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중세는 한나라의 멸망 이후 삼국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로 구분된다. 이 때 우리 나라와 일본은 고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전통적인 농촌구조의 붕괴현상이다. 고대의 농민들은 성안에 주거하면서 성밖에 있는 농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당시의 한반도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중국사가들은 미개한 족속들이라고 여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는 정치의 중심지가 되고 농민은 성밖으로 밀려나 촌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농지 부근에 살게 되면서 농작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으나 치안 상의 위험성은 더욱 높아졌다. 둘째, 장원의 등장이다. 농민은 세금에 짓눌리면서 점점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사이 대토지를 소유한 자는 가난한 농민에게 땅을 사서 더욱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결국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장원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가게 되었다. 한족 정권이 스스로의 통치능력을 잃고 타락해가는 사이에 북방의 유목민족은 힘을 길러 마침내 중원을 침공하여 점령한 후 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패업을 이루었다. 하지만 약탈과 통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문화적인 역량을 갖추지못한 그들에게 거대한 중국인들을 다스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목민족에게 황제란 초월적인 지위도 아니고 각 부족장들 위에 있는 또 하나의 귀족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중국중세사를 다루면서 유럽의 역사에서 당시와 유사한 점을 함께 제시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또 부분부분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기도 한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을 마치 당연히 언급해야할 역사처럼 제시한 곳도 있다. 일본사에 취약한 까닭에 선뜻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어차피 취사선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저자가 쓴 중국중세사는 없는가보다. 이 시대를 다루면서 우리 역사와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어서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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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시대에는 전국에 거의 3만을 헤아리는 도시가 있어, 그 크고 작음에 따라 향, 정으로 불렸는데, 그 가운데에는 당당하게 고대 독립 도시 국가의 후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한 대에는 향에 삼노 색부 등의 지방 유지가 있고, 정에는 정장을 두었다. 이들 소위 향 정의 직으로 삼노는 교육을 담당하고 색부는 부세를 담당하고 정장을 경찰의 임무를 담당했다. 때로는 천자조차도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18쪽 대대로 관료의 최고지위인 삼공에 도달한 가문이 나왔다는 것은 결코 그 혈통이 유전적으로 우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시의 정계가 고정화되어 유동성이 결여된, 말하자면 동맹경화증에 빠진 상태를 드러내 것이다. 즉 조정의 관위는 점차 소소의 특권가문이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2-23쪽 일민전에 실린 사람들은 정계에 들어가는 것을 단념하고 군신 관계에서 이탈하여 개인의 세계에 살려고 하는 반세속정신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벼슬하는 것을 단념하고 평민의 신분으로 있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후한이라는 시대가 매우 벼슬하기 어려운 시대였던 탓도 있었다. 26쪽 뇌물과 개인적 인연에 의한 엽관운동이 성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을 이룬 세력은 외척과 환관이고 이들 모두 우연한 기회에 천자의 측근 지위를 획득한 자들이다. 이런 세력은 정규 과정을 당당히 거쳤다고 자부하는 청류귀족 그룹에서 본다면 더러운 탁류였고 함께 일할 수 없는 소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청탁의 싸움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한때 탁류의 세력이 승리해 반대파를 탄압한 것이 소위 당고의 금이다. 42쪽 전선에서 대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군인들에게 둔전을 시켰다. 위의 둔전은 촌락 형태를 취했다. 호족의 장원 경영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대도시가 붕괴하는 한편, 새로이 분산된 집락이 도처에 생성되었다. 본래 촌이라는 글자가 고대에는 없었다. 촌이라는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둔전에 의한 촌락을 처음에는 촌이라고만 썼지만, 후에 같은 소리를 내는 촌자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대부터 계속되어 온 도시와 새로이 생겨난 촌락의 병존이 중국 중세 사회의 특색이다. 이 같은 것은 중세 유럽에서도 볼 수가 있다. 50쪽 구품관인법은 우선 군마다 출신관료 가운데서 중정이라는 관직에 임명하여 같은 군 안의 관리의 덕행과 재능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평점은 1품에서 9품까지로 나뉜다. 이것을 향품이라고 칭한다. 다음으로 조정 관리의 지위도 마찬가지로 1품에서 9품까지로 나눈다. 예를 들어 삼공은 1품, 대장군은 2품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을 관품이라고 한다. 72쪽 삼국지는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것이므로 위를 정통으로 본다. 그런데 동진시대가 되면 사정은 바뀐다. 동진은 정통 천자의 혈통을 이었지만 중원을 오호에게 점령당해 강남으로 도망간 정권이기 때뭉에 이와 비슷한 처지에 처한 촉나라에 대한 동정이 강해졌다. 그래서 동진 시대에 나온 습착치의 한진춘추는 촉을 정동으로 하여 삼국의 역사를 다시 썼다. 시대가 흘러 송대가 되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위를 정통으로 하여 기술했다. 북송까지는 선양이야말로 새 왕조에 정통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송이 되면 분위기가 다시 바뀌어 남송의 입장은 완전히 동진과 같아서 주자의 통감강목과 같은 것도 자치통감을 바탕으로 쓴 것이지만 삼국의 부분만은 촉을 정통으로 다시 기술하였다. 89-90쪽 여남왕에서 동해왕에 이르기까지 8명의 제후 왕이 번갈아가며 권력을 장악하거나 장악하려고 싸웠는데 그 때마다 무력이 동원되었다. 모두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정권다툼에 안달한 결과 그 같은 비극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내란이 자멸이라는 형태로 가까스로 종식되었다고 해도 비극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거대하고 비참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민족의 봉기였다. 100쪽 흉노의 한에서 시작하여 이후 계속 진행된 이민족의 봉기 그들의 중원 정복은 중국사회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은 중국 도시의 변질이다. 한 대까지 중국 사회는 크고 작은 농업도시의 집합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후한 때부터 호족이 중심이 되어 도시에서 떨어진 시골에 장원을 설치하고 성 안으로부터 농민을 불러내어 예속시켰는데 바로 여기에서 촌락 형태의 취락이 출현했다. 종전의 농업 도시가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05쪽 석호는 10살인 석세를 태자로 정하고 멀지 않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다음과 같이 개탄하였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못된 자식들만 낳았는가. 이 아들이 하다못해 20세가 될 때까지 살아 있어도 좋으련만 … 그러나 그때는 살아 있어도 이미 쓸모없게 노쇠해져 있을 것이다” 128쪽 동진은 북부 군대를 출동시켰다. 지휘관으로는 일류귀족인 사석과 사현 등이 임명되었다. 동진군은 비수를 건너 북군을 공격하고 그 선봉을 무찌르자 도망치기에 바쁜 오합지졸의 무리는 모두 패하여 퇴각하였다. 부견 자신도 그가 타던 수레조차 버리고 말을 타고 도망쳤다. 142쪽
환온은 유유히 건강에 진입하여 우선 사마원현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내외의 병권을 획득하였으며 일족을 지방의 요지에 배치하고 최후에 유뢰지를 지방관으로 전출시켜버렸다. 동진 조정에서는 이제 환현에 반대한느 세력은 없었다. 이와 같은 때에 귀족정치가는 완전히 무기력하게 되었고 다만 환현의 기색을 살필 뿐이었다. 환현은 자신의 지위를 승상에서 다시 한 단계 높은 상국으로 올렸으며 초왕이 되어 백관은 모두 그의 지휘 아래로 들어오도록 했다. 여러 방면에서 환온 타도의 군대를 일으키는 자가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경구에 있던 유유의 거병이었다. 유유 등의 의군은 파죽지세로 멀지 않은 수도 건강으로 밀어닥쳤다. 천자가 된 지 3개월 째 되는 환현은 당황해서 허둥지둥 수도를 버리고 이전의 근거지인 형주로 도망쳤다. 한편 부견이 죽은 후 장안에는 전진의 저족과 후진의 강족 사이에 숙명적인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155쪽
후진의 요흥은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서역의 고승인 구마라십이 후량의 여융 밑에 있자 그를 자국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병사를 출동하여 양주를 공격하도록 했다고한다. 요흥이 구마라십을 위해 불교 경정을 번역하는 사업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은 후에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오호의 군주에는 불교신자가 적지 않았다(소국에 어울리지 않는 문화사업은 국력을 피폐시켰고 유유는 바로 그 기회를 겨냥하여 낙양과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상에 보기 드문 폭군이었던 후조의 석호도 불교에 심취하여 서역의 승려인 불도징을 그의 수도인 업에 불러들여 장려한 불교사원을 수없이 건설하였다. 163쪽
일단 송의 유씨와 제의 소씨를 배출해낸 망명의 군입계급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 후한 말 이래 중원을 날뛰었던 이민족 군대의 계통이 농후하게 섞여 있어 그 기질과 풍습이 남쪽으로 내려온 후까지 전해져 온 것은 아닐까? 193쪽
본래 삼국 위 이래의 구품관인법은 당시의 대세에 밀려 귀족적으로 운영된 결과, 향품의 사정은 매우 불공평하게 실시되어졌다. 즉 이미 획득된 관위가 그대로 어느 가문의 등급으로 고정되어 어떤 가문은 관위 2품에 오를 수 있는 가문으로, 또 어떤 가문은 관위 3품까지밖에 오르지 못하는 가문이라는 식으로 등급이 성립되었다. 197쪽
오호의 투쟁과 대립은 북위의 통일에 의하여 진압되어 상호간의 혼합과 동화의 방향으로 향하였다. 북위 왕조의 역사적 의의를 유럽사에서 유례를 구한다면 우선 클로비스 왕토의 메로빙조 프랑크 왕국에 비교할 수 있다. 사실 북위의 지배하에서 일단 진흙에 버려졌던 중국 고대 문명의 전통이 탐구되고 부흥될 기미를 보였기때문이다. 태무제를 이어 즉위한 그의 손자 문성제는 태무제 시대의 이상한 긴장 정책을 고쳐 온화한 정치를 행했다. 불교 배척도 완화되고 승려의 존재가 허용되었다. 조정에서는 중국인 출신의 노정치가 고윤이 등용되었다. 그는 태무제에게 죽임을 당한 최호의 동료였는데 신중함과 선견지명으로 폭풍우가 지나가는 것같았던 태무제의 치세에도 화를 면하고 이제 문성제 시대에 등용되어 최호를 대신하여 중국화정책을 추진하였다.207쪽 풍태후는 개인적으로 실덕이 많았으나 권력욕이 강한 여섣에게 공통된 성격인 결단력이 뛰어난 여걸이었다. 북위적인 정치제도가 중국화해야 하는 추세를 일찍이 예견하고 삼장제와 균접법 같은 새로운 정책을 채용했다. 남편 문성제가 죽은 뒤, 아들 헌문제와 손자 효문제의 초기에 걸쳐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풍태후는 실권을 장악하여 손자인 효문제의 후견인이 되어 조정을 총람하였다. 이 상태는 그 후 효문제가 24세가 되던 해인 15년간 풍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보통 효문제의 제도개혁으로 불리려진 대부분의 것은 실은 풍태후의 방침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209-210쪽 북위는 이미 도무제 때에 그 때까지의 씨족을 해산하고 부족민을 중앙 정부의 통치하에 귀속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곧 실제 저치가 원칙대로 운영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종래의 족장이 봉건 영주나 관료의 형태로 되어, 여전히, 특권계급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풍태후의 섭정 중에 행해진 삼장제는 이같은 씨족적 단결을 파괴하고 인민을 소가족으로 환원할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인민의 5가를 1린으로 하여 인장을 두고, 5린을 1리로 하여 이장을 두고, 5리를 1당으로 하여 당장을 둔다. 인장 이장 당장을 3장 또는 3정이라 칭하고, 요역 면제 등 특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각자 그의 담당 구역의 호구 조사와 세역의 징수 책임을 부과시켰다. 이렇게 하여 정부의 통치력이 가족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다음에는 가족 내의 인원 특히 노동력이 있는 성정에까지 미치도록 노력하였다. 그것이 균전법으로 나타났다(485). 정부는 전란으로 황폐화되고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정부 소유로 귀속시키고 토지를 노동력에 따라 분배하고 그 대가로 조세와 요역을 제공받으려고 유도했다. 211쪽 북위 왕조가 중국화하여 순수한 중국 귀족으로서 중국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그 때까지의 국도 평성을 그대로 수도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았다. 효문제는 마침내 낙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이제까지의 영광스러운 도성을 버리고 패자인 중국의 옛 수도로 천도하는 것은 민족적 긍지가 높은 장로들의 반감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효문제도 주도면밀한 준비를 갖춘 뒤에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우선 이와 같은 의도를 숨기고 남조를 토벌한다는 명목 하에 대군을 이끌고 전선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낙양에 이르자 더 이상 전방 전선으로 진군을 보류하고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낙양을 도읍으로 정한다고 발표하였다(493). 216쪽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중국인 출신의 귀족문화인들이 조정에 등용되고 학교가 세워졌으며 중국적인 관제가 세워지고 복장도 중국화되었음은 물론, 그 위에 조정의 용어까지도 중국어가 사용되어 모국어인 선비어나 그밖의 호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북망민족의 성을 단번에 짧게 고치고 왕실의 성인 탁발씨는 원씨로 바꿨다. 원이라는 것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의미이다. 217쪽 한화정책으로 북위 정권의 기반이었던 선비족의 군인집단은 그 지위가 낮은 자일수록 중국화가 늦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대로 선비어를 말하고 일상적으로 무예를 익혔으며, 병역에 복무하여 전쟁터로 쫓아디니다보니 중국화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조정의 급격한 중국화에 대해 아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정의 중국화는 중국 귀족을 정치상에서 우대하고 대대로 뼈대있는 혈통의 무사인 선비족 무장들에게는 그 출세의 길을 막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218-219쪽 수도 낙양은 이전에 없던 번영을 이루었다. 낙양은 중앙의 북쪽에 궁성이 있고, 그 외곽에 내성과 외성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내성은 관아와 불교사원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특히 불교 사원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큼 장엄하였다. 내성에는 또한 왕공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각기 부와 권력을 다투고 호화스러운 건물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열중했다. 때로는 저택의 광대함이 궁중을 능가하는 것조차 있었다. 외성은 주로 서민의 주거구역이고, 북위 시대가 되면서 새로이 확장된 부분이다. 당시의 도시는 고대와 달라서 이미 농업도시가 아니고 소비도시 또는 2차 생산도시로 변해있었다. 관청에 근무하는 중급 하급의 관리와 상공업자가 그 곳에서 살았다. 수공업자는 각각의 직종에 의해 일정한 구역에 집중했다. 그 인종적인 구성도 다양하여 남조에서의 망명자, 전쟁에 의한 포로, 새외 서역에서의 이주자, 상인, 사자 등 여러 민족이 모여 가지각색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221쪽 낙양의 번영과 영화는 꿈과 같이 사라졌지만 북위 왕조는 영구히 멸하지 않는 견고한 건축물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운강과 용문으로 대표되는 석굴사원이다. 북위가 평성에 도읍하면서 5세기 중반 경부터 그 서쪽의 운강에 석굴사원이 개착되어 나갔다. 그 가운데 큰 것은 높이 70척(약 27m)에 이른다. 그 수법의 웅장함이며, 기개와 도량의 광대함은 마치 북위 발흥기의 민족적 기백을 생생히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다. 효문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석굴 조영은 낙양 남쪽의 용문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222-223쪽 장중우라는 자가 효명제에게 효명제에게 상서하여 관리임용제도를 더욱 엄중히 하고 무관이 문관의 직무에 취임하는 것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을 듣고 지금까지 불만이 누적되어 울적해 있었던 군인들이 폭발했다. 천자의 친위군인 우림영의 군인들이 1천여 명이 남짓이 수도의 대로에서 집회를 열고 상서성에 데모를 하며 고함을 질렀는데, 그 기세에 눌려 누구도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중우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장중우의 부친인 장이는 구타장하여 중상을 입은 지 이틀 후에 죽었다. 북위 말년 우림의 변은 곧 육진의 반란으로 발전 확대되어 갔다.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오랜 평화가 계속되면 일찍이 창업시대에 인기있던 존재로서 각광받던 군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용지물이 되어 정부에서도 세간에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고 결국 시대에 뒤쳐진 존재가 되어 버린다. 전선의 기지에 배속된 주둔 부대는 시대가 지나면서 그 지위가 함께 저하될 뿐이며 결국 사회의 최하층민과 다르지 않은 곤궁한 상태로 전락하여 버렸다. 225-227쪽 북위에는 업과 장안에 동시에 두 사람의 황제가 출현하게 되었다. 효정제의 국가는 동위로 불리고, 문제의 국가는 서위로 불렸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했다고 하는 것은 단지 명목적인 표현법에 지나지 않고 실은 고환과 우문태의 양 세력의 대치에 불과했다. 234-235쪽 후경은 하남 전선에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자신의 지위를 다행으로 여기고는 고씨를 배반하고 서위에 항복하고 다시 또 남조의 양에게 투항하였다. 양 무제는 그의 망명을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양으로서는 실패의 제 일보였다. 235쪽 건강에 들어온 후경은 거칠은 야만인이었으므로 남조의 백성들은 그 위세에 눌려 공포를 느껴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를 싫어하였다. 형주의 소역은 후경의 죄악을 꾸짖고 토벌을 선언했다. 선봉에는 이제까지의 내전에서 재능을 보인 왕승변, 진패선 두 장군이 있다. 양군은 큰 군함을 타고 양자강을 내려가 후경의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건강에 압박해 들어갔다. 매우 난폭하였던 후경이기 때문에 내리막길로 들어서자 숨겨주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240쪽
서위를 세운 우문태는 육진의 하나인 무천진 출신으로, 무천진은 음산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여 장성을 유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는 전진기지였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소와 말을 길동무로 하면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북방 기병의 습격에 대비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이었다. 이같은 고생은 진의 장군과 사병들의 단결을 확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선비와 중국인이 서로 통혼하여 혈통적으로 융합하고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내게 하였다. 실은 이런 신종 군벌 집단은 여러 곳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것이 한편에서는 고씨의 북제 왕조가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위의 우문씨 정권이 되었다. 후자로부터는 북주-수-당이라는 연속한 3 왕조가 출현하게 되었다. 249쪽 우문태의 시책 중에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부병제의 창설이었다. 이것은 북위 이래의 균전제와 상호 표리를 이루는 것이며, 균전법에 의해 확실하게 정부의 장악 하에 들어간 장정을 완전히 군사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251쪽 수왕실 양씨는 북주와 똑같이 무천진에서 나온 군벌장군의 하나였다. 따라서 북주에서 수로의 선양 그 자체는 군인집단에 대하여 그렇게 커다란 동요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점은 선양 뒤에 행해진 북주의 옛 왕가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에 있었다. 수 문제는 천성적으로 시기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으므로, 북주 왕가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우문씨 일족을 찾아내어 모조리 다 죽여버렸다. 257쪽 문제의 정치는 주위의 반대를 개의치 않는 자신감 속에서 수행되었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방침이 명확히 세워졌다. 종래의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에 의해 관리를 채용하려는 시도가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예였다. 258쪽 수는 이미 고구려에 대하여 문제 때에 원정군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양제는 두 번씩이나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재원정을 위해 풍부한 군수품을 준비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새 영토인 강남에서 물자를 조달해 오는 것이 편리하였다. 양자강 유역의 물자를 동북으로 운송하기 위한 운하게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북으로는 탁주 즉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시작하여 남으로는 항주에 이르는 수로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261-262쪽 동아시아의 당제국(618-907)은 유럽에서는 카알대제를 낸 카롤링조의 프랑크 왕국(751-911)에 비교할 수 있다. 다만 당제국은 완전히 한제국의 영역을 회복했던 것에 비해, 카롤링조는 황제라고 칭했던 최전성기에 있어서 조차 로마제국의 전영토를 재통일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267쪽 장안은 무천진 군벌의 오랜 근거지이다. 수왕조의 정치에 불만 반항의 뜻을 표명한 그들은 8주국의 가문을 과시하는 이연이 강력한 군단을 이끌고 장안에 들어오자 한결같이 환영했다. 그리고 장안을 다시 천하의 중심으로 만들 희망을 이씨에게 걸었다. 274쪽 측천무후는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스스로의 이름을 새로 만든 글자인 조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고쳐 국호를 주라 하였다. 중국에서 여성이 황제가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 오직 이 경우뿐이다. 당당한 대당제국이 한 여성에게 찬탈된 것은 중세 특유의 역사현상인 것이다. 292-293쪽 현종의 재위 45년 중에서 그 처음의 30년간은 연호를 개원이라 하였는데 태평성대였는데, 무후의 대숙청으로 통치에 방해가 될 듯한 세력을 대부분 멸망했다. 그 가운데는 무천진 이래의 군벌인 왕실 이씨 일족 및 개국공신인 문벌가문 등이 포함된다. 298쪽 현종의 치세 만년의 15년간의 연호를 천보라 한다. 안록산은 무인으로서 더 이상 출세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경지까지 이르자,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정예기병을 몰고 일거에 낙양 장안을 점령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진격을 개시했다(755). 전란은 평정되었으나 천하는 현저하게 황폐화되었다. 지방의 번진, 즉 절도사 가운데 가장 독립적인 색채가 강했던 것은 노룡의 이회선, 위박의 전승사, 성덕의 이보신이며 이들은 모두 하북에 있었으므로 하북 3진이라고 일컬어졌다. 312쪽 당 왕조는 안사의 난과 같은 대타격을 받아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으면서도 명백을 유지하며 그 후 150여년 정도를 여전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당 왕조가 변질되어 재정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가 변질되면서 전국의 도시도 변모되어 매우 근세적인 상공업도시가 발흥되기에 이르렀다. 313쪽 후진의 고조는 이미 거란에 의해 세워진 천자이므로 거란에 대해 신하로 칭하고 원조의 댓가로 지금의 북경 즉 대동을 포함하는 지방 이른바 연운 16주를 할양하고 거기다 또 세폐로 매년 비단 30만 필을 바쳤다. 342쪽 세종은 무장으로서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볼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불교가 헛되이 재물을 소비하는 것을 보고 불교 사원을 제한하고 승려를 도태시켰다. 이것이 중국역사상 최후의 불교 탄압이며,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과 합쳐 삼무일종의 법난이라 불린다. 347쪽 나는 중세의 사료를 접하고 그 세계를 깊이 이해하면서 오랜 전통적인 해석을 다시 수용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근세 초기의 사람들이 중세로부터 빠져나왔다고 하는 자각과 그 환희에 동정하고 있다. 중세는 결국 발판만은 아니고 움푹 들어간 골짜기였던 것이다. 350-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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