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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 본다. 싸움이 유치하게 감정적으로 번질 때 가끔은 "야, 내가 밥을 먹어도 너보다 3년은 더 먹었어!"라고 말한다. 내가 너 보다 나이 몇 살이 더 많다는 표현이 밥을 먹다는 것으로 대응된다. 밥을 먹는 것 = 삶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은것이다. 그만큼 삶과 음식은 밀접하다.
우리는 삶에 대해 늘 생각해 왔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 인문의 시작이다. 그럼 우리는 삶 속의 음식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내던진적이 있던가? 저자 김석신은 식품영양공학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식품'공학'을 하던 학자는 조금 근본적인 시각으로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음식과 이데올로기, 음식과 사회, 문화, 국가, 성별과 같은 문제 부터 좋은 음식과 올바른 음식에 대한 음식 윤리까지 음식의 영양성분을 공부했을 학자가 시각을 넓혔다. 이것이야 말로, 공학과 인문학이 만난 융합적 시각 아닌가. 게다가 밥의 이야기 이다. 밥이야기라면 뭐 늘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미처 생각치 못했던 음식에 대한 통찰
원래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발견이 가장 어렵다. 타성에 젖어 매일을 살다 보면 삶의 의미를 잊고 그냥 바삐 살아가다 보면 바람도, 공기도 느끼지 못한다. 다 스쳐 지나갈 뿐이다. 책은 바쁜 삶과 좁은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놓친 무언가를 찬찬히 되짚어 돌아보게 한다. 김석신의 <나의 밥 이야기>는 우리가 매일매일 익숙해져 잊고 있던 음식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음식이 갖는 의미와 윤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저자가 살아왔던 삶 곳곳에 녹아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추억의 향이 맡아지는 느낌이다. 어릴적 잔칫집에서 먹었다던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잡채의 고소한 향과, 맹장염에 걸리게 만들었던 모래 묻은 라면 같은 에피소드들이 생생하다. 음식에는 이야기들이 있고, 향과 맛이 있다. 왜 지금은 흔히 먹을 수 있고 재료도 더 좋은 걸 쓸수 있는 잡채가 그렇지 못했던 과거 보다 맛있지 않은지, 그 이유는 식품공학으로 찾아 낼 수 없다. 인생의 의미와 이야기속에 그 맛과 향이 있기에 그 이유는 아마도 철학과 인문적 시각으로 분석해봐야 알 것이다. 그래서 식품공학자는 결국 음식의 영양학적 분석만큼이나 인문학적 고찰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었다.
빵이 단순히 빵에 머물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존재욕구인 자기실현의 욕구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자기실현의 욕구는 삶의 참 행복과 가장 관계가 깊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욕구에 대한 집착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며, 음식에 대한 욕구로부터도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일상을 즐기되 탐하지 않는 태도는 음식에 대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p.93)
밥과 삶, 사회에 관련된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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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오락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출연자들이 외딴 장소에 가 자급자족으로 세 끼 식사를 직접 준비하는 게 내용의 전부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도 없고, 프로그램화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느라 바쁘다. 풍족한 삶에 익숙한 우리로선 그렇게 오랜 시간 한 끼 식사를 준비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재료는 인근 마트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그마저도 귀찮으면 외식을 가거나 배달을 시켜 먹을 수도 있다. 텃밭 열풍이 일면서 각종 작품을 기르는 이들이 늘었다고는 하나 그들조차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적으로 제 노동에 의지해야만 한다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나 또한 처음에는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었다. ‘뭐 저런 프로그램이 다 있냐’며 어처구니 없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웃음보다 더 큰 무언가가 읽혔다. 직장에서 주어진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다. 실제 식사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다. 먹는 속도가 상당히 느린 나는 길어도 10분이면 끝나고는 하는 식사 속도를 따르기 위해 먹는 양을 줄여야만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판단이 안 설 정도로 음식을 ‘흡입’하고 난 다음이면 언제나 속이 더부룩했다. 따로 운동을 할 짬이 주어질 리 없었다. 오히려 때론 양치할 틈도 없이 바로 일을 해야 하기도 했다. 살기 위해 먹는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먹는 건 살기 위한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무언가만은 아니다. 먹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크다. 오늘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다. 그토록 중요한 식생활을 왜 우리는 홀대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음식 이야기다. 국경을 넘나들지 않더라도 이는 유효하다. 서울 경기 지역에서 즐겨먹는 음식과 강원도, 전라도 등에서 즐겨먹는 음식은 서로 다르다. 교통이 발달하고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음식에 있어서도 일종의 ‘퓨전화’가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며 언급되는 무언가는 존재한다. 음식은 곧 문화이자 나와 너를 구분 짓는 정체성이다. 삼켜 먹고 영양분을 얻는 수단에만 그치지 아니하며, 한 개인의, 집안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도 한다. 그리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가난과 만날 수 있다. 빈곤했던 시절 우리의 먹거리 또한 내세울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반찬이라고는 김치 하나뿐인 밥 한 공기일지라도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식사시간은 소중했다. 오죽했으면 식구(食口), 즉 한 집에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존재하겠는가. 핵가족화가 진행되다 못해 1인으로 구성된 가구수도 상당수다. 젊은이들은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를 편해한다. 그럼에도 밥을 먹을 때만큼은 혼자이길 거부한다. 마트 식당가라든가 분식집처럼 혼자 먹는 게 그리 모나 보이지 않는 곳도 존재하지만, 밥을 혼자 먹어야만 하는 순간이면 이상하리만치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잠재의식 속에 깃든, 먹는 것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아가 삶을 나누는 게 곧 식사다. 안타깝게도 그리 중한 식사가 현대 들어 망가졌다. 먹을 게 너무 풍족한 탓이요, 경쟁이 기본 질서가 된 것도 무시못한다. 서양의 것이라면 무조건 마음을 열고 보는 못난 습성으로 고열량의 정크푸드를 세계화라며 받아들인 것도 원인이다. 햄버거 피자 콜라 등등. 입에 침은 고일 수도 있으나 건강한 먹거리는 분명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들 음식엔 아무것도 깃들지가 않는다. 부모의 정성도, 각 가정마다 달랐던 손맛도. 먹으면서도 먹는 게 맞는지를 묻고파진다. 음식답지 않은 음식에 둘러싸인 우리의 삶 또한 풍족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지 점검해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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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따뜻한 느낌의 에세이를 생각하고 책을 구매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우리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들어볼 수 있었으며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대하는가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음식에 관한 철학, 윤리학, 사회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또 생각해보고 싶다면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