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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집] 정양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도서/시집] 정양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내용보기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것, 짐작하지만 말 못 하는 것, 다 말하지도 아예 입을다물지도 않는 바로 그 지점. 거리와 긴장, 관계와 실존, 언어와 침묵이 순간의 눈빛으로 얽히는 데서 시가 태어난다.(_148p)’        똑같은 일상에서 비껴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어김없이 도서관행이다.   두서없이, 또 바라는 책 없이 손가락으로 훑어 책들을 구경하고 있자면 거긴 온
"[도서/시집] 정양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내용보기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것, 짐작하지만 말 못 하는 것, 다 말하지도 아예 입을다물지도 않는 바로 그 지점. 거리와 긴장, 관계와 실존, 언어와 침묵이 순간의 눈빛으로 얽히는 데서 시가 태어난다.(_148p)’

 

 

 

 똑같은 일상에서 비껴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어김없이 도서관행이다. 

 두서없이, 또 바라는 책 없이 손가락으로 훑어 책들을 구경하고 있자면 거긴 온전히 내 세상이니까. 그러다가 멈추면 그 책은 오늘 나의 책이 된다. 


 

 

 맛깔 나게 읽을 수 있는 사람만 읽었으면 좋겠는 오늘의 시집은 정양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재미 있는데 진중할 수 있고, 사랑하면서 외로울 수 있는 시집.

 

 

 

 

 

 

 

 판쇠의 쓸개

 

천생원네 머슴 하판쇠

덫에 걸린 멧돼지 배를 가르다가

주인영감 잡수실 쓸개를 제 입에 꿀꺽 집어삼키고

경상도 상주 어디서 새경도 못 받고 쫓겨온 노총각

 

나락섬을 머리 위로 훌쩍훌쩍 내던질 만큼

진창에 빠진 구루마도 혼자

덜컥덜컥 들어올릴 만큼 힘은 세지만

씨름판에서는 마구잡이로 밀어만 붙이다가

번번이 제풀에 나뒹구는 바봅니다

 

멧돼지 쓸개를 따먹어서

판쇠는 쓸개 빠진 짓만 골라 합니다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팽이 치다가

남의 논밭에서 일해주다가

주막에서 남의 술값이나 물어주다가

천생원에게 멱살 잡혀 끌려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새경 받고 *솜리 장에 가서

제일 먼저 까만 금테 라이방을 샀다는데

동네 아낙들이 멋쟁이라고 추켜준 뒤로는

밤에도 그걸 걸치고만 다닙니다

 

천생원이 만경 사는 형님에게 생일선물 보내려고

내일 새보그 맹경 좀 가따 와야 쓰것다 일러놓고

이튿날 새벽 판쇠를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아침밥상 물린 뒤에야 라이방 걸친 판쇠가 나타나더랍니다

 

너 시방 어디서 오냐?

맹경 가따가 오는 기리고마니라우

맹경은 머더러 가떠라냐?

어저끄 가따 오라고 혀짜너유?

가따가 오란다고 그냥 빈소느로 가씨야?

아 글씨 가따가 오라고 혀짜너유?

그렁게 맹경은 가서 뭐시라고 현느냐 그 마리여?

가따가 오라고 혀서 와따고 혀찌라우

그렁게 머시라고 허시대?

그냥 우슴시나 인절미 한 소쿠리 주시던디유

아치믄 머건냐?

인절미 머금서 와꾸마니라우

그 인절미를 니가 다 머거씨야?

먹다봉게 그렇게 되야꾸만이라우

 

하이고 이 쓸개 빠진 노마 인자는 나도

쓸개가 다 빠져뿌런능갑다

캐묻다 지친 천생원이 어이없어 웃는 동안

판쇠도 덩달아 라이방을 벗고

눈물을 찍어가며 웃었습니다

 

*** 솜리: 이리(지금의익산)의 옛 이름

 

 

 

한 세 번 소리 내 읽고, 또 읽었다. 

깔깔 거리다가 이번에는 엄마엄마 불러놓고 쇠자래기죽을 읽어본다.

 

 

소주 만들고 난 찌꺼기

소주아래기, 쇠자래기,

솜리 소주공장에서는 그걸

한 동이에 오십환씩 팔았다

 

(……)

 

술냄새 두엄 냄새 범벅이지만

달착지근한 사카린 맛에 홀려 먹다보면

뱃속은 잠시 든든한데 머리가

핑핑 돌고 어지러웠다

쇠자래기죽에 취해서는 학교 가던 논두렁길에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읽고 나면, 아빠와 엄마의 옛 이야기는 줄을 인다

그래 그랬었지, 그땐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어.

그리고 막걸리 심부름 시키면 가는 길에 어찌나 목이 마른 지 그거 먹고 집에도 못 갔어야

 

1부의 사람냄새 듬뿍 맡으며 웃음지어 읽어내려 갔다면,2부는 조금 더 진중하고 조금 더 외롭다. 담고 싶은 시가 많았지만 하나를 뽑자 정하고, 그 중에서도 똥차와 맛보기 엿에서 고민하다 맛보기 엿으로 적어본다.

 

 

맛보기 엿

 

엿장수 가위 소리를

마냥 따라다니다보면 어쩌다

맛보기 엿도 얻어먹고

자꾸만 군침이 도는 그

헛입맛 때문에

쓸 만한 쇠붙이들 어른들 몰래

헐값으로 바꿔먹기도 했는데

 

어차피 두고 떠나는

이 세상 풍광은 뒤돌아볼수록

나이 들수록 저다지 고운가

 

그래봤자 이 너른 세상

몇 발짝이나 더 디뎌보겠나 싶고

늙도록 헛입맛에나 매달려 사는 게

뭔가 찜찜하기도 하지만

 

맛보기 엿 껄떡거리듯

헛입맛으로 살면 좀 어떤가

한세상 헐값으로 바꿔먹으면 좀 어떤가

 

늘그막에 명산 명수들

맛보기로 드나들면서, 무언가를

헐값으로 헐값으로 바꿔먹고만 싶다

 

 

 

시를 읽으면 꿈을 꾼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읽다보면 동화되버리고 '아'하고 넘어가지만,

시는 한번 더 읽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꿈을 꾼다, 꾸게 된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탈이 어쩌면 받고 싶었던 위로가 아니었을까.

헛입맛으로 살면 좀 어떤가. 한세상 헐값으로 바꿔먹으면 좀 어떤가. 

 

 

나도 마지막으로,(발문에 적혀있는 문장을 인용)

김제군 공덕면 마현리 마을에 있을「은행나무 배꼽」의 은행나무를 한번 만나고 싶다. 

 

아! 그리고 이 시집을 읽게 된다면 꼭 발문까지 읽어보길 바란다. 

정양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집에 대한 이해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은행나무 배꼽


마재마을 날망에는 

세 아름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요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뿌리가 

집집마다 골고루 뻗어 있다고 믿는데요


은행나무 아랫두리에는 예전에

사람 들어앉아 잠을 잘 만큼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답니다

과거에 낙방하여 낙향하던 어떤 나그네가

그 구멍 안에서 한나절이나 잠을 잔 뒤에

구멍 안쪽에시를 한 수 써놓고는

들 건너 찰뫼산 모퉁이를 감아흐르는

부용강물에 그만 몸을 던졌더랍니다


 

(……)

 

 

은행나무 우람한 몸집 안에는 지금도

배꼽으로 삼킨 세월이 텅 빈 채 갇혀서

절명시라도 읊어내지는 신음소린지

무슨 힘을 쓰는 소린지 깊은 밤이면

어쩌다 한 번씩 머언 우레처럼

우웅우웅 우루웅 울어대곤 한답니다



 

 


o*******7 2013.02.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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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과 함께 길을 잃고 싶다
"이 시집과 함께 길을 잃고 싶다" 내용보기
지난해에 선물 받은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데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서 막상 펼쳐보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뒀더랬다. 내 마음이 어쩐지 이 시집 제목 같았다. 아니, 나는 길을 잃고 싶은 게 아니라,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라고 해야겠지만. 2010년의 2월이 막 시작된 한 밤에, 이 시집을 펼쳤다. 나는 길을 잃어서 힘들고 괴로운데, 왜 길을 잃고 싶어하는지, 시인의 마음 좀 들여다보
"이 시집과 함께 길을 잃고 싶다" 내용보기

지난해에 선물 받은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데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서 막상 펼쳐보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뒀더랬다.

내 마음이 어쩐지 이 시집 제목 같았다. 아니, 나는 길을 잃고 싶은 게 아니라,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라고 해야겠지만.

2010년의 2월이 막 시작된 한 밤에, 이 시집을 펼쳤다.

나는 길을 잃어서 힘들고 괴로운데, 왜 길을 잃고 싶어하는지, 시인의 마음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집을 읽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애초에 나를 이리로 끌어들인 제목이 뭐였는지, 내가 이 시집에서 읽고 싶은 게 뭐였는지, 그런 건 이미 까맣게 잊어버리고,

시인의 손에 이끌려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앞에, 혹은 옛날 드라마가 방영되는 티브이 앞에 앉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시집 읽다가 이렇게 큰 소리로 웃어보기도 처음이었다.

시집 읽고 남들에게 전래 동화 들려주듯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처음이었다.

천생원이 만경 사는 형님에게 생일선물 보내려고

내일 새보그 맹경 좀 가따 와야 쓰것다 일러놓고

이튿날 새벽 판쇠를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아침밥상 물린 뒤에야 라이방 걸친 판쇠가 나타나더랍니다

 

너 시방 어디서 오냐?

맹경 가따가 오는 기리고마니라우

맹경은 머더러 가떠라냐?

어저끄 가따 오라고 혀짜너유?

가따가 오란다고 그냥 빈소느로 가씨야?

아 글씨 가따가 오라고 혀짜너유?

그렁게 맹경은 가서 뭐시라고 현느냐 그 마리여?

가따가 오라고 혀서 와따고 혀찌라우

그렁게 머시라고 허시대?

그냥 우슴시나 인절미 한 소쿠리 주시던디요

아치믄 머건냐?

인절미 머금서 와꾸마니라우

그 인절미를 니가 다 머거씨야?

먹다봉게 그렇게 되야꾸만이라우('판쇠의 쓸개' 부분)

앞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웃음이 이 시에서 그만 폭발해서 혼자 푸하하 웃고는 연거푸 두 번을 읽었다.

그러고는 잘 외워서 다음날 아빠 엄마 앞에서 한 번, 동생 앞에서 한 번, "옛날에 판쇠라는 머슴이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판쇠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이 이렇게 내 안에서 전래동화처럼 바뀌어 우리 가족들 귀로 전해졌다.

읽기는 분명 시를 읽었는데, 구수하고 정감있고 감칠맛나는 옛날 이야기를 들은 기분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시집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1부는 이런 분위기이고, 2부는 분위기가 차분하게 바뀌며 시인의 일상사가 그려진 시가 많이 실려 있다.

사실, 1부가 너무 강렬한 나머지 2부의 인상은 크게 남아 있지 않다. 다시 읽을 때는 2부에 조금 더 마음을 두고 읽어봐야지.

 

이 시집을 막 펼쳤을 때는, 우울하고 또 우울한, 한없이 우울한 그런 기분이었는데,

이 시집을 덮을 때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이었다.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주인영감 잡수실 멧돼지 쓸개 낼름 해치우고 쫓겨난, 쓸개 빠진 판쇠 이야기를 생각하면 큭큭 웃음이 새어나온다.

한없이 우울한 길을 걷고 있던 나를 냉큼 샛길로 채어가준 고마운 시집.

이렇게 잃는 길이라면, 나도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아질 것 같다.

j******o 2010.02.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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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풍광은 나이 들수록 고운가
"이 세상 풍광은 나이 들수록 고운가" 내용보기
은행나무 배꼽     마재마을 날망에는 세 아름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었는데요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뿌리가 집집마다 골고루 뻗어 있다고 믿는데요   은행나무 아랫두리에는 예전에 사람 들어앉아 잠을 잘 만큼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답니다 과거에 낙방하여 낙향하던 어떤 나그네가 그 구멍 안에서 한나절이나 잠을 잔 뒤에 구멍 안쪽에 시를 한 수 써놓고
"이 세상 풍광은 나이 들수록 고운가" 내용보기

은행나무 배꼽

 

 

마재마을 날망에는

세 아름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었는데요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뿌리가

집집마다 골고루 뻗어 있다고 믿는데요

 

은행나무 아랫두리에는 예전에

사람 들어앉아 잠을 잘 만큼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답니다

과거에 낙방하여 낙향하던 어떤 나그네가

그 구멍 안에서 한나절이나 잠을 잔 뒤에

구멍 안쪽에 시를 한 수 써놓고는

들 건너 찰뫼산 모퉁이를 감아흐르는

부용강물에 그만 몸을 던졌답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그 구멍을 꺼려해선지

구멍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는데요

사람들 배꼽 높이만큼 파인 그 구멍을

사람들은 은행나무 배꼽이라 했고

위아래로 째져 보여서 아이들은 그냥

은행나무 보지라고도 불렀습니다

구멍이 점점 좁아졌다지만 내 어렸을 때만 해도

어깨나 허리에 감고 다니던 책보 여남은 개씩은

그 구멍 안에 쑤셔넣기도 했고

어떤 때는 사람들 눈을 피하여 분풀이하듯

그 안에다 다투어 오줌을 싸지르기도 했는데요

 

아마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무렵이었지요?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본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나그네의 절명시(絶命詩)가

문득문득 궁금했었던 게지요

구멍 안쪽에는 쭈그러든 나뭇결 사이사이에

무슨 부적처럼 보이는 흐린 붓 자국들이

손전등 불빛에 어른거려 보이곤 했는데요

내가 대학 다니던 때만 해도 그 구멍이

손바닥 하나쯤 겨우 드나들게는 좁았는데요

이제는 나무껍질만 세월 따라 부풀어

그 구멍을 영영 가두고 말았습니다

 

은행나무 우람한 몸집 안에는 지금도

배꼽으로 삼킨 세월이 텅 빈 채 갇혀서

절명시라도 읊어내는지 신음소린지

무슨 힘을 쓰는 소린지 깊은 밤이면

어쩌다 한 번씩 머언 우레처럼

우웅우웅 우루룽 울어대곤 한답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떠오릅니다. 우리 나라에 살아 있는 은행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입니다. 은행나무 나이는 1,1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0여 미터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2.3m를 넘어 동양에서도 가장 큰 은행나무랍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만난 은행나무는 동무들 여럿이서 둘레를 재보기도 했는데 얼마 전 찾은 은행나무는 철제 울타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울러 나뭇가지 여기저기를 철제 버팀목으로 받치고 있어 세월의 흐름에 점점 기력을 잃어 가는 게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렇더라도 오랜 세월을 견디며 지니게 된 장대한 높이와 안을 수조차 없는 굵기로 인한 감동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절집은 물론 절집에 사는 스님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빛을 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마재마을 사람들이 ‘뿌리가 / 집집마다 골고루 뻗어 있다고 믿는’  은행나무처럼 말입니다.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은행나무의 뿌리가 닿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풀어낸 시들이 눈에 띕니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의 마재라는 설화 공간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에는 ‘징용 안 갈라고, 이사 옴서부터 / 내내 벙어리 행세’(「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를 한 장구재비의 가슴 아픈 사연도 있고, ‘황새목 낫으로 한꺼번에 두 대나 잘라내고도 / 남은 손가락으로 다시 / 끗발 조이러 나다니는 종태 애비’(「내외」)도 있으며, ‘세무서 직원들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을 싹싹’(「술 뒤지는 날」) 빌게 한 특무상사의 화끈함도 있습니다. 보릿고개를 겪을 당시의 마을 공동체라면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전라도 사투리와 해학으로 버무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기억으로나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잠시 현재의 속도를 늦추고 고향에 머무르게 합니다. 서시라 할 수 있는 「이른 봄」은 내 마음을 아주 오랫동안 고향에 붙잡아 둔 작품입니다.

 

 

이른 봄

 

 

겨우내 투전판에다

나락 마흔 섬 날려먹고

속 터지는 만석이는

그 속 차리느라 고개 숙이고

새벽마다 고샅길 개똥을 줍는다

거름으로는 개똥이 으뜸이지

겨우내 잃어버린 그 농사 또 지으러

망태기에 망태기에 주워담는 개똥

 

미나리꽝에서 건진

젖은 개똥 속에는

막 돋아난 미나리싹도 묻어 있다


YES마니아 : 골드 g*******g 2008.04.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