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소설은 "1793년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로 시작한다. 회화 작품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라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회화 작품 외에도 클림트의 <유디트>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라는 등장한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소설들에서는 회화 작품의 일종의 비유로 잠깐 등장했었는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암시와 복선의 역할과 주인공들의 성격과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하나의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된 것 같다. 구체적으로 소설에서 유디트라고 나오는 여성과 영화 속에서 세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적장의 목을 베고 그 목을 가슴에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담은 클림트의 <유디트>와 흡사하다고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회화를 기점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며, 책의 part도 "Ⅰ마라의 죽음, Ⅱ 유디트, Ⅲ 에비앙, Ⅳ미미, Ⅴ사르다나팔의 죽음" 이렇게 5개의 구성이다. 이 구성들은 액자 구성의 이야기 전개로 마치 하나의 직소퍼즐을 차근차근 맞추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인상깊은구절] "이제 이 소설을 부치고 나면 나도 이 바빌로니아를 떠날 것이다. 비엔나 여행에서처럼 그곳에도 미미나 유디트 같은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마지막 구절이 이 책을 읽은 지 꽤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로 내 마음에 담아두게 하였다.유디트>사르다나팔의>유디트>마라의> |
|
이 작품은 출판된지 십년도 더 된 아주 작은 책이다. 내용도 한 가지 흐름으로 줄줄 흐르고 있어 읽기도 쉽고 금방 읽는다. 하지만 내용에 쉽게 공감이 가진 않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거나 흥미가 일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나를 파괴할 권리란 결국 자살을 말하는 것일 게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뜻을 강하게 풍기지 않는가. 처음에는 사람 목숨이 부모에게 귀속되어있다거나 신이 주신 거라든가 하는 의미에서 그걸 거부하고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묘하게 추리처럼 ‘의뢰인’이니 ‘고객’이니 어쩌구 하는 나레이터의 말로 시작된다. 아, 그렇다면 살인청부업자인가보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제목하고도 맞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흔히 영화에서처럼 타인을 살해하고 엄청난 보수를 받고 호화롭게(!) 숨어서(!) 사는 살인청부업자도 아니고 자신을 파괴할 권리에 대한 인식 그리고 행위로의 도움을 받는 의미에서 의뢰인과 그 보수, 더구나 그 보수가 간혹은 해외여행을 다니고 반년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니… 거참 좋은 직업일세.
‘고객과의 일이 무사히 끝나면 나는 여행을 떠나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고객과 있었던 일을 소재로 글을 쓴다. 그럼으로써 나는 완전한 신의 모습을 갖추어간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말은 그럴싸하다. 결국 ‘나’라는 인물은 창작이라는 결론으로써 신이 된다는 소리이다. 창작만으로? 그럼 살인으로? 자살로 이끈 것도 살인인가? 아니면 둘 다? 결국 저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쓰였단 말인가? 아니다. OR의 의미이니까.
보수 이야기가 없었다면 좀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헛세상을 헛되게 사는 많은 무의미한 삶과 인생 들을 그냥 보기가 안타까워 그걸 돕기 위해 나섰다면 오히려 부조리극을 한편 본 듯 했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나 심리는 늘 평범을 넘어설 때 그 가치가 더 인정받는 듯 보이니까. 정말 사악한 인간이거나 오히려 반대로 어떤 특이한 신념을 갖고, 자신을 파괴할 생각도 감각도 없이 사는 이들에게 그 느낌을 일깨워주고 인식시켜주고 행위로까지 이끈다면 그는 스스로를 어떤 결정자나 조력자, 또는 신이라고도 자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논리가 2% 아니 20% 부족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탄탄하지 않은 구조로 집을 짓기 시작했으니 집 자체는 화려하고 멋질지 모르지만 다 짓고 나서 금방 허물어지는 듯한 소설 구조,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기는 저런 생각을 하는 일개 독자인 내가 얼마나 소설적 부조리에 물들어있는지 알겠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나레이터와 등장하는 의뢰인들의 이야기는 그 소설적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느낄 정도로 스토리 자체는 재밌고 흥미로웠다. <마라의 죽음> <유디트> <사르다나팔의 죽음> 등의 그림에 얽힌 둑음 이야기도 유쾌한 일깨움이었다. 또한 세연 홍콩에서 온 여자 미미 그리고 세끗 인생 K 형인 C의 연관관계나 다른 인생 들 모두 독특한 접근방식이었다.
난 김영하를, 김영하의 작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끔 그에게, 그의 작품에게 필요이상으로 잔인하게 구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가끔은 미안해진다. 그렇다고 나를 찾아오지는 마시라.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난 그런 말을 듣고 김영하의 나레이터에게 ‘의뢰’를 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
|
동생 추천 한국 소설 세 권 중, 두 번째가 대출 중이라 세 번째인 이 책부터 보게 됐다. 내가 빌린 책은 이 표지가 아니라, 절판된 원래의 표지 그림이 축소되고, 그 옆에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다. 내가 좋아하는 문학동네에서 준 1회 수상작이라니, 기대가 컸다.
그런데 화자가 누구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1장을 몇 번 반복하다가 읽어 나가게 됐다. 불과 총 1시간 반 정도? 제목이 주는 무게감으로 예상했던 것에 비해, 훨씬 빨리 읽을 수 있었는데, 가볍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빨리 읽힌 게 놀라웠다. 뒤에 소감이나 평 같은 게 많아서이기도 하고, 5장도 1장처럼 중간 다른 장에 비해 짧아서 그런 느낌이 배가 됐다.
흔히 예술성과 선정성의 경계는 어디냐는 논란이 많다. 이 작품에서는 예술의 도구가 된 인간 and 성욕의 도구가 된 인간이 있고, 제목은 그들에게 들어맞는다. 스스로 도구로 전락했다고 느끼는 내가 나를 파괴할 권리.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그들이 진정한 자기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건 오히려 철저히 그 도구가 되었을 때라는 것이었다. 저렇게 하는 것이 이렇게 하는 것이면, 나를 파괴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언제 쓴 책인가 보아하니 96년이었다. 코앞에 IMF 구제 금융 시절이 닥쳐올 것도 몰랐고,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질 것인지도 몰랐고, 인터넷은커녕 삐삐나 쓰던, 세기말 불안으로 앞날이 특히 어두워 보이던 그때. 성매매란 용어가 (그제야) 갓 정착됐고, 사형제나 안락사 논란이 전 사회적으로 일기 시작하는 등 어지러웠던 시기였음을 떠올려보면, 당대 사람들의 내면 심리를 잘 파악했으면서도 표면화된 핫이슈들도 과감히 건드린 '최신' 소설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1장도 파악하기 어려워 반복해 읽었다고 했다. 2010년 현재의 내가 이 책에 있는 글자만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현재의 나를 파괴하고 당대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을 때, 책이 술술 읽힌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읽었다는 것으로 뿌듯해한다면 너무 자학적일까?ㅋ
음악으로 치면, 베토벤이었다. 겉보기엔 민감한 이슈를 부드럽게 녹여낸 것이, 마치 강렬한 듯 형식미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베토벤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다른 듯 엮인 이야기들은 조가 바뀌며 재현되는 화성의 조화로움이었다. 또 특히 깊은 뜻에 있어서는 저 유명한 '운명' 교향곡과 연관지을 수 있는데, 언뜻 보기엔 각각 '나는 나를 파괴해도 된다.', '운명 - 정해져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 쉬우나, 실상 속 내용은 둘 다 그 반대란 점에서도 공통이다. '운명' 교향곡은 어둠이 나중에 걷히므로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곡인데, 이 소설도 위에 적었다시피 나를 파괴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통해 희망을 담아뒀기 때문에 명작인 게 아닐까? |
|
참 무료한 일상에서 이책을 일게 되었다 무엇하나 읽을것 없고 무엇하나 할것 없고 더이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묻지도 않고 고민도 하지 않고 그런 시점에 읽었던것 같다 아무생각 없이 살던 내게 한동안은 내가 살고 있는것에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던것같다 이렇게 살아가는게 점점 나를 파괴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이게 나의 권리인것인지 한번 읽어 보신분들은 다시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나도 역시 그럴것이다 |
|
역시나 매력적인 소설 깔끔하다 매혹적이고 관능적이고 퇴폐적이며 끈적끈적한 묘~한 소설 그러나 읽는 내내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참 흡입력있는 소설... 모르겠다... 김영하님의 소설을 읽고 나면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역시 소설이다. 1996년에 초판된 소설이지만 지금 봐도 전혀 바래지 않아보인다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물론 소설은 보는 사람 결국은 읽는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거고 보는 사람 백명 천명 각기 다 다른 것은 상상하기때문에 이미지에의해 고정되어버리지도 않고 촌티나고 유치해지지도 않는거 같다. 하여간 김영하다~!!! 앞으로 김영하와 성석제 소설은 모두 다 봐야지... |
|
공포라는 연료 없이 혁명은 굴러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가 뒤집힌다. 공포를 위해 혁명이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공포를 창출하는 자는 초연해야 한다. 자신이 유포한 공포의 에너지가 종국엔 그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길로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 2003.10.08 |
|
C와 K, 미미와 유디트, 그리고 죽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살안내인 '나'의 이야기가 흡입력 있게 펼쳐진다. 진실, 죽음, 욕망,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 강한 문학적 탐구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죽음을 동경하고는 하는 우리 내면의 황폐함을 읽게 된다. |
|
p.221
내 자동차에 달려있는 GPS 네비게이션은 내가 길을 잃거나 과속하지 않도록 언제나 나를 보살펴준다. 위성들이 신을 대신하여 우리를 굽어보는 세계에서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 그 동안 몇 번이고 이 소설을 개작하려 했지만, 완성도 높은 매끄러움보다는 집필 당시의 거칠고 도발적인 질감이 이 소설에는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가벼운 손질로 만족하곤 하였다. 이번 판에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읽는 이들이 바뀌었으니 아마도 그때그때 전혀 다른 소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도 영아사망률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나라는 거기에서도 아마 세계적 수준일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사춘기로 접어드는 소설의 작가가 된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또 낯설기도 하다. 이미 내 품을 떠난 이 소설이 앞으로도 제 갈 길을 잘 개척해 나가기를 빈다.
집근처 분당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았던 책이다. 상기한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 작가의 시니컬하고 세련된 문장이 엿봉니다. 부산 롯데시네마 센텀시티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언제 봤다고 농담을 건네시던 그 모습..
작가의 중요한 덕목중에 프리랜서 로서의 여유로움이 있겠다 싶었다. 인상적인 만남, 인상적인 글들에 감사한다. |
|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일 수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더 나쁘냐면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나빠. 그건 K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종자야.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얇다고 우습게 보고 쉽게 읽으려다 다 읽을 때까지 목이 메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