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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는 남성성',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접하는 유해한 남성성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는 책이에요. 책은 다양한 사건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남성성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여덟 장에 걸쳐 소개하고 있어요. 친밀한 관계 내 여성 폭력, 디지털 성폭력, 그리고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문화 같은 다루기 힘든 주제들.... 6장과 7장에서 다룬 온라인 문화와 여성혐오가 제도 정치와 어떻게 엮이는지를 읽다 보면 정말로 우리가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책 전반에 걸쳐 다양한 남성성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데,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꺼리가 될 것 같아요. 다양한 범죄들이 언급되어서, 읽는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의미있는 독서시간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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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2023년 여름의 흉기 난동 사건들, 2023년 11월 진주 편의점 숏컷 여성 폭행 사건,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이라 불렸던 끊이지 않은 여성 대상 폭력들, 딥페이크 성폭력, 사이버레커와 여성폭력 사건들, 벗방 시장, 2025년 1월 19일 시부지법폭동 등이 모든 켜켜이 쌓여 있는 폭력에는 유해한 남성성이 존재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성혐오 기반의 유해한 남성성'을 설명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언어로 '폭주하는 남성성'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가 분명 남성의 폭력과 가해, 격노, 괴롭힘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그런 지점에서 해로운 남성성들이 폭주하고 있다고 본다. 이 남성성들의 폭주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보적이다. 이 책은 이러한 '폭주하는 남성성'이라는 구호를 통해 일상의 젠더기반폭력을 둘러싼 역동을 살피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제도 정치에서 남성 집단이 행하는 결속과 배제, 착취의 역학을 설명한다. 주변화된 남성성이 폭주할 때 새롭게 만들어낸 이 조어에서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남성 집단 일반의 특성이나 경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1장 <폭력의 연속선과 남성성'들'> (추자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에서는 이 '남성성'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남성성이란 특정한 속성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남성으로서 의미를 획득하는 실천이다. 무엇이 남성적이고 여성적인지 본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젠더는 반복된 실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래윈 코넬은 남성성을 개념화하여 구체적 실천으로서 남성성이 어떻게 드러내는지 설명한다. 코넬은 남성성을 헤게모니적 남성성, 종속적 남성성, 주변화된 남성성, 공모적 남성성으로 분류하고 그 관계를 설명했다. 코넬의 남성성 분류 중에서 그간 폭력의 하위문화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주목해온 것은 주변화된 남성성이다. 코넬의 주변화된 남성성은 계급, 인종 등 다른 사회구조와 교차하면서 주변적 지위가 맥락이 된 실천을 말한다. 주변화된 남성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실현할 수단이나 사회적 인정이 부재한 상황, 즉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실질적 자원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남성으로서 권력을 주장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다. 이 폭력은 가해자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 금기를 위반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제한된 계층적 지위와 사회자본 때문에 주변화된 남성성이 극단으로 폭주할 때는 강간과 살인 같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한편 주변화된 남성은 여성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지위의 남성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글에서는 주변화된 남성성의 예시로 한국 사회에 '사이코패스' 논의를 대중화시킨 사건 중 하나인 오원춘 사건을 가져온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조선족으로 평소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생활할 정도로 절약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계속하여 받자 이주 노동자라는 한국 사회의 주변적 지위에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할 수단으로 성매매와 강간 등 여성을 통제하며 자신의 남성 정체성을 확인했다. 그는 성인이 되고 나서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남성들을 재회하자 폭력을 행사해 응징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남성들의 범죄가 여성폭력이 아니더라도 남성성 수행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범죄학자들은 범죄를 행한다는 것이 곧 젠더 수행이라는 주장을 제기해온 이유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의 범죄를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했고 '사이코패스'라는 개인의 문제로만 진단했을 뿐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인셀 문화, 온라인 커뮤니티를 살펴보며 주변화된 남성성의 네트워크가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이러한 폭력 실행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주변화된 남성성은 헤게모니적 남성성 구축의 도구가 되어 이용당하기도 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합법성과 심니 보호를 표방하며 인셀이나 루저 같은 주변화된 남성성과 거리를 두고 단죄를 선언하지만, 그들의 열패감과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를 묵인, 조장, 활용하며 현행 젠더 질서를 유지했다. 현행의 이성애 및 남성 중심적인 젠더 지배를 영속화하고 경제적, 도덕적 이득을 얻어나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인셀 및 루저 문화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주변화된 남성성과 그들의 약자 서사를 용인하고 활용한다. 이렇게 남성성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성차별적 사회질서와 조직의 불평등 레짐 형성에 함께 기여한다. 이 글은 남성성에 대한 논의가 현행 젠더 관계에서 누가 이득을 얻고 있는지, 거기서 배제된 이들과 어떻게 함께 구조적으로 불평등을 문제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특정한 남성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태도 형성에 영향을 미친 또래 문화, 남성 동성사회성,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나 친밀한 관계에서의 강압적 통제,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 능력주의의 모순, 징병제와 정당정치의 언설 등에 문제를 종합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페미니스트 벨 훅스의 대안적 남성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롭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유약함과 취약함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서로에게 의존하며 우리 각자의 취약성은 서로를 통해 보듬어진다. 이러한 의존성은 약함의 증거로써 극복되고 부정되어야 할 속성이 아니다. 이런 의존성은 "자신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를 갱신할 수 있는 동력, 생성적 힘의 원천"이다. 남성연대 n번방, 박사방, 메타버스 공간 내의 온라인 그루밍과 성적 괴롭힘, 딥페이크 성폭력, VR 기술을 활용한 성매매 등 기술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범죄는 계속하여 등장한다. 이 모든 범죄의 원인은 하나로 귀결된다. 바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현실에서 여성을 자원화해 착취하고 결속을 다지는 남성연대의 문제이다. 새로운 디지털 성범죄는 유구한 젠더폭력의 역사의 최근 한 장을 차지했을 뿐이다. 이 책의 3장 <어떤 남자들과 딥페이크 성폭력>에서는 딥페이크 성폭력을 가부장적 남성연대의 문제로 짚어낸다. " 남성연대는 단지 어떤 집단이나 대상이 아닌 남성 가부장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모든 남성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믿을 하에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비롯한 타자를 배제하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p96) 왜 남성됨을 다른 남성에게 승인받는 수단으로 지인 여성의 능욕을 이용하는 것일까. 철저히 위계적인 방식으로 그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남성연대는 사회적 자원이 없고 취약한 존재들을 비난하고 조롱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무리 밖으로 나가떨어지면 손쉽게 폭력과 괴롭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남성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재회 취급하는 것을 무리에 녹아드는 하나의 방법으로 취급한다. 자신들의 불안정하고 허구적인 남성성을 감추고 다른 남성들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주변 여성을 조롱하고 성적으로 대하여 이들을 재물 삼아 남성되기를 수행한다. 극우란 타자에 대한 적대 그 자체를 입장으로 삼는다 자신들보다 취약한 대상을 재물 삼아 내집단의 동질성을 높이는 것이 바로 극우가 사용하는 전략이다. 8장 <윤석열은 어떻게 극우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나>에서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청년 극우 세력들이 만들어진 의미를 살피며 청년 남성들의 급진적 극우화를 가능케 한 조건들을 탐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극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극우란 민주주의의 본질인 국민주권과 다수결 원칙을 거부하고 차별, 혐오, 폭력을 정치적 수단으로 옹호하며 세력화된 집단을 지칭한다. " (p252) " 극우란 일관성 이는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타자를 적으로 취급하여 내집단의 동질성을 높이는 정치적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타자에 대한 '적대' 그 자체를 입장으로 삼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주의자, 자민족 중심주의자, 반공주의자 등을 반대하고 차별하고 혐오하자고 주장하면서 선동하는 '반대자'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 짓밞아도 되는 대상을 정하고 그에 대한 폭력에 무감해지게 만드는 과정이 반복된다. " (p268~269) 극우가 유해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선'을 지켜야 공존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젊은 청년 우파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는 자신들이 혐오나 차별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가 사실은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고 자신들이 이뤄낸 공동체의 결실만을 취하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청년 남성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지하는지는 6장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 도입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 청년 남성들은 대체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보다는 '페미니즘 및 그와 결탁한 정치인들의 성평등 정책이 낳은 역차별의 희생자'로, 즉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청년 남성들이 스스로를 피해자이자 약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의 여러 글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 이 책의 여러 글에서 남성이라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정한 사회적 구조는 청년 남성들의 아버지 세대가 가졌던 가부장 권력을 마땅히 누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청년 남성들은 기성세대가 누린 가부장 권력을 목격하며 성장했지만, 성인이 되고 깨달은 것은 가부장 권력은 이루기 어려운 욕망이며 오히려 스스로가 피해자이며 약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성취할 수 없는 남성들의 울분은 어느 정치인의 표가 되고 사이버레커들과 벗방의 수익이 된다. 전통적 남성성을 성취할 수 없는 주변화된 남성성이 극단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폭주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대안적 남성성에 대한 다양한 각본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6장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에서는 대중적인 페미니즘 담론이 청년 남성을 대체로 동등한 대화의 상대보다는 비판 혹은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클리셰를 반복하고 있으며, 의도가 무엇이든 이는 역설적으로 안티페미니즘 담론을 낳고 청년 남성들의 음모론적 피해의식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청년 남성들의 폭주하는 남성성들의 안티페미니즘을 변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로운 새로운 남성성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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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온라인 서점 리뷰란에서 한 유저가 가해를 저지르는 것이 남성만이 아닌데, 왜 남성성만 문제 삼느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을 보았다. 이 사회는 치밀하고 견고한 가부장제, ‘해로운’ 남성성에 의해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제 그 사회에서는 ‘우월한’ 남성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이제는 대안적 남성성을 꿈꿔야 한다. 불평등한 사회를 낱낱이 해체해야 한다. 서평을 쓰던 중 지난 6일간 여성 3명이 친밀한 관계에 있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왜 남성성이 문제냐 묻는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서평단에 선정되어 동녘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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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는 남성성> - 우리는 지금 어떤 남성성을 키우고 있을까 🫧 "남자애는 원래 그래." "좀 억울한 거야, 남자들은." "요즘은 오히려 남자가 차별받는 세상이잖아." 한 번쯤 들어본 말이다. 누가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말들이고, 누구의 말인지 가물가물한 채 스치듯 들리는 말들이기도 하다. 이런 말은 늘 어딘가에서 계속 흘러나온다. 댓글창, 뉴스 기사, 커뮤니티, 그리고 일상 대화 중간중간. 어떤 이야기는 그저 말이 아니라 사회의 방향을 결정해버릴 정도로 거대해진다. 🫧 20대 남성, 극우화, 안티페미니즘, 살인 예고. 한 문장에 담긴 단어들이 너무 많다. 서로 다른 줄 알았던 사건과 감정이 어떤 감정선으로, 어떤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한꺼번에 펼쳐보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런 복잡함을 억지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무섭게 몰아치지도 않고, 감정에만 기대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여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고 차근차근 모아 보여준다. 🫧 사건을 따로 보지 않고, 그 배경을 만들어낸 구조를 파고드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n번방, 벗방, 딥페이크, 단톡방 성희롱, 살인 예고와 서부지법 앞의 폭동까지. 이런 일들을 벌인 ‘특정한 몇몇 남자들’ 의 이야기로 넘기기엔, 그 빈도와 패턴이 너무 뚜렷하다. 어떤 범죄는 개인의 비뚤어진 욕망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꾸준히 허용하고, 축적해온 감정들이 어느 지점에서 폭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책에서는 여러 형태의 남성성을 ‘폭주한다’ 고 말한다. 분노, 억울함, 자격지심, 경쟁과 좌절. 그 감정들이 왜 하필 여성에게 향했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정치적 결속으로 이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낸다. 여기에는 한두 명을 지목하는 비난이 없다. 그 대신, 질문들이 촘촘히 들어 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놓친 걸까? 언제부터 누군가는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을까? 우리가 지금 보는 현상은 어디로부터 출발한 걸까? 🫧 기억에 남는 건, 가해자 개인을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는 태도였다. 정죄보다 더 무서운 건, 구조를 설명하는 언어라는 걸 다시 느꼈다. 딥페이크 영상을 돌리고, 페미니스트를 사냥하고, ‘여가부 폐지’ 를 구호처럼 외치고, 정치인이 <맥심> 화보에 실려 웃는 모습들. 그 전부가 거대한 맥락 안에서 서로에게 발화점이 되고 연료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우리는 지금 어떤 남성성을 살려내고 있고, 또 어떤 남성성을 키워내고 있는 걸까. 아이들은 자라서 ‘그런 남자’ 가 되지 않을 거라 믿는 마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매일 뉴스에서 확인하고 있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제일 먼저 눈을 돌려야 하는 건 ‘특정한 남자’ 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허용하고 있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 이건 누군가의 격렬한 분노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말과 시선, 조롱과 무관심이 어떻게 하나의 흐름이 되고 결국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도착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기록에 가깝다.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허용받았고, 누군가는 언제나 조심하라고 배워왔다. 그 오래된 불균형 속에서 어떤 감정은 계속 부풀고, 어떤 목소리는 계속 작아진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은 그 끝에서 터진 파열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외면했던 구조의 모서리를 이제는 똑바로 바라봐야 할 때다. |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아가다 보면 현실에서 불편한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뉴스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침투하는 불편함. 때로는 명확히 이름 붙이기 어려운 그런 순간들 말이다. 살인 예고, 흉기 난동, 스토킹,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 딥페이크, 사이버레커 등 우리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들은 이제 뉴스뿐만 아니라 정치권, 특히 극우 성향의 담론 속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지속되고 반복되는 현상의 공통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 책은 그 뿌리를 남성성에서 찾는다. 남성성은 흔히 남성다움이라는 규범이나 남성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여러 특질들의 목록처럼 이해되지만, 무엇이 남성적이고 여성적인지는 본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젠더는 반복된 실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남성성 역시 젠더를 체현하는 구체적 실천을 포착하는 개념으로서 함의를 가져왔다. p29 이 책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바탕으로, 그 이면에 자리한 구조적 성차별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차근차근 짚어나가며, 지금 우리가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지 직시하게 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를 묻는다. 책에 소개된 범죄 사례들과 '집게 손', '숏컷 여성 폭행 사건'처럼 명백한 여성 혐오 범죄들을 접하면서, 나는 이런 일이 왜 반복되는 걸까,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자꾸 되새기게 됐다. 사회는 이런 문제들을 일부 집단, 일부 남성의 문제로 개인화하여 납작하게 잘라내고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질환 때문이라고 하거나, 남성 집단 내 서열 경쟁에서 밀리고 여성들에게 분노를 느껴서...라고 하거나.(정신 질환은 남성만 겪는 것이 아닌데 왜 폭력은 남성에게서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지?)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그들의 폭력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피해자에게 2차 가해로 작용하고, 문제의 근본을 외면하게 만든다. 또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회시켜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낙인찍는 결과를 낳는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4장 <사이버레커와 여성폭력 사건들 - 정의 구현에 활용된 성폭력> 이다. 이 장에서는 사이버레커의 문제점-왜 온라인에서 가해자/피해자를 공개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왜 정의 구현을 외치는 사람들이 2차, 3차 가해의 원인이 되는가-을 이야기 한다. 유튜브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례들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노출시키는 방식이 어떤 문제를 낳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엄벌 주의가 반영된 결과이자, 이것이 피해자 고정관념을 강화시키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나 또한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사이다, 참교육과 같은 콘텐츠의 유해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이 '남성성'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어서 남자들은 억울함을 토로할지도 모른다.(책을 읽었다면 안 그러겠지만) 이 책은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시대로 가기 위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남성이 사회 구조 안에서 '강해야만 하는 존재', '감정을 비치지 않는 존재'로 자신을 지워야 한다고 강요 받았다면, 이 책의 3장 <어떤 남자들과 딥페이크 성폭력>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던 제대로 된 젠더 교육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당신의 불편함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더 나은 시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친밀한 관계 내 폭력(교제 폭력)으로 여성이 살해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폭력 신고를 수차례했음에도 가볍게 넘긴 대가였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희생되어야 끝나는 걸까. 오늘도 이 책의 사례가 늘었다. ++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더 찾아볼 자료"를 읽고 보면서 현실에서 지우는 것들을 계속 수면 위로 올려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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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혁명”이라 명명된 “광장 민주주의”의 경험에서 쏟아진 대변혁을 향한 이슈들과 의견들이 충분히 빠르게 다량으로 정책화되는 것 같지는 않다. 문제 많은 남성성의 현현인 권력 시스템에 온전한 기대를 품지는 않으니 실망이 크지는 않다. 내란 종식 하나만이라도 끝까지 해내길! 8인의 공저자와 만든 이 책은 더 멀리 더 오래 가야할 길과 더 새롭게 만들어낼 사회를 향한 이야기일 것이다. 차별과 혐오가 쪼그라들고 평등이 확대된, 그러기위해 낱낱이 드러낸 면면들. “성폭력의 사회적 이유를 외면한 공동체의 민낯을, (...) ‘젠더 갈등’의 덫을 넘어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이들에게 강력히 권한다.” (오찬호 사회학자, 작가) 분노 유발 범죄도 대응도 어이가 없어서, 더 진한 분노에 잠기는 순간들은 너무나 많았다. “성관계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피해 여성의) 머리가 짧은 걸 보니 페미니스트라서” 자행한 범죄들, “장기간 극심한 폭력을 행사하다 피해자를 살해한 가해자”에게 살인의 고의가 없다거나 “그런 폭력에 시달리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가해자를 죽임에 이르게 한 피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거나. 사법 기관의 몰이해는 끝이 없다. 그러니 이런 폭력은 “피해자의 죽음”으로만 종결되곤 한다. 문제는 개별 사건 처벌을 넘어 오래된 사회 범죄, 현상, 의미화, 조직, 제도의 결과로서 “해석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폭력, 차별, 혐오의 폭주에 대한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다. 이 책은 통계 데이터가 부족한 현실에도, 구체적 사례들을 활용하여 분석의 토대를 제공하는 귀한 책이다. ‘남성성들’에 주목하면,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정상성을 구축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남성성들”은 주변화된 남성성이 유발한 폭력과 범죄만이 아니라, 기업 운영, 제도 정치의 과정에서 “횡령이나 뇌물 공여부터 내란, 전쟁과 같은 폭력 행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범죄의 뒤편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보게 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드러난 통계는 명백하게 고발한다. “여성들은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살해된다는 것을. 즉 여성들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친밀한 남성 파트너”다. “2023년 성폭력 범죄 피해자 약 80퍼센트가 여성”이고, “성폭력 범죄자 약 94퍼센트”가 남성이다. “딥페이트 성착취물을 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텔레그램 방에 소속되어 있던 인원”은 22만 명이었다. “딥페이트 성폭력 피의자 98퍼센트가 남성”이고, “성착취물 피해자 99퍼센트가 여성”이다. 한국 사회는 “남성 대상 성평등 교육에 실패했다.” “주변의 여성을 제물 삼아 남성되기를 수행”하는 이들은 “경쟁 구조를 바꾸거나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여성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여성을 일방적으로 탓하는 것이 더 손쉽기 때문에. 한국의 20대 남성의 극우화는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고, 이들의 “남성연대”는 젠더폭력의 역사 그 자체다. 이에 비해, “광장에서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집단 정체성’은 “성별 위계와 차별을 둘러싼 억압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재규정”된다. 이 괴리를 둘러싼 문제와 갈등과 범죄를 하루빨리 제대로 분석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더욱 극심한 사회적 재앙이 될 것이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시대”는 역할도 의미도 끝났다. 그 동력과 잔재까지 기어코 제대로 끝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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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통스럽지만, 하늘로 주먹을 뻗게끔하는 동력이 있는 책입니다. 읽으며 많이 글썽거렸고, 분노로 끓어올랐으며, 종내는 결연한 눈썹을 만들며 책을 덮게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챕터마다 주어진 ‘더 찾아볼 자료’ 중 읽은 책이 나왔을 땐 너무 반가웠습니다… 아직도 참 해야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분명 제 주변의 ‘대안적 남성성’을 실천할 많은 동료 시민들에게도 제발 같이 읽어달라고 조르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동녘… 대체 어떤 출판사인거임 ㅠㅠ) 2024년 연말의 친위 쿠데타 이후 광장에서의 연대를 겪으며 우리들은 일종의 ‘합의’에 이르렀다고 성급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12.3 내란 이후 치뤄진 조기 대선에서 2030 청년들의 표심은 또 다시 김문수와 이준석에게 향했다. ‘폭주하는 남성성’이 불러온 사회적 물의(라고 밖에 표현되지 않는 온갖 웹하드 카르텔, n번방, 딥페이크 성범죄 등의 문제)가 개인 일반의 여성혐오가 중첩되며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짓기 보다는 안티페미니즘과 극우화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여성 혐오의 발동 기제를 구조적으로 톺아보자는 제의를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시점이다. ‘폭주하는 남성성’이란 ‘여성혐오 기반의 유해한 남성성’(9)을 설명할 수 있는 페미니즘적 언어이다. 남성성은 남성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성 또한 남성성을 담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남성성’이란 개념은 남성 일반에게 내재한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여성성을 평가 절하하며 구성되는 비대칭적인 개념’(11)으로 이해해야 한다.(그래서 책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남성들의 범죄가 여성 폭력이 아니더라도 남성성 수행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33)) 이 책의 집필진들은 이런 폭력적인 가해자적 남성성을 제도와 법률로 말미암은 엄벌주의로 통제하기 보다는 젠더기반의 폭력을 둘러싼 담론을 해체하여 살펴보고 해석하자는 제안을 던진다. 그래야만 우리 앞에 맞닥뜨린 이 폭력을 없앨 단초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대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차별과 폭력, 혐오의 말들이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이미 이 시점에서 비의도성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미디어가 부추긴 여성 혐오는 SNS라는 창구를 통해 전 국민에게 스며들고 있다. 운동장에 선을 긋고 서로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가 목청 터지도록 부르짖는 연대의 해법에 가닿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덮어놓고 껴안는 나이브함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2030 청년 남성들의 극우 프로파간다와 안티페미니즘의 사상적(이렇게까지 거창하지 않지만) 공유성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그들끼리 뭉쳐 강화되었으며, 어떻게 해석하고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제안으로서 이 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폭력이 개인적 특이성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닌, 하나의 집단 정서의 맥락으로 간주되어 ‘선’을 넘은 위해성을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장. 폭력의 연속선과 남성성’들’(추지현) 29p 주목할 것은 그들이 남성 동성사회를 준거 집단으로 삼아 외모, 경제력, 군 복무 경력,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 역량을 따져 자신의 지위를 판단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의 폭력 행사와 그 배경이 된 생애 과정에는 사회적 관계에서 남성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실천, 즉 남성성이 놓여있다. 30p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젠더 관계의 패턴, 즉 이성애, 남성 중심적 젠더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널리 수용되는 실천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물리적 힘, 강인함, 지배, 통제, 위험 감수 등이 속성을 중심으로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이해한다. 하지만 남성성은 그런 속성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이기에 실천의 맥락에 따라 사회적으로 달리 받아들여진다. 35p 이성애 관계에서의 연애, 결혼, 취업 등 기존의 남성다움에 대한 정상성 트랙을 이행하기 어려워진 신자유주의 시대의 남성들이 자신의 주변성을 변화하는 젠더 관계에 따른 피해자로서 호소하고, 여성 및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양상은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진단되어왔다. 38p 2023년 발생한 일련의 ‘묻지마 범죄’ 역시 심리적, 정신적 문제로 인해 고립된 생활을 해온 개인들의 실천이 아니라 많은 지지자와 추종자를 가진 조직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루저’ 및 인셀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인을 예고하는 행위와 실제 범죄 실행 사이의 연속선은 여성 혐오가 그저 가해자 개인의 범행 동기로 일축될 수 없다는 것, 주변화된 남성성의 네트워크를 통해 구조적으로 재생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위 ‘알파 메일’로의 진입이 어려워진 신자유주의시대의 주변화된 남성들이 여성과 소수자를 타겟으로 한 폭력을 자행하며 본인은 소외되었으나 어찌되었든 ‘가부장제’를 수호하는 대리자적 성격의 남성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폭력적 남성성을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나 에펨코리아를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살인 예고글’ 등의 형태로 전시하며 다수의 익명 남성의 ‘부추김’을 받고 실제 범행으로 실행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젠더기반 폭력에 가담하는 익명들은 젠더 질서를 재생산하는 공모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법과 질서의 실행자-헤게모니적 남성성-는 이런 주변화된 남성성의 담지자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막을 수 없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들은 이 폭력을 막으려 생각한 적이 없을 것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합법성과 시민 보호를 표방’(44)하지만, 주변화된 남성성을 도구로 활용하며 가부장적 젠더 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러한 남성성 논의를 바라보아야 할까. ‘대안적 남성성’은 ‘왜소한 몸, 여성적인 취향, 아버지나 또래 집단 남성의 폭력 행사가 일상이 된 상황에서도’(49) 본인 몸에 그것을 아로새기지 않으려는 실천성을 보여주는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 폭력적 기제를 ‘젠더 관계 변혁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하’(49)려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혐오 시대의 막을 내릴 새로운 열쇠를 쥐었다는 의미와 같다고 보아도 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너무나 낡았다. 하지만, 낡았다는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는 뜻과 같다. 그만큼 우리가 이 지구에 발붙여 살면서 그 문구보다 더 공감되는 문장을 발명하기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호의존성을 염두에 둔 우리의 반성폭력운동에서, 언젠간 ‘공생과 평화’에 가닿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이상의 논의가 나오길 바란다. 📍2장. 가장 일상적인 폭력,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김효정) 64p 그러나 ‘왜 가해자와 헤어지지 않느냐’는 물음은 가해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게 헤어짐을 요구할 수 있는 관계의 평등을 전제하며,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하에서 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하는 피해자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피해자의 상황과 피해 특성에 대한 이러한 몰이해는 ‘이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폭력 피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2차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73p 현재 한국에서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개인화된 삶의 방식, 친밀성의 구조 변화, 다양한 형태의 파트너십과 가족 구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제도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친밀한’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처벌 근거들을 묵인했는지를 보여준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없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하지만, 여기서 또 제도 안에 포섭되지 못하는 다양한 관계 및 형태의 ‘파트너십’에 대한 사회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젠더기반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의 서사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법과 제도가 얼마나 귀 기울여 들어주는가를 사회적 시선으로 일관되게 응시하는 것이다. 📍3장. 어떤 남자들과 딥페이크 성폭력(이한) 92p 사람들 대다수는 딥페이크 성폭력을 그저 극단적인 일부의 일탈로 취급하고 그 일부를 잡아 처벌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93p 2024년 검거된 딥페이크 성폭력 피의자 98퍼센트가 남성이었다. 그리고 한 외신에 따르면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자 99퍼센트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2023년 성폭력 범죄 피해자 약 80퍼센트가 여성이었고 성폭력 범죄자 약 94퍼센트가 남성이었다. 그저 일부의 일탈이라면 대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된 성비가 나올까? 이상하지 않은가? 98p 가해자들은 자신의 불안정하고 허구적인 남성성을 감추고 다른 남성들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주변 여성을 조롱하고 성적으로 취급했다. 이들은 자신 주변 여성을 재물 삼아 남성되기를 수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남성연대에 있다. 101p 가본주의 사회에서 고안된 ‘성별 분업’은 남성에게 ‘생계 부양자’라는 모델을, 여성에게 재생산과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가정의 수호자’라는 모델을 미덕 또는 규범으로 제시하면서 남성에게 ‘가장’이 되기를 권고해왔다. 그 관습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줄어들 기미 없이 여전하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덩달아 성장하게 된 포르노 산업, 그 시작점은 ‘암시장에서 유통되던 성폭행 결과물’과 ‘1999년 개설된 ‘소라넷’의 불법 촬영물’이라는 것을 아는가. 포르노=불법 공식이 굳어졌을 즈음부터 온갖 불법을 방치하고 암묵적으로 공인한 가부장적 국가와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던 기업체적 커뮤니티의 공모 때문에 ‘불법 촬영물을 올리는 헤비업로더, 이를 걸러내는 필터링 업체, 심지어 인터넷 기록을 삭제해주는 디지털 장의업체’(85)라는 젠더폭력의 삼각형은 더욱 굳건해졌다. 2010년대 들어 미성년자 성착취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랜덤채팅과 유명 연예인의 단톡방 불법 촬영물 공유, n번방 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며 디지털 성폭력은 우리의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더 나아가 딥페이크 성범죄와 메타버스에서 발생하는 성적 괴롭힘 등은 기술 발전에 대한 대가로 보기엔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그 병폐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 인터넷 기술은 성범죄를 유도하는 악성 기술로 간주되어 더 이상의 발전 없이 유보되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기를 원치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이 이 책이 원하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기술의 발전 뒤에 숨어 그 얼굴을 숨기고 있던,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미 성차별적이던 토양 위에 자라난 기술이 암묵적으로 용인되던 가부장적 질서와 젠더 차별을 더욱 공고히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똘똘 뭉친 남성 연대의 젠더 폭력 카르텔 그 자체가 된다. 이 남성 연대라는 것은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4050 중장년 남성의 전유물일까? 2030 청년 세대를 넘어서 10대 남성 청소년까지 이 굳건한 카르텔의 ‘뉴비’가 된다는 건 좀 신기하지 않은가. 그럼 우리는 다시 학교 교육 현장에서 되풀이되는 남성 청소년의 삶을 부담스럽게 하는 ‘남성 성역할 고정관념’의 재생산으로 초점을 맞추어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들이 옹호하고 있는 굳건한 자본주의가 감싸고 도는 가부장제는 결국 분업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성역할’을 더욱 강화한다. (자본주의.. 또 너야?) 그러나 2030 청년 남성들을 중심으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동료 시민의 등장을 우리는 반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4장. 사이버레커와 여성폭력 사건들_정의 구현에 활용된 성폭력(유호정) 123p 이와 같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품고 있는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양산되는 사적 제재 콘텐츠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27p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낙인과 2차 피해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다. 사이버레커 추종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피해자는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일면식도 없는 실제 피해자에게 ‘용기를 내야 한다’고 훈수를 둘 수 있었을까? 135p 성폭력은 통제감을 상실하는 경험이다. 피해자는 피해 이후, 심신의 고통을 겪는 것만이 아니라 주변인의 지지를 잃게 되거나 가정, 학교, 직장에 더 이상 속할 수 없는 소외와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그로 인해 일상에서의 시간과 공간과 관계가 달라지는 경험은 피해자가 피해 이전까지 설계하고 가꾸어온 삶의 범위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렇기에 성폭력 피해의 회복 측면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여러 선택을 해나가며 해결의 주체로 서고 존중받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유튜브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런 질문이 공상적인 질문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대다수의 인간종이라면 일상에 유튜브 한 스푼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유튜브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됨에 따라 자극적인 콘텐츠를 업로드해 조회수 사냥을 하는 소위 ‘사이버레커’가 횡행하고 있다. 심지어 사이버레커들은 성폭력을 ‘자극적인’ 콘텐츠로 삼아 시키지도 않은 ‘정의구현’을 외치며 정의봉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들의 정의구현 과정엔, 여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의지는 ‘뮤트’되어 있다. 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나. 형사사법 절차에서 불거진 ‘사법부의 온정적 처벌’(123)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문구에서 느낄 수 있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각시탈 감성’과 맞물리며 사이버레커를 대리자 삼아 정의를 부르짖게 된걸까. 그 피해자가 그러한 방식의 사적 제재를 원치 않더라도? 사이버레커의 도 넘은 훈수질에 이미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의 신원이 들쑤셔지고, 바라지도 않던 주목을 받게 된 것에 대해 감사라도 표하길 바라는 것일까? 이 과정에서 ‘성폭력피해자다움’은 재생산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그 자체로 피해자들에겐 올가미다. 성폭력이 계속하여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일말의 숙고도 없이 피해자다운 모습 만을 유튜브를 통해 송출하고, 사법부의 권한을 넘겨받았다는 일종의 망상에 사로잡혀 조회수를 위해 성폭력의 자극적인 이미지만 차용하고 있는 그들의 행위는 공허한 껍데기일 뿐이다. 사이버레커들이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정의구현의 껍데기를 쓴 자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목소리가 지워진 채,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도구가 된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본인이 원해서 낼 때에만 ‘주체’로서 기능한다. 성폭력이 개인의 경험으로 일축되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다른 피해자와의 연대를 통해 생체기를 치유하고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피해자는 ‘피해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면서도 일상을 잘 살아가며 다양한 정체성으로 존재할 수 있’(140)다. 그러니 단순히 정의봉으로 가해자에게 사적인 제재를 가하는 영상을 시청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행위보다,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었던 가부장적인 사회와 불평등한 조직 문화’를 해체하고자 숙고하는 태도가 더 상호의존적인 사회에 걸맞는 것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6장.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이우창) 178p 한국 주요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사용자들은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혐오하며 이성애적 관계와 가족관을 당연하게 전제한다는 사실과 별개로 전통적인 가부장의 책무를 부담스러워하고, 성인물 검역 정책에 분개하는 면모에서 볼 수 있듯 보수적인 성 윤리를 계승하지도 않는다. 196-197p ‘나거한’은 이와 같은 음모론적 세계관을 집약하고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나라 자체가 거대한 한녀”라는 문구의 줄임말로, 2022년 8월 디시이사이드 주식갤러리에 올라온 게시물 ‘한국자체가 거대한 한녀임.txt’에서 유래되었다. …… 언론과 국가기구가 호시탐탐 청년 남성을 전락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두려움은 안티페미니즘적 실천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남성을 억압하고 위협하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원망으로 가득한 음모론적 남성성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전통적 기독교적 안티페미니스트와 구별되는 ‘한국 주요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사용자’들의 인식을 파헤친다. 대한민국을 ‘페미민국’으로 의도적으로 오독하고, 나라 전체가 공모하여 청년 남성들을 ‘상대적 약자’로 만든다고 믿는 이들의 빈틈에는 가부장적 남성성의 대안이라는 서사가 부재한 상황이다. ‘피해자 약자로서의 청년 남성’(197)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그들 자신을 대표할 정치인 혹은 대변인을 내세우지 못한 음모론적 남성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고해지며 도리어 젠더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음모론적 남성성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시대가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가부장제 비판 이후 가부장적 남성성이 지속될 수 없음은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남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간직하고 있는 다수의 청년 남성’(200)이 밟아나갈 서사의 부재는 더 나은 연대를 꿈꾸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골몰해야 할 의제가 아닐까. 📍8장. 윤석열은 어떻게 극우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나_12.3 비상계엄에서 1.19 백색테러까지(권김현영) 250p 각종 지표에서 드러난 20대 남성들의 사회의식에 따르면 그들이 전통적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성향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반체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하기에는 이념적인 일관성도, 지속적 신념으로서의 수렴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극우’ 그 자체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또한 극우라는 범주 자체도 최근 들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252p 대안 우파는 2010년 전후 온라인을 기반으로 등장한 새로운 우파 세력을 지칭한다. 이들은 온라인상 청년 남성들을 주축으로 백인우월주의를 위시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며,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책을 증오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대안 우파는 온라인 기반의 밈 문화를 통해 정치적 담화공간을 점령하고 문제의 해결보다는 상대를 이기기 위한 말싸움으로 공론장을 낭비한다는 점에서 ‘반정치적’이다. 266p 이들이 이런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급진적 극우화의 배경에는 권력이 그들의 행동을 비호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들의 행동 패턴은 ‘규범과 예외’로 이중 구조화된 파시즘 체제의 이중국가에서 나치에 참여한 독일 시민들과 매우 유사하다. 269p 강조컨대, 지금 현대 정치에서 ‘극우’는 히틀러를 지지하는지 파시스트를 숭배하는지 트럼프를 지지하는지 윤석열을 지지하는지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배체하고 절멸하고 처단하고 수거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세력화 과정을 통해 구성되고 있다. 고정된 의미의 극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극우가 구성되는 과정, 즉 ‘극우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안 우파의 정의를 읽은 이후부터, 어떤 한 정치인이 계속 생각나서 괴롭다. “짤이 담는 메세지는 언제나 공허”한 법. 2030 청년 남성들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들 중 일부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통적인 우파의 신념을 따르지도 않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온오프라인에서의 테러를 감행하며 ‘극우화’되고 있다. (이 와중에 계엄에 반대하던 대다수의 2030 청년 남성들이 소외되었다.) ‘극우’는 고정불변의 일관된 정치적 입장이 아닌, ‘타자에 대한 ‘적대’’(268) 그 자체다. 알맹이 없는 신념이며, 누군가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대전 전후의 역사에서 이러한 극우 정치의 면면을 확인했다고 믿었다. 어떤 상황에서 극우 정치가 출몰하며, 그 과정에서 권력을 쥐는 것은 누구인지말이다. 극우화가 진전된 국가와 사회에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배제와 절멸이 당연시 된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선택’되지 못하고 주변화된 자아를 갖게된 청년 우파들은 자신이 느끼는 경제적 소외감을 ‘혜택 받는 존재’에게 폭력의 형태로 분출한다. 또한 검사 출신이면서 사법부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전 대통령의 행동이 반복적으로 뉴스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며, 극우화길을 걷고 있는 일부 2030 청년 남성들은 하나의 믿음을 갖게 된다. ‘미국의 보수 정치와 한국의 보수 정치가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267)다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의 성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며 우리와 연대할 ‘남성 시민의 자리’(274)는 바로 이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책 전반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동일하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종언을 고하며, 성을 초월한 시민들끼리의 연대만이 이 상호의존적인 지구 위에서 발 붙일 땅을 만들어 준다는 것…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폭주하는 남성성이라는 자극적인 주제로 책을 내놓지만 정작 그 안에 남성이 존재함으로서 생기는 사회적 이점은 배척하려는 태도가... 조금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여성 또한 매한가지 아닌것 아니겠습니까? 여성도 존재자체로 유해한 면이 있기 마련 아니겠냐 말입니다. 왜 한면을 바라보면서 다른면은 마치 안개가 낀듯 사유하십니까. 무엇이 당신을 지배했습니까. 돈입니까. 신념의 감옥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