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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인간, 침묵하시는 하나님 1. 모든 신학은 자전적이다. 나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무한히 들어온 소중한 믿음의 가치들이 기존의 믿어 왔던 방식으 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만날 때, 옳다 인정했던 그렇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인생의 고통가운데 하나도 적용되지 않을때, 실제로 하나님의 그 때 그 하나님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저자는 세계관의 위기로 표현함) 분명한 고난을 만났을 때 신실한 반응은 실로 당황스러웠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거나,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거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혹은 “어떤 다른 큰 뜻을 위하여”는 정답일 수 있으나 해답은 아니었다. 이전에 믿어왔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을 아는 나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아는 방식에 정말이지 돌을 던지고 싶었다. 책에서 말하는 리스본의 지진, 세계대전, 남북전쟁등을 겪으며 선조 세대가 가져왔던 질문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당황하지 않는다. 얼버무리거나 강요하거나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신정론을 탐구하는가? 그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 불가능한 체스경기가 오늘날 상당 수 사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며, 이러한 의문을 부적절하다 선언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신정론에 관한 질문을 제기 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인생에 대한 일관성 있는 견해가 필요하다. 한 개인의 세계관은 인간이 번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확신과 의미의 지각을 지지할 만큼 튼튼해야 한다. 삶에 대한 관점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린다면, 이는 논의되어야 할 세계관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신정론의 문제는 세계관을 보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2. 신정론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부재는(부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들 속에서 세대가 거듭될수록 수많은 질문과 논의를 낳았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지난한 고통의 문제와 악, 그리고 하 나님의 존재와 역할에 관한 수많은 의문들이 제기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논의과 고민 은 새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책에서 다루는 신정론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 것이다. 초기 신정론은 과도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설명 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 다. 하나님을 재판에 회부했고, 하나님께는 그럴듯한 변호가 필요하며 그것을 담당하고 나선것 이 신정론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신정론은 하나님을 재판에 회부하기보다 신자들이 표면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중요한 신조들, 곧 하나님이 존재 하시고 그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능 력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럼에도 이 세상에 부당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붙들 수 있 는지를 다루고 있다. 악한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고통에 대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바를 전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압도적인 중세의 유신론의 세계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 죄의 문제도, 고 통의 문제도, 질병과 죽음의 문제도 모두 선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하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그분의 선택과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다. 책에서는 예를들면 흑사병은 질병의 형상과 그것이 만들어진 질료에 관한 한 이것을 물질적이고 “자연 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의사들은 그것에 대해 토론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치료법을 시도 할 수 있었다. 하 지만, 이 질병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적 질문 이었다. 따라서 중세 시대는 의사들도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 즉 하나님 혹은 마귀가 이 병을 만드셨으며 그 목적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대답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 일 수밖에 없었다. 재앙의 원인이 전체적으로 카톨릭 신학 아래서 해석되고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악 때문에 인류를 벌주 고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 악과 그것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발본색원하는 일이 필요했다. 교회 는 고행과 순례ㅡ 속죄의 행위를 촉구했다 저자는 1755년 경건한 중세 카톨릭의 도시였던 리스본의 만성절에 일어났던 대 지진을 기초 로 신정론 논의를 시작한다.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죽고, 그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선하든 악 하든,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임했던 재앙은, 이후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에도 재앙이 되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온 세계를 자신의 손 안에 쥐고 계시고, 리스본이 파괴되어야 했다면 그 것은 필시 하나님이 선하신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행하셨다. 카톨릭 설교자들은 지진이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이 비극이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 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신적 종교 재판으로서 “많은 죄인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뜨 렸다” 는 것을 선포했다. 개신교 설교자들도 이 사건이 하나님 손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의 했지만, 오히려 로마카 톨릭의 미신과 교황제도를 향한 진노의 손이라고 주장했다. 신학자들이 리스본의 재앙을 죄악에 물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면, 기독교 철학자들도 그것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가지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신적지혜가 우리를 경악케 하는 악을 허용했다는 데에는 단순히 이런 허용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떠나서, 위대하거나 아무도 꺾을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이유가 존재해야만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선하심, 공의, 거룩과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옳다. 그분은 이것을 행하셨고, 따라서 그분은 이것을 올바로 행하셨다.” 하나님의 도덕적 인격이 이런 재난을 허용할 수 있다는 논증은 처음에는 철학자들에게, 나중 에는 신학자들에게도 그 견인력을 잃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임한 이런 끔직한 사건을 일으킨 지 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간에 피에 굶주린 그의 폭력성은 무작위적이고 무분별 하다고 볼 수 있었다. 3. 불가능한 체스경기 리스본이 제시했던 도전이 개인적, 지성적, 영적위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트어만이라는 신 학자는 “성경적 전통안에서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주제가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질문들은 더 이상 그가 과거에 믿었던 방식대로 믿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 까지 발전해버렸 던 것이었다. 어만은 사랑이 많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그림을 세상의 무고한 고통의 실재들과 조화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어만은 네가지 가설을 놓고 사유하기 시작했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이 네가지 가설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형적인 충돌은(각각은 사실이지만, 모두 보았을 때 발생하 는 모순들) 네가지 가설을 동시에 붙들려고 하는 노력을 “불가능한 체스경기”, 신학적 교착상태 라고 불렸다. (신학적 가르가소의 해) 이에대해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하나님이 악을 막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하나님이 악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안하시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사악하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실까? 그렇다면 대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불가능한 체스경기는 우리를 바트어만이 했던대로 많은 시실한 사람들이 마지막에 둔 수,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반드시 접어야만 하는 지점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믿음을 버렸던 그가, 논리적인 논증과 합리성 속에 마땅한 결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하나님을 그리워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이 복음은 어떤식으로든 그들에게 이해 될 수 있어 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범주에 맞추어 축소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이 때로는 바로 이 범주들에 도전하며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과 사실 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의미이다. 철학자이자 카톨릭 신학자인 찰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자연주의적 물질주의는 단순히 한 가지 제안이 아니다. 자연주의적 물질주의는 현대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견해, 즉, 과학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견해로 나타난다. 신앙에 대한 의심, 변화의 능력에 대한 의심,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유치하고 부적절한지에 대한 의식이 이 강력한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면 신앙을 상실 할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다. 비록 때때로 후회와 향수가 동반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함께함의 사역 수백년동안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의 문제와 씨름해온 반면에, 목회자들 은 신정론의 문제를 잘 비켜가라는 경고를 들어왔다. 우리는 고통과 악을 다 설명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방식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목회에서 이것을 시도한다면 유익보다는 훨 씬 더 큰 해를 불러올 것이다. 인생의 갑작스럽고 큰 고통의 순간에 있는 성도 곁에서 함께 슬퍼하면서 도움을 줄 수 는 있 다. 그러나, 비극이 가진 원인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거나 “하나님이 당신의 고 통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처럼 확실한 말을 넘어 그것의 배후에 있는 그분의 역할을 추측하는 것은 당사자의 경험을 하찮게 만들 뿐 아니라, 그것을 해명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런 위기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복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함께함의 사역을 답으로 내놓는다. 위로와 연대의 말을 제외하고는 오직 침묵속에서 긍 휼한 마음으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 함께 함의 사역의 한계와 그 이상의 것. 저자는 “함께함의 사역” 만이 악과 고통의 질문에 대한 포괄적 접근으로만 보는 것에 도전한 다. 치명적인 고난의 때가 최선의 가르침의 순간은 아닐 수 있지만, 여기에도 가르침의 순간이 존재한다. 자신의 경우이든 다른 사람의 경우이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의 문제는 단순한 목회적 돌봄의 문제가 아니다. 고통의 문제는 지적으로 혼란스러운 문제이며, 거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도 최종적으로 사고할 자원이 부족한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길 원하지만, 자신의 길을 분명하게 찾지 못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에게 마법같은 해결책과 모든 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경이로운 해답이 없다고 해서, 오랜시간 걸쳐서 이 문제를 생각해온 방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들이 회중에게 지성적 탐구 합리성을 갖춘 신앙을 추구하는 기도가 가지는 유익 고통 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으로서 기도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목회자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역과 오직 경험적인 것만을 설명하는 기도의 말에 굴종하는 동안 이 세속화 시대의 교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책 66-67페이지 참조)를 발견 한다는 것이다. 둘째, 고난앞에선 복음이 함께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듯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는것도 신자들에게서 신학적 유산을 박탈하는 행위다. 함께하는 사역을 넘어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초 월하는 영적신비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신학적 유산을 새로운 신학적 상상을 통해 고백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보존하고 있는 예배의 전례, 예배언어에 대한 지속적이고 창조적인 신학적 재고 사이 에는 유익하고 필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검증 된 찬송 가나 기도의 은유들은 여전히 가치를 지니지만, 이것은 새로운 환경속에서 진부해지거나 상황과 무관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새로운 신학적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놀라운 만유의 주님, 포근한 날개 밑 늘 품어주시는 주님을 찬양 할 때 주님을 이렇게 부르 는 방식이 가능하고 적절할까? 그것은 그 놀라운 만유의 주님이 또한 바다에서 쓰나미를 일으 켜 공포에 질린채 자비를 구하는 수천의 사람들을 물에 빠져 죽게 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사실 을 암시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세 번째 우려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긍정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이다. 고통과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 신자 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역사와 시간, 물리적 전형과 실제적 상황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성경적 주 장을 버리고 자연과 영성의 신비스런 하나님을 지지하라고 알게 모르게 압력을 행사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면, 이것은 역사와 제도, 실제적인 인간관 계,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의미 있게 말하고 생각 할 수 있는 방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함께함의 사역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영문도 모른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 나님의 임재와 역할은 단순히 추상적인 난제나 신학적인 게임이 아니다. 매일매일 우리 교인들은 고통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학은 충분치 않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겠는가? 자기보다 앞선 기독교 사상가와 신학자들의 도움도 없이? 일부 신학 자들은 신정론의 문제에 아예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철학자들의 손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바트어만과 유사한 용어로 신정론적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이 잘 못 되었다고 알 수 없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질문이 잘못된 질문의 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것은 그들의 질문이며 우리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기독교 철학자 메릴린 매코드 아담스는 극심한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이 최종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고 이 질문은 신앙을 상실한 바트어만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 님은 이것을 왜 허용 하셨을까? 왜일까? 하나님은 이것을 구속하실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시간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달라, 하나 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어 떻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보여달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말씀이 있는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달라 3. 위험한길 : 세상의 무고한 고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질문은 당신 혼 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유하는 신자들이 특히 지난 200년 동안 이 문제들을 붙들고 씨름 해왔다. 그러나 그길에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가지 중요한 경고 표시가 있다. 3-1.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우리중 대부분은 [쓰나미로 자녀를 잃고 도탄에 빠진 스리랑카인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섭리 와 경륜을 말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을 것이다. 하트의 윤리적 규칙 : 상대의 슬픔이 가장 현실적이고 저항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바 로 그 순간,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하나님께서 어쩌고 죽음이 그의 섭리안에 어쩌고.. 창조의 질 서 어쩌고..) 이 수치스러울 만큼 어리석고 잔인하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그렇 게 말해서는 안된다.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 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 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실제적인 고통을 무례하게 다루는 모든 추상적 “해결책”을 향해 하트가 취한 경멸 에 신학자 테렌스 틸러도 공감했다. ▶ 그러나, 하트의 윤리적 규칙에는 한가지 수정이 필요하다. 하트가 신학적 목록으로부터 제거하기 원했던 것은 신정론 문제에 대한 반응들 중 추상적 수 준으로는 만족스럽지만 실제적인 인간의 고통이라는 맥락 안에서는 잔인한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이것은 백번 옳다고 할 수 있다. 하트가 반대한 것은 냉담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신정론 문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는 신학 자의 태도다 이에 대해 케네스 수린은 “신정론을 단순히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훈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비록 의도된 바는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인 아버지에게 그의 아내와 네 자녀가 죽은것인 신정론의 이론적 이해와 어느정도 부 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냉담하고 무심한 하나님, 심지어 도덕적 괴물로서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행위다. 위안과 요령이 부족한 것은 당연히 복음적 진리도 될 수 없다. ▶ 또 한가지 다른 문제는 목회적 진리를 언제 말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복음의 어떤 측면은 적절한 순간을 기다렸다가 표현 되어야 한다. 깊은 비통에 빠진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은 어느때든 누구에게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뿐 아니라 특정한 진리를 말하 기에 적절 한 때를 찾기 위한 목회적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앞에서. 윌리엄슬로언코핀 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받았던 위로의 말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최고의 아마도 최악의 편지는 동료 목사들이 보낸 것이었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 역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포함해 적절한 모든 성경 본문들을 알고 있었다. 내 신앙은 그리 엉성하지 않았으며, 나 역시 이 본문들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성경 말씀들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이 말씀들을 비 현실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슬픔의 실재는 하나님의 부재 였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코핀이 경험한 슬픔의 깊이와 쓰라림은 “적절한” 모든 성경 본문들을 처음에는 그저 “비현실 적” 으로 들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감정은 바뀌어 갔다. “ 한때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비통함이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슬픔으로 바뀌어 갔고 적절한 성경 본문 속 진리가 다시 한번 저를 사로 잡기 시작 했습니다.” 끔찍한 경험을 겪고 있는 사람이 심지어 우릴 찾아와 “왜?”라고 질문 한다고 해도, 이 때는 고 통의 문제를 주의 깊고 신학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때가 아니라는 의미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 신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도록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 해야 할 때가 따로 있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두 번째 경고 : 하나님은 누구신가? 리스본에서 시작된 일들 84-85. 역사속 18세기 시점에서 유럽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우주를 묘사하는 데 있어 과학 과 이성의 힘에 대해 점점 더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교 조주의와 편협함에 대한 더 강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럽은 종교 전쟁을 통해 큰 충격을 받았으며 도덕적으로도 탈진해 있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종교의 얼굴은 종종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이며 폭력적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지배적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참된 종교” 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더욱이 개인주의, 이성, 자주성이 지적유행을 이루던 시대속에서, 예정과 인간의 부패같은 문 제와 관련된 교회 내부의 논쟁,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교리만 큼 옹졸하고 사람과 무관하며 심지어 위험스러워 보이는 것은 없었다. 18세기 문화속에서 종교가 차지했던 자리는 우리 시대 종교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여러측 면에서 유사하다. 엄격한 교조주의, 편협함.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계급은 종파주의에 싫증이 났고, 종교적 폭력에 진절머리를 냈으며, 교회의 권위에 기초해 만들어진 어떤 신학적 견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에 기초해 만들어진 어떤 신학적 견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성경, 교황, 신조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현대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무신론을 향하지만, 18 세기 지성인들 상당수는 전통적 종교에서 무신론으로 전향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편협하게 규정된 “비합리적인 신들”을 거절 했을 뿐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교회의 하나님, 즉 성경, 역사, 이야기, 신조, 삼위일체 하나님을 좀 더 친절하고 온화한 신으로 대체하고자 바쁘게 움직였다. 즉, 그들이 선호하는 하나님은 그 장엄함 이 자연 안에서 빛나고, 인간의 이성과 생각으로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였다. 이들의 생각에 하나님은 손에 피를 묻힌 분도 아니었고,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를 파괴하 는 삼위일체 공식이 필요한 분도 아니었다. 또한 그분은 질서 정연한 우주를 주재하는 것에 만 족하는 분으로서 쇠도끼를 물 위로 띄운다든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한다든지 해서 자연 법칙을 위반하면서 까지 기적을 행하셔서 신뢰를 산산조각내시는 하나님도 아니었다. 지적설계를 보존하고, 유지하며, 자연 개념과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존재였으므로, 정통기독교 가 주장하는 “미신”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으 므로, 따라서 이들은 이신론자, 범신론자 또는 초월적 심령론자가 되었다. ▶ 신자는 성경속에서 계몽주의 철학자는 자연속에서 신의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런 계몽주 의 사상가들의 문제는 첫째, 신자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하나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위대한 설계자로서 자연세계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이다. 즉,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과 인간의 정신의 기량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형상으로 재정의 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여 러 존재중 하나의 존재로서의 하나님, 좋게말해 인간의 자기 확대에 불과한 존재였다. 우리에게 있는 도덕적 선이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적 선의 최대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에게 능 력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의 최대치를 갖는 분이다. 우리가 증기기관을 설계함으로 천 재성을 보인다면, 하나님은 우주의 설계로 천재성을 보이신다는 방식이다. 둘째, 이런 하나님은 자애로운 설계자와 관리자로서 하나님 개념이 결국을 쇠퇴할 수 밖에 없 다.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우주의 에너지와 움직임이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며, 신적 감독의 하나님 역시 설 자리가 줄어들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계시된 종교를 소화하지 못해 이성의 하나님과 더불어 유신론을 만들어냈다. 믿음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한 치료책이 되어야 했지만, 결국 이 치료약이 하나님을 살해 한 것이다. ▶ 반대로 성경의 하나님은 여러존재중 하나의 존재나 추상적인 제일원인이 아니다. 세상 안이나 세상 밖이라는 말로 충분히 묘사될 수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세계 전체와 인간의 삶을 자신의 끊임없는 애정어 린 창조성 속으로 불러 모으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 하셨다는 말은 그분의 뛰어난 재주를 측정하기 위함이 아 니라, 그분이 필요가 아닌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세상은 원인과 결 과의 끊없는 사슬로부터 나온 결과가 아니다. 모더니즘적 예술 작품처럼 여기에는 필요성이 전 혀 들어있지 않다. 하나님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후회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 창조는 동기가 없는 행위였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랑 때문에 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창조 를 행한 예술가이지 연구비를 지원해주는 단체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합리적인 설계를 만 든 과학자가 아니다. 즉, 신정론의 네가지 질문 1) 하나님은 존재 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이 등식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은 유신론의 하나님, 계몽주의의 하나님이지 예수그리스도의 하나 님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방식을 따른다면 신정론의 문제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철학적 해결 책일 뿐이다. 즉, 이 전제는 무신론 “하나님은 없다”는 것으로 향하도록 주조되어 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존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실재로 다른 모든 질문을 이끌어 낸다. “악한자들이 번성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가 아니라, “오 하나님, 어찌하여 악한자들이 번성합니까?” 라고 묻는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이 질문의 기초가 아니라, 질문의 대상일 때 우리는 그분께 가 닿을 수가 없다” 신정론에 대한 탐구가 애초부터 유신론적 추정에 오염되었다고 하는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말 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염에도 불구하고, 신정론 문제에 대한 반응을 탐구함으로써 얻는 유익이 많다. 그 두가지 이유는 첫째, 불가능한 체스경기(신정론에 대한 고민이)가 오늘날 상당 수 사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며, 이러한 의문을 부적절하다 선언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신정론에 관한 질문을 제기 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인생에 대한 일관성 있는 견해가 필요하다. 한 개인의 세계관은 인간이 번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확신과 의미의 지각을 지지할 만큼 튼튼해야 한다. 삶에 대한 관점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린다면, 이는 논의되어야 할 세계관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신정론의 문제는 세계관을 보수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