대로 넘어오면서 일반화된 자화상을 보면 '죽음'과 관련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드나 역시 '예술가와 죽음'이란 주제에는 바니타스(생의 덧없음)이 나타남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낭만주의, 죽음을 통해 자기를 영웅화 하고, 죽음을 미화하여 자신을 영원화하려는 동경의 작품들과 우울증과 창조력의 관계를 알고 있던 르네상스인들이 승화시킨 죽음과 예술의 합작은 낭만주의적 감성과 현대 임상의학이 충돌하게도 만들었다.
중세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결국은 '집단적'으로 죽는다. 하지만 영생의 희망이 있었던 중세와 카타리시스라는 결말이 있었던 낭만주의 시대에 반하여 요즘 우리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죽음은 어떤 춤으로 다가오는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 되리라 믿는다.
밤이다. 밤이 되면 우리 모두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시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중세인들의 초연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한때 죽음을 함께 지켜봐주던 그 많은 사람들도 여기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저렇게 죽는다. 죽음은 다시 무섭게 야성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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