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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상처는 독자의 공감으로 치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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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거느리는 많은 풍경 중에서 여행이 차지하는 면적은 얼마나 될까?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고 또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피의 일’로서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대부분의 시인에게 있어서는 여행은 삶과 동의어이다.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음에게 있어서도 여행과 삶은 조금도 주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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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거느리는 많은 풍경 중에서 여행이 차지하는 면적은 얼마나 될까?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고 또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피의 일’로서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대부분의 시인에게 있어서는 여행은 삶과 동의어이다.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음에게 있어서도 여행과 삶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등호로 연결된다. 젊은 시인 이병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그에게 삶은 곧 여행이며, 시는 사진과 더불어 그 여행의 한 장르다.

삶=여행, 이라는 이 단순 명쾌한 등식은 시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꿈꾸는 인생의 방식이 되겠지만, 늘 그렇듯이 실제로는 삶과 여행은 완벽하게 겹쳐지지는 않는다. 고향의 지평 안에서는 만족할 수가 없기에 우리는 떠나는 것이지만 다른 땅에서도 언제나 한계는 발견된다. 욕망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간극은 깊고 넓어서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이병률이 자신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에 담아내고 있는 마음의 풍경화는, 그래서 늘 어둡고 쓸쓸하고 아련하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미리 편지도 띄워 놓았건만 나를 위해서는 아무도 플랫폼에 나와 있지 않은 작은 역에 15분간 정차한 장도열차 주위로 몰리는 어둠처럼.

 

장도열차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이나마

열차가 쉬어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 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 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 30쪽, <장도 열차> 전문

 

여행이란 그저 낯선 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치고 마는, 그래서 우리의 기대를 늘 배반하고야 마는 장도열차일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이 은밀한 전언은 우리로 하여금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 누군가(또는 무언가)와 간절히 만나게 되기를, 그 만남을 통해서 진심 어린 눈물을 쏟아내며 이야기하게 되기를,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로 살아가게 되기를 꿈꾸지만, 그러한 기대는 언제나 무산되지 않았던가!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은 이처럼 시인이 간절히 기대했으나 타인의 삶(또는 낯선 세계) 속으로,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의 삶으로 깊숙이 스미지는 못한 채 단지 스침이 되고 만 안타까운 내력들을 들려주고 있다.


   시인의 여행이 실패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가 여행지로 선택하여 도착한 땅은
‘우리’에겐 낯설고 새로운 세계이겠지만 그 땅에서 이미 살고 있는 ‘그들’에겐 일상적 삶이 굴러가는 생활의 현장임을 우리는 곧 알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와 ‘그들’을 뚜렷하게 구별시켜 주던 경이와 신비의 색감은 우리가 여행지에서 ‘그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우리’의 일상과 거의 다를 바 없는)을 목격하는 순간 금세 빛이 바래고 만다.

 

아물지 못하는 저녁

 

눈발 쏟아지는 길을 걸어 식당을 찾아냈다. 인적 없는 식당 안을 채우고 있는 소란스러운 냄새, 냄비에 뭔가 끓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오지 않고 내심 앓는 소리로 끓고 있는 냄비에만 마음이 쓰였다. 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뭔가 모를 그것이 다 졸아 타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뚜껑을 여니, 두 줄로 포개어져 끓고 있는 두부에 붉은 물이 들고 있었다. 도마 위에는 긴 머리칼 한 올과 가지런히 썰어놓은 파 한 뿌리. 아, 나도 모르는 사이, 냄비 안에 파를 집어넣고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두부를 자르고 있는 나.

 

푸지게 공허만 차려놓고 돌아오지 않는 주인은 어딜 간 것일까. 보따리만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는 이 매몰찬 안간힘을 어쩔 텐가. 물기가 내려앉아 얼기 시작한 창문 밖으로 눈발은 그치질 않고 식당 안으로는 문을 닫아걸어야 할 것만 같은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 26쪽, <아물지 못하는 저녁> 전문

 

시인이 주인 없는 식당에서 마주 친 끓고 있는 냄비에는 낯선 곳, 낯선 음식에 대한 여행자로서의 기대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혼자 사는 그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음식이자 일상의 반찬인 두부가 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모르는 사이, 냄비 안에 파를 집어넣고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두부를 자르고’ 간을 보는 시인의 행위는 여행자의 호기심이 아니라 일상적 습관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시인은 뭔가 새롭고 낯설고 경이로운 모험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왔지만 그 여행의 현장에서는 자신이 떠나온 익숙한 일상의 모습을 다시 발견할 뿐이다. 더군다나 주인이 없는 그 현장에서 어쩔 수 없는 습관의 힘에 의해서 자신이 그 주인공 역을 떠맡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마음을 한층 불편하게 만든다. 시인이 ‘보따리만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는 이 매몰찬 안간힘’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식당 주인 대신 차린 두부찌개가 불러 일으키는 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아물지 못하는 저녁’이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창문 밖 몰아치는 눈발과 몰려드는 어둠을 바라보면서 말 없이 식당주인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에는 옹이처럼 새겨진 오래된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에 실린, 일상적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 상처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외부적으로는 그가 일상적 삶을 감내하고 있는 삭막한 도시환경과 기술문명(옥탑방, 전철, 휴대폰. 인터넷 따위)이, 내부적으로는 사소한 마주침에도 마음의 누(累)를 느낄 정도로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시인의 여리고 착한 마음이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시인은 마음 속에 상처를 품게 된 것일 테고, 일상적 삶에서는 자주 덧나곤 하는 그 상처로부터 도주하고 회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기획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결국 여행도 그 진정한 탈출구나 치유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시인은 자신의 상처가 된 내력들을 시로써 내려놓기에 이른 것이다. 평면을 가질 뿐인 카메라로는 그 내력들의 깊이를 다 담아낼 수 없기에 택한 이 방식은, 놀랍게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상처에 공감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 권의 시집을 통해서 한 시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독자 편에서 맺은 일방적인 관계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독자들이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이병률 시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 고백한 상처의 내력들이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받고 이해되고 나누어짐으로써 이젠 더 이상 그 자신만의 상처로 남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병률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는 읽는 순간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나 그런 공감과 이해와 나눔의 마음을 갖게 만드는 매혹적인 시집이다.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이 시집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스침이 많아 상처가 된 내력들을 내려놓지 못한’ 시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어보면 이러한 시인의 고백이 어느 정도 사실임이 확인된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 시들을 읽고 개입하는 순간, 그 미완의, 소통불능의, 내밀한 내력들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면서 시인 자신에게만 갇혀 있지 않고 열리고 소통되고 확장된다. 장도열차를 탄 시인은 이제 작은 기차역 플랫폼에 나와서 그를 기다린 그리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눈보라 속에서 돌아온 주인 식당과도 두부찌개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여리고 착한 시인과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c*****t 2011.05.11. 신고 공감 4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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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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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에 중독된 사내의 방랑의식- 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이병률은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2005)의 <자서自序>에서 “스침이 많아 상처가 된 내력들”을 이야기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찾아 끊임없이 세상을 떠돈 시인의 내력을 생각한다면, 그의 상처는 무엇보다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자서>)을 향한 동경과 맞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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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에 중독된 사내의 방랑의식

- 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이병률은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2005)의 <자서自序>에서 “스침이 많아 상처가 된 내력들”을 이야기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찾아 끊임없이 세상을 떠돈 시인의 내력을 생각한다면, 그의 상처는 무엇보다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자서>)을 향한 동경과 맞물려 있다. 그리하여 이병률의 시에는 저주받은 시인의 낭만적 정서가 흘러넘친다. 지금 이곳에 발을 디딘 채 바라보는 저편의 세계는 바람처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한 사내의 내면에 오롯하게 스며들어 있다. 떠남과 돌아옴의 여정이 이병률의 시에서 반복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인은 떠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순환의 여로를 반복한다. 도대체 그는 왜 이토록 떠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일까? 한바탕 울기 위해서이다. “울진이라는 이름에 울컥하여”(「스미다」) 새벽에 차를 몰고 울진에 갈 정도니 시인에게 울음은 이미 일상화된 습관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시인만 울고 있는 게 아니다. 갑작스레 치솟은 설움을 견디기 위해 울진으로 간 시인의 눈에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스미다」)가 보인다. 해바라기 숲을 등진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울고 있다. 울고 싶은 사내 앞에 우는 사내가 나타났으니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같은 시). 그런가 하면 “새벽 두시에서 네시 사이/ 집 앞에 머물다 가는 여인네”(「오, 비린 것」) 역시 소리 내어 울고는 이내 사라져버린다. “종일 비린내가 머물고 가는 통에/ 물기 마를 날 없는 집 앞 평상 다리가 썩”(같은 시)을 만큼 이병률의 시 세계는 온통 울음으로 덧칠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의 삶을 규정하는 이 울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생의 절반」을 참고하면, 그것은 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컴컴한 얼룩”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얼룩은 사랑의 상처와 같은 것이다. 누군가의 넓은 등이 따스해 보여 다가가면, 흠칫 놀란 사람들은 “화들짝 짜증을 내며 뒷전으로 물러”(「생의 딴전」)난다. 사랑이 곧바로 상처로 이어지는 이 사내의 사랑은 수차례 스친 상처 자국이 되어 시인의 몸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단단한 벽이 되어버린 상처의 그늘은 몸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 속으로 시인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어도 뜨겁지 않네

달아오른 숯을 잡아도 뜨겁지 않네

사흘째 가구 삐걱이는 소리에 놀라거나

골목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신발 끄는 소리에 놀라

잠결에도 내가 연필 떨어뜨리는 소릴 듣네

 

(……)

 

억세게 태어난 늑대 머리 말을 타고 봄 들판을 지나

단번에 가을을 질러 겨울에 도착한 비린내

내 몸에 들어와 독을 찾아 마시고 밤새 책을 쓰다

마침내 일어나 앉아 나를 흔들고 있기 때문

하룻밤만 있겠다더니 방을 내놓으라며

나를 토막내 마당에 던져놓았기 때문

- 「저 몸살」 1연과 3연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어도 뜨겁지 않은 ‘저 몸살’의 리듬에 시인의 몸은 들떠 있다. 몸살은 몸-살(殺)이다. 여러 개의 다른 리듬이 한 몸 속에 공존하고 있는 현상이 몸살이라면, 당연히 몸살이 난 몸은 외부의 사물-현상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잠결에도 내가 연필 떨어뜨리는 소릴 듣네”라고 시인은 쓴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평소에는 느낄 수 없던 몸의 감각이 느껴진다. 인용하지 않은 이 시의 2연을 참조하면, 몸살은 “서둘러 도착한 바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바람이 “몸 안에서 만리를” 돈다. 그것은 “억세게 태어나 늑대 머리 말을 타고 봄 들판을 지나/ 단번에 가을을 질러 겨울에 도착한 비린내”처럼 순식간에 몸속으로 침투한다. 손쓸 사이도 없이 시인의 몸을 점령해버린 바람의 숨결(비린내)은 “내 몸에 들어와 독을 찾아 마시고 밤새 책을 쓰다/ 마침내 일어나 앉아 나를 흔들고 있”다. 그냥 흔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토막내 마당에 던져놓”기까지 한다.

 

이병률은 이처럼 토막 난 몸으로 방랑의 길을 걷는다. 방위(方位)로 따지자면 그의 발길은 서쪽을 향해 간다. 그의 몸속에 퍼진 바람의 숨결이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고개를”(「전생에 들르다」) 들기 때문이다. 바람에 묻어 있는 죽음의 징후는 그리하여 그의 시를 “이 세상 소리가 아”닌 “지독한 말”(「내 마음의 동굴, 독사 한 마리」)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이를테면,

 

 

내 마음이 시킨 일이 아닌데 더군다나 희망이 시킨 일도 아닌데 이 세상에 떠도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드는 말 이 세상과 돌과 바람과 햇빛하고도 빚어지지 않는 말이 들렸다―한 일 년쯤 이곳에서 당신 허물과 살아보고 싶군요

- 「내 마음의 동굴, 독사 한 마리」 2연

 

 

라는 부분에 나타나듯, 시인은 저 바깥에서 들려오는 독사의 말에 심취해 있다. 그가 살아보고 싶은 당신의 허물은 ‘내 마음의 동굴’ 앞 강가에서 비늘을 씻던 뱀 한 마리의 바로 그 허물을 가리킨다. “어두운 허방 가운데에 불을 놓고 가는 도도한 이”(1연)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뱀은 내 마음의 동굴 속으로 들어와 “수십 마리 새끼를 낳았다”(3연). 이 세상 소리가 아닌 뱀의 말은 몸살로 들뜬 시인의 귓가에서 아련하게 맴돌고 있다. 뱀의 독(말)에 중독된 몸살 난 몸으로 그는 “신성한 가을 겨울을 살았다”. ‘신성’이라는 시어가 오롯이 부각되는 이 지점에 이르러 이병률의 본격적인 시 쓰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저주받은 시인의 마음속에는 이렇듯 ‘신성’을 향한 애타는 갈망이 스며들어 있다. 「중세의 가을」에 표현되거니와, 그러한 갈망은 “일체의 내력을 내려놓”아야만 시의 세계로 펼쳐질 수 있다. 일체의 내력은 내려놓는 것은 돌려 말하면 관습화된 ‘나’를 내려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 마음의 동굴로 몰려온 “지독한 말의 성충들”이 ‘나’를 “어지러움투성이”로 만드는 까닭은 여기서 연유한다. 외부의 신=영혼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무당처럼, 시인은 어지러운 몸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온갖 “지독한 말”들을 받아낸다. 따라서 어지럽지 않으면, 다시 말해 몸살이 나지 않으면 시인은 이러한 말들을 견뎌낼 수 없다. 이병률 시에 나타나는 울음의 정체는 무엇보다 이러한 지독한 말-몸살의 시적 현상과 연관되는바, 그것은 신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신성을 열망하는 ‘저주받은 시인’이라면 달게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하겠다.

o*****s 2017.10.08.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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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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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2009년 올해 읽은 첫, 첫 시집 이병률의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첫' 이라는 詩도 있기에, 나도 한번 시적여보고 싶어서 제목을 이렇게 달아봤다. 물론, 그러한 질투느낌의 시로 이 시집을 읽은 건 아닌,       시집 읽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무언가의 공허함에서, 무언가의 결핍에서, 위로를 받고자 읽거나 자신의 고요함을 읽고 싶거나 할 때.   그런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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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2009년 올해 읽은 첫, 첫 시집 이병률의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첫' 이라는 詩도 있기에, 나도 한번 시적여보고 싶어서 제목을 이렇게 달아봤다.

물론, 그러한 질투느낌의 시로 이 시집을 읽은 건 아닌,

 

 

 

시집 읽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무언가의 공허함에서,

무언가의 결핍에서, 위로를 받고자 읽거나 자신의 고요함을 읽고 싶거나 할 때.

 

그런데 시집을 읽다보면 시를 쓰는 것도 그렇게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냥 내 느낌.

 

 

사실, 이 시집은 모 시인의 다른 시집을 도서관에서 빌리러 갔다가 그 시집이 없어서 단순, 제목과 시인의 인지도에 끌려 들게 된 시집이었다.

한 마디로 첫,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시집. 그런데 다행이다.

만약 모 시인의 시집을 빌리러 갔다가 빌리려 했던 그 시집이 있었더라면 나의 2009년 읽은 첫 시집의 제목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될 뻔 했으니. 풋! 그냥 우습다.

 

제목 하나에 이렇게 갈릴 운명이 있단 말인가, 시집이란 것이?

 

별거 아닌 서점간의 프로모션으로? 새해를 열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손이 닿게 할 것인가에 내가 걸려들 뻔 한건 또 아닐까? 대형 서점을 빙빙 돌며 신간도 아닌 시집이 다시 판매대열에 올려진 최영미시집을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대를 거론했다거나, 새해가 되면서 무언가 목표의식을 느끼게 해준다거나 하는 장르의 책들이 모두 선전할 때, 시집도 예외가 없었던 모양이다.

 

 

시인 이병률이 지었던, [끌림]을 작년에 읽었던 터라 도서관에서 이 시집에 '끌렸'던가 보다. 그 책 읽음이 이렇게 사소한데서 발휘될 줄이야. 그 시인도 독자인 나도 몰랐을 터. 그런데 자꾸 상관없는 서평쓰기에 거론되는 '사건'이 되는 순간.

 

자꾸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나의 뭉근한 속바람을 읽었던 것일까? 본능이..

하지만 읽다보면 외로워지고 외로워지는 깊숙한 무언감.

 

<전갈傳喝>을 읽다가는 수업을 머얼리 인천까지 다니면서 들었던 올 겨울 마지막 전철 타던 그때가 떠오르게 했다. 오산에서 인천까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2시간의 걸쳐 다녔던 수업. 난, 천안행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반대편 인천라인에서 거나하게 취한 승객이 비틀거리며 일이 늦게 끝나고 머얼리까지 가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전철이 일찍 끊겨버리면 어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가라고 이러는 거냐고 고래 고래 텅빈 전철레일에 대고 소리치셨다. 주변에 서 있던 몇 몇 분들은 살짜쿵 거리를 넓혀주시고 반대편에 섰던 우리쪽 사람들도 전부 그 아저씨를 바라봤다. 그래도 거칠게 푸념하는 아저씨를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푸념거리라도 소리칠 수 있는, 세상에 분풀이를 해도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왠지 그렇게 푸념을 하면 들어줄 세상이 될까 싶어서.

 

비록 노조파업으로 지하철운행간격이 엉켜있을 당시였지만, 늦게까지 있는 그 전철시간에 감사하며 다닐 때였다. 모두가 이른 귀가를 서두를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늦게 일을 해야 하는 사회도 아니요, 멀리까지 무언갈 배우러 다녀야 함도, 머얼리까지 일자리를 향해 다녀야 하는 사회도 아닌 사회말이다. 이른 귀가에 모두가 함께 모여 함께 저녁을 할 수 있는 사회. 그건 꿈같은 천국일테지.

 

하지만, 시 <전갈> 의 전문보다 <좋은 사람들>의 시 전문을 올리고 서평을 마치려 한다.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골목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들이비치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나는 개미들의 행렬을 따라 내 몇 평의 땅에 골자기가 생기도록 뒤척인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페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눈발을 지켜보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식히면서 살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낸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날마다 세상 위로 땅이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m*****e 2009.02.02.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