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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도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儒家)를 가장 먼저 접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논어(論語)>를 가장 먼저 읽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을 접할 때는 막연함을 느끼게 된다. 당장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논어(論語)>를 찾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되고 특히 옮긴이마다 해석이 다른 바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인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과거에는 주석을 잘못달면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敵)이라 하여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에 성리학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경전의 경직된 해석을 통한 부작용이 있었던 반면에 현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해석이 범람하여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연 어떤 책을 선택해야 좋을지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 결과 나는 수 많은 논어 번역본 중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논어 번역본으로 추려서 서로 비교하기 시작했다. 즉 홍익출판사에 나고 김형찬 교수가 옮긴 논어와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오고 김학주 교수가 옮긴 논어, 성균관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오고 이기동 교수가 옮긴 논어 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오고 유교문화연구소에서 옮긴 논어 이렇게 총 4권을 서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아무래도 가장 정통적인 논어 번역본은 성균관대학교에서 심혈을 기울여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을 모두 번역하고 있는 중 처음으로 번역된 논어라고 생각되었다. 다만 책이 너무 두껍고 비싸서 고민하던 중 한글 세대를 위해 쉽게 번역한 홍익출판사에서 출판하고 김형찬 교수가 옮긴 논어를 먼저 읽게 되었다.
분명 이 책은 쉽게 논어를 옮긴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으나 좀 더 주석으로 자세한 설명을 넣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한 원문을 먼저 보여주고 한글로 번역한 다음 주석을 다는 것이 좋은 구성으로 보이는데 원문을 맨 마지막에 한꺼번에 모아 놓아 원문과의 괴리를 초래하였다. 아마도 한문에 익숙치 않은 중고등학생들을 위해 맨 마지막으로 모아 놓은 듯 한데 득보다는 실이 많은 구성이라고 보인다.
결국 종합해 보았을 때 논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배병삼 교수가 쓴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를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고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나온 논어 및 논어 강설을 함께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병삼 교수의 책은 정말 쉽고도 흥미있게 논어 및 공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바 처음 동양 고전, 특히 논어를 읽을 때 필연적으로 드는 막연함을 없애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 중국에 갔을때, 그래도 그 동네에서 지식인임네 하는 사람들에게 논어에서 잘 이해 안되는 구절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읽어본적이 없덴다. 논어는 중국의 정치와 철학에 중요한 책이었지만 이제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만 읽히는 책이 된걸까? 공자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관심이 가게 마련...논어는 소로우가 사랑하는 책이었고 나도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논어는 공자의 사상이 노자와 다름에 많은 강조점을 둔다.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는 자의 얼룩 묻음과 세상을 등진 삶 사이의 오랜 갈등을 보여준다. 세상을 등지고 자기안의 창조본성과 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삶. 나빠지기 마련이고 사람을 망치기 마련인 더러운 놀음에 가까이 않는 것. 분명 옳은 삶의 하나이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삶에 눈감고 있을 것인가?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고 그깟 얼룩묻음이야 다시 씻으면 되는 것을...공자는 자신을 위한 삶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삶이 자신을 위한 삶임을 보여준다. 더러운 정치의 암투와 전쟁, 속임수와 배신.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옳은 사람이 들어서야한다고 믿는다. 논어는 하늘뜻에 그 근본을 둔다. 주위의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도, 존대하고 예로 대하는 것도 사실 하늘이 있고 그 뜻이 선함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준이면 그것은 기준이 없음이다. 허접한 옆사람을 어찌 사랑하랴? 하늘이 그 사람을 사랑함을 알지 못한다면...극악무도하고 아래로만 향하는듯한 세상의 풍속과 비참함 또한 하늘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한가닥 희망이나 가져볼 수 있을까? 하늘이 있음으로 그리고 선한 뜻이 있음으로 옳은 삶을 살 이유가 있다. 공자는 뒷사람後生을 두려워했다. 웃사람이 아닌 아랫사람,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늘의 시선, 두려워한 것이 도치되어있다. 하늘이 없으면 어떻게 후생을 두려워할까? 이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살아보며 느낀다. 논어에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自己가 서 있다. 수양과 반성, 끊임없는 배움과 사고의 훈련들. 이것은 자기가 바로 될때 하늘뜻 실천과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 가능해짐을 뜻한다. 자기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까? 수많은 꾀임과 교묘한 말과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 군자는 일의 원인과 해결을 자기 안에서 찾는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자기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임을 공자는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이 두고두고 문제임은 모든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알고 느끼며 절망하는 이유이다.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를 이겨내 예로 돌아감이 仁이다. 단하루만이라도 자기를 이길수 있다면 천하는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천하는 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자기를 이길만한 사람이 없는 때문이다. 결국 하늘이 기준이나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자기가 해결되지 않는 것과 절망적 현실 앞의 무한한 힘의 원천이 되어야할 하늘뜻이 명시적이 아닌 때문이다. 하늘뜻을 찾고자하나 하늘의 뜻은 모호하다 역을 하거나 점을 쳐도 선한 뜻이려니 한다. 이것이 근본인데 주어지지 않으니 답답하다. 천지의 조화와 생물의 기이함을 보면 그 뜻을 알듯도 한데 하늘은 말이 없다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논어는 우리나라 사람이 원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귀한 자산이다. 소로우의 [원문으로 읽는 것이 진정한 이해를 준다]는 말이 문득 기억난다. 그에게는 라틴어였지만 우리에게는 한자가 있는 셈이다. 이 책의 앞 부분 번역도 아래에 자세한 주가 있어 도움이 되나, 뒷부분에 수록된 원문 읽기를 권하고 싶다. 원문에 필요한 해석들이 같이 있어서 원문으로 읽으며 해석자의 생각을 뛰어 넘어보는 재미가 있다. 도는 우리 마음 속에 있고 각 사람이 자란만큼 들리는 것이니까...추가로 콘텍스트 안에서 텍스트를 보기 위해선 공자의 삶과 제자들의 됨됨이도 공부를 병행하면 살아있는 공자를 만나는데 더 도움이 될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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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논어, 논어
참 많이 듣긴 했는데, 나이 31살에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이레저레 세상살면서 많이 들어 봤던 얘기들이 나왔는데,
인간의 도리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말은 느리고 능숙하지 못해도 실행은 민첩해야 한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거나 혹은 행동을 함께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배울 만한 사람이 있다. 그들의 선한 점을 골라서 그것에 따르고 선하지 않은 점을 골라서 내 자신을 바로 잡는다."
좋은 말들 몇가지 있어서 옮겨 적어 본다.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겠다.
아래부분은 논어 명어집이라고 긁어 왔다.
시간날때 마다 한번씩 봐야 겠다.
----------------------------------------------------------------------------- 닭을 잡는 데 어째 소를 잡는 큰 칼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일의 대소, 나라의 대소에 따라서 처리하는 인재도 적당하고 부적당한 자가 있다. -논어 도(道)가 행해지고 있는 사회라면 나와서 활동하겠지만 도가 없는 사회라면 오히려 숨어서 사는 것만 못하다. -논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잘못을 고치느냐 않느냐에 있다.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려는 사람보다는 곧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며 자기의 귀중한 경험으로 삼아야 한다. 탄개(憚改)는 고칠 것을 두려워하여 꺼림. -논어 봉황이여, 어떻게 해서 이처럼 덕이 쇠퇴했는가. 봉황은 세상에 도(道)가 행해지면 나타나고 그렇지 않으면 숨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도(道)를 잃어버린 이 때에 나타났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봉황의 덕도 쇠한 것이구나. 세상을 구하고자 동분서주하는 봉황에 비유해서 그 태도를 풍자한 초(楚) 나라 은자(隱者) 접여(接與)가 한 말. -논어
소인은 궁핍하게 되면 반드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된다. -논어 정치라는 것은 법이나 규칙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비유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北極星)에 여러 별들이 따라오듯이 백성은 그 덕을 연모하여 위정자를 따라오게 될 것이다. -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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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논어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논어를 읽어주었고, 때론 공책에 적어 놓았었다. 피곤한 날에는 쉬기도 했고, 시험을 보거나 다른 스케줄이 있을 때엔 읽는 것을 쉬기는 했지만 꾸준히 논어를 읽었다. 그렇게 다 읽었는데 큰 아이가 ‘서울시 초등학교 독서토론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서울 8개(동부, 서부, 북부, 중부, 강동, 강서, 동작, 성동) 교육청에서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참가하는데 그 독서 토론 대회 추천 도서 중 하나가 논어다. 논제는 당일 발표하기에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입론하고, 발표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논어를 읽어두긴 잘 한 것 같다.
논어는 동양 고전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혀 왔고,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을지 모를 그런 책이다. 모두 20편으로 되어 있는 논어를 읽으면서 왜 사람들이 ‘공자’, ‘공자’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와 맞지 않은 글들도 있다. 하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아이들과 활기찬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좋은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지금은 구태의연한 사상이 될 수 있는 것들. 그런 것을 찾는 것도 은근 재미있는 시간들이다. 아이들에게 논어는 분명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을 음미하고 다른 책과의 연관성을 찾는 것. 그렇게 같이 연결시키면 분명 재미있는 논술 수업도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학이(學而)편과 술이(述而)편을 가장 좋아한다. 학이편은 배움의 중요성과 공자의 주요 사상이 담겨 있고, 술이 편은 공자의 용모, 태도, 행동 등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한 잔소리 같은 느낌이 들지 모르겠지만 물질이, 돈이 최고의 권력으로 자리한 지금 논어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논어를 시작할 때 아이들은 왜 이런 재미없는 것을 같이 읽어야 하냐고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신문이나 책에, 논어에서 인용한 글을 만나게 되면 굉장히 반가워(?)한다. 큰 아이의 경우 풀이 된 논어가 아니라, 한자로 된 원문논어를 만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한자 공부를 좀 더 하면 논어 원문도 읽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갖게 되었다.
이젠 논어가 끝났으니 장자나 다른 책들도 도전해 볼까 생각중이다. 나는 그나마 쉬울 수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왕 아이들과 시작한 고전 읽기. 가능하다면 다음 책을 골라 또 시작하고 싶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나의 경우 학문의 즐거움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책 읽는 즐거움은 무엇인지 안다. 동양 고전의 즐거움까지 알려면 아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묘한 행복을 이젠 조금은 알 것 같다.
술이 편 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격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 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가 만약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드는 천한 일이라도 나는 하겠다. 그러나 추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 2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간다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리어 본받고, 그들의 좋지 않은 점으로는 나 자신을 바로 잡는 것이다.” 2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이 다가온다.”
큰 아이는 논어를 가지고 독서토론 입론을 어떻게 작성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추천 도서도 있으니 그 책들과 함께 적절하게 인용하고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다. 어렵지만 뿌듯했던 논어 입문기... 나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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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권의 번역본으로 공자의 사상에 대해 가늠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삶에 대해서도 무지하며 논어의 한 구절구절이 탄생하게 된 앞뒤 배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공자의 사상을 정의할 수도 비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권의 논어 번역본으로 본 공자의 이야기들을 읽어가는 독자로서 위로를 받은 부분이 있다는 점과 내 언행을 수양해줄 포인트를 발견했다는 점 등이 이 독서에서 얻은 가장 큰 미덕이다.
논어는 인과 예를 강조하고 일상에서 위와 아랫사람으로서 각자의 예를 지키듯 국가에 있어서도 덕치와 국민의 섬기는 예를 강조한다. 이 부분이 정치권력에게는 분명 통치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새겨들으면 백성된 한 사람으로 반가울 일이다. 그러나 정치권력자들에게는 통치자로서의 일종의 처세, 시민에 대한 처세에 불과해지지 않을까 불안해지기도 한다. 참으로 강하면서 부드럽고 예를 갖춘 仁者가 되기란 어렵다. 정치권력자들에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특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는 참 어려운 일이다. 자본의 축적을 좇자면 예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지금의 정치는 신분과 물질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만능주의를 키워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는다고 해서 단숨에 성인이 되기도 어렵겠지만 성인으로서 지금의 정치 혹은 경제적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이야기지만 지금도 유효한 공자의 말 중 부를 쌓아 부유해질 듯 하면 그리 했을 것이라는 말이 이런 생각과 함께 와 닿는다.
그렇다면 시민으로서의 정치참여에 대해서 논어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얼핏 보면 공자의 가르침은 바르지 않은 정치에서는 멀리 가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하는 공자이지만 나는 그가 정치외권에서 시민으로서의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정치권력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치 밖에서도, 간혹은 정치 안에서 강력하게 올바른 언변과 행동으로 실천해줄 정치가가 필요하다고는 생각도 잠깐 든다.
당시의 정권강화를 위한 신분제를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녀와 동일시하여 강화해왔기 때문에 당시의 공자의 가르침은 매우 효율적이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공자의 가르침과 생활이 가히 현대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신분과 성별의 차별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 또한 떨칠 수는 없다. 특히 소인을 여자와 동일시하며 군자로서의 여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문구들을 보면서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당시의 뿌리깊은 신분제와 정권을 결성하고 있는 남성중심적 사회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공자 이후 공자의 유교적 형식을 강조하기 위해 재편된 논어의 모습의 일부이기도 할 것이라는 예상을 해본다.
몸가짐과 형식을 강조하고 있기도, 또 그보다는 섬김과 아랫사람 혹은 빈곤한 자들에 대한 군자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기도 한 논어이지만 그 안의 공자의 모습은 제자를 매우 사랑하고 평생 배우는 자세를 중요시하고, 스스로 빈곤과 불편을 자초하는 선비의 일관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의 가르침이 이후에 그리고 전파되면서 우리의 역사 안에서도 형식과 신분의 차이를 강화시킨 역사로 남기도 했지만 이는 분명 여러 전파과정에서 정권의 필요성에 의한 것을 취하고 재편하다보니 생긴 역사들로 이해된다.
지금 논어를 읽는 것은 그러한 유교적 가르침에 대한 선입견을 조금은 교정할 기회가 된다.현대사회에서 삶의 모토는 차이에 대한 이해가 지배적이다. 그 차이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에 대한 시도와 노력만이 자신을 정화시킨다. 그런 면에서 논어는 지친 삶을 조금은 위로하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나 투쟁을 모토로 야망을 가졌다면 논어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공자가 권력자들에게 전쟁의 실무기로서의 백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통치자가 아닌 시민으로서 볼때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경우에는 그러했지만 다른 독자의 경우 리더쉽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여 그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면 공자의 백성을 다스리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어를 즐겨 공감하거나 가르침을 얻는 부분이 많다면 불경 혹은 탈무드 또한 권한다. 최근 성경을 읽으며 느낀 점이 있다면 정말 한국기독교의 목적에 맞게 재편된 성경의 느낌을 버릴 수 없다는 점과 동시에 왜 나는 이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만 해석하려했는가 하는 반성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은 논어와 불경에 못지않게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했는데 에피소드 혹은 공자의 말, 부처의 말, 예수의 말들은 나에게 나름의 해석을 유도하면서 개개인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불경이 나와 나의 마음을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성경은 내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고 주변을 살피게 했다. 어떤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정치처럼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보다는 그 가르침들에 대해 나를 다스리는 기회로 삼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많은 종교인들에 대한 실망을 아직도 감싸고 있는 것은 몇몇의 진실된 실천종교인들이다. 이들은 사제이기도 하고 일반신도이기도 하다. 그들이 실천하는 불경, 혹은 성경의 언어들은 모두가 똑같이 읽는 글자들이 아니다. 자신이 해석한 긍정적의미로의 불경, 혹은 성경의 언어이다. 종교의 가르침들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논어를 읽으며 종교와 각 경전에 대한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논어를 통해 본 공자는 이타적 인간이다. 그러나 논어를 읽다보니 왜 공자의 가르침이 ‘유교’라 할만큼 거의 종교적으로 번성해왔는지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섬김과 인자의 태도를 보이는 형식을 적당히 배분하고 그 형식에 의미를 둠으로써 종교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자신을 수양하게끔 하고 인과 예라는 덕목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한 비판은 스스로를 정비하고 서로를 보는 시선의 잣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의 변화는 무리를 만들고 종교적인 힘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교가 했던 역할처럼 말이다.
개개인의 이러한 수양이 축적되고 확대되고 올바르게 전파되었다면 아마도 공자가 생각하던 유토피아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사상이 그가 생각했던 유토피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의 느릿느릿한 실천은 분명 의미가 있다. 나 또한 이러한 가르침이 진정 유토피아적인 모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 생각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옳은 것에 대한 고민으로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며 그 존재를 가치있게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다. 물론 논어가 경전이라기 보다는 공자의 일상에 가까운 기록인지라 잘못 해석되거나 앞뒤 정황을 알 수 없는 경우 그의 가르침에서 모순적인 면도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화되지 않는 논어 안의 ‘공자’를 만나는 것은 그가 진정 이타적인 사람들로 넘쳐나는 유토피아를 만나는 것과 같고 그 부분이 독서 이후에 감동으로 느껴진다.
논어는 내게 자기계발서와 같이 보였는데 근래 넘쳐나는 자기계발서와는 같으면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논어는 무엇이든 이기고 오르기 위한 처세술이라기 보다는 지혜롭게 좋지 않은 것을 피하고 자신을 가다듬으며 말을 (잘하기보다는) 아끼는 처세술이니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는 각 독자의 몫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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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중학교때 한문 시간을 통해서 처음으로 접했다. 그 때 책에는 논어에서 따온 말이라고 쓰여 있었겠지만 인식하지는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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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치고 <공자>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한 사람이다보니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부류부터 그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부류까지 참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그를 평하고 논한 사람도 드물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느 쪽? 다행히도 이 책은 그를 위대하다고 목을 메지도, 죽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지도 않았다. 그럼 이도저도 아닌 두루뭉술할 것 같은데 그 또한 그렇지 않고 나름 색깔을 갖고 있다.
그것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 공자>, 즉 <사람 공선생>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공선생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평생을 부유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말년에는 제자들과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거렁뱅이처럼 <한 자리>를 구걸도 해본 인물이다. 그래서 공선생은 자기 스스로 뛰어난 위치에서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그를 기리며 받들었기 때문에 유명한 인물일 따름이다.
그럼 이런 인물이 세 살에 천자문을 뗀 천재였는가? 그도 아니다. 그가 <위정편>에서 말하길, 자신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뒀으며 서른이 되어서야 겨우 자기 학문을 세운>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뒤의 행보를 보면 남다르다. 마흔이 되면 학문에 치질 법도 한대 지치지 않고 스스로 <그 어느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더니 쉰에는 자칭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고 당당히, 예순에는 무슨 일이든 듣는 족족 이해를 했으며, 일흔에는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고 하니 참으로 괄목할 성장이다. 과연 무엇이 평범한 이를 이토록 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어느 정도는 시대가 영웅을 만든 경우가 아닐까 한다. 공선생이 전국을 떠돌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 아직은 주나라 천자를 중심으로 한 예의와 법도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은 시대. 그렇기에 공선생은 <착하게 살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당시 군주들도 완전 무시당하지 않고 '그래, 공선생이 말한대로 옛날에는 참 살만한 세상이었어'라면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착함(仁)>이 통했기에 공선생은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건 그렇고 2천 년 전 가르침을 오늘날에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있을까? 당근 공선생이 말씀하던 것을 곧이곧대로 따르기엔 200% 모자르다. 우리는 고작 600년 전에도 공선생 말씀대로 살아보았고, 3~40년 전 만해도 공선생의 말씀을 따르려다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오늘날에도 오롯이 살아남아 <전통>으로 떠받들어진 덕목이 있는가 하면, 이에 맞서 <폐단>으로 지적받아 퇴출당한 폐습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공선생이 말씀하시길>이라는 '떠받드는 식'으로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그러니 다르게 읽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닐까. 이제는 <사람 공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라는 '따지는 식'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힐테다. 사실 춘추시대 당시의 공선생의 말씀도 따지고 들 것이 많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남은 한이 없다>고 말해놓고 막상 '저녁'이 되자 <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니라>라며 제자가 물음을 던질 때마다 앞뒤가 맞지 않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다. 이렇게 변죽이 들끓던 인물에게 과연 '무슨' 매력이 있었을까?
적어도 난 고상한 체 하지 않고 사람냄새 물씬나던 그의 <변덕>과 궤변에 가까운 <엉뚱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귀엽지 않은가? 진짜 삶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던(이데아) 플라톤같은 사랑(플라토닉)은 밥맛이다. 아니 사랑하면 어디 마음 속으로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육신의 한 곳이 잔뜩 꼴리고 부푸는 것이 솔직담백한 사랑인 것을 애써 감추며 고상한 척하는 사랑이 어디 사랑인가 말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한다던 이들이 과연 순수하기만 할지 의심이 드는 나다.
그래서 난 배고플 땐 메리를 드시고, 짐짓 메리가 내 뱃속 구경을 하고 싶어서 소원을 들어주어 메리의 도리를 다하게 하였다며 너스레를 떠는 공선생이 귀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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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논어를 KBS 중계석 희망특강 "박재희의 난세에서 헤엄치기"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논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고전으로서도 꼭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막상 다가서기에는 어려운 책이었지만.. 겨울방학도 맞이하고 해서 한 번 쯤은 읽고 어쩌면 넘어야할 산이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엔 읽었습니다.
하지만 읽고 나니깐 왜 이것에 대해 두려움이 컸는지.. 조금더 일찍 보지못했는지 아쉬움이 많이 납습니다. 또한 고전이 왜 고전으로 남아 대대 손손 읽혀지는 지를 알 수 있기도 하였구요.
저 개인적으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 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내가 남을 알아 보지 못함을 걱정해야한다는 구절이 맘에 와 닿았습니다."
살다보면 남이 왜 자신을 못 알아봐주는지에 대해 속상한 적이 남을 알아보지 못해 속상한 적 보다 더 많았습니다. 아니 남을 알아볼 생각보다는 내가 남보다 튀어야한다고 교육받아왔습니다. 어쩌면 나는 겸손해져야하고 주위에서 다른 이를 빛나게 하는 것은 자기 pr의 세계라고 칭해지는 요즘 현실엔 안 맞아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렇기에 주위에 눈을 돌려야지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신이 발전할 수 있으며, 어쩌면 오랜 시간이 흐르면 먼저 튀는 사람보다 더 그 조직에서 융화되고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고전들 처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마음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게나마 이렇게 논어와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디자인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논어 시작 전에 간단히 공자에 대한 설명이 써 있는 부분은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각주가 주황색으로 처리 되어있는데.. 오래 읽으면 눈이 좀 피곤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 한자로 원문이 적혀있는데, 이왕이면 음도 같이 실어주셨으면 합니다. 한자뜻까진 힘들더라도.. 음이 적혀있으면 한 번 옥편도 찾아보면서 공부하기 쉬울 것 같아 아쉽군요..
양장본이라서 생각외로 가격이 쎄서 할인가격이 아니면 선뜻 손이 쉽게 가지 못합도 아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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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 程子 논어를 읽기 전이나 읽은 뒤나 똑같다면 그 사람은 논어를 읽지 않은 것이다. - 정자
인문고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을 몇 가지 꼽을 때 그 중 빠지지 않을 책이 바로 이 책 《논어》다. 책을 펼쳐보지 않은 사람들도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로 시작하는 학이 편의 첫 구절은 전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논어는 그 명성에 비해 다 읽어낸 사람은 드물다. 일단 주위를 보면 그렇다. 결코 길지 않은 책이라 마음먹고 읽어내기만 하려면 어려울 게 없지만 제대로 읽으려고 원문 해설까지 하나하나 따져 읽다보면 어지간한 끈기로는 끝까지 독파해내기 힘들다. 요즘은 일반인들이 읽기 쉽게 나온 해설서들이 많지만 그걸 읽고 논어를 읽었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가장 손쉽게 논어를 읽어내는 방법은 끝까지 일독 하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틈틈히 펼쳐 한 구절 한 구절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늘 가까이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구입한 지 꽤 오래 되었지만 자주 접했던 몇 구절만을 일상에서 되새기거나 다른 책에서 만난 글귀들을 논어에서 다시 찾아 확인하고 밑줄을 그어두는게 고작이다. 그런데도 누가보면 몇 번은 읽은 책처럼 책은 허름해져 있다.
사실 논어가 아무리 최고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하더라도 정자가 얘기한 것처럼 읽기 전이나 읽은 후나 내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책이나 마찬가지다.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같다면 굳이 유명세를 따라 읽으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인문고전 독서법을 담은 책들을 보면 어려운 고전을 읽고 이해하려 노력하다보면 깨달음을 얻게 되거나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반복해서 꾸준히 읽으라고들 한다. 하지만《논어》 같은 책 전체를 반복해 읽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속독으로 읽을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쁜 현대인들에게 특히 그렇다. 그래서 바쁜 현대인들은 논어의 내용 중에 자신의 일상과 연결해서 되씹을 만한 유익할 만한 글들만 골라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한 구절을 읽더라도 자신의 일상을 변화시킬 단초가 된다면 그것으로 책을 읽는 목적은 이룬 셈이다. 이렇게 논어의 글들에 익숙해지다보면 굳이 전체를 일독하지 않더라도 논어를 읽은 성과를 보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들만 반복해 읽어도 억지로 일독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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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때 교양으로 수강한 적이 있었다. 물론 한자까지 외워가며 비교적 원문에 충실한 풀이와 해석으로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 바 있었다. 그래서 불혹을 넘긴 나이에 다시한번 논어를 접하고자 선택한 책이었는데, 아쉽게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짤막한 원문풀이에 그치지 않는 책 내용은 한마디로 '헐;'이었다. 틈틈이 읽고는 있지만, 다시 다른 논어를 구입해야 겠다는 아쉬움이 계속 드는 책이다. 오히려 한자가 함께 수록되었다면 이해가 훨 빨랐을 법도 하다. 아무튼 논어를 꼼꼼이 읽고자 한다면 비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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