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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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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잠잠(책을 통한 만남)했던 신본주의자 전병욱 목사가 세상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탁월한 신학적 논리와 지성, 무엇보다도 그의 삶으로 보여주는 예배자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신간이다. 솔로몬의 일생을 돌아보며 진정한 예배자가 가져야 태도와 마음가짐 그리고 삶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제껏 솔로몬에 관한 책들은 무수히 많다. 우리들의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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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잠잠(책을 통한 만남)했던 신본주의자 전병욱 목사가 세상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탁월한 신학적 논리와 지성, 무엇보다도 그의 삶으로 보여주는 예배자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신간이다. 솔로몬의 일생을 돌아보며 진정한 예배자가 가져야 태도와 마음가짐 그리고 삶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제껏 솔로몬에 관한 책들은 무수히 많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지혜의 솔로몬을 생각하며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한 기도때에 항상 빼놓지 않고 세상에 전무후무한 솔로몬의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이 책 말미엔 그 탁월한 지혜의 왕 솔로몬이 무너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친다. 이 책의 핵심은 예배의 은혜와 기름 부음일 수도 있겠으나 또 예배가 무너지면 삶이 무너지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에겐 오직 신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선 우린 예배의 자리를 기억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 예배자의 자리를 흠모하게 도와주는 책이 될 것이며, 또 전병욱 목사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w******f 2005.04.05. 신고 공감 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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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또 한번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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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아니 저자는 자신을 신본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신본주의자는 누구인가? 인본주의자의 반댓말인가? 자신을 지성과 영성이 겸비된 목사라고 전병욱씨는 말한다. 그런데 그의 책에서 성서적 지성, 신학적 지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신본주의자,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자처럼 말한다. 이건 철저한 교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전병욱의 책에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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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아니 저자는 자신을 신본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신본주의자는 누구인가? 인본주의자의 반댓말인가? 자신을 지성과 영성이 겸비된 목사라고 전병욱씨는 말한다. 그런데 그의 책에서 성서적 지성, 신학적 지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신본주의자,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자처럼 말한다. 이건 철저한 교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전병욱의 책에 과연 주석이 있는가?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성서를 대입하는 방식을 나는 이 책에서 또한번 대한다. 신본주의자는 절대로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성서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성서의 증언앞에 인간의 모든 사고와 생각을 굴복시켜야만 한다. 나는 그의 사고를 교만 그자체라고 생각한다. 전병욱은 청교도적 신앙관에 기초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신앙, 그것이 최고로 선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진정한 신본주의자는 어디에 있는가? 김남준의 책을 읽어보라. 그러면 전병욱의 논리와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c****b 2005.11.25. 신고 공감 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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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그 이상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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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가 없는 핵심의 말씀이 바로 전병욱 목사가 아닐까? 직접 육성 설교를 듣노라면 이런저런 유머스러운 이야기로 딱딱한 말씀을 아주 유연하게 풀어가시곤 하지만, 글에서는 한땀의 쉼도 없이 하나님의 날카로운 말씀의 칼로 모든 죄를 베어버리고 있습니다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내 손에 들려있는 예배. 몇페이지 못 읽고 그만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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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가 없는 핵심의 말씀이 바로 전병욱 목사가 아닐까? 직접 육성 설교를 듣노라면 이런저런 유머스러운 이야기로 딱딱한 말씀을 아주 유연하게 풀어가시곤 하지만, 글에서는 한땀의 쉼도 없이 하나님의 날카로운 말씀의 칼로 모든 죄를 베어버리고 있습니다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내 손에 들려있는 예배. 몇페이지 못 읽고 그만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읽는 예배의 말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어떻게 간섭하시기를 원하시는 알고 그만 쉬는 것도 잊은채 다시 기도를 하게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어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잠시 머리를 식힐만도 한대.. 여전히 내 손에는 들려있는 예배. 솔로몬의 삶의 끝을 보면서 못내 아쉬워서 다시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 진정으로 그 분이 받으시고 있으신지... 이 책을 들고 있는 내내 기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전병욱 목사님의 글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고 다시 그분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잠자는 세상을 깨우느니 차라리 잠자는 교회를 깨우겠다
k***7 2005.11.1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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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나타나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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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배에 대한 책이다. 예배는 가장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의식이자 중요함, 행위 그 자체이다. 기독교 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하고 계속되며 예배로 끝이 난다. 그러기에 중요하기도 하지만 ,일상적, 습관적이 될 수 있고, 그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한 의미는 정말 많이 취야해진 듯 하다. 이전에 일요일의 종교인, 월요일의 사회인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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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배에 대한 책이다. 예배는 가장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의식이자 중요함, 행위 그 자체이다. 기독교 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하고 계속되며 예배로 끝이 난다. 그러기에 중요하기도 하지만 ,일상적, 습관적이 될 수 있고, 그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한 의미는 정말 많이 취야해진 듯 하다. 이전에 일요일의 종교인, 월요일의 사회인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했지만, 근자엔 그런 의미조차 없이 꽤 즐겁게 주 5일을 즐기고 있다. 이 책은 예배가 중요하며 예배를 잘 드려야 한다고, 예배를 잘 드린 솔로몬은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고 그래서 우리도 예배를 잘 드려 복받아야 한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솔로몬이 예배를 드린 자세와 그 본질적 의미, 예배를 왜 드리고 어떻게 드려야하는것인지, 과연 진정한 가치있는 예배는 어떠한 것인지 말하면서 우리가 과연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실제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저자의 놀라운 점은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고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세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다른 외국 저자나 여러 명저에도 굴하지 않는 저자의 가치인 듯 하다. 더구나 동시대에 함께 할 수 있는 언어와 감각으로 트렌드를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중요한 듯 하다. 우리가 잘 아는 왕은 하나님께 나아가 '번제'를 드렸다. 번제에 담긴 의미, 일천번제, 예배라는 것은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는 관계성의 발로이자 신앙의 총체적인 형성이다., 만남과 교제와 공유를 통해 그리고 진정된 마음으로 섬김이 있는 예배를 순전하게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꼭 고찰해볼 수 있는 좋은 저작인것 같다. 솔로몬이 그러했던 것 처럼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들이 이 책을 통해 많이 발현되었음 한다.
j****c 2005.04.2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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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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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배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예배하는가? 나는 예배하는가? 가슴을 치는 질문들을 던진 책이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기대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회개하도록 한 책이다. 점점 더 화려해지고 볼거리가 풍성한 예배로 발전(?)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손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깨끗한가? 되돌려 볼 수 있었다. 진정으로 예배가 회복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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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배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예배하는가? 나는 예배하는가? 가슴을 치는 질문들을 던진 책이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기대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회개하도록 한 책이다. 점점 더 화려해지고 볼거리가 풍성한 예배로 발전(?)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손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깨끗한가? 되돌려 볼 수 있었다. 진정으로 예배가 회복된다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니 나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준비되고 예배 한다면 우리나라의 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때라도 당신의 사람들을 준비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믿고 진정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나의 뜻을 버리고 나아갈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제인 예배에 참여할 줄로 믿는다.
p***y 2005.04.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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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감동시킨 일천번제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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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가 없는 핵심의 말씀이 바로 전병욱 목사가 아닐까? 직접 육성 설교를 듣노라면 이런저런 유머스러운 이야기로 딱딱한 말씀을 아주 유연하게 풀어가시곤 하지만, 글에서는 한땀의 쉼도 없이 하나님의 날카로운 말씀의 칼로 모든 죄를 베어버리고 있다. 아침에 내 손에 들려있는 책, 몇페이지 못 읽고 그만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점심을 먹고 잠시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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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가 없는 핵심의 말씀이 바로 전병욱 목사가 아닐까? 직접 육성 설교를 듣노라면 이런저런 유머스러운 이야기로 딱딱한 말씀을 아주 유연하게 풀어가시곤 하지만, 글에서는 한땀의 쉼도 없이 하나님의 날카로운 말씀의 칼로 모든 죄를 베어버리고 있다. 아침에 내 손에 들려있는 책, 몇페이지 못 읽고 그만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점심을 먹고 잠시 읽는 예배의 말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어떻게 간섭하시기를 원하시는 알고 그만 쉬는 것도 잊은채 다시 기도를 하게 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퇴근하면서 잠시 머리를 식힐만도 한대.. 여전히 내 손에는 들려있는 예배. 솔로몬의 삶의 끝을 보면서 못내 아쉬워서 다시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 진정으로 그 분이 받으시고 있으신지...
이 책을 들고 있는 내내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전병욱 목사님의 글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고 다시 그분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잠자는 세상을 깨우느니 차라리 잠자는 교회를 깨우겠다

i*******2 2008.11.09. 신고 공감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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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감동시킨 일천번제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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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번제, 성전, 기도, 축복, 죄 이렇게 다섯가지의 작은 제목을 가지고 전병욱 목사님 특유의 강한 말투로 내용을 채우고 있다. 가장 먼저 번제란 무엇이며 구약의 번제와 지금의 예배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은 도움이 되었던 부분이 기도에 대한 부분이다. 그동안 나는 기도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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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번제, 성전, 기도, 축복, 죄 이렇게 다섯가지의 작은 제목을 가지고 전병욱 목사님 특유의 강한 말투로 내용을 채우고 있다. 가장 먼저 번제란 무엇이며 구약의 번제와 지금의 예배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은 도움이 되었던 부분이 기도에 대한 부분이다. 그동안 나는 기도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기도에 대해 더욱더 많은걸 알게 되었다. 최근들어 기도의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었는데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에 가서는 솔로몬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나는 나의 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이며 나의 죄 때문에 나 혼자 망하는게 아니라 가족과 교회와 민족이 망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더욱 철저하게 회개하여 죄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책은 성도들이 어떻게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앙지침서로써 매우 적당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신앙생활을 하며 열정이 식어버린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책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예배를 통해 시작되며 솔로몬이 번제로 시작했듯이 우리의 신앙은 예배를 통해 시작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n****7 2006.08.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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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감동시킨다는 막말을 버려라!
"하나님을 감동시킨다는 막말을 버려라!" 내용보기
제목: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것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고 지키사, 자신이 너무나도 신실하심을 솔로몬과 솔로몬 시대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이사 자신을 경배하고, 경외하고 믿고 신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건 솔로몬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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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것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고 지키사, 자신이 너무나도 신실하심을 솔로몬과 솔로몬 시대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이사 자신을 경배하고, 경외하고 믿고 신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건 솔로몬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세를 끝까지 지키시사 솔로몬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에게서 그 나라를 완전히 빼앗지 않으시고 그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사무엘하 7장12절-16절) -예배의 초점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맞춰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도대체 누가,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떤 인간이 과연 하늘(하나님)을 감동시킬수 있단 말인가? 참 어이가 없다. 책제목부터가 일단 비기독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이란 생각을 떨칠수가 없다. 내가 알기론 전병욱 목사는 장로교 교단인 총신대학원 출신 목사이고 장로교 합동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장로교 교단출신 목사가 이렇게 어이없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다니... 내가 복을 받은 것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복받을 짓을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그 큰 사랑과 자비하심을 먼저 베푸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사 헌신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앞에서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 장로교 칼빈주의 신학의 바탕이다.




  설사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땅히 인간은 그에게 헌신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를 섬기고 사랑하고 그를 위해 우리 목숨을 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장로교교단의 창시자인 종교개혁자 존칼빈 선생의 가르침이다. 장로교 합동교단에서 목사가 안수받기 전에 반드시 동의하고 서명해야 하는 것중에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혹은 웨스트민스터신조라고 불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이 있다. 그 대요리, 소요리문답의 첫번째조항의 첫질문이 사람의 첫째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인가?


답:사람의 가장 첫째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온전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첫째되는 이유이고, 이것이 인간의 존재의 이유이다. 이건 인간의 당연한 의무라고 정해 놓으신 거지 인간이 이걸 통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킬수는 없다는 것이다. 설사 하나님이 감동을 하신다 치자. 그건 예배자인 우리자신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묻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구원자이신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 보혈의 피가 성도라고 불리우는 우리에게 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 때문에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장로교 표준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조 제2장 2조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므로 홀로 자기 안에서 자족(혹은 자충족-스스로 만족하신다.) 하신다. 그 지으신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피조물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으시고, 오직 그들 안에서, 그들로 인해서, 그들에게 또는 그들위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셔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간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하셔서 인간에게 감동을 받으신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드러내시길 기뻐하시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우리 같은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이 과연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큼 감동받으실 만큼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아무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감동을 받으셔서 그런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편에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사랑과 놀라운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 몸에 묻은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안에 거하시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질그릇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표현이 인간을 많이 봐주고 양보한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질그릇이라고 불리울 자격도 없는 자들 아닌가!!) 참된 보배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기뻐하신다. 사도행전 17:24-25절을 보라 과연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무언가 도움을 필요로 하시거나 피조물이 과연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사도행전17: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름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더군다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과연 죄인들에 의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셔서 하나님이 감동을 받은 만큼 그기에 대해서 보답하시기 위해서 그러한 행위를 하신것인가? 아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그 모진 고문과 형벌과 치욕과 죽임을 묵묵히 참고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인자와 자비가 크셔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행한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벗어난 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셔서 그러한 것인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을 택하사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인자하심을 보이신 것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사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결과가 아닌가!!한 마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행하신 일이 아닌가!! 한 마디로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그 공로와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찬송과 예배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그 모든 헌신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떠한 호의도, 은혜도 베푸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의무도 없는데도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가 원하시고 필요로 하신다면 우리가 그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이라도 드려야 하며, 우리가 그에게 예배드리고 그를 오직 그만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의무요, 그것이 인간의 도리인 종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편에서 마땅히 하나님께 해야 할 의무는 있어도 하나님편에서 인간에게 하셔야 할 의무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인간을 찾아오셔서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과 자비와 인자하심으로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누구인가? 사도 바울이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라고 얘길 하지 않는가? 원수는 당연히 원수를 갚는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제거하고 박멸해야 하는 존재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 앞에서 제거당해야 하고 지옥불에 던져져야 하는 원수가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사도바울과 같이 당대의 최고 영성을 갖추고, 도저히 우리가 흉내도 못낼 정도의 신앙을 갖춘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죽는 것도 마다 않고 헌신하신 그런 분이 자신의 죄인됨의 신분을 의식하였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로마서7장에서 토해내었던 것을) 그렇게 우리자신의 생긴 모양대로 원수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가 없으시고 너무나도 순결하신 성자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 당신의 공의로우심의 원수 갚으심을 당해야 했던 것을...(사도 바울이 자신의 죄인됨의 신분의식으로 인해 느낀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토해내고 이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신분에 대한 의식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희망과 기쁨으로 바뀐것)... 이사실들이 어째서 인간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이루어진 결과란 말인가?  





다른 종교는 인간입장에서 신을 만족시켜야 신이 복을 내리고 은총을 준다.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신에게 돈을 바치든지 제물을 바치든지 해서 말이다. 중국으로 가는 장사꾼들이 임당수를 무사히 건너가기 전에 서해 용왕에게 선물을 바쳐야만 서해 용왕이 그 선물에 흡족해서... 그 서해 용왕을 달래기 위해 장사꾼들이 처녀 심청이를 사서 임당수에 제물로 바쳤던 것을 기억해라. 온갖 정성을 다해서 신을 감동시켜서 신을 움직일 수 있단 사고 방식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신이 움직이고 정성이 부족하면 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옛적부터 그런 말이 전해내려 오지 않는가?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늘을 감동시킨 일천예배자란 제목과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의 원리가 속담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지성이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말이 틀린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인간의 공로가 신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신이 인간에 의해서 움직여 질 수 있고, 인간의 행위 여부에 의해 신의 행동의 여부도 좌우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신을 좌지 우지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된다면 신은 인간에 의해서 좌지 우지 되는 로보트에 불과하다. 내 정성을 보고 신이 감동해서 신이 마땅히 나에게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Give and Take의 원리와 사고 방식이 적용이 된단 말이다. 도대체 이런 사고 방식이 기독교의 하나님관인가?




이런 신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왜 인간의 손에,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신이니까... 성경은 인간에 의해 좌지 우지 되지 않으시고, 인간과 의논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자기 뜻과 계획을 정하시고, 한번 정하신 그 계획은 바꾸시지 않으시는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주권자인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서 40장14-16절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으로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다.




한 방울 물 보다도 못하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떠오로는 먼지 같은 섬보다도 못한 한 인간, 비록 왕이지만,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 드린 고작 천마리의 소떼의 제물로 하나님이 감동하신다고 이사야서 40장 16절이 기록하고 있는가?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다고 했다.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 나무 전부 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불쏘시개로 다 태워 드려도 하나님이 만족하신다고 했는가?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솔로몬 따위의 죄인이(솔로몬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다 다 그러한 죄인이다.)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단 말인가? 전병욱 목사는 이사야서를 읽지도 않았는가?


 



욥기41장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 천마리의 소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솔로몬 것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솔로몬이 하나님에게는 없는 소떼 천마리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고마워서 감동하시고 눈물이 날 지경이 되셨단 말인가? 누가 누굴 움직이고 누가 누굴 감동시킨단 말인가? 여러분이 어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그날 저녁에 돈 한푼이 없어서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에게 돈 10000원을 주었다 치자. 원래 그 돈은 당신건데 그 사람이 당신이 준 돈 중에 일부를 고마워서 당신에게 돌려준다 치자. 그게 당신에게 감동이 될 수 있는가? 그 사람과 당신은 누가 더 높고 더 낮다고 할 수 없는 대등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 사람이 당신에게 돌려준 돈 때문에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너무나도 하찮은 우리 인간이 도대체 무엇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킨단 말인가? 소떼 일만마리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단 말인가?




미가6장 6-8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선지자는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과연 인간이 천천의 수양과 그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드림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신다고 하신것인가? 그걸 기뻐하시지 않으셔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았나!!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인간이 온전하게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장로교의 또다른 위대한 교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 당신은 이 모든것을 온전히 지킬수 있습니까? 답: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이땅위에서 불완전하게 나마 어느 정도 행하게 하신 것 아닌가?(성령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가 온전히 그렇게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건 우리가 구원받은 신자이긴 하나 여전히 죄악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육신이 몸이 죽고 영과 함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죄성이 제거된 완전한 육신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완전하게 미가 선지자가 요구하고 있는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줄로 믿는다.)


 



또한가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솔로몬은 왕이다. 한 마디로 얘기를 하자면 솔로몬은 원래부터 엄청나게 부자다. 자기 아버지 다윗이 물려준 재물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솔로몬이 얼마나 부자인가 한번보자. 열왕기상 4장 22절-23절 솔로몬의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  그 당시는 오늘날처름 과학적인 축산 농법이 발달하지 않아서 오늘날 우리나라에만 해도 대규모로 돼지의 경우는 2000마리 이상 소의 경우에도 한 사람이서 500마리 이상 키우는 정도로 하긴 힘들긴 하겠지만, 어쨌든 왕이다




또한 그 정도로 키우는 게 힘든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거의 매일 번제물로 제사를 이스라엘 민족이 드리니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는 사실상 힘들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많은 소를 키울수 있을 만한 능력과 또 가축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니 열왕기상 4장에 나오는 기록을 볼 때 하루에 솔로몬의 왕궁에서 저만한 가축이 소비되는 것은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욥의 경우도 욥기 1장 3절에 보면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욥기 42장 12절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일개 구스라는 곳의 한 부족 족장에 불과한 욥의 경우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하물며 일국의 왕인 솔로몬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자였지 않았겠는가? 그가 일천마리정도의 되는 소떼를 드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우리가 백번 양보해서 솔로몬이 지극정성을 들였다고 치자. 그런데 자기 전 재산이 소 떼 천마리일 경우에는 지극 정성을 들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감동하셔서 꿈에 나타나실 정도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실제로 그렇다는게 아니라 백번양보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일개 족장인 욥도 1000마리의 소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에 욥만한 부자가 없었겠는가?이미 다윗왕이 주위의 많은 민족과 국가들을 재패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패권자가 된 이스라엘을 건드릴 어떤 나라도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경제와 군사적으로 막강하고 부강한 선진국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일개 신민 가운데서 욥과 맞먹는 부자가 최소 백명은 되지 않았겠는가?(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고 한다면...그 당시는 그렇게 큰 우상숭배가 없었으니 말이다.) 왕인 솔로몬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1000마리 정도는 좀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동네개가 씹고 다니는 개 껌값도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이게 무슨 지극 정성인가? 지극 정성이라고 할 수 없지.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바친다면 모를까!!




 


솔로몬이 일천번제드린걸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더구만. 하루에 한 마리씩 천일동안 바쳤다는 얼빠진 소리... 솔로몬이 정치를 하고 먹고 자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기브온 산당까지는 거리가 무려 10Km라고 한다. 말을 타고 왔다갔다 해도 족히 최소한 두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그냥 자기 혼자 말을 타고 간다면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적토마나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거의 현대판 자동차에 맞먹는 속도를 가진 아주 우수한 천리마 같은 말을 타고 가면 왕복 한 시간 안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이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왕의 행차라는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닌데에 문제가 있다. 텔레비젼 사극 방송에서도 (최근에 종영된 이산이라는 사극 영화를 봐도 그렇다.)봤듯이 왕이 행차할 때는 왕 혼자만 가는게 아니다. 왕을 호위하는 수백, 혹은 수천명의 호위무사들 시종을 드는 내시들, 궁녀들, 비서들 그 많은 사람들이 왕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 때문에 총동원 되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함께 움직여서 십킬로미터나 되는 기브온 산당까지 간다고 생각해보라. 전쟁을 치루기 위해 군인들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행군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로마군인들은 하루에20로마마일(29.6km)를 다섯시간안에 걸었다고 한다. 물론 거리수는 거의 3배정도였지만, 이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다. 가장 빠르게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시간에 거의 6km를 걸을 수 있는 체력과 능력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왕을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저정도로 군사훈련을 받는 사람들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수 많은 수행원들이 길을 갈려면 어마어마한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하는 시간을 빼고 가는데만 해도 최소한 두세시간은 걸린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천일동안 매일 왕이 저런 행차를 한다면 왕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장사를 하거나 혹은 볼일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백성들의 원망 또한 엄청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런 인력들을 최소한 줄이고 왕과 수행원 몇명만 간다고하자. 말을 타고...그렇다고 해서 왕이 그냥 지 몸만 가겠는가? 소도 한 마리 몰아야 되는데... 기브온 산당까지 소를 한마리 가지고 갈려면 소를 몰고 같이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소는 말처름 빨리 달리지 않는다. 천천히 시간과 여유를 두고 몰고가야지... 10km나 되는 거리를 천천히 소를 몰고 간다고 한 번 생각을 해보라. 빨리 가도 세시간은 넘게 걸릴거다. 게다가 구약의 그 복잡한 제사를 다 드릴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한 마리를 드리고 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거의 하루 한나절이 다 날아간다. 왕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운 사람인데 이래서는 나라가 온전하게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완전히 사기라는 이야기이다.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은 한꺼번에 1000마리를 다 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100마리나 500마리씩 나누어서 한 열흘간에 걸쳐서 그곳에서 잡았다고 하든지-이건 순전히 내추측임... 그런데 이러한 내추측도 성경에 의하면 나누어서 드린 것 같지도 않다. 역대하 1장7절에 제사를 드리고 난 이밤에라고 나와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기브온 산당은 일천마리를 한꺼번에 제사드릴 정도로 충분히 큰 산당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어느날 하루에 소를 천마리 다 몰고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날짜를 며칠씩 간격을 두고 백마리씩 정도(이것도 좀 무리인 수치일 가능성이 많다.)를 몰고 가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도로는 지금처름 넓직한 도로가 아니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백마리만 몰고가도 길은 꽉 들어찰텐데 천마리를 몰고갈려면 거의 교통이 마비가 되버릴 것이다. 아니면 왕의 농장이 한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군데 분산되어 있어서 여러곳에서 소를 몰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적당할 것이다. 아무튼 솔로몬이 천일에 걸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음은 틀림없다.




 


그럼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날 저녁에 오신 것은 무엇때문일까? 진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감동받으셔서 일까? 아까전에도 말했다시피 솔로몬에게 소 일천마리는 그렇게 큰 재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일국의 왕인데, 하루에 자기 왕궁에서 소비되는 가축이 얼마나 많은가!그렇다면 솔로몬이 그렇게 큰 정성을 다 바쳤다고 할 수 없다. 주님께서도 회당에서 부자들이 돈궤에 많은 돈을 내는걸 보고는 아무 말씀을 안하시고 두렙돈 내는 과부를 보고 칭찬하셨잖은가? 저는 궁핍한 중에 자기의 전제산을 다 바쳤으니, 저가 가장 많이 한 것이라고... 솔로몬은 풍족하고 여유있는 와중에 자신이 소유한 소떼들 중 지극히 일부만을 드린 것이다. 이것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일천번제예배자란 이름을 그에게 갖다 붙이는 것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정말로 완전히 아전인수격인 성경해석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상식(일천번제로 제사드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에게서 복을 뜯어내자는 엉터리사고방식-어디서 많이 듣던 사고방식 아닌가? 이건 누가 뭐래도 세상의 물신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수많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신에게 여러 수억씩 안겨주고 두배, 세배로 뜯어낼려는 사고방식, 절에 여러 수천만원을 시주하고 부처가 감동해서 여러 몇배로 불려줄거라는 환상, 완전 이교도적인 사고방식이지 않은가!!)에다가 성경구절을 그럴듯하게 억지로 끼워맞춘 사고 방식 말이다. 그날 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오신 까닭에 대한 답은 역대하 1장8절-9절에 나와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나의 아비 다윗에게 베푸시고 나로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는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것을 굳게 하소서... 솔로몬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하나님을 움직이고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무려 몇 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셔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절대로 거짓말 하시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으로 맹세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너무나도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솔로몬에게, 그리고 또한 후대에 이 성경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하고 그를 신령과 진정으로 경외하고 경배하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는 거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고 계심을 솔로몬에게 확인시키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에게도... 또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것은 왕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서 백성들 앞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뭐가 뭔지 모르는 얼떨떨하고 한편으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가기에는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 걱정도 되고 염려도 되어서 그것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건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하신다. 너무나도 위대한 지도자였고 스승인 모세 곁에서 모세를 모신 자신이지만 막상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모세가 죽고 난 다음의 그 막막함, 그 막중한 책임감과 뛰어난 지도자인 모세조차도 패역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로 맞아 죽을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적막함과 막막함, 온몸과 마음이 팽팽한 긴장과 날카로움으로 신경이 곤두서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큰 인자와 사랑으로 여호수아를 배려하시고 그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나타나사 위로하시고, 권면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라. 여호수아 뿐만 아니라 솔로몬도 여호수아와 거의 비슷한 심리적 상황하에 있던 것이 아닐까? 자기 아버지 다윗은 정말 위대한 사람인데 자기가 자기 아버지 만큼 그 왕으로서의 직무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직무를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이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열심히 잘해도 본전인 것이다. 잘해도 자기 아버지를 뛰어넘어서 더 뛰어나게 잘 하지 않으면 정말 곤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꼬 하시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도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심리적, 정신적 상태와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몇십년전에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여호수아를 위로하시고 힘주시기 위해서 그러하셨던 것처름 심적 부담이 너무나도 큰 상태에 있는솔로몬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솔로몬이 드린 제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너무나도 큰 은혜와 배려라고 해야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에게 하신 약속을 확인해보자.


사무엘하 7장12절-16절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이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이제 시행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에게 그날 밤에 나타난 것이다. 또한 솔로몬이 제사를 드린 것은 솔로몬 자신의 개인자격으로 사적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다. 전병욱 목사를 비롯하여 하늘을 감동시킨 일천번제 예배자라고 솔로몬을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일천번제가 솔로몬 개인자격으로 사적인 차원에서 드린 제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역대하 1장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역대하 1장2절-3절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과 온 이스라엘의 각 방백과 족장들을 명하고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역대하 1장5절 후반부-...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이 구절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건 분명히 솔로몬이 자기 개인자격이 아닌 공적인 차원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왕위에 오른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첫번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공식적인 왕의 직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솔로몬과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간 사람들은 단순히 솔로몬을 수행하는 비서들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천만인을 대표하는 12지파 백성의 대표자들이고 족장들이다. 이 사람들을 다 거느리고 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린 제사란 말이다. 솔로몬이 이 제사를 백성들을 거느리고 백성들과 함께 드린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왕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확인하는 자리이다. 또한 그것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역대상29장21절-25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29장 21절이하의 사건들을 다시 역대하에서 한번도 보여준 것이 역대하 1장의 일천번제 드리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왕권의 권위와 정통성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께 보고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만일 새로운 왕인 솔로몬이 이렇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 만일 솔로몬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이건 자칫 잘못하면 정치적 자살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이요, 뜻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의 정통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데,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왕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왕권의 권위와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보고하는 일 없이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한다면 끊임없이 왕권의 권위와 정통성에 대한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제사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함께 가서 드린 제사이므로 백성의 대표자들은 족장들과 재판장들과 온방백들도 함께 드린 제사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솔로몬을 축복하신 것이 솔로몬이 드린 일천마리의 소가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 때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밤에 이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셔서 솔로몬과 같은 축복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만 나타나셨다는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와는 무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왕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기 자신 솔로몬이 왕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보고하고 또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셔서 몸과 마음을 새롭고 정결하기 위해서, 온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천이나 만이라는 수는 충만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곧 천마리는 이스라엘 모든 민족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시대를 온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출발하기 위해서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예표하는데 있다. 즉, 죄사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즉, 솔로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새시대에 새로운 정결하고 깨끗한 백성으로 그 시대를 여는 의미에서 일천마리의 소를 이스라엘의 왕인 자신이 백성의 대표자들인 족장들과 재판관들과 함께 전체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드린 것이다. 솔로몬은 자신이 드린 그 일천번제가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속죄, 즉 죄사함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예표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간인 내가 솔로몬 처름 흉내내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것이라는 사고 방식은 그야말로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유일하게 감동시킬 수 있고 감동시키신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예배방식에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 인간의 목적이자 의무이자 큰 기쁨인 예배를 드릴 뿐이다. 또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었고 그로 말미암아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자신 그 자체에서 하나님께서 기쁨의 원인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고 성취하신 그 위대하신 일들 때문에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발 전병욱 목사는 이런 책좀 쓰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리고 치열한 자기 반성도 성찰도 없이 이런 제목을 단 책을 쓰는 것인가? 제발 장로교교단의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으면 장로교 교단의 목사답게 그에 걸맞는 책을 쓰고 그에 걸맞게 설교를 했으면 한다. 예배의 초점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맞추어 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p********s 2008.07.26. 신고 공감 0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