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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성 이야기
이 책은 저 시력(低 視力) 장애를 가진 아이를 기르고 있는 어머니인 이미경씨가 쓴 위인전기이다. 우리 모두가 장애우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듯이 저자도 아이가 저시력 장애를 갖게 되기 전에는 앞을 못 보는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었는데 아이의 장애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안내방송이 안나오는 것에 대한 불편함, 점자 블록을 아무 생각 없이 가리는 사람 때문에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눈이 뜨이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12살의 나이에 점자를 배워야했던 아이를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팠을지 짐작이 간다. 저자는 점자를 배우고 아이에게 가르치면서 일제 강점기에 시각장애인들이 교육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애쓴 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우리말과 글이 탄압받던 시대에 오히려 한글 점자를 만들어 눈먼 사람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분이라는 것을 알고 박두성 선생님의 일생을 좇아 자료를 모아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 인천 학익동에 송암 박두성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나도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함께 그 곳을 한번 가볼 생각이다. 박두성 선생님이 평생동안 점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에는 어린 나이때 부터 아버지를 도와온 선생님의 늦둥이 딸 박정희 할머니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내 이름과 똑같아서 할머니 이름이 있는 곳을 읽을때면 기분이 묘했다. 저자의 아들은 백혈병이 중추신경계에 재발하여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시신경이 손상되고 시각장애 1급 진단을 받는 장애인이 되었다. 우리 나라는 아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해 장애인과 함께 사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 어려운것 같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점자 동화책을 읽어주는 동네 아줌마, 아저씨 또는 친구로 서로 만나야 장애인이 단지 다른 도구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닌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박두성 선생님은 한글점자를 만드신 분이다. 선생님은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곳 교동이라는 섬의 달우물 이라는 마을에서 1888년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 섬은 작지만 옛부터 서해안의 바닷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역사가 깊고 문화가 풍부한 곳이고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의 세 물줄기가 만나 망망한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사는 것이 가난하여 힘들었지만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항상 충고하셨다. 일제 치하 조선은 나라 안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힘도 없고 일본에 맞설 힘도 없는 나라를 지키려고 백성은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하였다. 나라 밖으로는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개혁을 핑계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려는 상황이었다. 박두성의 집안은 영국선교사 토마스가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던 길에 폭풍우로 표류하게 되면서 박두성이 사는 교동이라는 섬에 정박하였고 토마스 선교사를 도와준 인연으로 두성의 집안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서당을 다니던 박두성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이 세운 보창학교에 들어가 신학문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보창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인 가계에서 점원 노릇을 하며 일본말도 제법 배웠으나 심한 눈병에 걸려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온다. 이동휘 선생은 총명한 두성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하성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권한다. 졸업 후에는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졸업 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할 기회도 있었으나 일제에 행동으로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으로 실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선에 남아 후진을 양성하기로 한다. 이에 이동휘 선생은 박두성에게 암자의 소나무처럼 푸른 절개를 굽히지 말라고 송암이라는 호를 주고 남들이 하지 않은 일에 평생을 바치도록 부탁한다. 조선총독부는 허울 좋은 회유정책의 하나로 제생원 맹아부라는 맹인학교를 세웠는데 박두성은 이 학교의 교사로 일하게 된다. 맹인학교 교사로 부임한 날 박두성은 맹인들의 닫힌 눈꺼풀과 이상한 빛깔로 바뀌어 버린 눈동자를 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있는 남루하고 비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이 눈을 뜨고도 살기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참담한 심경이 된다. 제생원 맹아부에서 받은 첫 충격은 스물여섯 살 박두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1913년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정책으로 고아를 위한 양육부와 시각 장애아, 청각 장애아를 교육하는 제생원을 세웠다. 당시 제생원 원장은 총독부 관리인 일본인이었고 안마와 침술을 담당하는 교사 또한 일본인으로 한국인 교사는 박두성 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장애인을 보는 눈이 몹시 비뚤어져 있었다. 장애아가 태어나면 부모나 조상의 죄 탓이라고 생각하여 몹시 학대하고 천대 하였다. 남몰래 사람들 눈을 피해 집안 깊숙이 숨겨 기르거나 심한 경우 몰래 갖다 버리기까지 하였다. 제생원에 처음 부임한 날 박두성은 점자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교과서도 없이 앵무새처럼 말로만 떠들며 가르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특히 안마와 침술에 필요한 해부학과 생리학, 침술 수업을 할 때는 일본어로 된 책이라도 교과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점자인쇄기를 일본에서 들여와 밤낮을 쉬지 않고 점자책을 찍어낸다. 이렇게 비록 일본어이지만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해 점자교과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오게 된다. 박두성은 방학 때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맹생(시각 장애 학생)을 모으러 다녔다.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시골길을 찾아다니는 박두성의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히기 일쑤였지만 구부러져 버림받은 나무를 찾아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직업 교육은 마땅히 모든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부인 김경내는 첫 번째 부인이 집을 나가고 얻은 두 번째 부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오빠의 권유에 따라 박두성과 결혼하고 맹인 교육의 동반자가 되어 평생 박두성의 손과 발이 된다. 그리고 그와의 결혼에서 낳은 딸 정희는 아버지의 시각장애인 교육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마음까지 암흑이 되고 마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박두성은 한글 점자의 필요성을 느낀다. 당시 이미 1896년경 미국 선교사 로제타 홀 여사가 세운 평양여학교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반이 있었고 홀 여사는 미국의 뉴욕 점자를 가지고 한글 점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받침을 표기하는 법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네 점으로 만들다 보니 단어가 길어져 읽는 속도가 더뎠다. 뉴욕 점자를 기본으로 고안한 점자라서 기본적으로 우리 한글에는 맞지 않아서 박두성은 한글 점자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근본 원리부터 알아야함을 깨닫고 창제 과정부터 살펴보고 연구한다. 그리고 한글 점자도 한글처럼 과학적인 원리에 따라 고안하여 3.2점식 점자를 만든다. 3점은 자음, 2점은 모음으로 만든 것이라 익히고 적용하기 쉬웠다. 한글 점자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박두성은 자신이 키운 제자 여덟 명을 모아 일본의 감시가 심하여 비밀리에 조선어 점자 연구 위원회를 만든다. 그리고 3.2점식 점자의 최대 단점이었던 받침으로 쓰는 자음을 알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루이 브라이의 6점 배열을 한글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6점의 배열을 조합한 결과 63가지의 점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점자 연구와 일반 책을 점자로 번역하는데 눈을 너무 혹사하여 눈이 상해서 시력이 약해지고 눈동자가 회색으로 변하는 장애를 갖게 된다. 눈의 건강을 돌보지 않은박두성의 연구로 1926년 8월 맹인들을 위한 훈맹정음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후 1935년에는 시각장애인들도 한글 점자로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해방 후 교육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훈맹정음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받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글 점자의 실용성을 연구하려고 조선어점자연구회를 육화사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육화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결정이 육각형인 것에서 따온 것으로 점자가 여섯 점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박두성은 육화사를 통해 점자통신교육을 하였다. 학교로 직접 나오지 못하는 맹인들에게 점자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우편 통신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점자 통신교육 취지문에서 박두성은 누구든지 배워야 하지만 더욱이 눈먼 이는 성한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배워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그리고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며 비록 눈이 멀었어도 이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지 읽을 수 있으며 외국에는 맹인 주에 학자나 사업가 등 유명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눈은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며 눈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두뇌가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니 맹인들을 방안에만 가두어 두지 말고 글을 가르치라고 보호자들을 설득한다. 박두성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점자 교육을 받도록 하기위해 평양, 신의주, 나남, 청진에 까지 전국 곳곳에 담당 간사를 두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공부한 맹인 학생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있어서 김천년 같은 이는 후에 맹인학교 교사가 되어 많은 맹인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들판의 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자라듯이 장애아들도 가르치는 사람의 손길로 자란다.” 박두성은 아예 학교의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맹인 아이들의 생활지도 까지 담당한다. 기본적인 생활예절은 물론 화재 등 비상시에 대피하는 방법까지 맹인들이 평생을 살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가르쳤다. 그리고 성서를 번역하기에 이른다. 혼자 읽고 점자로 제판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어린 딸 정희에게 성서를 읽도록 하고 그 소리에 맞추어 아연판에 점자 제판기로 구멍을 뚫어 성서가 대량으로 인쇄될 수 있도록 만든다. 박두성은 일본인 교사들과 힘겨운 씨름을 하고 나온 후에는 딸 정희에게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자신의 말을 잘 간직할 수만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소 그가 갖고 있던 신념을 확신으로 심어준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성서 점역을 시작한지 10년 만에 1000장에 가까운 신약성서를 완성하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맹아학교 제자 이상진과 더불어 맹인 주간 회람지인 <촛불>을 만든다. 이 점자 주간지 촛불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200여 호를 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상진은 후에 서울 맹학교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박두성은 당시 물자가 풍부하지 않았던 때에 점자를 쓸 종이를 구하기 위해 중앙청, 조선은행 등을 돌면서 묵은 장부나 출근부라도 구하려고 애썼다. 격무에 따른 과로로 박두성은 68세에 중풍으로 쓰러지게 된다. 그로인해 점자 책 펴내는 일이 한동안 침체되었다가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침을 놓던 것이 소문이 나서 찾아온 환자를 아내 김경내가 침을 놓아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경희는 박두성에게 점자 제판기 다루는 법은 배워 열심히 성서를 점역한 끝에 2년 후 점자 신약성서, 구약성서를 완성하게 된다. 이후 이경희는 도서관의 점역사가 되어 평생 숱한 사람들의 눈을 밝혀주는 일을 하게 된다. 76세에 박두성은 제생원 맹아부 제자들 등 아끼던 맹인들에게 둘러싸여 암자의 소나무처럼 푸르게 살아온 생을 마감한다. 선생님이 가신 후에도 그의 뜻은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이경희 할머니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희랍어에 법전까지 수백 권이 넘는 책을 점역하셨고 시각장애 학생들이 대학 입학시험을 볼 때면 교수실에 함께 들어가 시험지를 점역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이상진 할아버지는 박두성 선생님의 전기를 육성으로 녹음하여 처음 발간하신 분이기도 하다. 박두성 선생님과 그분을 도운 사람들은 조금도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신 분들이다. 박두성 선생님은 맹인들이 장애에 갇혀 자칫 넓은 세상 함께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도록 손을 잡아끌어 주셨다고 저자는 말한다. 선생님은 사후 1992년 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대한민국 은관문화 훈장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잠정적인 장애인이다. 내가 태어날 때 건강했고 지금까지 별다른 장애 없이 살아왔다 해도 우리는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언제 장애를 갖고 살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장애우가 더 이상 다른 세상의 사람이 아닌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야할 사람들이란 인식을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하는 일상이 그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며 그들의 삶은 치열한 투쟁의 연속일 것이 라는 생각이 든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수요조사를 하여 수화를 가르치는 교육이 있었다. 업무가 바빠서 신청해놓고 못 갔는데 많이 후회가 되고 죄스럽게 여겨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받은 능력이나 여유가 있는 부분을 나누기 위해 일정부분 노력하고 우리 시간의 일부를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못하는 장애우가 말을 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수화를 배워 그들과 소통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가능하다. 요사이는 정보화 기술이 발달하여 많은 부분을 해소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봉사하고 나눌 부분들이 꽤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고 은퇴를 하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준비하여 나의 가능한 부분을 나누는데 기여하고 싶다. “루이 브라이”나 “박두성” 선생님의 전기는 나의 막연한 꿈을 일정부분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갈수록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물론 과거 역사 속에서도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에 놀란다. 그리고 때로는 힘든 현실에서 그분들의 빛나고 아름다운 삶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쫓아 아귀다툼하는 세상에 사는 내게 큰 위안이 되며 그들을 닮고 싶다는 생각들이 나의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것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