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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가 보여주는 전 생애의 바로 그 한 순간... <온 생애의 한순간>
"중견작가가 보여주는 전 생애의 바로 그 한 순간... <온 생애의 한순간>" 내용보기
학창시절엔 전상국의 소설로 합평회를 하고는 했다. 아마도 이문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때때로 비교해가며 「우상의 눈물」을 읽었던 듯하다. 그러고보니 간혹 계간지에 실린 소설들을 제외하고는 전상국의 소설을 꽤 오랜만에 읽었다.     「물매화 사랑」.   “물매화. 이름을 알면서 그것이 비로소 내 인생에 들어왔다. 가지울로 거처를 옮긴 그
"중견작가가 보여주는 전 생애의 바로 그 한 순간... <온 생애의 한순간>" 내용보기

  학창시절엔 전상국의 소설로 합평회를 하고는 했다. 아마도 이문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때때로 비교해가며 「우상의 눈물」을 읽었던 듯하다. 그러고보니 간혹 계간지에 실린 소설들을 제외하고는 전상국의 소설을 꽤 오랜만에 읽었다.

 

  「물매화 사랑」.
  “물매화. 이름을 알면서 그것이 비로소 내 인생에 들어왔다. 가지울로 거처를 옮긴 그 첫해 여름에 가장 먼저 만난 들꽃도 물매화였다. 그 가을엔 겨우 여덟 송이의 물매화를 보았다. 내가 물매화를 바라보듯 물매화도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중환자실 앞에서 그냥 돌아온 뒤 다시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물매화에 겹쳤다...” 어린 시절 잃은 자신의 어머니와 이제 나이가 들었으되 말을 잃고 우울중 판정을 받아 숨어들 듯 기거하고 있는 가지울 근처에서 새롭게 발견한 물매화... 그리고 그러한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관조와 가지울 근처 왜갈봉에서 가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사내... 긴 말이 혹은 대화가 없는(혹은 필요없는), 대신 풍경이 흐르고 시간이 고여 있는 듯한 소설...

 

  「소양강 처녀」.
  일제 강점기부터 장수하늘소의 서식지로 알려진 추곡 마을, 그 마을에서 선생님으로 재직중이며 장수하늘소의 연구를 위해 발품을 팔고 다니는 나... 그리고 근처 추전리로 은연중 스며들어 다 죽어가는 한 사내를 살리고, 그 사내의 아이까지 떠맡아 지내다, 또 그렇게 나타난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 한 여인... 장수하늘소를 찾아다니는 나와 산삼을 캔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그녀, 그런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마을 사람들... 점점 그 존재의 희박함으로 희귀함을 드러내는 장수하늘소와 부유하는 존재 같았으되 여러 사람에게 묵직한 존재감을 실어주고 떠나간 그녀의 이야기...

 

  「플라나리아」.
  (1,2년전에 읽었던 듯하다) 같은 제목의 일본작가소설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흥미가 가는 생물체인 플라나리아.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을 함께 하는 플라나리아는 몸이 잘리면 그 만큼 개체수가 불어날 뿐 죽지는 않는다. 과학교사인 나는 학생들과 플라나리아를 가지고 실험을 하던 어느 날 감쪽같이 플라나리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동거하던 그네 또한 이 플라나리아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그네가 사라진 정말 집을 떠난 것인지 아니면 집안 어딘가에 있지만 그저 사라져 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인지 헷갈린다. 자연과 인간, 존재의 사적인 역사성과 순간의 포착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소재인 플라나리아가 너무나 적절하게 어울려서 빈틈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대상 수상작이어도 불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아, 그리고 섬뜩함을 느꼈던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60년대 초 제임스 맥도널과 그의 동료는 플라나리아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학습시킨 플라나리아를 다른 플라나리아에게 먹여서 학습된 내용이 전달되는가를 알아본 것이다. 접시에 담긴 플라나리아에게 불빛을 비춘 후 전기 충격을 가하자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전기 충격의 고통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불빛을 비춘 후 전기 충격을 여러번 반복하게 되면 플라나리아는 불빛만 비춰도 몸을 동그랗게 오그렸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같은 것인데 이렇게 학습된 플라나리아를 갈아서 다른 플라나리아에게 먹였다. 학습된 플라나리아를 먹은 다른 플라나리아 역시 불빛만 비춰도 몸을 말았다. 학습된 내용이 전달된 것이다.”

 

  「온 생애의 한순간」.
  표제작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의 시 「내 청춘의 영원한」으로 시작되는 소설. 곤충 사진을 찍는 여자와 홀로 산행을 즐기던 남자의 만남... “남자의 관심을 끈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두쌍무늬노린재가 되어 있는 여자의 그 지독한 몰입. 가슴을 뻑, 소리나게 얻어맞은 것처럼 남자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남자는 어떤 일에 지독히 몰입하는, 그 신명을 모르고 살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하지만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는 남자의 치명적인 한계, 그리고 자신의 일로 명성을 쌓아나가게 되는 여자라는 부수적인 조건 때문에 영원하게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지속되지 못함으로 ‘온 생애의 한순간’이어서 더욱 선명한 관계에 대한 여자의 고찰...

 

  「이미지로 간다」.
  ‘예술이 절대 정신이라는 의미는 동시에 예술이 객관 정신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객관 정신의 표현, 그것이 곧 예술이란 얘기다.’ 헤겔의 관념의 늪에 빠진 대학 강사이기도 한 40대의 나... 인도에서 만났다는 그네의 이야기와 그와 미지의 이야기가 헷갈린다.

 

  「한주당, 유권자 성향 분석 사례」.
  어딘가에서 읽은 것 같은데 어디서였는지 모르겠다. 한 중소도시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정채라는 남자와 그 술집의 단골로, 또한 그 지역의 얼치기 지적 유지로 술집을 들락거렸던 닥터 박, 송암선생, 테너 장, 김영랑 교수, 주유소 최의 이야기...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보다 길어 중편이며 주인공 역을 하는 한정채라는 남자의 캐릭터가 꽤 선명하여 기억에 남는다.

 

  「너브내 아라리」.
  공무원으로 일하다 부정한 사건에 연루되어 덤터기를 쓰고 감옥에 갇혔던 나... “부정과 비리의 법칙은 그 순환 관계가 명료하다. 어느 공무원이 업자의 청 하나를 마지못해 인간적으로 들어준다. 소액의 촌지가 인간적으로 주머니 속에 들어온다. 세상이 다 그런 거야. 술 한잔 걸친 공무원의 그 호기야말로 인간적이다. 뇌물이 아니면 결코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울분의 이를 갈던 업자로선 그 작은 돈이 그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황금알을 낳는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한다. 양심의 실종으로 얻어진 그 감동에 비례해 수백 수천의 피해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 수백 수천의 피해자는 일구월심 이를 갈며 오로지 가해의 날만을 기다린다.” 그런 내가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들어앉았던 장항리와 그곳에서 만났던 쏘가리 최씨... ‘외진 곳이면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너브내 강’에서 낚시를 하던 나와 그곳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살고 있으며, 아주 조금씩 나와 친분을 쌓았던 쏘가리 최씨... 그리고 쏘가리 최씨의 죽음은 자신을 돌아보는 새로운 계기를 만든다.

 

  「실종」.
  “나는 항상 가벼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증발되는 것을 꿈꾸었다. 내가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남의 일처럼 귀에 들려오는 그런 꿈이었다. 오랜 세월 나를 사로잡았던 그동안의 갖가지 실종 미스터리가 내가 꿈꾸는 실종의 시나리오 만들기에 도움을 주었다... 실종증후군의 또 하나의 증세는 내가 실종된 사람들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기를 내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종자의 행방이 그 시신 찾아내기 등으로 밝혀진 날은 심한 두통에다 하루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불안 증세를 보였다.” 1980년 이후 40만명 증발, 1990년 이후 4년간 경찰에 신고된 가출 인구는 모두 13만 1천69명... 젊은 시절 나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병하의 실종,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교장 선생의 실종,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의 실종자... 그리고 치매 속에서도 실종자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집착 증세를 보이는 나의 노모와 한 아파트에 기거하는 계단을 기어다니는 할머니...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점차 기력을 잃어가는 기억과 끝끝내 기억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실종의 이야기...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07.02.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