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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산다. 시를 읽는다. 그냥 읽는다. 끌리는 대로 읽다 꽂히는 시가 있으면 메모한다.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시. 그런 모호함이 좋다. 소설에도 모호함이 있지만. 왠지 모호와 난해는 시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시인 안미옥의 에세이 『빵과 시』는 시를 쓰는 마음, 시를 준비하는 마음을 빵과 연결시켜서 보여준다. 시를 좋아하는 이라면, 아니 빵을 좋아하는 이라면 반가고 기꺼울 책이다. 일상이 시가 되는 순간, 아침달 시리즈 ‘일상시화’의 마지막이라니 아쉽다. 시인은 시를 언제 쓸까, 떠오르는 시상을 어떻게 붙잡을까. 시어에 숨겨진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시인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따라오는 생각이다. 시를 써야지 준비하면 바로 시를 쓸 것 같은 생각은 독자의 오만이다. 단 번에 시가 되고 단 번에 소설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러니 아무 말이나 쓴다는 시인의 글은 괜히 반갑다. 아무것도 아닌 나도 뭔가 쓰려고 하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시간을 정해두고 그 안에 쓰려고 노력하니까. 쓴다는 건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건 모두에게 같다는 게. 시를 쓰기 전에 한글 창을 켜고 시간을 정해둔 뒤 아무 말이나 쓴다. 일종의 모드 전환을 위해 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시의 주제와 상관없이 워밍업의 시간은 늘 필요하다. (33쪽) 『빵과 시』이라는 제목답게 시인은 빵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빵, 자주 가는 카페, 친구들과의 만남, 동네책방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빵을 좋아하는 이라면 빵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모양과 맛을 떠올릴 것이다. 잘 모르는 빵이 등장하면 나는 검색을 했다. 아, 이런 빵이구나. 시인이 좋아하는 카페가 나오면 나는 또 검색을 했다. 내가 모르는 공간, 한 번도 간 적 없고 앞으로 방문할 일이 없을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을 상상했다. 「이혜와 서울」란 이름의 카페는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 같다.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한 어떤 그리움까지 생겼으니까. 빵은 어디에나 있다. 빵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또 가장 멀리 있는 형태로. 손 닿을 곳에. 마음 닿는 곳에. 시가 그러한 것처럼. (62쪽) 가만가만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아이의 정직한 마음은 웃음과 감탄을 불러온다. 빵과 시에 대한 글을 쓴다는 엄마에게 관심을 보이고 천변의 돌 다리를 건너며 멋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온다는 아이.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생각하면 생각이 밖으로 나오고 문장이 다음 문장을 쓸 수 있게 만든다고 이어진다. 시인처럼 좋은 시와 문장을 쓰는 삶은 아니지만 생각이 행동으로 나온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돌아보게 된다. 시는 흐르고 있는 것일까. 멈춰 있는 것일까. 흩어지는 것일까. 가라앉아 있는 것일까. 사라진 것일까. 새겨진 것일까. 어떤 시는 투명한 상자 안에 서 영원히 흐르고 있는 모래바다 같다. 가라앉으면서 흐르는. (83쪽) 시인에게 모든 건 시로 연결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글을 읽기 전까지는 시인이 원하는 시와 독자가 어떻게 읽어주기를 바라는지 몰랐다. 모든 시에는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은 질문을 발생시키고 삶과 고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 마음은 당근을 먹으면서 당근 케이크를 생각하고 자꾸 씹히는 당근 조각 같은 시로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시가 품은 괴로움은 시인이 시를 쓰며 넣어둔 씨앗은 아닐까. 시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동물 앞에서도, 생활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끄러운 일 앞에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생활 없이, 이웃 없이, 사랑 없이, 반성 없이는 시도 없고 시인도 없다. (139~140쪽) 빵이 좋아서, 시가 좋아서 만난 책. 시가 더욱 궁금해졌다. 바게트빵을 상어라 생각하는 아이를 키우고 유서를 편지처럼 보낸 엄마에게 말하지 못하고 쓰는 사람이 된 시인. 그 마음이 시가 되어 나와 닿았을 순간. 시를 읽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일이고 고통을 읽는 일이고 헤아리는 일이다. 다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어 오독하며 시를 읽는다. 사람이 자라면 눈물도 더 크게 자란대 다들 이걸 어떻게 감추고 살까 매일 한 뼘씩 커지는 눈을 어디에 묻어두고 있는 걸까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거울 속에 감춰둔 것 같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울 것 같은 기분이 되나봐 너는 빵 속에 숨겨두었지? 그래서 울고 싶을 때마다 빵을 먹잖아 부드러운 빵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너는 매번 딱딱한 빵을 먹는다 잘 씹히지도 않는 빵을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고 (시 「적란운 위에 쓴 편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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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살면서 시를 생각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간혹 기억하는 시라면 감상적이었던 젊은 시절 읽었던 시들 정도로 빈약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괴로워 한 시인이 기억나고, 손끝으로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라면서 그걸 뺀 만큼 사랑한다는 사랑고백,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을 지나며 만나는 저녁놀 정도입니다. 안미옥 시인은 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시는 기존의 경계를 허물기 때문에 자유롭고, 한 문장 한 문장 쓰여지면서 자신의 지경을 새롭게 구축하기 때문에 경계를 견고히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를 짓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와 시인의 힘을 빌려 언뜻 감성을 느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시는 절실함이 다릅니다.
이 책은 빵과 얽힌 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빵과 시가 절실하게 만나지는 못합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경우 주제나 소재를 제시하고 글짓기를 시키는 경우는 있겠지만, 재주만 드러난 글이 좋은 글이 아니듯, 주어진 주제나 소재에 대한 글이 뛰어날 수 있는 이유는 재주가 아니라 절실한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는 빵을 좋아합니다. 습관적으로 빵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프랜차이저 빵집은 철저히 배척하는 편입니다. 동네빵집이라면 반드시 들러 그 집의 식빵과 단팥빵을 맛봅니다. 중국집 요리사를 평가할 때 그 집의 짜장면을 먹어보면 안다는 말이 있듯이 그 빵집의 제빵사 솜씨는 식빵과 단팥빵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제 나름 기준입니다. 불행히도 요즘은 당뇨 때문에 단팥빵을 제한해야 해서 빵집을 들러도 흥이 나진 않지만 한 개 정도는 반드시 사서 아내에게 줍니다. 아내는 단팥빵이라면 조금씩 먹는 편입니다. 아내는 빵을 좋아하지 않지만 단팥빵과 소라빵, 그리고 소보루빵에 묻힌 쿠키 크럼블 정도는 먹습니다.
얼마 전 사위가 쿠폰이 있다며 빵집에 가자고 해서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사위가 한턱낸다는 소리에 나도 군말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아내는 자기가 가자고 했으면 따라나서지 않았을 나를 보며 핀잔 비슷한 눈총을 쏘았지만 기분이 좋아보였습니다. 둘만 나섰으면 저리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싹싹한 사위 때문에 흥이 났을 겁니다. 이것저것 한 봉지 사들고 집에 들러서 며칠 동안 잘 먹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소라빵을 내가 마지막으로 먹은 다음 날에 아내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내 소라빵 어디있어요?”
빵을 좋아하지 않던 아내가 ‘자기빵’이라고 말을 할 때 ‘아차 큰일났네’ 절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먹었어요” “내 빵인데...” “사올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대답을 하는 아내는 사위가 사 준 소라빵이 사라져 실망한 듯 보였습니다. 저녁에 운동을 나가서 돌아오면서 소라빵을 사서는 아내에게 줬습니다. 필요없다던 아내는 빵봉지를 받아들고는 강아지 뼈다귀를 숨기 듯 한쪽 구석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빈봉지를 확인한 저는 제가 사온 빵을 선뜻 받아들고 혼자 먹으려고 따로 둔 아내의 모습을 본 것이 아주 오래전의 일이란 것을 기억했습니다.
작가의 ‘빵과 시’를 읽고 감상을 적는 나의 글은 여전히 기존의 경계를 허물지 못합니다. 일상을 살면서 저지르는 배려심의 부족을 느끼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상 정도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손끝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라고 그 동그라미를 뺀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도 못할 것이고, 타는 저녁놀 강둑길을 같이 걸을래? 아내에게 권하면 “으언다” 답에 쓸쓸함도 느낄 겁니다.
이번 설에 아내와 둘이서 한탄강, 임진강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들른 빵집에서 아내가 고르는 빵을 확인하고는 제가 아내의 빵 취향이 진화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전히 좋아하진 않지만, 고르는 빵의 종류가 세련되었습니다. 남편의 뜻이 ‘남의 편’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아내가 외로웠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또 어떤 마음일까요. 시를 읽을 필요 있습니다.
원태연 시인 두 번째 시집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