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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스님의 불교 인문학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책: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일지 스님의 불교 인문학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책: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내용보기
극적인 타결의 계기가 마련될 때가 있다. 불교에서 그것은 무엇을 계기로 발생하는 것일까? 나에게 그것은 기존의 불교 관계자들의 가르침이 나름의 타당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두루 지니고 있음으로 인한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내용은 그 자체로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고 비유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근기(根機)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정도가 다른 데다가 과학과
"일지 스님의 불교 인문학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책: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내용보기

극적인 타결의 계기가 마련될 때가 있다. 불교에서 그것은 무엇을 계기로 발생하는 것일까? 나에게 그것은 기존의 불교 관계자들의 가르침이 나름의 타당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두루 지니고 있음으로 인한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내용은 그 자체로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고 비유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근기(根機)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정도가 다른 데다가 과학과 달리 입증이 불가능함을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의 ‘연기와 공’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연기하는 제법(諸法)이 실재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 있어서 “실재라고 본 유식사상과 비실재라고 이해한 중관사상의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말해 이것을 조정시킬 만한 제3의 도 따위는 결코 있을 수 없다.”(200 페이지)는 말이다. 따라서 내가 말한 극적인 타결의 계기란 탐구에 뛰어들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늘 선택한 책은 일지(一指) 스님의 ‘중관불교와 유식불교’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법(諸法)의 법은 다르마/ 담마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Dharma/ Dhamma는 붓다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소문자로 시작하는 dharma/ damma는 물(物)과 심(心)의 현상을 의미한다. 상술하면 법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를 말한다. ‘중관불교와 유식불교’에 “대승불교철학의 주요 문제는 다(多)와 일(一), 생성(生成)과 존재(存在), 윤회(輪回)와 해탈(解脫)의 관계“라는 말이 나온다. 중관불교와 유식(唯識)불교는 대승불교의 대표적 철학사상이다.(이태승 교수는 설일체유부, 경량부, 중관 사상, 유식 사상을 4대 불교 철학 사상이라 부른다.: ‘을유 불교산책’ 참고)



이것이 첫 문장이다. 저자는 말한다. 대승불교에서의 다와 일, 생성과 존재는 궁극적으로 동일하며 현상계도 궁극적 실재도 공하며 이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이는 공(空)을 주지(主旨)로 하는 중관불교(中觀佛敎)의 입장이다. 중관이란 다른 말로 유(有)와 무(無) 사이의 중도(中道) 또는 유무(有無) 중도의 공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중관불교의 대표적 논자(論者)는 나가르쥬나(용수龍樹)와 아리야데바(제바提婆)이다.



마츠모토 시로가 말한 비실재(非實在)와 공(空)은 맥락이 같다. ”인도 중관불교를 중국에 이식한” 쿠마라지바는 나가르쥬나의 생애를 몽환(夢幻)이라 기록했다. 저자는 말한다. 소승은 계율의 불교이며 대승은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열어가는 인간의 불교라고.(44 페이지) 그러나 중요한 말은 다음의 말이다. 일체가 공이라면 인간은 확실히 자유롭지만 그 자유를 어떻게 스스로 사용하는가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스스로 해결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더 엄격할 수도 있다는...



아리야데바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법칙은 공(空)이라고 가르쳤다. 저자에 의하면 번뇌 속에 열반이 있다는 ‘법화경’이 답한 것이 오염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연꽃과 같이 정화될 수 있는가란 문제였다.(60 페이지) “나가르쥬나의 중관불교를 중국에 이식하는 데 크게 공헌한“ 쿠마라지바의 제자 승조(僧肇)는 인간의 지각을 규정하는 시간, 공간의 비실재성을 논했다. 즉 시간과 공간, 물(物) 자체는 인간의 지각을 규정하는 진실한 존재 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현혹된 인간의 개념적인 착각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70 페이지)



알아 보아야 할 것은 중관의 공 사상은 니힐리즘인가, 란 명제이다. 설일체유부는 중관파의 사상가들을 도대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도무론자(都無論者)라 불렀다. 또한 유식파의 스티라마티는 중관파의 사상을 극단론이라 불렀다. 저자는 중관불교의 공사상은 결코 니힐리즘이 아니라 말한다.(75 페이지) 공사상은 비존재를 주장하는 단견(斷見)과 존재를 설하는 상견(常見)을 모두 부정한다.



저자는 ”공(空)은 무(無)가 아니라 모든 현상이 상호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말한다.(77 페이지) 이 부분은 김영민 교수가 ‘보행’에서 인용한 바이기도 하다. 이정우 교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붓다의 생성존재론(生成存在論)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생성하는 가운데 생성하지 않는 실체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실체주의 또는 현상의 깊은 곳에는 불변의 본질들이 존재한다고 믿은 본질주의자들로 정의했다.(‘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105 페이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설일체유부는 존재의 생멸변천을 설하는 무상(無常)의 교리와, 상주불변하는 자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는 무아(無我)의 교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다 고차적인 존재의 원리를 상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80 페이지) 저자는 설일체유부가 12연기설 각지(各支)에 대해 심신론적 해석에 치우쳐 12연기의 상의상관성에 유념치 않음으로써 다분히 실재론적인 연기해석의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말한다.(81 페이지)



저자는 불교에서 굳이 정통이란 수식을 붙인다면 누가 더 핵심적인 붓다의 정신을 자신의 시대에서 생생하게 재생시켜 가는가의 문제일 뿐이라 말한다.(82 페이지) 중관과 유식의 대립은 생성과 존재의 변증법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싶다. 존재가 아닌 생성만을 인정하면 세계는 불가피하게 환각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생성의 기저(基底)에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것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낳았고 이는 유식불교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나가르쥬나의 ‘중론(中論)’은 유명한 책이다. 나는 ‘중론‘에 의거해 ‘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는 고미송 박사의 논의를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저자는 ‘반야경’의 직관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필요에 따라 나온 책이 ‘중론’이라 설명한다.(105 페이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가르침을 생각해보자. 저자에 의하면 나가르쥬나는 ‘중론’에서 아비달마학파의 실체론적 연기 이해에 맞서 연기(緣起)의 무자성(無自性), 공(空)의 정신을 천명”했다.(115 페이지)



중요한 것은 나가르쥬나에게 연기는 실제적인 상의상관성의 법칙이 아니라 공, 법성(法性), 진여(眞如)외 동의어이며 희론(戱論)이 적멸한 공성(空性)이란 말(116 페이지)이다. 저자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연기 이해는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묻는다. 그리고 연기라는 교의적 명제 속에는 상의성(相依性)보다 더 깊은 교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묻는다.(117 페이지)



나가르쥬나는 ‘관거래품’에서 “이미 지나간 것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이 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이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에 걸쳐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 제논의 운동부정론을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내용 없는 사상(개념)은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며 직관이 의미를 가지려면 사유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123 페이지)



순수직관조차 사유로 지어진 추상물(抽象物)이라는 것이며 직접적이라고 여기는 사실조차 사유와 대상의 대립관계에 의해 사고(思考)되어 나온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베르그송이 사유를 부정하고 운동을 긍정하는 데 비해 제논과 나가르쥬나는 사유를 긍정하고 운동을 부정한다. 나가르쥬나는 가고 있는 것은 간다는 판단을 확장적 판단 또는 종합적 판단으로 보는 것이다.



저자는 아비달마의 법유(法有)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유가 아니라 그것의 특성으로서의 본질적 유를 의미한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이는 모나드가 구체적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것 또는 그를 그것 또는 그이게 하는 규정성들의 총체인 것과 닮았다. 저자는 불교는 모든 다르마를 존재(存在: being)가 아니라 생성(生成: becoming)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다.(134 페이지) 저자는 나가르쥬나가 존재의 자성을 부정하고 존재의 잠재적 형성력인 행은 공(空)이며 그 공이라는 단견에도 집착하지 않는 타트바(tattva: 如, 如實)를 말했음을 지적한다.



아비달마 불교에서 윤회와 열반은 상대적인 존재 법칙이지만 나가르쥬나에게 열반은 개념과 사유의 틀에서 파악될 수 있는 지적 개념이 아니며 존재, 비존재의 구별을 완전히 초월한 것이다.(138 페이지) 나가르쥬나는 업과 번뇌의 완전한 지멸(止滅)이 해탈(解脫: moksa)인데 업과 번뇌는 사유와 분별로부터 생기고 희론에서부터 생기는 바 희론은 공성을 이해함으로써 소멸된다고 말했다.(144 페이지)



나가르쥬나는 공(空)을 외부의 환경이나 감각에 의해 혼란되지 않는 마음의 고요함 즉 산탐(santam: 적멸寂滅)으로 보았다. 나가르쥬나에 의하면 공의 진실은 모든 이원적 대립을 초월한 것이다.(148 페이지) 나가르쥬나는 원인과 결과가 각각 고유한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다면 원인과 결과 그 자체도 성립하지 않으며 양자의 결합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이란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침투불가능하고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성질을 말하는 듯 하다.)



저자는 우리들이 생존과 죽음을 자립적이고 항상불변하는 것으로 파악하며 허무한 것이라 보고 집착하기도 하는 것은 시간 내의 업과 번뇌에 묶여 있는 인간의 기본적 무지이며 생성과 소멸이란 우리들의 개념적 이해일 뿐이며 삶은 영원한 것도 순간적인 것도 아니라 설명한다.(15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생존과 죽음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다. 여래(如來: 붓다의 별칭)를 존재와 비존재, 공과 불공(不空)의 분별을 넘어선 무자성, 무희론의 존재로 보는 나가르쥬나의 붓다 이해는 독특하다.



나가르쥬나는 번뇌가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며 누군가에 속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라 말한다.(155 페이지) 현상계도 궁극적 실재도 공하며 이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을 새겨보자. 나가르쥬나의 논의는 절대적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족적 존재라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을 속성으로 하는 존재)인가, 란 내 옛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가르쥬나가 연기(緣起)의 실유(實有)에 집착하는 자성론자(自性論者)를 비판하는 것은 고(苦: 고는 사성제의 첫 요지要旨이다.)가 만일 자성을 가진다면 멸(滅)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세상의 고통스런 실상, 그 고통의 원인, 고통을 소멸시키는 진리 즉 니르바나,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한 가르침을 사성제라 한다. 사성제는 12연기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이다.



나가르쥬나는 연기의 무자성, 공, 중도를 정관(正觀)하면 사성제를 바르게 본다고 가르쳤다. 나가르쥬나는 얻을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으며 단멸(斷滅)도 아니고 상주(常住)도 아니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인 것을 니르바나라 부른다고 가르쳤다.(162 페이지) 저자는 나가르쥬나의 ‘중론’을 읽기 위해서는 초기불교, 아비달마불교, 반야사상에 대한 예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불교사상을 대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불교사상의 오랜 역사에서 나타난 여러 흐름들을 따로따로 격리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 말한다.(20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아비달마불교, 중관, 유식, 화엄, 정토, 선(禪) 등은 교리적 특질을 보완, 수용하면서 불교라는 하나의 거대한 사상적, 종교적 체계를 성립한다. 저자는 중관불교는 숲의 정적(靜寂)과 사원(寺院)의 안주에만 매달리지 않고 인생의 악몽(惡夢)과 관념의 신기루를 헤쳐나가서 그 니힐리즘의 어두운 심연마저 뛰어넘은 종교적 천재들이 빚어낸 사상적 성과라 말한다.(173 페이지)



중관 사상은 유식사상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인도와 중국의 불교를 모두 체험한 현장 스님이 사람들이 존재가 공하다는 공견(空見)에 집착하게 됨으로써 아상가께서 선정(禪定)으로 법광삼매를 증득하시고 대신통력을 얻어 마이트레야(미륵)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유가유식의 논서를 설한 것이라 말했음을 전한다.(174 페이지) 저자는 중관파의 사상가들이 공(空)의 체험보다 공의 논증에 치우친 결과 체계가 경직화, 현학화되었다고 말한다. 유식불교는 인간의 심층심리에 관한 자각으로 눈을 돌린 결과이다.(이로써 불교는 초기불교의 유심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유식사상의 형성을 이끈 내면적 근원력은 요가를 수행하는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영상은 오직 식(識)이라는 자각적 체험이다.(182 페이지) 유식설의 신봉자들은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yogacara)들이다. 위빠사나는 요가 실천법의 하나이다. 유식은 철저히 유심론이지만 서양의 유심론과 달리 사마타(삼매를 목표로 하는 수행), 위빠사나(지혜를 목표로 하는 수행)에 의한 선정(禪定)의 필연적 체험에서 연역(演繹)된 유심론이다.(184 페이지)



초기불교가 오온(五蘊: 물질 또는 몸인 色, 느낌인 受, 생각인 想, 인식인 識, 의지작용인 行)만이 존재하며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데 비해 아비달마는 제법(諸法)이 그 자체로 존재성을 가진다는 다원론을 주장했고 유식은 일체를 유(唯)라는 하나의 명제로 환원한 체계이다. 유식은 사물을 주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언어의 차원에서 언어와의 관계에서 밝히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사물에 즉(卽)해서 사물을 보고자 했던 아비달마와 크게 다르다.



유식은 일체에의 지향, 유(唯)에의 지향, 진여에의 지향이 어울려 성립된 사상이다. 유식은 아비달마의 유적(有的) 존재관과 반야와 중관의 무적(無的)인 존재관을 지양하는 제3의 입장이다.(189 페이지) 저자는 유식은 ‘화엄경‘에 나오는 ’야마천궁품‘과 ’십지품‘의 두 게송을 중요한 교증(敎證)으로 인용한다고 말한다.



”마음은 공화사(工畵師)와 같아서 여러 가지의 오온(五蘊)을 그리나니 온누리에 지어내지 못하는 존재가 없다.“, ”또한 이와 같이 사유하라 삼계(三界)는 허망하여 다만 마음으로 지어진 것이니 12연기도 모두 마음에 의지한 것이다.“(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한다. 욕계는 감각적 욕구의 세계, 색계는 형태와 존재에의 집착이 남아 있는 세계, 감각적 욕구도 존재에의 집착도 없는 순수정신의 세계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계들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유식은 모든 존재는 아뢰야식이 지어낸 것이라는 사상을 주지로 한다. 아뢰야식(識)은 마음 깊은 곳에서 쉬지 않고 활동하는 심층심리를 말한다. 저자는 이는 무아설과 대립되는 듯 보이지만 무아설이 바로 아뢰야식설 성립의 동인(動因)이다.



저자는 무아 윤회를 난문이라 말하며 붓다는 이에 대해 업(業)의 상속(相續)을 답으로 제시했다는 말을 한다.(윤회하는 것은 我가 아니라 業이라는 논리를 제시한 학자로 방경일을 들 수 있다. 그는 단호하게 무아윤회는 궤변이라 말한다: ’초기불교 vs 선불교‘ 참고) 업을 저장하여 상속하는 심리적 주체로 상정된 것이 아뢰야식이다. 유식의 근본경전인 ’해심밀경‘은 공과 유식의 차이는 동일한 교법을 설하는 바 명료함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 성격은 같다는 가르침을 편다.



유식학파 즉 요가 수행자들은 아비달마가 보인 이론적 경도(傾倒)에 반하는 차원에서 성립된 것으로 선(禪)의 원류의 의미도 갖는다. 저자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말한다.(앞서 말한 마츠모토 시로의 ’연기와 공‘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란 부제를 가졌다.) 저자는 여래장 사상을 모든 사람들이 번뇌에 싸여 있지만 자기의 본성에는 여래의 태(胎)가 있다는 사상으로 모든 사람이 붓다가 될 가능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상이라 설명한다.(217 페이지)



중요한 것은 ’능가경‘에서 여래장과 아뢰야식이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유식불교가 중요시 하는 경전이 ’화엄경‘으로 그 중 ”이 삼계에 속하는 것은 모두가 이 마음뿐인 것이다. 이를 여래가 분별하여 설법하였다. 이와 같은 열두 가지의 유지(有支: 12연기) 또한 모두 일심(一心)에 바탕한 것이다.“란 구절이 특히 그렇다. 유식 불교의 문헌 가운데 입능가경(入楞伽經)을 빼놓을 수 없다.(능가란 스리랑카의 음역이다.) 이 경전은 자심(自心)의 현현 아닌 것이 없기에 외계의 집착을 여윌 것을 강조한다.



’유식삼십송‘은 바수반두(세친) 만년의 저작으로 식전변(識轉變)이란 새로운 개념을 사용해 유식무경설(唯識無境說)에 새로운 이론적 근거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237 페이지) 유식의 식(識)은 원어로 vijnapti라 한다. 다만 육식(六識) 등에서 말하는 식은 vijnana이다. vijnapti는 어떤 대상을 반드시 지향적으로 표상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불교는 다르마에 관한 고찰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론이다. 하지만 불교의 존재론은 개별적인 현상적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의 존재론과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저자는 불교는 현상을 다르마(dharma), 본질을 다르마타(Dharmata)라 부른다고 말하며 불교의 존재론은 마음의 존재론으로 이는 동시에 마음의 인식작용과 인식내용을 문제삼는 인식론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24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유식사상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통일시킨 실천의 사상이다. 저자는 아뢰야식을 존재, 인식, 실천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존재의 측면에서 아뢰야식은 모든 존재를 생성시키는 근원체이다. 아뢰야식의 아뢰야란 함장(含藏)한다, 집착한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인식의 측면에서 아뢰야식은 지각되지 않는 미세한 심층심리의 활동으로 정의된다. 종자(種子), 유근신(有根身), 기세간(器世間) 등은 아뢰야식의 인식 대상이다.



존재와 인식의 근원체인 아뢰야식은 선과 악을 성립시키는 기체(基體)이기도 하다. 저자는 심(心: citta)을 모든 현상적 존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식(識: vijnana)을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저자는 아뢰야식은 이숙(異熟)되는 것,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 記別할 수 없는 것), 훈습(薰習)되는 것으로 구분된다고 설명한다.(259 페이지) 이숙이란 전(前)의 원인과 다른 결과를 성숙시키는 것이란 의미이다.



아뢰야식은 오염된 자아는 물론 청정한 자아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tabula rasa 같은 것이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 식전변이란 일정한 상태로 정지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 활동을 의미한다.(270 페이지) 유식무경(唯識無境)이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정신활동이며 현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이다.



저자는 붓다가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이는 미혹의 세계에서 깨어난 사람을 의미하기에 그 깨달은 입장에서 볼 때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계도 하나의 꿈이라 말한다.(277 페이지) 저자는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의 분별일 뿐”이라는 가르침, “의식의 표상만이 있다.”는 가르침은 우리들의 지각이 갖는 주관적 편견과 자기모순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요청한다고 말한다.(27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유식무경은 불교수행의 본질,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선정(禪定)을 닦고 그 체험에서 기인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우러나온 도리이다. 저자는 한 송이 꽃을 보더라도 자기의 마음에 의해 꽃과 비슷하게 현현된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라 말하며 그렇기에 외계의 사물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280 페이지) 저자는 자신을 움직이는 여러 현상들은 아뢰야식이라는 영사기에서 상영되는 영상일 뿐이라 말한다. 실체는 없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사물을 그 자체로서 직접 파악하지 못하고 그 사물의 영상을 파악하기에 착각(유령 또는 헛깨비를 보는)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289 페이지) 또한 실재하는 사물을 볼 때에도 우리는 그 사물 자체와 비슷한 그 표상을 보는 까닭에 착각이 생길 수 있다. 저자는 인식의 세 가지 범주(삼량三量)를 말한다. 1) 붉은 장미를 감각으로 보는 순간의 인식(현량現量), 2) 이것은 붉은 장미라고 지각하는 인식(비량比量), 3) 장미로 보지 못하고 붉은 카네이션으로 오인하는 인식(비량非量)..



저자는 이런 비량(非量)보다 자아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착각이 근원적 착각이라 말한다. 유식에서 중요하게 거론하는 삼성(三性)이 있다. 이는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이다. 의타기성은 타(他)의 힘에 의하여 생기(生起)되는 성질을 의미한다. 변계소집성은 외계 현상을 분별하여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원성실성은 완성된 진실된 것을 말한다. 삼무성(三無性)은 무자성(無自性), 공(空), 공성(空性)을 말한다.



저자는 유식사상은 우리의 업과 번뇌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철저히 인식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업과 번뇌는 우리의 존재방식을 불교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자지 책임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유식 불교에 한한 것이 아니라 불교 전체에 해당하는 바이지만 특히 중관과 유식을 나란히 말하는 이런 책을 통해서 더욱 여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 이 책은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등을 통해 내게 인문학적 감수성과 치열한 불교 정신을 함께 느끼게 해준 일지 스님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 이론서이다. 이론서이지만 수행을 통해서야 그 실상을 제대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은 스님의 타계 13년을 맞아, 그리고 오래 전 사 두었지만 어려워 조금씩 읽고 다른 책들을 참고한 끝에 거우 읽게 된 책이다. 내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성철 스님을 기억하며 “스님, 부디 다시 괴로운 많은 이 사바에 오시지 마소서”라고 말했던 일지 스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다른 책을 찾아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m******1 2015.08.25.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중과과 유식을 시작하는분께..
"중과과 유식을 시작하는분께.." 내용보기
불교 서적을 뒤적이다.. 중관과 유식이 대승불교의 중심 사상을 알게되어.. 중관이란 말이 나오는 책을 전부 뒤적이다.. 발견한 책.. 책의 내용의 깔끔함과 일지 스님--전혀 모르는 분이지만..--의 본인의 중관에 대한 느김이 잘 서술된 책으로 보입니다.. 중관이나. 유식을 시작하시는 분에게 권유하고픈 책입니다.. ^^   저도 ..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반야경의 중심사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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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서적을 뒤적이다.. 중관과 유식이 대승불교의 중심 사상을 알게되어..

중관이란 말이 나오는 책을 전부 뒤적이다.. 발견한 책..

책의 내용의 깔끔함과 일지 스님--전혀 모르는 분이지만..--의 본인의 중관에 대한 느김이 잘 서술된 책으로 보입니다..

중관이나. 유식을 시작하시는 분에게 권유하고픈 책입니다.. ^^

 

저도 ..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반야경의 중심사상인 중관..

통열히 구절구절이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 강추염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s*****0 2008.12.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