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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작가들의 작품을 한참 읽던 시절이 있었다.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김형경등 세상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를 무릇 여성의 시선으로 따라가고 싶어서였나보다. 3월에 읽게 된 공선옥 두 번째 소설집을 읽어가면서 이제껏 이 작가의 글을 읽어보지 않은 나의 게으름과 수많은 핑계들을 탓하였다.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당시 어긋난 시스템속에서 모진 목숨을 살아야했던 하류계층의 애닳음, 운명이라는 올가미에 얽매인 여인들의 한많은 인생살이에 목메이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슬슬 그런 상황들이 지겨워졌으니까..
공선옥작가의 작품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운명과 모성앞에서 방황하는, 현실에 상처받은 아름다울 것 하나없는 투박한 여성들이다. 작가의 체험적 삶이 글 속에 그대로 응고되어 긍정적인 요소로나마 승화될 가망이 없는 그런 삶의 앙금들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스스로 팔자 좋게 살아갈 능력도, 고사리같은 새끼들 잘 키울 여력도, 그렇다고 양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짐을 과감하게 풀어놓을 베짱도 없는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소외된 자들의 끝없는 가난과 대충의 눈치보기, 어쩌다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면 그것으로나마 자기위안을 삼을 뿐이다.
<모정의 그늘> 속의 허여사는 주머니돈을 세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나이든 여인이다. 대학까지 나온 큰아들은 무슨 이유인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배움의 전당에서 꿈꿔오던 이상과 현실과의 상당한 괴리감때문이리라. 언제나 큰형에 밟히는 둘째는 집을 나가고.. 큰아들을 사모하는 아이가 둘 딸린 한수님은 돈벌이를 나름 하는 여자이다. 그런 질팍한 여자가 궁색한 허여사의 위안이 된다. 종종 알아서 챙겨주는 용돈때문에..
<타관 사람>의 그는 어디에서 왔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저 풋내나는 땅 남도로 거슬러 내려와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고쳐 고아원에 있는 조카를 데려와 살아갈 생각뿐이다. 삶에는 중요한 시기가 있다. 하늘아래 발붙이고 떳떳하게 살기 위한 계획과 능력을 갖추는 시기, 지나가는 행인에게 웃음을 던지며 살아가는 여인에게 빌붙는 구차함이란...
<어린 부처>속의 엄마는 나쁜 엄마이다. 무책임하고 어미 구실 절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여자이다. 그런 여자의 아이들을 돌보고 보살펴주는 남자. 그들은 어느 순간 어긋난다. 합의이혼에 동의하지만 증빙서류불참으로 시간을 번 두 사람, 천진난만하지만 급박한 상황을 제대로 알고 대처하는 아이들... 아부지라고 부르는 아이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인형을 들고 집에 들어서는 아부지.. 달라붙는 아이들.. 인생이란 어찌될 지 모르는 것이다.
<어미>와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속의 모성은 눈물겹다. 안타깝고 더럽다. 아이들을 아동 일시보호소에 보내야 하는 현실속 어미들의 모습이 기막힐 뿐이다. 공선옥 작가의 경험이 묻어나는 이야기라고 한다. 직접적인 체험없이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고 줄거리를 들여다보면 채워가는 삶이란 복에 겨운 소리일 뿐이다. 노동과 양육은 동시에 이루어지질 않음을.. 고급 아파트나 오피스텔의 감각적 개념의 글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지린내나고 울컥한 삶이 그 곳에 있다.
<몸을 위하여>는 여성의 육체를 구속하는 성장기 첫경험, 생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억압된 몸 얘기이다. 결국 망가지는 것은 몸과 정신 두가지 모두였다.
<세한>, <우리들의 고향>,<내 생의 알리바이>속의 주인공들 또한 작가자신의 분신임을 드러낸다. 어릴 적 기억들, 노동의 가치, 지겨운 주변상황, 이제는 더 이상 구속받고 싶지 않지만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등 90년대 느끼는 소외계층의 가치관 혼란을 온전히 그리고 있다.
공선옥 작품속의 막된 여자들의 고달픈 이야기가 밉지 않은 이유는 글의 진정성이 돋보여서이다. 일부러 만들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현실에 반대하는, 반란을 꿈꾸지 않은 그런 문체들이 내 가슴 깊이 들어왔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공 작가의 전반적인 작품을 디비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한 사람 더 생겼다.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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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선옥 작가의 소설을 추억하고자 한다. 제목이 아주 멋진데, <내 생의 알리바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명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운명을 개척할 것인가? 혹여 운명을 개척한다면, 처해진 상황에 대한 끝없는 자기 반성을 통해 미래 모색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라면 적어도 공선옥의 경우처럼,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생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진 않을까? |
| 공선옥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소시민을 넘어 경제적으로는 하류층, 사회적으로는 소외 계층, 가정적으로 결손 가정의 모습을 주로 보여준다. 그 곳엔 생활의 권태로움을 호소하는 유한부인도 없고, 자기 일에 승승장구하면서도 여성적인 섹시함을 잃지 않는 커리어우먼도 없으며, 아무 이유도 없이 젊음이라는 이유로 방황을 정당화는 청춘의 모습도 없다. 흔히 사람들이 운명, 팔자라고 하는 세월의 흔들림에 온몸과 더불어 인생이 흔들리는 잡초같은 삶의 모습만이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화려함으로 번쩍거리는 요즘에 팔리지 않는 재고물품같다. 자신의 소속신분(?)을 결코 망각하지도 않고, 실험 정신을 발휘하여 혹은 간접경험에 의한 변신도 시도하지 않고 데뷔작부터 자기만의 스타일을 꿋꿋하게 지켜오고 있다. 그것이 젊은 세대들에게 칙칙함으로 비춰질지도 몰라도 삶의 서러움과 슬픔, 그리고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진 세대에게는 가슴 저린 공감이 뒤따를 것이다. 또 나쁜(?) 모성에 대하여도 생존에 대한 끈끈함과 당당함으로 무장, 소홀할 수 없는 어머니의 자리일지언정 어떤 이유로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책임감이 느껴져 가슴 뭉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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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소설집에는 공선옥의 이야기가 아주 직접적으로 나와 있다. 전라도에 사는 여자 작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서울의 여자 작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공선옥의 소개서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공선옥은 그런 여자다. 술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아이를 아동일시보호소에 맡겨야 하는 엄마, 한겨울 김치를 훔쳐와 우걱우걱 주린 배를 채우는 여자. 소설 속의 여자들은 다 그녀다. 공선옥이다.
그녀의 소설은 그녀의 삶을 표절한 것들이다. 그래서 현실을 벗어나지 않은 실감이 있다. 나는 그녀가 광주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슬프게 하지 않아서 좋다. 나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입장이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그렇다고 믿는다. 내가 가슴에서 삭히고 오래 묵혔기 때문에 덤덤하게, 흥분하지 않고, 하지만 냉랭해서 더 슬프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에서 살짝 비켜가, 그러니까 세상을 나하고는 조금 다른 방향에 있는 듯 세련되게 인생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라서 또한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공선옥은 주인공과 철썩 붙어서서 청승맞은 이야기를 게다가 촌스럽게 하지만 세상을 깔보는 시선이 아니어서 좋다.
한 번 살아보자, 하는 그녀의 인생관을 나는 부러워한다. 나는 아이가 셋인 그녀의 생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나도 아이를 셋 낳고 싶다. 이미 떨어져 나간 내 살덩이이되 안쓰럽고 대견한 존재들을 품 가득 안아보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주인집 뒤로 늘어선 푸성귀 밭들이 전부 집주인 거라고 했다. 영례는 푸성귀 살 돈이 없었으므로 도둑질을 했다. 만날 간고등어만 먹은 얼굴이 간고등어 빛깔로 윤기를 잃고 거무튀튀해가 세살쟁이 딸아이나 자신이나 갈수록 볼품이 없어져가는 게 싫었을뿐더러 입덧이 서느라고 정말로 신선한 야채가 먹고 싶었다. 밤에는 도둑질을 하고 낮에는 도둑질한 그 밭에서 일을 했다. 할미는 밭에 널려 있는 시래기 한 줌도 그냥은 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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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망설인다. 뭐라고 글을 쓰야 할지. 그만큼 공선옥의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애증이 서로 엇갈린다. 작년인가 작자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을 필두로 '피어라 수선화'와 '시절들'등 그녀의 책을 탐독했다. 뭔가 찝찝하면서도 쉽게 내쳐버릴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재의 소설이 아니기에.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주로 그리는, 생을 간신히 버텨가는 삶의 모습이나 시골스런 배경이 나오는 작품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김소진이나 구효서의 작품들도 가끔 그런 이유에서 나에게 냉대를 받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11개의 단편소설이 묶여진 소설집이다. 공선옥, 그녀에 대해서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그녀가 재혼했다는 소리를 며칠 전 누군가에게 들었다. 그냥 아이 몇명만 키우는 홀어미 삼십대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소설에는 그녀의 삶이 많이 투영된다. 다른 소설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많은 부분들을 간접체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아마도 소설을 위해 별다른 간접체험이 필요없어 보인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 사는 인생 그것들이 작품에 녹아있다. 이번에도 몇가지 사실들이 보인다. 세명의 아이를 데리고 사는 여자, 두 아이를 데리고 재혼하여 한 아이를 더 낳은 여자, 아이들을 아동일시보호소에 맡기고 그것에 참담해 하는 여자.
나의 증오는 이렇다. 책임지기도 어려운 아이들을 왜 무책임하게 생산하는 것인지, 블행한 삶이 예견된 인생을 왜 스스로 선택하는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인생, 그것도 소설 속의 주인공의 인생에 대해서 왈가불가한다는 것은 나의 오만이다. 그러나 읽는내내 뭔가 개운치 않는 화가 내부에서 끓어올라 끝까지 그 감정을 삭히기 어려웠다. 나라면..적어도 나라면... 아직도 한끼의 식사와 하룻밤의 잠자리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있을 수 있다. 그래... 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적어도 그런 삶은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는게 나의 가치관이다. 다음 세대까지 무책임하게 물려주지는 말아야 한다.
외로워서, 남편이 없더라도 아이가 있으면 외로움을 상쇄할 수 있다고 그래서 아이를 지우지 못하다고 주인공들은 나에게 항변하는가? 성욕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 손길이 싫어면서도 그 손길의 따숨은 싫지 않았다고 나에게 항변할 것인가? 그렇다면 피임이라도 확실히 하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자신의 성욕을 채우든지..계속 흥분할 일은 아닌데 자꾸 작중 인물들에게 분노가 치민다. 공선옥의 대한 또다른 나의 사랑은 이렇다. 그나마 공선옥이기에 우리가 이러한 글들을 볼 수 있다고. 그녀이기에 이런 생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탄탄한 구성과 생명력 넘치는 글들은 그녀이기에 가능하다고. 그런 이유에서 공선옥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리라 믿는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끝내 내칠 수 없었던 나의 애증을 이렇게나마 끝낸다. 아직도 그들이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작가가 후기에 밝혔듯이 그녀의 2천년대 작품은, 그녀가 살아갈 2천년대에선 자식 잘 키우고 정신과 몸이 건강하길 바란다. 진심으로. [인상깊은구절] 두 번째 소설집 '내 생의 알리바이'에서 가장 공선옥적인 작품은 아마도 술먹고 담배피우는 엄마가 아닐까. 이 작품에는 공선옥의 인간학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공선옥만의 소설언어가 집중적으로 담겨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두 아이를 혼자 몸으로 키우는 여성이 나오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편은 처자식을 버렸다. 광주의 아동일시보호소에 아이들을 맡기고는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와 공장노동자가 된 애기 엄마. 나는 둘째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목포행 비둘기호 밤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떻게 하다보니 두 남자 사이에 끼여 앉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옆자리의 털복숭이 남자가 술컵을 건네며 수작을 걸어오는 것이 소설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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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소설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지영과 이름만 비슷하지 소설적 색채는 전혀 다른데, 나는 공지영을 별로 안 좋아하면서 이상하게 공선옥의 소설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인간의 편견이란...
공선옥의 소설에는 유난히 나쁨 엄마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나쁜 엄마가 어디 되고 싶어 되겠는가. 상황이 안되고 돈이 없으니 아이들을 보호시설에 보내게 되고, 쓰린 가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혼자 훔쳐내야 하는 것이리라. 작가 후기에 의하면 이러한 소재는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너무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막막한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뛰어넘어 보려는 여인들의 노력이 생생하게 다가와 마음이 아프다. 공선옥이라는 작가를 계속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내 삶은 걸레조각. 아니 이제는 걸레로서의 효옹도 떨어져버린 한줌의 쓰레기. 어느 순간 그 생각에 미쳤을 때 그때까지 치밀어오르던 부아통이 슬며시 들어가버리고 가슴 서늘하게 외롭고 설운 감정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이즈막엔 짜증밖엔 남지 않은 아내의 볼썽사나운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그는 겁이 났다. 내 삶은 걸레조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