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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겨우살이 -이것이 인생일까?
12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길에 터를 잡은 민둥산이 있다. 골목에 간신히 자리를 잡은, 그 초라한 산의 중턱에는 나무가 모여 있다. (이는 골목과 골목으로 겨우 이어진 산동네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의 아슬아슬한 삶을 암시하는 묘사일 것이다.) 그 나무는 <흉흉한 소문>의 진원지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목을 매 죽고 누군가는 갓 태어난 아이를 내다 버리는 걸 나무는 목격하기 때문이다.
박형숙의 소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화자 <나>는 그 나무의 <마른 가지들이> 사나운 바람에 <배고픈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구슬픈 소리를> 내던 11월의 어느 날을 회상한다. 화자가 중학교 입학시험 원서 접수를 하는 날인 그날, <나>의 막내 여동생 <수영>이가 태어난다. 엄마가 보름이나 일찍 수영이를 낳았기 때문에 가족들도 미처 막냇동생의 탄생을 예상하지 못했다. 수영이가 태어나자, 사촌 언니는 <투박한 목소리로> 딸을 낳았다고 전하고, 아버지는 병원에 가보지도 않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먹을 게 부족한, 더구나 좁은 집에 동생이 태어난다는 게 반갑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으로 헐떡이는 엄마의 일상을 지켜본 <나>는 도리어 걱정뿐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동생이 태어나자 <나>는 돌변한다. <나>는 수영의 탄생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도는 바람에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 흥분은 동생이 <내 아이인 것 같은 허무맹랑한 기분>으로 비약하기도 하였다. 급기야 13살 <나>는 동생을 <끝까지 돌봐주어야지> 하는 다짐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월사금을 내지 못했다고 <맨발로 추운 복도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적 있다. 가난이 초래한, 그 치욕적인 경험 탓에 <나>에게는 학교가 <끔찍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 뒤 <나>는 공부보다 소설 읽는 재미에 빠졌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나>의 그 습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방과 후 어린 동생 <수영>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나>는 집안의 맏딸로 가족을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생각하고, 집안일을 <제일 먼저> 처리하였다. 고교 졸업 뒤 세무서 취직을 앞두고 있던 <나>는 때마침 발병한 엄마를 맏이로 간호하고 돕기 위해 취업마저 포기하였다. 그렇게 <나>는 아픈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키웠다. 그러므로 13살 어린 수영에게 <나>는 엄마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미팅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한다. <너 좋다는 이 남자한테 가거라> 하는 엄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나>는 그와 결혼한다. 물론 그 바람둥이에 주정뱅이 악습까지 몸에 밴 남자를 선택한 데는 그 남자를 구원해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자는 <나>의 포부도 없지는 않았다. 그게 오만과 독선임을 뒤늦게 깨달아도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어쨌든 <나>의 인생은 결혼 후 예측불허의 가파른 하향곡선을 줄곧 그린다. 이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의 결혼 생활의 세부(細部)만 개관해도, 그것은 행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결혼 생활 내내, 가난과 육아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의 남편의 폭음과 폭언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나>는 자주 엎어지고 또 자빠지는 삶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남편의 지속적인 행패로 <나>의 심신은 나날이 피폐해진다. 그 탓에 <나>는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남편에 대한 경멸도 종종 지우지 못한다. 급기야 남편에 대한 살의를 느낀 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화장실에서 쓰러진 남편을 방치할까 하는 악감정을 순간적으로 품기도 하였지만, 이내 그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산전수전 두루 겪은 화자가 자신의 쓰라린 인생 일부를 여동생에게 토로하는 방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영>의 삶과 엄마의 인생도 간헐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세 여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그 이야기의 중앙에 배치돼 있지만, 그 좌우에는 엄마와 <수영>이 각각 병립(竝立)하고 있다. 소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이를 통해 1960년대 이후 서울 산동네 빈민 가정의 여성이 겪어야 했던 여러 난관과 애환을 독특하게 전시한다. 이를 과감하게 압축하면, 그들은 달동네 민둥산의 나무들을 닮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전언(傳言)이다. 숲으로 우거진 풍성한 산이 아니라 서울 변두리 고지대의 헐벗은 민둥산에 기대서 겨우겨우 연명하던 그 나무들 가운데 하나는 <나>의 나무다. 그 나무는 평생 가난과 일에 시달리면서 가족을 부양하였다. 13세 소녀 시절에 일찌감치 그 나무는 여동생을 키우며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도 하였다. 결혼 후 <나>는 온갖 어려움에도 가내사와 육아와 남편 내조에 진력하였다. 그 나무는 평생 글자 그대로 가족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살았다. 그 나무는 가진 것을 다 내주며 줄곧 살았기에 정작 자신에게 남은 것은 이제 없다.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그 나무에는 잎사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겨울의 나무로 간신히 버티는 그의 빈손에 다행스럽게도 백석 시집이 전달된다. 그 속에 포함된 두 편의 시는 일생 아낌없이 주던 그 나무한테 이렇게 역설한다. ‘너는 갈매나무다!’
백석 시인이 말한 대로 그 갈매나무는 <드물다는 굳고 정한> 나무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나무다. 그것은 고고한 자태를 과시함에도 실존적으로나 현실적으로는 처량한 신세의 나무다. 그러나 시인은 거듭 강조한다. 하늘이 그 나무를 귀한 존재로 여겼기에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고. 그리하여 시의 한 대목에서 <나>는 위안을 얻으며 눈물을 쏟는다. 그건 <나>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부산물이요 쌓인 서러움의 분출일 것이다.
가난과 일을 늘 달고 다니며 겨우겨우 살아온 인생, 하루하루가 겨우살이나 다름없는 인생, 그게 과연 인생일까 의심스러워도, 그 빈한한 인생의 주인공도 <갈매나무>처럼 귀한 존재임은 분명하다고 이 작품은 강조한다. 그렇게 박형숙은 이 작품에서 도시화와 근대화의 격랑으로 휩쓸려 갔던 도시빈민의 딸에게 ‘그대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귀중한 갈매나무로, 잘 버티어서, 굳게 이겨내서, 참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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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나는 예배당이나 불당으로 들어가 기도하거나 묵상하는 대신에 나의 ‘서당’으로 입실한다. 종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명심하면서도 ‘현실 종교’에는 거리를 두고, 종교적 편견 없이 산다. 그동안 책이 나의 종교였을까? 종교였을 것이다! 그 안에서 時時로 광신도가 되기도 한다. 그 위험하고도 황홀한 우물에서 나는 제철 만난 개구리처럼 이따금 흥겨이 혹은 서럽게 운다. 오늘 나는 어떤 울음을 發露(발로)하였나! 내가 바르트의 책을 다시 살핀 건, 박형숙의 <모경>을 다시 읽고 싶어서다. 박형숙의 근작 소설집 <모경의 빛>의 모태가 된 이 단편소설은 나의 ‘애간장’을 태운 작품이다. 그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내 애가 타고 간장마저 녹았던 ‘별난 경험’을 토로하는 자리에서, 바르트의 통찰을 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사색이 바로 나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아직 그의 사유 근방에도 가지 못하고 그 먼 외곽에서 빙빙 돌고 있는, 빈한한 ‘정신적 프롤레타리아’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그의 철학은 이 글의 보이지 않는 밀알이 되었다. <모경>의 공간은 왕십리 산동네다. 일명 달동네로 불리는 그곳에는 <날림으로 지은 집>에서 일용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살아간다. 세계적 관심을 끈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그들의 삶이 무던히 조명되었다. 하지만 깡패들이 낮에도 어슬렁거리는 그 누추한 마을 사람들의 困困(곤곤)한 이야기를 최근 소설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런 달동네 도시빈민의 딸이 박형숙 소설가요 <모경>의 화자 ‘인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화자는 작가의 분신일 것이다. 푸치니의 명품 오페라 <투란도트(투란의 딸이라는 뜻)>를 패러디해서 부르자면, <왕십리도트>인 인해가 주인공인 엄마를 떠올리며 소설은 전개된다. 4녀 1남의 막내딸인 인해가 예닐곱 살 무렵부터 사춘기 시절까지 기억하는, 엄마가 남긴 단편적 에피소드가 이 소설의 줄거리다. 엄마 <모경>은 땅딸막하였지만 인해의 <견고한 울타리>이기도 했다. 모경은 불순한 남자들이 기웃거리는 산동네 골목을 파수꾼처럼 두루 살피며 네 딸의 성장을 견인하였다. 그이가 <항상 당당>한 자세를 견지한 것도 딸을 4명이나 키우는 그만의 특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도시빈민의 아내로 가난한 집안의 딸을 산동네에서 온몸으로 키우는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이 이 소설에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뻐드렁니>의 모경이 담임 여교사에게 보인 일화라든가,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전제군주처럼> 보일 때라든가, 모든 걸 손발로 해결하던 시절 집안일을 분산시키는 방식에서, 왕십리 ‘억척 어멈’의 일상과 지혜와 노동이 노출된다. 중학생이 된 인해에게 엄마가 <빤스는 자기가 빨아야지>라고 강조한 것도 그 단면이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보인 모경의 애정이 딸에게는 편애로 보여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을 터이다. 그러다가 모경은 텔레비전도 구비한다. 인해도 이제 <티브이 동냥>을 하지 않고 집에서 연속극을 즐기는 달콤한 시절을 잠시 보낸다. 하지만 어느새 인해는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도 어김없이 그에게 들이닥친다. 그와 친구의 집을 서로 방문하면서, <허름한 판자촌이 몰려 있고, 공동변소에 부엌도 같이 쓰고, 걸핏하면 눈물을 질질 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동네>, 인해 거처인 달동네의 실상에 그는 눈뜬다. 그건 <너한테 냄새가 났었어>라는 인해 친구의 말로 요약되는, <가난의 냄새>가 몸에 밴, 변두리 인생의 누추한 진상에 인해가 접근했음을 뜻한다. 설상가상으로 인해의 생리가 시작되고 감정도 불안정해질 무렵에 엄마의 위기도 도래한다. 기나긴 세월 동안 빈곤을 감내하며 다섯 자녀들의 양육과 고된 가사를 견디던 모경에게 갱년기 증상과 더불어 갖가지 위험한 정서적 정신적 인자가 엄습한다. 엄마의 몸과 마음이 함께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경은 여행으로 그 위기를 때때로 극복하기도 하고, <산꼭대기에서 산 중턱>으로 이사하거나, 출가할 딸들의 혼수품을 장만하거나, 혼수품으로 이웃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기도 하면서, 그 위기를 간신히 이겨낸다. 그 와중에 인해는 여고생이 되어 옷과 외모에 신경을 쓰지만 그가 발견하는 것은 <추리닝 차림의 여자애>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몸부림칠수록 더 괴로워지는 고통의 무한반복을> 보고 만다. 그에게 <마음의 빗장>이, 그 결말인 양, 생긴다. 말도 그의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위축된 일상을 보내며 불길한 불안도 머금으며 그는 공부에 열중한다. 이처럼 모경과 인해는 <포물선>이 되어 날이 갈수록 서로 만나지 못하고 제 갈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포물선의 양극에서, 서로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지점에서, 모녀의 접점은 이제 실종되기 직전이다. 모경이 꿈꾸던 대학에 입학한 자랑거리였던 딸이 운동권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을 살려야 할 인해가 <매캐한 최루가스>를 묻혀 오고 무단으로 외박하고 술을 마시며 데모에 투신하는 여대생이 된다. 그런 딸을 걱정하던 엄마는 성당을 찾아가 간절히 기도하고 딸에게 회초리도 들고 손도 잡아보고 딸의 불온한 책들도 불태우지만 이미 딸의 정신은 민주화를 위한 변혁의 길로 가버렸다. 급기야 인해가 21살 때, 모경이 온갖 방법으로 가지 않으려 했던 그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자를 찾으며 울부짖었을 모경은, 어느 날 자살을 선택한다. 그 순간에도 인해는 공안정국을 타도하려는 이들과 함께 아스팔트로 학교로 뛰어다녔다. 인해의 고통과 슬픔은 엄마의 죽음조차 곁에서 지키지 못한 데서 한층 증폭된다. 엄마가 성당을 찾아가 애원의 기도를 올리고, 병원을 찾아가 우울증 치료를 받기도 하고, 사할린으로 떠난 오빠를 찾아 헤맸다는 사실을 인해가 무심하게 넘긴 것도 그 원인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그 늦은 깨달음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 인해의 고통과 슬픔은 그의 삶과 사유 到處(도처)에 뿌리내린다. 소설가 박형숙의 과묵과 아픔은 이때 잉태된 것이리라. 30여 년이 지나 박형숙은 그 흔적을, 너무 아파서 아물지도 않는 그 상처를 여기서 우선 조금 드러낸다. 그리고 아마 그는 남몰래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그의 울음을 듣지 못하지만 읽는 동안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들리는 그의 통곡을 저절로 들을 수밖에 없다. 소설 아닌 곳이었다면 작가는 실컷 울었으리라! 그러므로 이건 박형숙의 독특한 서사적 <애도 일기>다! 왕십리 달동네에서 인해와 엄마가 함께 연탄재로 만든 꽃밭에서 피었던 <사루비아, 맨드라미, 과꽃>이 오늘 나의 가슴에도 발화한다. 남루한 산동네에서도 꽃보다 예쁘게 자라는 딸 옆에서 엄마가 불렀던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하는 노래가 왼쪽 귀머거리인 내게도 생생하게 들린다. 엄마는 꽃을 노래한 것일까? 바람 부는 옥상에서, 엄마 곁에서, 억센 손으로 가계를 일구듯이 예쁘게 꽃밭을 가꾸는 엄마를 지켜보며 노래를 듣는 딸에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그것은 담은 것이 아닐까! 그 앞에서 <스러지는 빛을 받으며>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은 점점 내 흐린 눈을 적시며 저녁노을처럼 붉게 내 눈에 보이고, 드디어 그건 다시 바르트의 <밝은 방>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박형숙의 소설은 우리에게 노래로 들어와 사진으로 이어지더니 窮極(궁극)에는 예술로 독자의 心琴(심금)을 두들긴다. 엄마를 잃은 효자와 불효자 모두에게 그의 작품은 마침내 엄마에 대한 경의와 고마움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지렛대로 승화된다. 그 길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걷기는 참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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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나간 한 시절을 배경으로 절절하게 써내려간 어느 가족에 관한 연작소설이다. 각 단편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서울의 한 산동네에서 성장한 1남4녀와 부모의 이야기가 다양한 주제로 변주되며 지난 시대와 작가의 마음의 풍경들을 드러낸다. 그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 87년의 명동성당, 평생을 '노동 기계'로 살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작고한 아버지, 힘든 환경에서도 가족을 이끌었고 가끔은 딸에게 빛이 되어 주기도 했던 엄마가 등장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갈등하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속에도 어떤 아스라한 빛이나 따스함이 있었음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진솔하게 쓰여진 한 편 한편을, 비슷한 시절을 통과해온 독자로서 책 곳곳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나의 지난 시절에 있었을지도 모를 빛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작가에게도 글을 쓰는 과정이 마무리 짓지 못한 추도와 치유의 시간이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