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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껴 쓰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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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 - 저자 : 권용선 / 문학박사 - 출판사 : ㈜역사비평사 / 서울 - 출판일 : 2014년 10월 1일
2. 리뷰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7.15 ~ 1940.9.26.) : 유대계의 독일 평론가. 보들레르, 프루스트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편, 1925년부터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1961), 《역사철학의 테제》 등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발터 벤야민” 중에서
나는 이과다. 사회과학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중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오로지 우연이다. 인문고전 추천 도서 중에 이 책 한 권이 끼어 있었고, 이름만 들어봤지 뭐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공부법’이라고 하니 한 번 꺼내어 몇 장을 뒤적거려 보았다. 우연히 그 중에 눈에 드는 문장이 있었고, 그렇게 책이 수중에 들어왔다. 책이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진주 같은 책을 골라 읽을 것인가. 가끔은 우연이 이끄는 운명적인 만남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책을 읽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도대체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은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었다. 위에서 보듯, 사전의 인물 소개는 아주 짤막했다. 그 아래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긴 했지만 오십보백보다. 결국 독일의 사회학자, 문학평론가라는 아주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독일계 유태인으로 1900년대를 보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을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시대는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고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까지 그의 삶은 어느 한 순간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벤야민에게 있어 그런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오직 공부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933년 이래 파리에서 벤야민의 삶은 평온하지 않았다. 그는 ‘여행자’가 아니라 ‘망명객’, 즉 조국의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으로부터 목숨 걸고 탈출한 도망자였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를 팽개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것만이 개인적 불행뿐 아니라 비루하고 염치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며, 고장 난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다시 살 만한 곳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방식이라고 그는 믿었다. 대혜종고 스님의 말씀처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하는 사람, 벤야민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 본문 중에서
무한한 지식의 탐구 속에서, 그는 자신을 가로막고 억압하는 수많은 현실을 빠져나와 오히려 그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알아보고, 도전한다. 프루스트, 보들레르, 카프카, 세 작가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생각하고, 글로 적어 남기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 벤야민은 암울한 시대를 버티어 냈다.
“벤야민은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자신이 떠나온 곳, 즉 베를린을 다시 발견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에 관한 에세이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를 알게 되기 전에 먼저 모스크바를 통해 베를린을 보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모든 여행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여행은 낯설고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지만, 언젠가는 일상의 삶이 있는 원래의 출발지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점에선 삶의 예외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 혹은 여행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낯선 곳의 경험으로 익숙한 삶의 공간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벤야민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 본문 중에서
그는 여행을 사랑했다. 여행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에서 도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행을 통해 자신이 현재 서있는 현실을 더욱 새롭게, 심층적으로 바라보았다.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 낯설음을 유발하는 거리를 보들레르와 같이 ‘예술적으로 산책’하면서 그는 익숙한 것이 주는 매너리즘 뒤편의, 진짜 현실을 발견해 낸다. 세상이 주는 ‘가짜 아우라’에 현혹되지 않고 도리어 그 베일을 벗겨내는 쾌거, 그것이 벤야민의 미완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결실이다.
“벤야민이 역사를 바라보는 유의미한 틀로써 프루스트를 염두에 둔 것은 역사를 연속성의 관점에서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일반적인 역사가들의 방식에 반대하며, 역사를 통해 현재를 픙부하게 인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과거를 고정된 사실로 인식하고 시간의 연속 과정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이미지’로 인식한다는 것은 역사를 “구성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며, 이때 역사가 구성되는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Jeztzeit)으로 충만된 시간”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벤야민이 볼 때,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축적된 과거의 사실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으로 지금 ? 여기의 삶에 간섭하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보들레르를 통해 산책자의 시선을 배웠다면, 프루스트를 통해서는 통찰의 방법을 배운다. 마치 옛 영화 필름과 같이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한 컷을 똑 떼어내어 현실로 가지고 온다. 그 한 컷을 지금의 현실에 띄움으로서 현재의 삶을 새로운 시야로 조명하고 통찰하는 것이다. 왜 일까. 벤야민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결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더 현실에 파고드는 모습을 보인다. 현실에 지지 않는 참 지식인의 모습이란 이런 것일까. 아니면 현실에 대항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공부밖에 없어서였을까. 어쩌면 벤야민에게 있어 공부는 그의 삶의 방식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오직 공부가, 그가 세상과 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카프카는 이제 그에게 통찰을 표출해내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자신의 아픈 곳까지도 파고들어 고통 가운데 내어 놓는 통찰의 결과물, 글이다. 그의 내면에서 이미 충분히 무르익은 통찰은, 담배 연기와 같이,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와 같이, 가볍고 리드미컬하게 흘러나와 글이라는 매개로 정착된다.
“벤야민이 생각하는 훌륭한 작가란 어떤 사람일까? ...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 <훌륭한 작가>, 227쪽 누군가의 생각과 경험에서 배우지 않고는 완전히 새로운 글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벤야민이 말한 ‘생각하는 것’ 속에는 우리가 읽고 보고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을 날것 그대로 둔 채가 아니라 충분히 비판하고 숙고하여 다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능력까지를 포함한다.” - 본문 중에서
관찰, 사유, 통찰, 그리고 글쓰기. 이것이 그의 공부법이었다. 아주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련의 과정. 이것을 위해 벤야민은 프루스트가 되고, 보들레르가 되고, 카프카가 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하면, 그를 나에게로 끌어와 내 식으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 반대의 과정을 거쳤다. 나를 프루스트에게로 끌어가 온전히 프루스트와 같이 사고하고 통찰한 것이다. 세 작가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그들의 특수성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결과 벤야민은 자신만의 공부법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사유방식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오랜 세월 이미 자신의 내면으로, 행동으로 체화된 탓이다. 이미 틀이 잡힌 그릇에 새로운 물을 부어본 들, 그 물은 여전히 그릇의 모양 그대로 담길 뿐이다. 이것이 더 오래 고착화 되면, 우리는 그것을 편견과 고집이라 부른다. 우리가 벤야민에게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공부법은 자신의 틀을 깨어내는, 바로 그 일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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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지식인의 아우라'
프롤로그에 1939년경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 벤야민의 사진이 실려 있다. 앞에 기록카드를 수북이 쌓아놓고 한 손으로는 카드를 넘기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곧바로 메모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자세, 입은 다문 듯 보이고 표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우 진지할 것 같다. 진지할 것만 같은 아우라가 물씬 느껴진다.
이것이 사유하는 지식인의 초상일까. 적어도 이 책에서 따라가고 있는 벤야민의 이미지를 매우 잘 반영하고 있는 사진이자 표지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 그대로 벤야민의 공부법을 다룬 책이다. 다만 그리 단순하거나 익숙한 '공부법'은 아니다. 그가 삶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구체적인 실천수단이자 도구로써 어떻게 '글쓰기'에 임했는지를 엿보고 있다. 과정에서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일방통행로' 등을 포함해 그가 쓴 글들이 자연스럽게 인용된다.
벤야민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는 경우 좀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공부법'이 궁금한 독자라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다. 아, 아주 큰 틀에서 저자가 말하는 그의 '공부법'은 결국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독자로서 하나 덧붙이자면, 역사가는 연대기적 연속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단지 축적된 과거의 사실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으로 지금-여기의 삶에 간섭하기 때문(p.138)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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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학을 전공했고 벤야민에 대한 해설서를 쓴 바 있던 한 저자는 이 책에서 독일의 유태인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을 파고들었다. 보통 어느 인물의 행위나 사상적 내용을 파고들 법한데, 그 사람의 행동과 사상의 수단이면서 방법이 되었던 ‘공부법’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특한 점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주된 관심은 벤야민이 품었을 법한 질문을 추적하고, 그 질문에 벤야민이 어떤 경로로 답을 찾아갔는지,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고,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11쪽). 저자에 따르면 벤야민은 학자도 종교인도 번역가도 철학자도 시인도 아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벤야민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이다(16쪽). 이때 글쓰기는 그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 더불어 시대의 문제에 맞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항상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29쪽). 벤야민은 사람들에게 으레 그러하다고 강요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흠집 내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이미 자리 잡은 길에 대해서는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는 규격화한 정규 학교 공부에 싫증을 내면서 독서토론회를 조직하고, 청년운동 단체를 조직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기존의 글쓰기 장르나 분야에서 요구하는 일반적인 글쓰기의 문법에 대해서도 반항하였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방식이었다. 파리를 여행하고 경험할 때에도 지도에 그려져 있는 형태가 아니라, 자신만의 도시를 ‘헤매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문화가 담겨 있는 여러 파편들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를 통해 새롭게 공간을 재편함으로써 ‘좀 더 인간에 어울리는 미래를 선취’하려 하는 그의 목표(107쪽)를 실현시키려 하였다. 또 남들이 으레 할 만한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쓸모없어 보이는 자료들도 수집하여 자신만의 의도에 맞게 정리하여 새롭게 배치해갔다. 이런 삶을 살다보니, 그는 교수가 될 수 없었고(애초부터 원하지 않았을 수 있다), 끝내 망명에 실패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그는 괴짜였고, 삐딱한 인물, 주변과 조화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의 삶, 그의 공부법은 실패한 것일까? 이를 두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표현한다면 저자의 의도 또는 벤야민의 의도하고는 멀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벤야민은 끊임없는 ‘야인’이었다. 그가 글쓰기에 대해서 남긴 말을 인용해본다. “지식인의 프롤레타리아트화는 한 사람의 프롤레타리아트조차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계급은 지식인에게 교양의 형태로 하나의 생산수단을 부여했기 때문이고, 또 이 교양의 특권에 의해서 지식인으로 하여금 부르주아계급과 연대 의식을 갖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생산자로서의 작가」(이 책 244~245쪽) 이것의 의미를 저자는 지식인, 작가는 곧 자기 출신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작품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는,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고자 하는 글을 쓰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245쪽). 책에 대한 두 가지 아쉬움 또는 의문이 있다. 첫째, 벤야민을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를 수 있다. 벤야민이 세상을 의심하고 불화했던 양상을 그의 저작에서 나오는 내용이라든가, 그의 정치적 행동, 인간 관계 등을 통해 좀 더 부연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공부법만 갖고 이해하는 데는 다소 추상적이고 생소한 느낌도 든다. 둘째, 벤야민이 추구했던 삶을 벤야민은 스스로 어느 정도 이뤄낼 수 있었는지 이에 대한 저자 나름의 냉정한 평가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이러한 생각 역시 기존의 방식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반증할까? 그래서 저자는 벤야민의 공부법을 그저 보여주는 방식, 따라가는 것에 그치고 말았던 것일까? 끝으로 되물어보자. “손쉬운 화해에 대한 의심과 불화”(259쪽)하려면 권력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을 나는, 우리는 할 수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