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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라 불리는 비판이론가들이 있다. 국내의 학술적 동향을 보면, 비판이론가들 가운데 하버마스와 마르쿠제가 지고 있는 별이라면 (한때 이들은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구가했다! ) 벤야민은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와 벤야민만큼 주목을 받아야 마땅한 비판적 지성의 별이 국내에선 아직도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별은 바로 테오도르 아도르노다. 아도르노가 국내 인문교양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아도르노의 읽기 어려운 난삽한 글 때문일 것이다. 아도르노는 에세이, 모델, 병렬체를 사유의 지향점으로 삼았는데, 이런 아방가르드적 시도에 비한다면 하버마스나 벤야민의 글은 명료하기 그지없고, 사상적 장단점을 그나마 쉽사리 살필 수 있는 축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 역자 김유동의 말대로, 아도르노의 글쓰기는 실증주의적인 사고방식, 조야한 낙관주의, 근시안적인 비판, 사유보다는 이미지에 길들여지고, 실상을 파고들기보다 소통에 중점을 두는 문화상품에 익숙한 현대 독자에게 당혹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아도르노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도 한몫 했으리라.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부정의 진리'와 '부정변증법'은 아무래도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희망이나 벤야민의 종교적 열정을 가진 메시아적 구원에 대한 긍정주의와는 다소 다른 음울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도 하버마스나 벤야민만큼 구원의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은 매우 긍정적인 비판이론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가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진리란 가상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가상 없는 구원이 솟아오르리라는 망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아도르노는 구원의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은 긍정의 철학자이다.
'한줌의 도덕'이라는 뜻을 지닌 이 책《미니마 모랄리아》는 둘이 공저한 《계몽변증법》의 속편으로 간주되는데 아도르노는 이 책을 호르크하이머에게 헌정한다. 아도르노가 나치 집권의 박해에서 벗어나 미국 체류기간에 쓴 에세이 형식의 글로 망명 지식인이 성찰한 올바른 삶에 대한 153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독일의 망명 지식인이 바라본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삐 풀린 산업자본주의의 모델이었다.
에세이 형식을 빌어 아도르노가 맞서 싸우고 있는 적은 단 한마디로 말하면 '전체'이다. "전체는 비진리다"라고 언명하는 아도르노는 "진리는 전체"라는 헤겔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어버림으로써 자신의 반파시즘, 반전체주의적 노선을 명확히 한다. 이 책에서 '전체'는 체계, 세계 행정, 파시즘, 이윤경제, 야만성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특수한 것과 유일한 것, 단편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을 옹호하고 이를 체계적 논리 속에 집어넣지 않고 에세이적인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근대성의 지배원리에 반기를 든다. 우리는 아도르노의 에세이에서 쇼펜하우어, 니체, 클라게스의 잔영(殘影)과 더불어, 마르크스, 헤겔, 베버, 루카치의 환영(幻影)까지 엿볼 수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저자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들려주는 법이다. 아도르노는 에세이 형식을 빌어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아무런 꾸밈장치 없이 자유분방하게 써내려가는데 무엇보다도 '고독한 지식인'의 책무에 관하여 다양한 감상들을 풀어놓는다. 만약 내가 망명 지식인이었다고 해도 지식인은 역사적 고난과 시대적 역경을 진지한 사유와 글쓰기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도르노에게 지식인이란 전체 메커니즘을 꿰뚫어 보면서 전체에 대한 순응 대신 내적 저항의 글쓰기를 삶의 방편으로 삼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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