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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나를 알아야 삶이 보인다.『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나를 알아야 삶이 보인다.『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내용보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맘때면 항상 만족보다 후회가, 성취감보다 좌절감이 크게 다가온다. 내 안의 불안이 커서이리라. 잡을 수 없는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리라. 힘들 때는 그것에 잠식돼있는 나를 보곤 한다. 부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바깥으로 모든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중심을 세우지
"나를 알아야 삶이 보인다.『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내용보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맘때면 항상 만족보다 후회가, 성취감보다 좌절감이 크게 다가온다. 내 안의 불안이 커서이리라. 잡을 수 없는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리라. 힘들 때는 그것에 잠식돼있는 나를 보곤 한다. 부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바깥으로 모든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중심을 세우지 못했던 까닭이다. 점차 대인 관계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이다. 좋게 말하면 조심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으로 변화했다는 거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편하고 반대로 나 편해지고자 한정된 범위 안의 세상만 바라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연말이라는 시기라서 일도 바쁘지만 이런저런 잡생각도 많았다. 쓸데없는 잡념이 많았다고나 할까. 그렇다 보니 무엇을 해도 노력이 부족하고 피곤해 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영혼 없이 살았다. 고민만 많고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머리로 생각만 한다고 뭔가가 이뤄지지는 않는데 말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간 후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중략) 녹음이 우거져 푸른 나무를 보면서 겨울날에는 온통 주변이 쓸쓸했음을 누가 알 수 있으랴. 그 꼿꼿한 자책만이 도드라졌음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비범한 삶은 어려움을 겪는 때에 비로소 자신의 고귀한 본질을 드러내는 법이다."-46쪽

 

요즘 내게 부족한 건 평정심이었다. 이런 시기에 있다 보니 마음은 심란했고 누구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했다. 부쩍 예민하게 받아들이거나 아예 무심하거나 그랬었다. 그러니까 중간은 없고 감정 기복이 심했다는 거다. 올해는 내, 외적으로 변화가 많았다. 변화한다는 게 두려웠다. 안주하기를, 평탄하기만을 바라는 안일함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변화를 두고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고 내 안의 불안을 남에게 전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에서야 내 힘듦만 보고 남의 힘듦은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지 못했음에 반성도 하게 되고. 누군가는 나더러 나 자신에게 참 엄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뭘 하든 크게 만족하지 못하고 내 능력의 한계를 먼저 탓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엄격했던 게 아니라 내 부족함에서 파생된 부끄러움이었다. 나도 나 자신을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 또한 나이니까 말이다. 이렇듯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이 많았던 시기에 만나게 된 이 책은 반성과 함께 답답한 마음을 한결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누구나 삶을 원하는 방향대로 잘 살고 싶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과 시행착오가 존재하고 발목 잡는 일이 허다하다. 알고 있지만 실천이 어렵고 실천한다 해서 메뉴얼처럼 적확하게 설계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란. 책은 2000년의 시간 동안 전해져왔던 공자의 지혜로운 가르침이 한가득하다. 이를 집약하자면 각자가 추구하는 원하는 삶은, 결국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데 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 전에 상대방의 관점과 시선도 포용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우리, 각자가 원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말인즉슨 각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의 방향과 꿈은 분명 다르지만, 그것을 원하는 것은 똑같다는 거다.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고 이상이 있다. 모든 것을 충족하며 살 수는 없다. 대신 원하는 것을 향해서 힘차게 도약할 수는 있다. 그 과정이 아름답다. 하지만 공자는 과정뿐 아니라 결과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과정이 아름다우면 그걸로 충분하지 결과까지,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말의 숨은 뜻은 다른 데 있다. 결과마저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 이전에 그 삶을 직시하는 혜안이자 지혜이다. 내 삶도 컨설턴트를 고용해 최고의 기업처럼 최상의 이익창출을 위해 경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어서 우리는 지침서를 찾는다. 사실 자기계발 서적은 잘 안 읽는다. 비슷한 내용, 조언들이기 이전에 내 마음, 행동이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만 주야장천 읽을 게 아니라 근본 문제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달라지는 부분이기에 구태의연하게 찾아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손이 가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멘토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도 딱히 없다. 이런 내 모습을 반추하면 나는 참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성인의 가르침도 읽으면 그때만 좋은 말이네, 정도이지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감동은 잘 몰랐다. 아마도 인위적으로 포장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였을 거다. 중요한 건 내가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 진정성이 결여됐다고 판단되는 건 오래 기억되기 어렵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는 상당히 괜찮은 개선책을 선보였다. 저자 우간린도 말했다시피 스토리텔링의 힘이 그것이다. 오랜 시간 사랑받고 전해 내려오는 성인의 가르침은 딱딱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완벽히 파괴한다. 파괴함으로써 소설처럼 쉽게 읽히며 사유하게 하는 역동성을 발휘한다. 어떤 가르침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로써 제공하고 나는 그것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쉽게 받아들이면 그만큼 생각할 거리와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된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기분 상태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차이가 달라지니까 말이다. 특히 안 좋은 일만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 같을 때, 한 권의 책이 구심점 역할이자 지주 역할을 할 때가 분명 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지금 내가 당장 달라졌다고, 달라진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반성하게 되고 수용하고 싶다는 생각, 그래야겠다는 다짐 정도는 하게 된다. 이것이 한 권의 책이 가진 힘이자 이 책의 힘이 아닐까 한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하면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내 삶을 살 수 있는가이다. 나를 낮추고 타자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한다. 마찬가지로 내 삶 바깥에 있는 타자와의 관계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행동으로써 먼저 모범을 보인다면 그게 만족을 얻는 방안 아닐까 하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안다. 끝없는 자기 성찰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뭐든지 진심을 내세우고 노력이 뒤따른다면 그 자체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책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버림과 비움에 있었다. 후회가 따르고 욕심이 큰 것은 이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한 데 있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높은 목표를 세우고 이상적인 삶을 욕심 내는 건 우매한 짓이다. 그게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의 지혜가 아닐까. 다양한 인생 지침이자 지혜를 담은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도 그것일 테고 말이다.

 

 

 

공부의 최종 목적은 지식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지혜를 키우는 데 있다.-91쪽

 

 

w*****8 2014.12.07. 신고 공감 9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스스로 빛나는 삶을 사는 길
"스스로 빛나는 삶을 사는 길" 내용보기
잠이 깼다. 방안은 아직도 어둠의 진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별 일이다. 베개에 머리가 닿음과 동시에 잠이 들고, 웬만해선 아침까지 깨지 않는 터라 의외이다. 하지만 정신은 맑다. 천정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이 잠시 지나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방안의 낯익은 사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맑아진 정신사이로 한 여름날 소나기처럼 수많은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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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 깼다. 방안은 아직도 어둠의 진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별 일이다. 베개에 머리가 닿음과 동시에 잠이 들고, 웬만해선 아침까지 깨지 않는 터라 의외이다. 하지만 정신은 맑다. 천정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이 잠시 지나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방안의 낯익은 사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맑아진 정신사이로 한 여름날 소나기처럼 수많은 상념들이 쏟아져 내린다. 생각에 겨워 몸을 뒤척인다. 잠들기 전에 읽었던 책의 영향인지 상념은 세월의 바다를 건너 젊은 날을 향한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다.

 

 

 

  20대에 바라본 지금의 내 나이는 아득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나이에서 돌아보는 20대는 어제인 듯 생생하다. 미래(未來)는 말 그대로 미지수(未知數)이기에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지나온 시간은 추억이라는 그리움이 존재하기에 이렇듯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 지나간 시간은 애틋함과 더불어 후회와 아쉬움을 가져다준다.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살았다. 남자로 태어나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애를 낳는 일 뿐이라는 끝도 없는 자신감과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더라도 그 움직임에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하는 원칙주의자였다. 하지만 때로는 무엇인가가 되고 싶고 갖고 싶어 그것을 향하게 되고 그러다가 스스로의 원칙을 배반하는 선택을 할 때도 있었다. 지향하는 바를 위해 많은 포기를 하기도 했지만 지향하는 대로 살기에는 세상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 때도 기쁨은 잠시였고 곧이어 찾아온 삶에 대한 회의와 깊은 고독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지향하는 바가 곧 내가 가는 길이지만 때로는 그 길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을 향하기도 했다. 세상적인 욕심과 성취에의 욕망이 정당함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정당하지 않을 것을 정당한 것으로 변질시켰다. 살면서 후회를 안 만들고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나고 보니 후호의 기억이 더 많이 남는다. 최선이라고 했던 것이 최선이 아니었던 경우도 많았다. 가진 지식의 한계와 지혜가 아닌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세상적인 기준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는 범인의 눈에 비친 올바름이 과연 올바름 이였을까 

 

때로는 스스로 부여한 정당성을 기반으로 한 선택과 판단도 정당하지 않았다. 공부는 늘지 않으면서 고집은 세다고 공자에게 자주 나무람을 당하던 제자 증삼과 같았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후회가 많이 남는다. 나름의 지식을 기반으로 최선의 판단을 하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의 결과는 기대를 벗어나거나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의 삶을 바꿔놓곤 했다. 마치 이 책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 증삼이 효도라는 명분으로 아버지가 몽둥이로 때리는 매를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온 몸으로 받아내다가 공자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또한 공자의 제자 중 공자와 오랜 세월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한 자공은 자신의 돈을 들여 주위 나라에 노비로 팔려간 백성을 구해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국가에서 주는 상금도, 돌아온 사람들이 주는 사례도 받지 않은 일로 공자로부터 문밖으로 내침을 당한다. 이런 모든 일들이 그들의 판단으로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행했지만, 공자가 생각할 때는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제자들도 이들의 행동에 옳다고 했지만 공자만은 그러지 않았다. 증삼은 만약에 아버지가 몽둥이로 때리는 매를 맞다가 몸이 상하거나 생명을 잃게 되면 아버지를 범죄자로 만드는 행위이니 비록 자신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매를 들었을지언정 일단 도망가는 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효라고 가르친다. 자공의 일은 국가가 노나라의 백성을 구해오면 상금을 주겠다는 원칙을 배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선한 행동을 방해하고, 나라의 기강과 원칙을 허물었으므로 잘못했다는 가르침을 준다. 증삼과 자공은 옳다고 판단해서 한 행동이 결과론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고 그 결과는 후회로 남는다. 젊은 시절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던 선택들이 지금 돌아보니 후회가 남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공자는 그의 말씀을 통해 이렇듯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문제에 올바로 대처하는 지혜를 알려준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들을 일깨워준다.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과 주위 여건을 고려한 공자의 판단은 우리가 현명한 인생을 살 수 있는 혜안을 뜨게 해준다.

 

 

 

  공자의 말씀을 처음 접한 것은 까까머리 학창시절이다. 그 시절 학교 시간표에는 일주일에 두 번 한문시간이 있었다. 머리가 넓으신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선생님이 싸리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를 들고 한문을 가르치셨다. 처음 접한 구절이 논어 학이(學而)편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였다. 여기에 운을 더해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라고 읽어 주시고 각 글자의 음과 뜻과 더불어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알려주셨다. 한문선생님은 이 문장이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 새로운 것을 아는게 참 기쁨이다라는 의미라고 하시며 여러분도 성인의 말씀에 기대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우리는 이 지겨운 공부를 왜 즐겁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시절이야 누구나 그랬겠지만. 공자가 언제 이런 말씀을 하셨고,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상황설명이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구절을 풀어주고 암송하게만 하셨다. 지금에야 그동안 논어를 여러 번 읽어보고 다른 역서(譯書)들도 접한 얕은 지식에 의해 학이(學而) 편의 이 구절은 공자께서 나이가 한참 되신 뒤에 하신 말씀임을 알게 됐다. 마치 지금의 내가 길거리를 자신들 만의 언어를 구사하며 시끄럽게 지나가는 교복차림의 학생들을 보며 저렇게 공부할 때가 제일 행복했는데하며 그들이 가진 젊음의 풋풋함과 공부만 할 수 있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나이가 되니 공부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알게 된다. 물론 교복차림의 그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나처럼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인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찾아왔을 때,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기쁘고 즐거운 것도 이제는 깨달은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의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의 역자(譯者)들은 자구의 해석에만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공자의 말씀이 쉽게 와 닿지가 않았다. 그저 곰팡내 나고 고리타분하지만 옛 성현의 말씀이니 의문을 갖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마치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과학적 지식에 맞지 않는 성경구절에 의문을 가지면 돌아오는 대답은 믿음이 약해서였다. 어떤 논리적인 해석도 없이 나중에 믿음이 강해지면 의문이 사라질거니 무조건 믿으라는 거였다. 그처럼 공자의 말씀도 그 말씀에 대한 심도있는 해석이나 설명이 없이 그저 옛 성현의 말씀이니 그 말씀에 의의를 갖지 말고 그냥 따르라는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그러니 그저 답답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는 공자의 말씀에 대한 역자의 해석이나 자구 풀이에 그치는 책은 아니다. 공자와 가장 오랜 시간을 지냈고, 공자의 사후 시묘 살이 3년을 지내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묘 옆에서 3년을 더 지킨 자공의 눈에 비친 공자이다. 공자의 말씀이 어떤 여건에서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비롯되었는지 들려준다. 앞뒤의 정황과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던 근간이 되었던 사건중심의 이야기는 공자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단순히 자구의 해석이 아닌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공자는 같은 질문에도 제자에 따라서, 여건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하셨다. 그것이 공자의 교육법이다. 그러니 공자께서 말씀을 전달해주시는 여건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지 않고는 공자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힘들다. 후세에 와서 신격화되고 성인화 되어 그저 우러름의 대상이 되는 공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에 전해지는 공자의 말씀은 삶에 있어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를 안내하는 멘토이다.

 

  공자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성인의 틀을 벗어던지고 맨얼굴로 마주하는 공자는 우리네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이상을 펴기 위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자 했으나 선뜻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55세에야 본인의 조국인 노나라에서 대사구를 지내며 개인의 기재(奇才)를 마음껏 펼칠 기회를 갖기도 했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그를 시기하는 많은 이들이 그의 성취를 용납하지 않았다. 다시 조국을 떠나 십 수 년을 타국에서 방황하며 상갓집 개 취급을 받기도 했다. 수많은 시련이 그와 제자들과 함께했다. 방황을 끝내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68세의 연로한 몸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심, 백성을 향한 불타는 애정도 그제서야 모두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저 현세에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이상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나마 전해지기를 바랐다. 육경이라고 불리는 . . , , , 춘추등 유가의 경전이 완성된 것도 이때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공자와 같은 세대를 살지 않지만 공자와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 그의 사상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최고 경지의 용감함은 성인의 용감함이니라. 바로 자신이 곤궁하게 된 것이 운명임을 알고, 뜻한 대로 되려면 때를 만나야 함을 알고, 큰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135)

 

공자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우리가 지금 겪는 어려움과 동일했다. 단지 모습만 달리했을 뿐이다.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에게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공자의 말씀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우리를 현명한 길로 인도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어떠한 선택을 해야 되는지를 알려준다. 그의 삶이 평탄하지 않듯이 역사 속에서 그에 대한 평가도 순탄하지 않았다. 살아서도 고단한 인생이었던 그의 삶은 죽어서의 평가도 일괄되지 못했다. 공자 사후 공자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 한 무제와 동중서에 의해 한제국의 통치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진다. 국가의 통지이념으로 받아들여졌던 공자의 사상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다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21세기 경제대국인 중국의 문화 이이콘의 상징처럼 그 위상이 높아졌다. 언제나 스스로를 절제하며 자신의 소신을 단 한순간도 잃지 않고 군자의 길을 가기위해 애쓴 공자. 세상과 타협하여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소신을 버리지 않은 공자. 단 한순간도 배움의 손길을 멈추지 않은 공자. 그는 자신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이렇듯 꽃을 피울 줄 알았을까. 

 

 

  그저 세상적인 기준인 성공이라는 목표아래 정신없이 달려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공자의 말씀과 그의 생이 주는 가르침은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깊은 밤 상념 속에 헤매며 잠 못 들고 있는 나처럼 말이다. 20대의 젊은 시절 세상을 두려움 없이 살았던 그때, 지혜도 없이 그저 젊은 혈기와 용기로만 세상과 단판 짖고자 했던 그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그 시절 내가 좀 더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참된 지혜가 있었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이순간의 후회는 조금 더 줄지 않았을까. 조금이라도 지나온 시간의 여정 속에 후회의 순간을 줄이는 것. 그것으로 가슴 아파 하지 않는 것. 내안의 참된 지혜를 근간으로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그 또한 원하는 삶은 사는 것은 아닐까. 후회를 줄인다는 것은 그만큼 온전히 삶을 산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공자는 후세에 자신의 이름이 이렇듯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리라 생각했을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적인 기준인 성공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이 과연 잘사는 삶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역사에 이름을 떨친다고 그 또한 원하는 삶은 아닐 것이다. 그저 스스로를 제어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자신을 이기는 것. 스스로를 밝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내가 살다간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 다음 일 것이다. 주어진 한세상, 보다 지혜로운 판단으로 겸손히 세상과 마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매순간 고민하며 사는 것, 자신의 이상을 행동으로 실천해가며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사는 최고의 방법은 아닐까. 그것이 공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길은 아닐까.

 

자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없는 까닭을 근심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자신을 알 수 있게 힘써야 한다. 군자란 자신의 능력이 없음을 걱정해야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해서는 안 된다. (269)

 

  우린 흔히 공자를 떠올리면 인()을 떠올리고, ()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만나본 공자는 바로 겸손(謙遜)이었다.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알고 겸허해지는 것. 세상의 권위에 굴복하거나 아첨하지 않고, 힘없는 자들과 무지한 이들 앞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 누구를 만나던 그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고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인()이다.

 

덕행과 관용을 베풀고 겸손함을 지키는 사람은 영예로울 것이고, 넓은 토지를 갖고도 검소한 사람은 편안할 것이며, 자리를 맡아 일을 하면서도 녹봉을 소중히 여기고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이고, 강한 병사를 거느리고도 두려움으로 이를 지키는 사람은 승리할 것이며, 총명한 지혜가 있으면서도 묵묵히 이를 지키는 사람은 현명해질 것이며, 많은 것을 듣고 알면서도 스스로 얕은 자세를 지키는 사람은 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여섯 가지가 바로 겸손의 덕이니라. (288)

 

  여러 번 공자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깨달음도 다르다. 이전에 내가 알던 공자는 쉼 없는 배움과 기다림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나본 공자는 바로 겸손(謙遜)이다. 공자를 만날 때마다 내가 본 공자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짐을 의미한다. 그만큼 나는 알아가고, 깨달아가고 성장하는 것이리라. 언제나 배움이 늦어 공자에게 수시로 질책을 받던 증삼이 끊임없는 공부로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大學)을 저술하여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 올곧이 전한 것처럼, 공자를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나의 시선은 공자와의 만남을 통해 삶이 바뀐 제자들처럼 내 삶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세상을 보는 내 시선이 바뀌면 그만큼 삶을 살아가면서 내게 닥쳐올 문제들에 대해 조금은 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는 나의 삶의 여정에 오점과도 같은 후회의 순간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삶, 후회의 순간을 줄이는 삶이 참된 삶은 아닐까. 죽는 순간까지 수시로 점검하고 또 점검하며 자기성찰을 꾀하며 스스로 빛나는 삶을 사는 길 말이다.

 

선비는 그 뜻이 크고 굳세야만 하나니,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어짊을 자신의 맡은 바로 삼아야 하나니, 어찌 무겁지 않으랴? 죽은 뒤라야 끝이 날 테니 또한 멀지 않으랴?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后己, 不亦遠乎? (大學)

 

  내일이 되면 오늘 내가 아는 공자와 또 다른 모습의 공자가 내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말씀과 사상이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우리 곁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새벽녘 청아한 기운에 힘을 받아 따뜻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과 마주한다. 책을 열고 다시금 공자의 말씀과 만난다.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공자는 그의 삶의 여정을 빌어 어떻게 사는 것이 원하는 삶을 사는 방법인지를 보여준다. 오늘은 이 문장이 그에 대한 답이다. 물론 내일이 되면 그 답 또한 달라지겠지만.

 

물은 사사로움이 없이 방방곡곡에 흐르니 이를 마치 군자의 덕()과 같다. 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기가 돋아나니 이는 군자의 인()과 같다. 또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대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니 이는 군자의 의()와 같다. 물은 앞은 곳에서는 굽이굽이 흐르지만 깊은 곳에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마치 군자의 지()와 같다. 물은 수많은 계곡을 흐르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니 이는 군자의 용()과 같다. 물은 면면히 부드럽게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가니 이는 군자가 세세히 살피는 것과 같다. 나쁜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니 이는 군자의 포용과 같다. 더러운 것들도 다 받아들여서 이를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바꾸니 이는 군자의 선()과 같다. 천 굽이를 돌다가도 결국 동쪽으로 흘러가니 이는 군자의 지()와 같다. (355)

 

 

 

h*****o 2014.12.05. 신고 공감 8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내가 만난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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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명심보감'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뜻하는 바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당시 어머니는 하숙을 쳐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계셨고, 하숙생 중에는 몇 달 밀린 하숙비를 떼어 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그 사람들은 으레 필요도 없는 옷가지며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를 마치 꼭 다시 오겠다는 맹세의 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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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명심보감'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뜻하는 바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당시 어머니는 하숙을 쳐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계셨고, 하숙생 중에는 몇 달 밀린 하숙비를 떼어 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그 사람들은 으레 필요도 없는 옷가지며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를 마치 꼭 다시 오겠다는 맹세의 일환인 양 손도 대지 않은 채 떠나가곤 하였다.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 것을 굳게 믿었던 까닭인지 아니면 물건에서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는지 어머니는 언제나 그 물건이 놓였던 자리를 한동안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셨다.  약간의 미련이 묻은 그 옷 보따리를 말이다.

 

그해에도 그렇게 떠난 사람이 있었고, 나는 그 옷 보따리 속에서 모서리가 너덜너덜 닳아빠진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명심보감'이었다.  기껏해야 '아들 자, 계집 녀'를 지나 '배울 학, 학교 교'의 수준에 이르렀던 나의 한자 실력으로는 눈에 익은 글자를 찾아내는 데만도 가뭄에 콩나듯 하였다.  버릴까? 하다가 왜 갑자기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불현듯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전에 없던 호승심이 치솟았던 것이다.  '이번 겨울 방학에 이 책이나 외워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 앞에서 어려운 말을 줄줄 읊어대는 내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가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인연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명심보감' 외우기는 그해 겨울의 엄혹한 추위처럼 맵고도 쓴 것이었다.  자치기를 하자는 친구의 유혹도, 외발 스케이트를 타는 스릴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나는 집 밖 출입을 삼가한 채 명심보감과 한자 사전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했다.  명심보감 초략본 19편 247조 중 계선편 11조를 간신히 외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지식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자왈, 위선자 천보지이복'으로 시작되는 명심보감의 문구를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되는 걸걸한 목소리로 읊을라치면 친구들은 마치 공자의 현신을 뵙는 듯 존경과 경외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곤 하였다.  개중에는 그게 무슨 뜻이냐며 한수 배움을 청하는 친구도 가끔 있었다.  나는 그럴 때면 '네깟 것들이 설명을 해준들 이해나 할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뒷짐을 진채 한껏 점잔을 빼곤 하였다.  나와 공자의 첫 만남은 그렇게 특별했었다.

 

내가 공자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 신입생이었던 어느 봄날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였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나에게 후광이 비치는 듯 밝게 빛났던 '논어'.  나는 익숙한 스승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웠었다.  그때 나는 '그래, 대학생이라면 적어도 '논어'는 읽어줘야지.'하는 심정으로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미련없이 꺼냈던 것이다.  스승님을 다시 뵙는데 그깟 돈이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논어'의 한 구절 한 구절의 깊이는 '명심보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내내 잘 읽지도 않는 논어를 마치 부적처럼 가방에 고이 모시고 다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만 주야장천 읊어대면서.  그랬던 내가 최근에 공자를 다시 만난 것은 우간린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통해서였다.  나에게는 이제 유식한 문구를 읊어댄다고 해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봐 줄 만한 친구도 없고, 그때의 치기는 더더욱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단순한 한자의 뜻풀이가 아닌 이야기와 에피소드의 방식으로 쓰였으므로 마음을 담아 조용히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공자의 가르침은 고지식하다거나 구태의연하다고 말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가장 보편적인 지혜는 쉽게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오한 진리를 쉽게 설명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이제 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의 의미를 간신히 깨우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아는 공자는 자신의 지난했던 삶의 체험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무엇보다 가장 쉬운 말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깊은 의미를 새록새록 깨닫게 되지만, 가슴 한편에서는 '아, 진즉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초석이다.  단언컨대 공자의 가르침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달의 사락 s*****l 2014.12.02. 신고 공감 7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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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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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인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많은 연구와 발표들이 이뤄지고 있다. 그중 공자의 [논어] 사상이 한축을 담당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부쩍 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동양 고전중에 꼭 한자리를 차지하는 공자의 사상을 담은 [논어]는 그럼 과연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는가? 매 출간되는 책은 공자의 책 논어의 글을 해석하고 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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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인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많은 연구와 발표들이 이뤄지고 있다. 그중 공자의 [논어] 사상이 한축을 담당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부쩍 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동양 고전중에 꼭 한자리를 차지하는 공자의 사상을 담은 [논어]는 그럼 과연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는가? 매 출간되는 책은 공자의 책 논어의 글을 해석하고 주를 다는 형식의 책이 주였다. 하지만 이번 우간린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는 논어의 얘기가 주가 아니라, 공자의 삶을 기본 바탕으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새로운 시도의 책이다. 그래서 더욱더 의미가 있고, 공자의 성인적인 부분보다 인간적인 부분에서도 그를 만날수 있게 해준다.

 

무려 2천년전의 사상이 아직도 여전히 21세기에 논의되고 연구가 되어지고 있다. 그의 생각과 사상이 2천년전의 고리타분한 박물관의 박제되어버린 낡고 고루한 죽은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타도의 대상이 되었는 사상이였지만, 이제는 중국 문화 아이콘의 상징이 되고 있다. 평생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했던 공자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여유롭고 한적하며 낭만적인 스승의 길만 걸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사실 그의 삶은 수많은 고난과 고통과 좌절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을 발전시키고 더욱더 자신을 엄격한 잣대로 바로 세우는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운명은 배신해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p.49

 

공자는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좋을까하며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로서도 어쩔도리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노력의 중요성을 아주 강조하셨다. 사실 그의 평생 삶이 노력이요 헌신을 한 삶이라고 보았을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아주 철저하게 지켜낸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으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리라. 나 또한 이 글귀에 채찍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낀것이 사실이다.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 경기탓만 하고 나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노력하고 노력하라는 의미로 가슴깊이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식은 쌓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p.200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책을 달달외는 암기대왕들이 천재로 대접받는 대한민국 교육현실. 고등학교까지는 세계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지만 결국 창의적인 부분에 뒤쳐져 거기까지로 대부분 끝나고 만다. 왜 그럴까? 지식을 배움에 있어 지혜가 바탕이 되지 않아, 실천하는 공부가 아니라 머리속의 공부가 되기 때문일것이다. 나역시 여기서 자유로울수가 없다. 책만 파고들면 학문적으로 성공하고 그외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실천하는 지식과 지혜가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곳이였다. 흔한 말로 헛공부, 헛똑똑이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는 좀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책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중인데 다시한번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평범한 것에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 세상이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풍경은 모두 같다. 다만 소극적인 사람은 그 어두운 부분만 부각해서 보게 될것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그 빛을 보게 될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깊은 가르침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선 나를 바로하고, 남에게 도움을 줄수있는 사람이 될수 있다면 2천년전 공자의 가르침을 아주 잘 이행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f*********2 2014.11.11.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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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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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하면, 논어하면 막연하게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다. 권장도서라서, 남들이 읽으니까 읽기도 했지만 그 뜻을 이해하며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뜻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글자를 읽었다고 보면 될까? 그런 내가 논어를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작년 이맘때. 이지성 작가의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읽고 아이들과 고전 읽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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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하면, 논어하면 막연하게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다. 권장도서라서, 남들이 읽으니까 읽기도 했지만 그 뜻을 이해하며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뜻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글자를 읽었다고 보면 될까? 그런 내가 논어를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작년 이맘때. 이지성 작가의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읽고 아이들과 고전 읽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터다. 아이들과 고전을 어떻게 읽을까 고민하다가 하루에 2페이지에서 3페이지를 나와 아이들이 소리 내어 읽고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문구를 노트에 적는 식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논어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이들이 한자를 알기 시작하면서 쉬운 것은 원문을 보고 해석하려 했고,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은 우리말로 되어 있는 것을 읽었다. 그렇게 읽어 나갈 무렵 나는 뭔가 부족한 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6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한 권을 다 읽은 기념으로 조촐하게 조각 케익 파티를 했다. 대단한 뭔가가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아니지만 논어의 구절들을 적은 노트는 우리들의 든든한 추억이 되었고 가끔 그 노트를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책은 내가 논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 뭔가를 알게 해 준 책이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상황 설명을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에 부합하는 책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이 정치나 문화, 교육 혹은 다양한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책인데 좋은 말이 나온 상황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제자들과의 이야기만 묶었기에 다소 생뚱 맞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논어를 읽을 때 부족하다 생각한 부분이 이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런 대화가 오고가게 된 배경. 만약 그 배경을 알게 된다면 그들이 한 말들이 더 마음에 와 닿지 않을까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한 듯 이 책은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자공의 시선으로 이야기 한다. 자공은 공자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공자가 죽고 삼년상을 치른 뒤 다시 3년을 공자 무덤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누구보다 공자의 마음을 잘 알았고, 공자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사람. 그래서 이 책은 화자가 자공이다. 200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자공이 된 작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 하듯 펼쳐 낸다.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공자의 제자가 된 듯하다. 공자가 앞에 서고 제자들은 그 뒤를 따르며 사물과 사람과 자연에 대해 이야기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때론 내가 자공이 되고 자로가 되고 안회가 되는 기회. 공자의 수업을 받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상황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은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진부한 느낌이 드는데 이 책은 그런 느낌의 진부함을 현대의 시선으로 매끄럽게 처리했다. 모두 10장으로 이뤄져 있고 상황에 맞게 주제를 나누고 그에 합당한 상황을 이야기로 이끌어 간다. 한 주제에 대해 공자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있기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난 뒤 공자의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 그런 방식으로 읽어가다 보면 어려울 게 별로 없다. 아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구나 싶어서 더 따스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모두 좋은 말들이고 좋은 글이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5장 난관과 좌절을 기꺼이 견디는 즐거움편에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배움의 거처다. 이 주제에 공자의 말씀은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이다. 자공과 공자가 야유회를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 공자가 갈 길은 가지 않고 매미를 잡고 있는 노인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이다. 자공은 그런 스승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지만 공자는 요지부동이다. 그러면서 매미를 잡고 있는 노인에게 그 방법을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리고 노인이 말한 방법에서 자공은 가슴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나는 늘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선생님처럼 훌륭한 스승에게 배워야 한다고만 여겼다. 보통 사람들은 나를 가르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그 노인처럼 평소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사람이 뜻밖에도 큰 깨달음을 선사했던 것이다.’ (192) 요즈음 나는 뭔가를 공부하는 것에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배우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서 배우겠다는 생각을 하질 못했다. 내 배움의 잘못된 점은 지식적인 부분만 생각했던 것 같다. 지식적인 부분의 배움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나 인성 부분은 책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비교 분석하며 좋은 점은 배우려고 하는 자세. 어느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에도 동감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고전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지금보다 잘 살겠다는 물질적인 욕심보다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람들과 잘 꾸려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나이쯤 되니 사람에 배신(?)당하고 사람에 상처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같이 살아야 하는 것 또한 주변의 사람들이다. 상처 입었다고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창고에 들어갈 게 아니라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 방법에 고전 읽기는 굉장한 도움이 된다.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도 인생에 좌절이 있었고 고통이 있었다. 사랑하는 제자를 앞서 보냈고, 아들도 먼저 죽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공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 건 아닐까? 나는 공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살 수도 없다. 그러나 공자처럼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고 헤쳐 나간다면 이 세상. 살만한 것은 아닐까 

 

너무 아웅다웅 살지 말라고,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조화를 이루며 살다보면 편안함이 올 것이라고...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k*****3 2014.12.02. 신고 공감 6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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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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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   인터넷 환경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온라인이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아 가면서 알게 모르게 생활 모든 면이 온라인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속도전을 자랑하며 터지는 속보들과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뉴스피드들을 이제는 충격도 없이 흘려보낼 정도로 무감해 지고 있다. 신문으로만 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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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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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환경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온라인이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아 가면서 알게 모르게 생활 모든 면이 온라인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속도전을 자랑하며 터지는 속보들과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뉴스피드들을 이제는 충격도 없이 흘려보낼 정도로 무감해 지고 있다. 신문으로만 들었던 뉴스를 이제는 핸드폰만 있으면 페이스북이나 밴드등 다양한 소셜 커뮤니티를 통해서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너무도 익숙해진 광경들, 아침 출근시에 스마트폰은 안경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페이스북을 수년째 이용하고 있지만 이따금씩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찜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들어 친구가 급증하면서 더 자주 그런 느낌이 든다. 벤덤과 푸코가 말하였듯이 나는  '페이스북'이라는 '파놉피콘'(감옥) 에 갇혀 생이라는 과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감옥의 진일보한 개념으로 우리 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명명한 바 있다. 과거 푸코의 감옥(판옵티콘)은 한 개인에 의한 일방적인 감시개념이었다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현시대의 '디지털 판옵티콘'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공론장에 나와 노출증과 관음증을 동시상영하는 개념으로, 모두가 감시자인 동시에 피감시자가 되는 사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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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교도소 건립 문제로 시끄럽다. 6.4 지방선거에서 교도소는 최고의 이슈였는데 선거 이후 학부모들이 다시 문제제기를 하면서 교도소는 뜨거운 감자로 재급부상했다. 유권자 신분으로 선거당시에는 침묵하고 있던 학부모들이 난데없이 아이들의 학습권 침해와 청정 교육도시 이미지를 훼손시킨다는 명분을 들고 일어서기 시작한 운동은 일파만파로 세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지상파 뉴스와 CTV 뉴스에서도 대서특필 되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님비현상이라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도소 반대파는 더욱 대담하게 '초등생 등교거부'라는 집단행동까지 불사해 가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병철 교수가 디지털 파놉티콘시대라고 말했을 때만 하더라도 소셜 커뮤니티를 단순한 개념을 생각했었다. 문제는 이렇게 불거지게 된 '교도소 반대'가 밴드와 카톡, 페이스북으로 확산되면서 일어난 현상들이었다.  SNS는 순식간에 반대 강경파에 장악 되어 갔고 조금이라도 교도소 건립을 찬성하거나 옹호하는 발언이 나오면 순식간에 적으로 간주하며 집단 공격을 퍼부어 댔다. 인신공격은 차치하고 찬성하는 이가 자영업자일 경우에는 불매운동을 벌이며 찬성은 절대악, 반대는 절대선이라는 편가르기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초등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교도소 반대 피켓을 들게 하며 이 추운 날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강요하고는 자랑스럽게 아이의 사진을 밴드에 올려 놓기도 한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학부모로서 교도소 반대를 외치는 학부모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점 도가 지나치는 반대 학부모들의 집단행동에 슬슬 거부감이 들었다. 재정 자립도가 낮은 편이고 지방 소규모 도시로서 교도소라는 (정확히는 법조타운이지만) 국가 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한다면서 자신들의 자식을 1인시위에 내보내는 학부모들의 행동이 내게는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졌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교도소 앞 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교도소를 혐오시설이라 기피하며 비난과 욕설을 일삼는 일부 학부모들의 행위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오랫동안 SNS를 별 부담없이 활용해왔던 터라 교도소 찬반 양론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할 때 밴드나 페이스북에서 공공연히 교도소 건립을 찬성하는 발언을 해 왔었다. 교도소 반대를 하는 학부모들에게 표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는 반대파들의 이분법 논리에 영락없이 늑대우리의 생닭신세가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상털기까지 당해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디지털 파높티콘'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경험해 보았다. 소셜 네트워크(밴드,페이스북,카톡)가 일방적인 소통에 불과할 뿐 아니라 가입과 동시에 모두 감시자이자 피감시자가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민주주의의 존립의 기본 전제인 표현의 자유는 '감시'라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의해 저절로 자기검열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현재도 여전히 교도소 찬반 논란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사이버 상의 막말과 비난으로 수십건의 고소고발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중이다. 결국 군민화합을 위한 지역의 대표 밴드는 고소고발의 원천지가 되어 전과자를 양성하는 사이버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를 통치하고 조직을 관리하며 인간관계를 잘 맺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모두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다.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선생님의 지혜야말로 최선의 답이다. -p75

   

"너희 생각에는 내 머릿속에 온통 정치와 도덕만 들어 있는 것 같으냐? 아니면 정치와 도덕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너희에게 정치와 도덕, 예의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너희가 자신의 삶과 인생에도 관심을 두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너희가 자신의 삶을 더욱 서정적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p216 

 

 

 

 바야흐로 21세기 '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 여전히 공자의 사상은 유효할까? 고전적인 것들은 모두 지루하고 상투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시대에 여전히 공자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의 열풍이 식지 않고 출간 될 때마다 나를 궁금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2500여년이 흐른 지금도 공자의 사상이 유효한 이유... 그것이 가장 궁금했었다. 먼저 이 책은 기존의 고전 공자의 책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가 경제학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더 특별한 것은 기존 공자의 저작들 <논어>,<공자가어>,<사기>,<공자집어>등에서 공자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가필한 스토리텔링 형식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논어 원문을 해석하는 형식이 아니라 삶과 밀접한 문제들을 그렸기에 조금 더 현실적인 공자를 만날 수 있었다.

 

 사회가 점점 복잡다단해지면서 도덕적인 가치들이 흔들릴 때가 있다. 아무리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다해도 때때로 부딪히는 삶의 문제들은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는 가치혼란을 겪곤 한다. 이번에도 나는 또 한번의 가치관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나는 성경책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행위와 같이 목적이 아무리 좋다하여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는 옳지 않다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아무리 가치관이 변한다해도 보편적인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학습권을 지키기 위해 초등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채 시위를 가르치는 부모의 편을 들고 싶진 않다. 공자는 '정치와 도덕과 예의 ' 이전에 자신의 삶과 인생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자신이라는 중심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원하는 삶을 사는 최고의 가치이며 공자가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삶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최선의 삶의 정의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삶의 매 순간을 축제처럼 여기며 살 수 있다. 이것이 공자의 행복론이며, 고전이 지닌 가장 보편적인 가치의 힘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삶의 기쁨이 숨어 있는 법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선행은 악덕이 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2 2014.12.05. 신고 공감 5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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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가르침은 제자와의 대화 속에 숨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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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평안함이 있을 것이지만 약간의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할 것입니다. 나이가 적은 아랫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일이 걱정거리가 되겠지만 어렵지 않게 잘 해결되고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건강이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2014년 벽두에 본 토정비결 중 가정·건강 관련 운세가 내용대로 맞아 떨어져 자식 건강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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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으로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평안함이 있을 것이지만 약간의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할 것입니다. 나이가 적은 아랫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일이 걱정거리가 되겠지만 어렵지 않게 잘 해결되고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건강이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2014년 벽두에 본 토정비결 중 가정·건강 관련 운세가 내용대로 맞아 떨어져 자식 건강 때문에 병원 출입이 잦았다. 예상치 못한 부분이 터져 망연자실화여 병원 신세를 질 때도 있었지만 이 또한 헤쳐 나갈 수 있으니 내게로 오는 것이라 여기고 마음을 붙들어 긍정의 에너지를 모으며 지냈다. 나이 50이 되면 얽히고설킨 관계망을 정리하여 인생 후반부를 함께 하고 싶은 이들과 소통하며 정서적으로 안정감 있는 인생을 보내고 싶었다. 질병의 공포에 휘둘리는 자식의 안위를 염려하면서 아들의 건강 회복을 위해 그동안 세워두었던 계획을 2~3년 유예하며 인생은 정해진 방향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풍상이 몰아칠수록 어려움을 감내하는 송백(松柏)처럼 흔들림 없는 기개로 살아야하는 일상에 소소한 의미를 발견하며 지내고 싶다.

   예기치 않은 일로 미궁 속에 빠져 일상의 리듬을 찾기 힘들 때면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헤맬 때가 있다. 살아온 햇수가 늘수록 원하는 대로 안 되는 일들이 산재해 일상의 리듬이 깨질 때, 운명은 배신해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지금 이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는 일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새벽에 일어나 108 참회문에 맞춰 머리를 조아리고 번뇌를 씻어 내림으로써 정신을 모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불길한 운명에 맞닥뜨릴 때면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푸념하며 화를 내기보다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야 한다. 고루한 생각에 사로잡혀 경직되어 지내기보다는 물상의 변화에 감응하는 감수성으로 무뎌진 마음을 일깨우는 일 또한 원하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계제로 작용할 것이다.

 

   삶의 가치를 실현하며 자존감을 키워가는 일에 지식을 어떻게 배우고 운용할 것인지는 인생의 숙제로 남는다. 정해진 궤도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생길, 크고 작은 일에 직면할 때면 남다른 혜안으로 감정적인 대응을 줄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권력과 법률로 사람을 징벌하는 패도(覇道)를 넘어 스스로 고치고 바꿀 수 있도록 유도하는 왕도를 생활 속에 구현해야 한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기술을 모두 갖춘 채 시의 적절히 부드러움과 강함을 이상적으로 발휘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관계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남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모욕적인 언행을 견딤으로써 자신을 무장하고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큰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우둔하여 미혹된 삶을 돌아보게 한다.

  스물 세 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규범을 내세워 규칙을 준수해달라고 당부하지만 관성대로 살아온 습성이 몸에 밴 그들은 담임의 말을 눙치고 만다. 노기를 띠고 당위성을 드러낼 때면 강압적인 틀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친다.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힘들다고 여기며 좌절할 때 공자는 제자의 밝은 면을 드러내 그 점을 칭찬하고 인정하여 자신감을 북돋워 주고 잠재력을 끌어내 제자들의 성장을 도왔다. 분야가 다른 지식을 통합해 꿰뚫어 알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은 앎의 영역을 확장해 탐구의 다양한 방법을 찾아갈 때 어디에서든 배움에 귀착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주입하는 획일적인 수업에서 탈피해 공자는 상황에 맞추어 원리를 터득할 수 있는 대화로 무언가를 배워 경험의 횟수를 늘려갔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함께하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며 영혼의 울림을 따라 외양에 치우친 공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른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걷어내고 생기 있게 움직이는 하루를 열 수 있는 일이 고마워진다.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내는 일은 쉽게 기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시삼백>> 첫수인 물수리새를 제자들에게 읊어주고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젖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느낌을 표현할 때 학문 수양과는 또 다른 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 시를 낭송하고 공부를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활기 있는 분위기로 단조로운 생활에 변화를 시도하는 동기 부여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공자는 아끼는 제자 자로의 참혹한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때를 제대로 알아 비극을 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바라며 <<역경>>을 통독하기를 당부하였다.

    스승에게 옷을 선물하고 싶은 제자가 고급스러운 비단을 비쳤을 때 우연히 만난 이에게 옷감을 선물하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숱한 인연 중 가볍게 여길 인연은 없음을 분명히 한 예다. 70명이 넘는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수학하는 동안 쌓인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공자의 죽음으로 표면적으로는 끝이 났지만 스승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은 죽음이 초래하는 비통함에 젖어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일깨울 수 있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덕()과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의()로 제자들의 성찰과 수양을 도왔던 스승의 인품을 흠모하는 후학들은 유혹이 많은 세상을 만났어도 동요되지 않은 근간을 바로잡아 그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자신을 닦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 ’

   일상에 부딪히다 보면 그 당시의 감정이나 정서에 따라 상황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양상이 달라진다. 돌려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일에 노기를 띠고 말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의 근육이 약해진 자신을 질책할 때가 있다. 한마디를 하면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따라주길 바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내는 일부터 시작할 일이다. 유한한 삶의 종착지인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현재, 매순간 자신을 밝히고 주변을 밝힐 수 있는 사람으로 후세를 밝힐 수 있는 인생을 위해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며 궤도를 수정하여 나은 길을 찾아가다 보면 어느 새 자신이 원하는 삶에 이를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긴다.

 

n*****9 2014.11.24. 신고 공감 5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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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孔生), 이토록 거짓이 없는 신의 한 수
"공생(孔生), 이토록 거짓이 없는 신의 한 수" 내용보기
전쟁터 같은 세상살이가 힘들어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해버리는 ‘오포세대’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상을 아이러니하게도 ‘미생’이 제대로 파고들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미생(未生)은 바둑용어로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바둑판에서 한 수 한 수 두는 것이나 현실판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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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같은 세상살이가 힘들어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해버리는 ‘오포세대’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상을 아이러니하게도 ‘미생’이 제대로 파고들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미생(未生)은 바둑용어로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바둑판에서 한 수 한 수 두는 것이나 현실판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생은 완전히 죽은 돌을 뜻하는 사석(死石)이 아니다. 오히려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완생(完生)’이 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할까. 바꿔 말하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생이라는 좁은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완생이라는 큰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비록 실착(失着)을 두었다고 해도 말이다.

 

 

 

 

우간린의『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읽고 과연 ‘신의 한 수’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신의 한 수가 되려면 완생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살아 있는 지혜’가 되어야만 가능하지 싶다. 더구나 신의 한 수를 두는 사람이 2천 년 전 살았던 공자(孔子)가 아닌가? 하수(下手)입장에서는 고수(高手)로부터 한 수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옛날의 방식을 오늘날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 는 없을 것이며, 우리 삶에 명쾌한 해답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의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스토리텔링으로 공자의 지혜는 물론 변화무쌍한 삶의 흔적 까지도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크게 두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는 ‘나는 누구인가?(Who am I)’이며 두 번째는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What am I)’이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Who를 먼저 고민하고 What은 그 다음이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신경쓰다보니 What에만 쏠려 있다. 공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인(仁)을 버리고 이(利)를 취한 셈이다. 눈앞의 먹고사는 문제로 근심이 멈추지 않는데 한가롭게 노래를 부를 여유가 있다는 게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공자는 아무렇지 않게 편안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유인즉 원망과 근심이 어려움을 풀어줄 수 없기 때문에 즐겼던 것이다.

 

 

한편으로 공자는 ‘책을 읽더라도 책벌레는 되지 말라.’고 한다. 즉,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것이다. 단지 책벌레만 된다고 한다면 ‘죽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겠지만 결코 ‘살아 있는 지혜’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지혜는 ‘갑작스러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해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내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공자는 ‘가장 수준 높은 지혜’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공자가 말하는 공부의 네 가지 요점은 이렇다. 첫째, 넓게 공부하라. 둘째, 성실히 행하라. 셋째, 신중하게 생각하라. 넷째, 분명하게 판단하라는 것.

 

 

이렇듯 공자의 생각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굳이 사상이 아니라 생각이라고 말한 것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누구나 막막한 심정에 사로잡혀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처방전에서 위로를 얻는다. 자기계발이라는 인생 지침서가 많은 까닭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는 천편일률적인 지침은 한 순간 가슴에 머물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어쩌면 이 해답의 궁극적인 것은 ‘이렇게 저렇게 살았다.’는 인생을 간과한 탓인지 모른다. 언뜻 공자의 일상적인 풍경은 평범하고 오래됐다. 그러나 심산유곡의 난초처럼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여전히 높고 깊은 울림으로 맴돈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와 똑같은 수준의 인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책을 통해 공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것을 매우 공감하게 된다. 성인(成人)으로 불리는 공자가 신성한 존재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자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어진 사람이었다. ‘어진 사람은 사람을 아낀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공자의 두 가지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게 된다. 하나는 웃는 얼굴이며 다른 하나는 근심 어린 얼굴이다. 웃는 얼굴은 ‘어떠한 도전에 맞서더라도 삶에 대한 영원한 희망과 신념’이다. 반대로 근심 어린 얼굴은 ‘천하 만물을 위한 사명’이다. 다시 말해 공자의 인생관은 삶에 대한 깊은 자각이며 사랑이었다.

 

 

공자는 군자(君子)의 도를 펼치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 다녔지만 천형(天刑)이 아니라 천명(天命)으로 여겼다. 비록 행색이 초라할망정 겸손과 지혜의 삶을 펼치며 살았다. 그러면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또한 물(水)처럼 살수는 없는 것일까? 공자가 말한 물의 품성은 다음과 같다.

 

 

물은 사사로움이 없이 방방곡곡에 흐르니 이는 마치 군자의 덕(德)과 같다. 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기가 돋아나니 이는 군자의 인(仁)과 같다. 또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대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니 이는 군자의 의(義)와 같다. 물은 얕은 곳에서는 굽이굽이 흐르지만 깊은 곳에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마치 군자의 지(智)와 같다. 물은 수많은 계곡을 흐르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니 이는 군자의 용(勇)과 같다. 물은 면면히 부드럽게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가니 이는 군자가 세세히 살피는 것과 같다. 나쁜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니 이는 군자의 포용과 같다. 더러운 것들도 다 받아들여서 이를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바꾸니 이는 군자의 선(善)과 같다. 천 굽이를 돌다가도 결국 동쪽으로 흘러가니 이는 군자의 지(志)와 같다.(p 355)

 

 

 

 

 

 

 

지금 우리는 미생이다.『주역』에 따르면 미(未)는 시작도 아니며 끝도 아닌 변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생은 아직 살아있지 않아 우리는 완생을 위해 ‘신의 한 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 문화의 정수이자 5천년 무구한 역사를 지닌 바둑, 어쩌면 아직까지 바둑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45cm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흰 돌과 검은 돌의 행마는 수만 가지다. 이 책을 2천년 공자와 대국하는 심정으로 읽었다. 공자의 ‘신의 한 수’를 알게 된다면 우리가 조금은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새삼 공자의 삶이 불안한 시대를 견디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물(水)처럼 흐르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포근히 흡수해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불멸의 멘토, 공자의 삶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공생(孔生)! 이토록 거짓이 없는 신의 한 수가 어디에 있을까?

p******0 2014.12.07. 신고 공감 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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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작은 기준이 되어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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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그리고 공자 이렇게 우리가 4대 성인이라 배운 성현들은 제자들과 떼로 떠돌아 다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성현들의 말씀은 주로 제자들의 붓을 통해 이천년, 이천오백년동안 시간과 공간을 무한 확장하며 민족과 나라에서 대륙으로, 세기에서 다음 세기 또 그 다음 세기로 퍼지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직접 스스로가 신의 아들임을 밝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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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그리고 공자 이렇게 우리가 4대 성인이라 배운 성현들은 제자들과 떼로 떠돌아 다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성현들의 말씀은 주로 제자들의 붓을 통해 이천년, 이천오백년동안 시간과 공간을 무한 확장하며 민족과 나라에서 대륙으로, 세기에서 다음 세기 또 그 다음 세기로 퍼지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직접 스스로가 신의 아들임을 밝히고, 나를 따르라 내가 빛이요 하늘이요 진리다 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퍼뜨렸지만 순수하게 내면의 탐구를 위해 도시의 시장통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이사람 저사람 길을 막고 서서 산파술이라는 말고문 대화술로 삶의 진실을 깨우치도록 이끈 경우도 있다. 


 




 


공자는 기원전 500여년전의 인물로 역대 성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전 인물이지만, 짧은 내 지식으로 판단컨대 현대인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처세를 가장 실용적으로 접근한 인물이다. 우리 조선의 600년 통치의 정신적 대들보가 되어 온 유교와 유학이 지난 한세기 동안, 무차별적인 서구 문물의 공세에 묻혀,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형식만을 남긴 채 서서히 붕괴했다면 그 파괴란 우리 조상이 선택적으로 강요했던 유학의 형식 뿐일 것이다. 겉치례와 허례. 그것은 없어져도 좋다. 설령 거기에 전통이라는 이름이 딱지 처럼 붙어 있더라도 말이다. 거기에 무임승차한 숱한 제약과 독버섯처럼 자라고 퍼져 생활과 문화를 장악했던 지배층의 위선이 여성차별과 신분제 강화의 수단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던 파렴치한 역사의 면모를 우리는 보았다. 다시는, 절대로 유교적 전통이 어떤 부류의 인간에게는 그것 자체로 굴레와 속박일 뿐인 그 회환의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형식이 죽어간 그것은 이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어느 종교든 어느 학문이든 인류 문명을 전 과정을 통해 그 숱한 변화와 파괴와 학살과 혁명을 뚫고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것은 위대하다.  공자가 존중했던 삶의 형식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예의와 법도라는 낡은 생활 방식으로 한 나라 모든 인간의 생활 방식을 철저하게 구속하고 지배했지만  망국과 재건을 통해 들여온 서구의 합리적 방식의 삶이 정신까지 만족시킨 것은 아니다.  이 선택이 가져온 물질적 삶은 곤궁한 영혼이라는 부산물을 낳으면서 어쩌면 그 때 그 제약적인 생활보다도 더욱 피폐할 정신적 삶에 현대인은 나날이 지쳐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 이 틈새로, 2500년간 이어온  죽지 않은 메시지들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생활에 맞추어 찍은 듯 부활하고 있다.  왜?. 물질은 종교가 될 수 없지만 가르침과 깨달음은 비록 학문과의 경계가 모호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이 종교가 되는 법칙은 간단하다. 신뢰와 믿음의 댓가로 풍요로운 정신 활동을 가져다 주는 것, 그래서 따르고 믿어 진리가 되는 것. 그게 종교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번잡한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의 순간순간들을 만난다. 어쩌면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이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아무리 육체가 제한된 공간 제한된 사람들 속에 갇혀 있다고 해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의식적 무의식적 선택 앞에 직면하고 때로 두려워한다. 하물며 요즘 젊은이들은 결정장애의 한 형태인 햄릿증후군이라는 신조어적 질병을 만들어냈다. 성장 동력을 잃고 노쇠해진 탐욕스런 자본주의는 그러한 정신적 피폐 현상마저도 시장으로 보고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린다. 결정을 대신해주고, 헬리콥터처럼 그들을 떠나지 않는 엄마를 대신할 의존형 인간을 위한 서비스 산업 만들어내기까지하니 말이다. 우리는 이미 물질적 최전방의 삶, 내 정신적 문제까지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사회로 내몰려 있다.

 

만일 이 때 삶의 크고 작은  결정에 기준삼을 수 있는 정신적 대들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직면한 그 어떤 선택도 죄와 기도와 용서라는 번거로운 전략에 더 이상은 기댈 필요가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꿰뚫을 수 있다면 정신적 삶은 실용적 선택과 만난다. 학문과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믿음이 행동이 되지만 종교적 예식을 버릴 때 우리는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종교와 학문이 일치되는 접점이다. 인문학과 자기계발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삶의 무수한 선택 앞에서 선택의 기준을 심어주는 책, 공자님 말씀에서 허례는 빼고 처세와 실용적 선택을 이끌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를 본질로 삼고 예로써 행하고 겸손함으로써 말하고 신의로써 이룬다. 그래야 군자다. 논어 위령공(278쪽)

 

맞는 말이다.  겸손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겸손하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재주가 많고 덕이 많은데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겸손이다. 아무나 겸손해질 수 없다. 평범해 보이는 말 속에 설령 진리가 있다 한들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릴까.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진보하지만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찾는 사람은 퇴보한다. 이 얼마나 간단한 사실인가. 이 말을 체화시켜 내가 입을 열 때마다, 내가 행동을 할 때마다 자잘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면 조금씩 나는 더 진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자공의 뛰어난 언변과 학식이 선생과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지만 결국 그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다.  그 이유는, 출중한만큼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지적하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점은 동시에 가장 큰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뛰어난 언변이 무기라면, 겸손하지 않는 한, 그 날카로운 언변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임을 인식할 때 그의 사회 생활은 장기적으로 신뢰와 존중 속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책을 읽으며 서양의 토론식 수업인 하크네스 테이블이 연상되었다. 공자는 말씀하신다. "배웠으되 생각하지 않으면 허황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선에 빠진다... 문제를 보고 근본을 생각하면 작은면을 보고도 전체를 꿰뚫을 수 있고 현상을 보고도 본질을 알아볼 수 있다(87쪽)"라고. 그러나 혼자서는 부단히 노력한다 해도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생각에 미치는 데 한계가 있다. 공자는 A=B이다 라고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질문하고 대답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그 대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질문하고. 중간 중간 부연 설명만 할뿐.  제자들의 깨달음은 토론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마음의 양식도 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처세에 도움이 된다.


이 책이 공자의 애제자였던 자공의 관점에서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라 어느 정도의 허구도 가미되었겠지만 공자는 다른 성현들과는 달리 노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 권력의 실세들과 교류하며 통치 철학을 결정하고 조언하였다. 권력자들의 경계와 권력싸움에 자주 밀려나 오나라 제나라 등을 떠돌며 거친 광야의 국경선에서 초조한 기다림을 견뎌야 했던 시련도 있었고, 기용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때로 자괴감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는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삶 속에서 배우고 가르치던 현실 속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성과 도덕과 통찰력이 타고났으므로 그에게는 항상 어디를 가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비록 그가 뜻을 품었던 현실 정치에서 배제되고 고립된 삶속에서 방황하는 날들이 있었지만, 그의 지혜는 국경을 넘나들며 제자들을 통해 퍼졌고, 세기를 넘고 넘어 현재 디지탈 시대 속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 우리의 안방에서도 활자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 공자의 철학은 철저히 현실적이고 융통성이 있고 멀리 내다보기에, 생각과 배움이 허황과 독선에 머물지 않고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며 갈팡질팡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길 잃은 마음 속 지평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 자공의 입을 통해 재현된 공자와 그 제자들이 몰려 다니며 나눈 깊은 대화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들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번민할 때 믿고 의지하는 지평이 되어, 불안하게 흔들리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 나를 다잡아주는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g******1 2014.12.07. 신고 공감 4 댓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