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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시리즈를 보면,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두 시리즈의 취지는 비슷하지만, 재야(?)학자들이 경쾌하고 개방적으로 써내려간 '리라이팅'시리즈에 비해, '절대사상'시리즈는 강단학자(?)들의 성실한 설명이 돋보이는 편인데, 두 시리즈 간의 같은 취지속의 수많은 '다름'들은 독자에게 뜻하지 않는 즐거움을 준다. 특히나 이 책의 경우, 이전에 읽었던 고미숙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읽는 내내 생각나서, 비교를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었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1부에서는 정약용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뒤 2부에서는 정약용의 주요 저작들 중 읽어볼만한 부분들을 저자인 금장태 교수가 추려서 수록하고 있다. 2부에 수록된 글들은 주로 1부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관련된 글들이 대다수이기에 옛 글임에도 불구하고 쉬이 읽힌다. 따지고보면 박지원에 비해 정약용은 '모범생'이었다. 비록 그는 젊은 시절, 당시로써는 금단의 학문이었던 서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는 터라 그로인해 주변으로부터 수없이 모함을 받고 실제로 말년의 삶은 귀향지에서 보내긴 했지만, 아울러 실제 정조에게 벼슬에 물러나고자 하는 의사를 수없이 표명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쨌건 기본적으로 벼슬자리 언저리에 계속 머물렀던 '주류적'인 인사였고, 다소 유쾌하고 여유가 있었던 박지원에 비해, 정확하고 엄격하며 성실성을 그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디오니소스와 프로메테우스? 박지원과 정약용의 인간형을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듯 싶기도. 아울러, 그가 자식들에게 쓴 편지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이 시간이 지나 죽어'잊혀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 했던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지식들이 후세에 이어지는 것에 대해 가히 '편집증적'으로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누군가가 다룬다면 꽤나 흥미있는 주제가 될 듯 싶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점이, 어쩌면 개혁적이면서도 또한 시종일관 '주류지향적'??이었던 그의 삶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의 학문적 방향(?)-학문의 표준은 어쨌건 경전 그 자체에서 논해야 한다는-은 다소 꽉 막혀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런식의 학문 방향이 자칫 교조적이고 보수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어보이기도 했지만,(이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그의 '모범생'적 인상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고) 이러한 발상은 당시 사정에 비추어본다면 온갖 설들로만 어지러워져 난삽해져가고만 있는 조선의 사상적 논란들을 교통정리 할 수 있는 유일한 실현 가능한 해결책이었기에 어느정도의 진보성을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결국, 모두들 알다시피 그의 치열한 애민사상과 학문적 노력들은 오늘날 그를 '영원하게'만들었다. 그는 하늘에서나마 만족하고 있을까? 하지만, '민'을 언제나 그 중심에 두었던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구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것을. 책은 정약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정도에 주력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사상가라고 하지만 아는바가 거의 없는 나의 무식함 때문이었다. 허기사,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 소중했던 우리의 과거들을 얼마나 많이 '밀어버렸'던가. 근대화의 수많은 폐단들이 새삼스럽지만도 않은 오늘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라도 정약용은 한번쯤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단절되어버린 조선의 철학적 전통은 '이제부터' 만들어나아가야하는 것이기에. ps.여담이지만, 정약용이 서학을 공부했던 죄로 주변으로부터 모함을 당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단지 사회주의, 혹은 맑스를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는-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류의 비난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른다-오늘의 우리사회가 떠오르는건 나뿐인건가? 우리사회에서 오늘날까지도 불온시되고 있는 어느 서양의 현인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고 했다지만, 되풀이되는 역사마저 희극으로 봐줄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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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없어 다산학의 입문서로 단 한 권만을 읽어야 한다면 금장태 교수의 이 책을 고르면 된다. 정약용의 삶과 사상, 대표글과 연구문헌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다산 사상이 고전으로서 지닌 핵심 가치를 "인간의 재발견",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객관적 증거를 중시하는 합리적 학문자세", "과학적 실용정신" 네가지로 제시한다. 또한 다산 사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제시한 미래지향적 통찰로 "외래문물과 전통문화의 종합을 통한 창조적 사유", "물질적 경제생활과 정신적 도덕문화의 조화를 통한 균형있는 가치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관계의 결합에 기반하는 사회질서의 이상"을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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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특징은 그리고, 이 책의 3부에는 다산 이 책을 읽으면서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2008년 MB정부에서 집행된 법들이 누구에게 득과 실이 되었는지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다산 목민관이란 백성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도 수령과 아전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현실을 고발하였다. 그는 어떤 흉악한 도적보다 더욱 잔혹한 도적으로 감사의 탐학상을 고발하면서,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을 다 죽이게 된다”고 선언하여, 탐학한 목민관을 징벌함으로써 백성을 구출해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민생을 소중히 여기고 국법을 높일 것을 주장하여, ‘민생’과 ‘국법’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근본강령임을 확인하고, 무엇보다 ‘민생’을 중시하고 ‘국법’을 존중함으로써 관리들의 착취를 근절시킬 수 있고, 관리들의 착취를 막아야만 백성을 도탄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고(p57), 36세 때(1797년)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있을 당시 그는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불합리한 부담에 대해 어떠한 상급기관의 압력에도 맞서 민생을 보호하는 목민관의 태도를 일관되게 지켰다(p65). 군주와 목민관이 맡은 임무가 바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것을 막아 백성을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는 경제적 분배의 균형을 통하여 민생의 안정이 전제될 때 평등의 실질적 효과가 확보될 수 있음을 주목하였다. 분배의 균형을 위해서는 “부자의 것을 덜어내서 가난한 자에게 보태주어 그 살림을 고르게 할 것(田論)”을 강조하고 있다(p131). 한 집안의 가장이 바로서면 자식들도 바르듯이,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은 수많은 민초들의 한숨만 커질뿐이다. 그런 면에서 핸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은 참고해 볼만한 책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당파에 의해 인재를 배척하는 것은 개선되지 못했다. 이는 까마귀가 100년이 지나도 집을 짓는 방법이 개선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이라면 개선하고 발전해야 하건만 줄세우기에 의한 자기사람 심기는 까마귀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산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문상과 결혼에서의 부의금과 축의금의 폐단을 지적하고 싶다. 옛날 어려운 시기에 부조는 같은 마을에서 상부상조하는 차원이었지만-죽은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닌 산자를 위한 허례허식 중시-지금은 핵가족화 되어 있어 직장에 있는 사람이나 동기들의 부모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이 부조하거나 결혼 축의금을 전달하는 형식적 적금형식으로 변질되었다. 차라리 부조금 없이 조문을 받고, 생전에 고인을 기억하는 가까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인을 추억하고, 결혼의 경우도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을 초청하여 축하하는 것이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다산 꼬랑지. 개인적으로 1,2월은 다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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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종교학과 금장태 교수가 쓴 책.
국내에서 다산 연구에 힘쓰는 학자로 관련 저서와 논문이 다수 있다.
정약용에 대한 개괄적 입문서라고 할 만한 책이다.
1부에서 다산연구에 매진하게 된 계기, 다산의 시대와 삶, 다산 사상의 핵심과 오늘날 다산사상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2부에서는 다산의 수많은 저작들 가운데 뛰어난 글들을 간추려 '다산 저작선'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3부에서는 다산관련서를 소개하고 다산의 연보를 끝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저자는 다산 사상이 고전으로서 지닌 가치를 '인간의 재발견',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객관적 증거를 중시하는 합리적 학문자세', '과학적 실용정신'의 네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정약용을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수원성 축조의 설계자로, 서학(천주교)과 관련하여 오랜 세월동안 유배지에서 삶을 보낸 학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 역사서, 역사의 인물들에 대해서 중,고등학교에서 단편적으로 가르쳐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리고 그런 정도만 배운 나의 학창시절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을 역사관련 서적을 읽을 때마다 하곤 한다.
하여간 나는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를 읽으면서 시대을 앞서 살았던 정약용을 만났다. 그리고 그를 배척하고 핍박하던 조정의 무리에 대해 얼마나 분노했던가...
이후에 다산과 관련된 책을 읽으려 했으나 기회가 없던터에 이번에 가벼운 마음으로 금장태 교수의 책을 사서 읽었다.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그의 삶과 생애, 저서가 어디 가벼운 것이던가. 읽어갈수록 그의 깊은 생각과 치우치지 않은 삶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끄러워져서 마음이 무거워질 수 밖에..
하지만 내가 그와 친해졌다는 증거를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어 기뻤다. 다산은 그의 글 '두 두아들에게 보여 주는 가계(示二子家誡)'에서 자신의 자손과 붕우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내가 죽은 뒤에 아무리 정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진설해 놓고 제사를 지내준다 하여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 편을 읽어주고 내 책 한 장을 베껴주는 일보다 못하게 여길 것이니, 너희들은 그 점을 기억해 두어라...중략... 이 책에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여 오묘한 뜻을 모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나의 자손이요 붕우가 되는 것이니 천년에 한 번 나오더라도 배 이상 나의 정을 쏟아 애지중지 할 것이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예수께서 누가 내 형제요 자매인가를 말씀하시던 부분을 닮았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다산은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나마 자신과 깊이 교감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처형되고 자신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던 소를 올리면서 가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천년이 지나도 후세에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이가 나오리라 기대하고 자신의 저서를 500여편이나 남긴 것은 후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이다. 그것은 대부분 유배시절(18년) 집필하였으니 그에게는 고통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풍성한 열매가 되었다.
중국 전국시대 거문고의 대가 '백아'는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유일하게 알아듣고 칭찬했던 '종자기'가 죽자 종자기의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하고 거문고 줄을 끊어 다시 연주 하지 않았다한다. 나를 알아주는 이(知音)가 없어서 줄을 끊어버린 백아와는 달리 아픈 유배의 시절 자기의 글로 후세를 기약했던 다산의 혜안이 놀랍고 고맙기만 하다.
시간이 나는 대로 그의 글을 읽어 친구가 될 작정이다.
[인상깊은 구절] "이곳 윤단의 산정이 바로 그가 강진의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렀던 다산초당이다. 그는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몰두하여 자신의 생애 중 학문적으로 가장 빛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80p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기간을 하늘이 그에게 학문에 깊이 침잠할 수 있도록 내려준 기회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정열을 기울여 경학과 예학 및 경세론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에서 가장 방대하고 창의적인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 -83p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완성한 저술은 경전과 직접 연관된 것이 232권이요, 경세론의 저술이 96권으로 합치면 328권에 이르니 거대한 학문의 탑을 이루었다. 더구나 그의 경전해석이 열어준 정밀한 고증과 창의적 사유체계와 그의 경세학이 제시한 구체적인 제도개혁의 정신은 한국사상사에 하나의 우뚝한 산봉우리로 솟아올랐다고 할 수 있다." -86p
"그는 경전해석에서 자신이 일관적으로 지키고 있는 학문자세를 밝히면서, '나는 경전을 연구할 때 오직 옳은 것만 찾고, 옳은 것만 따르며, 옳은 것만 지키려고 한다. 어떤 것을 선택해서 지키고자 할 때는 널리 고증하고 지혜를 다 기울여 정밀하게 검토하지 않음이 없으며, 마음가짐은 티 없는 거울과 평평한 저울같이 유지하여 소송에 판결을 내리듯이 그 뜻을 파악해 내고자 한다. 이렇게 한 다음에 비로소 감히 이론을 세운다. 어찌 감히 그럴 것이라 보이는 견해로서 남이 주장하는 것을 덩달아 주장하면서,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을 어기겠는가'라고 선언하였다. 그것은 정밀하고 객관적인 검토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확립하는 것이며, 기존의 일반적 학설에 편승하여 동조하거나 자신의 독단적 편견을 철저히 벗어나 재판관이 판결을 하듯 다양한 견해들을 공정하게 평가하여 취사선택함으로써 진실성을 밝히는 객관적인 학문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00-101p
"그의 개혁의식은 전통에 내재된 본래적 가치를 재각성함으로써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요, 본래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현재의 왜곡된 지식체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개혁론은 본래의 실상으로서 공자와 맹자에로 돌아가는 길이면서 동시에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미래적 이상을 지향하는 것이라 하겠다." -106p
"내가 노자의 말을 보건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은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중략...모든 마음에서 일어나고 뜻에서 싹트는 것은 매우 부득이한 것이 아니면 그만두며, 매우 부득이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225-226p [여유당기(與猶堂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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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를 발전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과 함께 실학에 대한 관심 역시 증대되고 있다. 비록 유학의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당대 정치에 반영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긴 하였으나, 민중의 삶과 괴리된 학문에 대한 자기 반성이었다는 점에서 실학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리사욕 챙기기에 급급했던 지배층, 극에 달해있던 삼정의 문란은 어쩌면 개혁 그 이상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시대는 수많은 불우한 삶을 낳았다. 학문적 소양은 충분하지만 시대가 허락지 않은 인물. 다산 정약용 역시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그는 조선 후기 가장 훌륭한 임금 중 하나였던 정조 치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 역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듯, 정약용 역시 남인 시파라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꼬리표로 인해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성리학 중심적인 폐쇄적 사회에 혜성 마냥 등장한 서학, 학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수많은 인물들은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마감해야만 했는데, 한 때 서학에 심취했던 정약용 역시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벽, 이가환, 윤지충, 이승훈 등. 지배계층의 관점에서는 위험하다 일컬어지던 인물들이 모두 그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정조 사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벽파의 반란(?)은 항상 정약용을 향해 있었다. 삶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유배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불행은 시대가 낳은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성한 저작활동을 통해 오히려 그 시간들을 하나의 기회로 활용했다. 조정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는 고달픈 민중들의 삶과 가까워졌기에,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사상을 남길 수 있었다. 당대에는 외면 받았던 그의 저서는 느지막히 세상이 필요로 하는 값진 존재가 되어 우리 곁에 맴돌고 있다. 늦게 나마 세상 사람들에게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는 다음 세상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사암'을 자신의 마지막 호로 사용했던 정약용 선생의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산의 삶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이 책은, 그의 수많은 저작들의 서문을 수록함으로써 정약용의 방대했던 저술에 대해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목민자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자를 위해 있는 것인가?'라는 원목 서문의 질문을 통해 그는 목민관으로서의 기본에 대해 묻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권력의 소유 여부를 떠난 인간이었다. 학문에는 정통할지 모르나 실무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오던 사대부가 목민관이 되었을 때 겪는 고충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충이 각종 부정부패, 공정치 못한 판단까지도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민관은 하나의 직책이었을 뿐, 신분 평등론을 통해 그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인간으로서 설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노동량에 기초한 배분을 주장했던 그의 급진적인 여전론 역시 실질적으로 일하는 자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산 정약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다름 아닌 열린 정신이 아닐까 한다. 분명 그는 서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학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서 서학은 보다 나은 사회를 설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 그렇기에 그는 유학 혹은 서학,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편협된 사회는 그를 특정 영역에 속한 인물로 간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어떠한 사회를 살고 있는가. 물질적인 풍요와 셀 수 없이 많은 기회들. 이 모든 것을 놓치고 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산 선생이 지닌 창조성이 아닐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