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김용규 등 공저, 지안출판사)는 지식소설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지식이란 곧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한다. 인류가 그동안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들 - 참됨, 선함, 아름다움, 자유, 평등, 사랑, 정의, 희생, 성스러움 등 - 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식인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하며 사회에 구현하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식인이 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황금의 중간길’이라고 표현하든 혹은 앤서니 기든스 식으로 ‘제 3의 길’이든 간에, 인간으로서의 실존 -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 - 은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왜 인류는 그토록 힘들고 고된 여정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무엇이 인류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물론 인간은 짐승에서 왔기 때문에 언제든지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사회(문화)가 강제하는 대로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달리 표현해서 유전자에 지배당하고 조종당한다는 본성으로서의 인간을 주장하는 생물학적 결정론과 남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남들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회화된 존재라는 환경결정론(문화결정론)의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약 700만년 동안 힘들고 고된 여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자적으로 볼 때 침팬지와 겨우 1.6%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오랑우탄과 침팬지 사이의 차이인 3.6%에 비하면 훨씬 적은 차이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 인간 욕구의 충족을 위해 노동을 통해 이룩한 문화(문명 또는 사회)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판단기준이나 준거의 틀로서 작용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의 말대로 진실은 아마도 그 중간쯤 어디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라도 실존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자이다. 문제는 어떤 것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떠한 결정론에도 자신의 실존을 내맡기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가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사이에서 자기 스스로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저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부자연스럽고 부질없으며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이와 같은 ‘인간적 노력, 인간적 행동’에 의해서만,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비로소 ‘제 3의 침팬지’로서의 자신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폭력적이게 만드는 요인들을 - 그것이 생물학적이든 환경적이든 - 스스로 다스릴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인류의 사회에 미래를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류의 미래와 희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경결정론의 대결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독자로 하여금 생각해보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면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의 실존론적 선택과 결정 - 실존론적 변양 - 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려는 열정을 갖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만나볼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저자는 진정한 지식 - 지혜라 해야 더 어울리겠지만 -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과거는 기억으로서 현재에 현현하고 미래는 기대로서 현재에 현현한다.” 그러므로 ‘지금-여기’의 실존이 얼마나 중요한가! 과거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용납하며, 미래에 대해 새로운 대안과 희망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지나가버린 어제로, 미래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내일로 여기는 인간은 얼마나 막 되먹은 삶을 사는 것인가 알 수 있다. 그런 인간에게 ‘지금-여기’란 단지 스쳐지나가고 말 것이 아닌가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간으로 살아라. 그러기 위해 도덕적 훈련을 통해 성숙하라. 우리는 매순간 우리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고 있으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이러한 삶은 ‘지금-여기’의 자기 자신과 외부 조건들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즉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만들어 내놓는 ‘효과 있는 행위’이다. 이 책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론과실천)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서 ‘철학적 인식론’과 ‘이성의 빛과 어둠’ 등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다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인류가 어디쯤에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을 수호하며 우리의 삶에 실천하기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서 독자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앞으로 3편에서 현대 문화와 문명, 그리고 4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5편에서 자본주의와 현대 물질 문명 등에 대해서도 계속 다루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
| 다니... 이 소설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네요. 이 소설에 왜 지식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는지 참 의문입니다. 최근 각 신문에 난 리뷰에 보면 지식소설이 어쩌구--- 라고 되어 있고, 또 작가의 말에 보면 지식소설의 새 장을---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왜 이소설이 지식소설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왜 지식소설이라는 편협한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 궁금합니다.(마케팅 전략이겠지만) 이 소설은 그저 평범한 과학소설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요. 두 분의 저자께서 이 소설을 지식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소설의 소재(두 이론)에 있습니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 본능주의와 행동주의가 소설의 큰 틀에서 대립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 소설의 소재가 지식이라는 주장입니다. 역사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 역사소설이고, 지식으로 소설을 쓰면 지식소설이라는 겁니다. 허면, 지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역사는 지식이 아닌가요? 음악은 지식이 아닌가요? 과학은 또 어떻습니까? 지식은 넓은 의미의 앎을 포괄하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과학과 역사와 음악은 좀더 세분화된 지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허면, 다니라는 소설은 과학소설이어야지 왜 지식소설입니까? 솔직히 저는 본능주의가 무엇이고, 행동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이 두 이론이 과학에 한정된 이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찌보면 사회학에 더 가까운 이론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과학소설일 수도 있고, 사회소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어차피 생물(침팬지)을 소재로 본능주의와 행동주의를 풀어 갔으니까 과학소설이 맞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소설은 단지 과학소설로 분류되어야 합니다. 지식소설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저의 작디 작은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삼류 오락 대중 소설을 제외하고는(간혹 아닌 것도 있지만) 소설은 다 지식을 수반하여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최근 발간된 권지혜씨의 꽃게무덤이란 소설집에 보면, 꽃게무덤이란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게장 담그는 법이 나옵니다. 이는 엄연한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꽃게무덤도 지식소설이겠네요? 게장 담그는 법은 아무래도 좀 웃기다고요? 허면, 오래전에 나온 박일문씨의 소설 적멸을 봅시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화 된 불교사상이 포괄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불교사상의 변천 과정부터 그것이 인간에 어떻게 적용되는 가를 한 동자승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은 지식이 아닌가요? 허면 이것도 지식소설이겠네요? 또 봅시다. 외국사람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 중 한 명인 베르베르(이름이 맞나?)의 개미는 어떻습니까? 두 말할 나위 없겠지요? 이윤기씨의 그리스로마신화는 또 어떻습니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인 박상우씨의 내 마음의 옥탑방은 또 어떻습니까? 이것들은 지식이 아니고 쓰레기인가요? 설마, 무슨무슨 이론만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다니의 작가분들께서는 단순히 지식을 소재로 한 게 아니고, 지식의 변천 과정을 그렸다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작가의 말에 보면 그런 대목이 있슴) 하지만, 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물론, 제 눈이 작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차라리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론을 들이대며 지식소설이라고 부른다면 일부 수긍이 갈 수도 있겠습니다. 두서 없는 말이지만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모든 소설은 지식에 기반하여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전에는 소설가들을 실천하는 지식인이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지식보다는 웃고 즐길 수 있는 코미디가 대우 받는 세상이라 소설가들이 개떡만도 못한 신세가 됐지만요. 다니.... 참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소설 어쩌구 하는 것은 솔직히 웃기네요. 그냥 과학소설이라고 했어도 책 많이 팔렸을 텐데... 작품도 좋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학소설을 좋아하니까요. 저도 그런 사람이지만요... 지금까지 헛소리였습니다. 이 책을 보고자 하는 분들은 꼭 보세요.^^ 이 소설 지식소설이라는 타이틀만 빼면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
| 인류의 더욱 발전(?)된 삶을 위해 행해지는 수많은 행위들이 있다. 철학,과학,문학,예술 등등. 이들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인간이란 동물이 사고할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고할 수 없다면 위의 것들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는 적당히 절제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집중되지만은 못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개입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인간의 탐욕이 위의 것들에 개입되면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결과가 진행된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동료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게 폭력성이다. 폭력성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폭력이던 그 영향은 중대하고, 또한 치명적이다. 그 폭력성의 결정체가 제노사이드라고 본다. [제노사이드(genocide)-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행위] 이 책에는 두 종류의 동물이 등장한다. 사람과 침팬지이다. 그런데 두 동물의 공통점은 자연에서 지능이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족에 대한 폭력성이 공통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폭력성의 핵심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책은 인류의 극단적인 폭력성 제노사이드를 튀들디, 튀들덤 두개의 침팬지 집단에 축소해 비교하여 보여 주고 있다. 침팬지의 제노사이드가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파괴에 기인한다면 인류의 제노사이드 원인은 탐욕 하나 뿐이다. 그것도 소수 힘있는 자들의 무분별한 탐욕이다. 우스운 것은 그 탐욕에 대다수 대중들이 꼭둑각시처럼 반응해 놀아나 준다는 것이다. 집단최면....군중심리.... 중국의 문화혁명(인류 제노사이드 하나의 예)을 거치면서 부모를 잃은 제니퍼와 산림의 파손으로 결국 제노사이드를 당하는 '다니'라는 암놈 침팬지를 연결시키면서 결국엔 탐욕에 의한 폭력성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다는 인류의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인구달'이라는 엄청난 분의 글을 읽었던 나로썬 제니퍼와 다니의 아름다운 교감과 사랑에 감동하면서 폭력성이란 것에 대하여 무감해 지고, 결국 은연 중 해피엔딩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돌고 돌듯 이 글의 이야기도 결말은 명확했다. 바로 이게 인류의 운명이며, 현실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반복될 현실이라는 것이 이 책의 명확한 결론이다. 어쩌면 그 결론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 줌으로써 작가들은 좀더 인류가 반성의 눈 뜨기를 기대 했을까? |
|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인간의 잔인성과 폭력의 근원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인간은 선한 존재이면서도 또 선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번 어떤 광기에 빠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잔인해진다. 광기, 그것은 인간의 내재된 동물적 본성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아버지가 자식을 학대하고 친구끼리 이웃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보도를 듣는다. 그리고 국제뉴스에서는 내전이니 테러니 해서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모습을 본다. 동종 내 학살, 즉 제노사이드가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그럴 듯한 이유와 목적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고 있다. 동물들에게서도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지만 인간만큼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대량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제니퍼와 다니의 정신적 교감을 보면서 문명화된 인간과 순수한 자연의 소통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은 그 순수함으로 우리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을 깨닫게 한다. 제니퍼와 다니에게 일어난 비극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인지도 모른다. 강한 소수에 의해 다수가 희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쟁은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를 얼마나 피로하고 지치게 만드는가. 그 경쟁으로 인해 우리가 진화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경쟁사회에 놓여있는 우리는 행복한가.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은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줄어들거나 억제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비록 크든 작든 매일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무서운 존재들이지만 또 그것을 막기 위해 사회적 제도나 장치들을 끊임없이 계발하며 노력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동반자로 또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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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김용규/김성규 형제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지식은 진화하며 건전한 지식에는 대부분 그와 대립하는 지식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서로 대립하는 지식 쌍이 경쟁하면서 어느 한쪽이 자연도태하거나 상당수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지식들의 갈등 구조와 진화과정을 따라가며 보여주는 소설이 그들이 생각하는 '지식소설'이다.(p.415)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나망가 계곡 침팬지 이야기는 폭력성 자체에 대해 인간과 사회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인공들(웨슬리 경, 해리슨)과 폭력성은 길러지는 것이며 조절 가능하다는 환경 결정론의 주인공들(제니퍼, 요하네스)이 갈등하는 구조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갈등하는 주제가 진화를 둘러싼 것이기에 이 소설은 형식상으로나 다루고 있는 내용 상으로도 작가들이 다루려는 지식적인 것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폭력의 기원에 대한 의문은 나망가 계곡 동쪽에 서식하는 침팬지군(튀틀덤)이 벌목으로 인해 거주지를 잃고 서쪽의 튀틀디를 공격하는, 다시말해 제노사이드하는데서 출발한다. 침팬지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잔혹하게 동족을 살해하거나 성노예 삼는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이와함께 주인공인 제니퍼의 친부모가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매장 당하고 처형당한 과정 역시 이런 제노사이드의연장선상으로 그려진다.
제노사이드에 대한 대립적인 시각은 해리슨과 제니퍼가 저녁 식사 중 벌이는 논쟁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해리슨은 제노사이드가 벌목때문이 아니라 본성에 잠재해있는 공격성 때문이며 다시말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고 강조한다. 벌목으로 난민들에게 일자리와 먹을 것이 주어진다면 침팬지 몇마리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아니겠냐는 논리도 보탠다.
반면 제니퍼는 동물들이 천성적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서열을 가리거나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할때 나타날뿐 상대방에게 치명적 부상을 입히거나 동종을 집단학살하는 일은 없다고 반박한다. 벌목이라는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면 불가피한 동종 내 제노사이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대립은 침팬지를 대하는 이들의 시각차에서도 기인한다. 해리슨과 웨슬리 경 측은 난민을 앞세워 인간이 굶고 죽는 마당에 침팬지 사정을 봐줘야하느냐고 접근한다.
반면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고, 그들과 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해온 제니퍼는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고, 종교심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무차별한 학살에 노출시키는데 극구 반대한다. 나망가에 살면서 모든 생명이 연결돼있음을,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짓밟히는 것이 결국에는 나와 우리 모두를 파괴하는 일임을 절감한 그녀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생태학자들의 침팬지 보호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것이 두려워진 원주민들은 결국 제니퍼를 공격하지만, 그녀는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저항 없이 죽음을 선택한다.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것은 철저한 비폭력에서 출발한다는 믿음에서다.
책의 결말이 어둡게 끝나지만 독자들은 언젠가 제니퍼의 죽음이 나망가 계곡을 살리는 초석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멸종 위기의 마운틴고릴라를 구명한게 바로 다이안 포시의 죽음으로 가능해졌듯이, 그리고 한알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결국에는 공중의 새가 깃드는 나무로 자라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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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 이은 훨씬 더 자연스럽고 발전된 '지식소설' 이다. 다행히 이번에 멋진 미주와 참고문헌이 달려있다~! (알도에서는 요것들이 없어 상당히 아쉬웠다. ) 제노사이드, 동물, 심리, 환경, 생태, 유전, 진화.... 뭐 요론쪽 주제의 이야기 였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거나 하는 그런 분야는 아니다만 사실 상당히 흥미로운건 사실이다. 결국 비극으로 슬프게 끝나고 말았지만...(난 비극이 싫어..ㅜ.ㅜ) 지식소설 = '지식의 진화' 생물학적 결정론 ↔ 환경 결정론 본능주의 ↔ 행동주의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제이 굴드 침팬지와 인간의 DNA 차이는 겨우 1.6%이다. 유전자가 1%변화하는데 450만년이 소요된다. 다윈이 다 뒤집어쓰고 욕먹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용어 선택에는 정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다윈이 어쩔 수 없이 대중적 용어로 교체 했지만 실로 이후 그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지금에 와서 또 '신'자유주의가 나대치는건 왜일까... 어휴... 인간들아... 폭력성...내재된 본성... 으... 갈수록 인간이 더 싫어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폭력은 인정될 수 없는걸까? 부당한 죽음의 위협에서도 그냥 당하고 말아야하는건가?... 칸트가 정말 현실적으로도 옳은가? 나 역시 요하네스에 동의한다. 비폭력은 대항할만한 힘이 있고 그때 의식적으로 폭력을 자제할때 의미를 갖는 것이지 힘이 없어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을때는 비폭력이 아닌거야.. (간디의 비폭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서방 언론의 힘이 간디에게 있었기 때문..) '경쟁' 이것이 정말 진보의 원리인가? 아니면 아무런 효과도 없는 사회진화론자들의 사기극인가... 예전에 본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란 책 에서 보았던 밀그램의 심리실험들도 등장했다.. '김용규 김성규' 두 형제 저자 님들께 정말 감사한다. 이런 '지식소설'의 장을 열어주시고 또 계속 작품을 써주셔서..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너무 기다려진다... 알도가 01년 다니가 05년 이니까 이제 새 작품이 좀 나올때가 되지 않았나? ㅋㅋ 아 지식소설... 너무 좋다~ 빨리 후속작품을~~~ |
| 이런 소설이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문화와 문학의 이만큼 발전되었다는 반증이 될만도 하겠다. 순문학이 옳으니 목적문학이 옳으니 하는 고리타분한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때가 어제같은데, 문학이 그 스스로도 위대한 목적이 될 수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노골적으로 다른 학문의 이해를 위한 도구로서 쓰여져도 훌륭한 예술성과 그 목적하는 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편의 영화를 혼자서 찍는 것 같았다는 김훈의 평이 납득이 갈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으로 읽힌 책이었다. 진화생물학과 인류학의 논점들을 깔끔하게 소설적인 형식으로 풀어놓았다. 덕분에 사회생물학과 진화론에 관한 노쟁들을 스스로 복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있었던 점을 하나만 찍어서 말하라면, 소설의 주인공은 스키너-왓슨의 행동주의를 지지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그반대편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들은 윌슨과 도킨즈 등의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들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행동주의 이론들은 이제 더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고 도킨시안들의 이기적인 본성론이 휩쓸고 있는 작금에 조금 시대에 뒤덜어진 구성이 아닌가 싶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중인물들은 상당부분 진화심리학의 논점들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미 지나간 토론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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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표지를 보았을 때 읽는 내내 알지 못했던 한 가지를 발견했다. 표지에 침팬지가 울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전에도 보았는지 모르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 그림은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다. 눈물의 의미가 무언가 하는 것과 왜 침팬지인가 하는 것이다. 가슴 속에 찡한 울림을 주고, 폭력에 의한 피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지식소설이라고 작가들이 규정한 이 소설은 쉽게 읽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간단히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아프리카에 사는 침팬지 다니에 대한 묘사와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제니퍼의 현재와 과거사에 대한 것이다. 과거는 중국계 입양아인 그녀의 부모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해당한 것이고, 현재는 환경파괴에 의한 침팬지 사이의 학살을 다루고 있다. 제노사이드. 우리가 흔히 코소보 사태니 아우슈비츠니 하는 것들을 말할 때 인종청소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선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린 침팬지 집단이 다른 지역을 침범하여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몇 번 이 장면을 보여주는데 잔혹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 외에 동족을 살해하는 것은 없다는 상식을 여지없이 파괴한다. 책 후기에 작가들이 말한다. 이야기 구성을 위해 침팬지 수화는 허구로 만들어 내었다고. 하지만 읽는 내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수없이 나오는 이론이나 연구 결과들이나 이제는 익숙한 제인 구달이 그런 묘사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지만 숙제도 한 아름 안게 되었다. 세계화와 사회진화론에 대한 허상을 씻어내게 되었고 칸트의 철학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뭐 이 책과 관련된 책들을 꼭 읽지는 않겠지만 관심이 커져가고 새로운 사유의 장을 만들어줘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작가들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코소보 사태 때문이란다. 이로 인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오고갔고, 폭력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집단학살, 즉 제노사이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코소보나 아우슈비츠에 대한 글이 아닌 왜 침팬지에 대한 것이냐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들은 이에 대한 해답은 내놓지 않지만 역시 인간들의 직접적인 살인을 다루기 쉽지 않기 때문이거나 소집단을 통한 연구가 더 섬세하고 직접적인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연구 대상이 많지 않지만 충분히 폭력성을 표현하는데 무리가 없는 존재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종을 찾기는 비교적 쉽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지식소설이라 말하여 어려울 것 같지만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이런저런 이론이나 연구 결과들이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오고 지식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거창한 이론이나 엄청난 활극은 없지만 잔잔히 흘러내리는 감정의 깊이나 인식은 가슴 깊은 곳까지 전달된다. 연구 대상에 감정이입이 되어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발생한 아픔과 비극을 보면서 제인 구달의 냉철한 탐구 방법은 경이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단순히 애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자이자 상대적으로 우월한 힘을 가진 존재로써 다른 종족에 개입하지 않는 그 인내력은 놀랍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 사람마다 평이 갈라질 것이다. 하지만 인정해야할 것은 외부의 개입으로 인한 좋은 변화보다 나쁜 변화가 더 많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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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가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실험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프리맥교수는 그녀에게 다이안 포시가 아니라 제인 구달을 본받으라고 충고한다. 다이안 포시는 마운틴고릴라를 살리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밀렵꾼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가 참혹하게 살해 당했다. 반면 제인 구달은 그녀만큼 침팬지들을 사랑했지만 과학자적인 냉정함을 잃지 않았고 그 덕에 다이안 포시와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팬지들에게 수화를 가르치면서 천재성을 보인 다니에게 애정이 쏠리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다니는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사랑했고, 제니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침팬지들이 내지 않는 소리까지 냈다.젝,젝,젝 다니가 부르는 제니퍼이름이다.
침팬지들이 평소에 이루던 평화는 서식지가 벌목으로 침해당하자 깨져버린다. 그리고 잔혹한 제노사이드(종족살해)가 일어난다. 인류가 자연에 가하는 폭력. 개발이라는 명목하에,때로는 그것이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여기서는 원주민과 난민들에게 일자리와 삶의 터전을 준다는 명목으로.
불법 벌목을 막으려고 유엔에서 파견된 요하네스와 제니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대응방식은 다르다. 제니퍼는 무저항 비폭력을 원칙으로 한다면 요하네스는 적에게 대등한 방식으로 당당하게 맞서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들의 불법행위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처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활약한다.
요하네스에게 느끼는 짧은 순간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동안 형성된 다니와의 사랑이 훨씬 중요했던 제니퍼는 결국 제노사이드의 희생자가 된다. 사랑한다면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해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니를 찾아 숲으로 갔다가 자본의 조종을 받는 원주민에 의해 침팬지가 죽인 것으로 보이게 살해당한다.
제니퍼의 부모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무참히 희생되었다. 4세에 경험한 처참한 광경은 그녀에게 각인되어, 과거를 묻고 미래를 살라는 양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를 찾아 중국에 가게되고, 부모가 겪었던 참혹한 죽음을 알게된다.그리고 자신의 운명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낀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루 박사는 당시 홍위병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전혀 과오를 느끼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너무나 순수했고, 단지 마오 쩌둥에게 이용되었다는 것만이 억울했다고. 하지만 그가 가족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이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거짓중언을 하여 살아남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랑만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음을...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1.6%만이 다르다고 한다. 인간이 제3의 침팬지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유전자에 존재하는 폭력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다소 허무, 황당함을 느꼈지만 그래서 더욱 폭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았다.
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항상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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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에 지식을 담았다? 뭔가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하나 장만하고.. 멀리 떨어진 여자친구에게 하나 보내주고.. 같이 읽으면서 서로의 감상을 공유했죠. 워낙에 침팬치에 관심이 많고 키우고 싶어해서 감정이입은 어렵지 않았지만.. 지식소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물론 이 책을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없지만 혹여 저처럼 지식소설이라는 것에 대해 끌리셨다면..그부분은 조금 접고..ㅋㅋ 물론 많은 양의 사실과 과학에 근거를 둔 지식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소설과 별 무리 없이 융화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책이란건 이런책 저런책 새로운 장르?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거 아닌가요.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