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미, 그녀는 시인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민 그녀는 분명 이제껏 시인이었다. 이번엔 소설가로 옷을 바꿔입은 그녀를 만나게 된 책 [흉터와 무늬]를 읽었다. 최영미 라는 이름 하나로, 어떤 것도 물을 것 없이 그녀의 책을 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말로 서른 이전의 것들이나 그 이후의 것들에 대해서, 꼬나문 담배 한 개피가 피워내는 연기 뒤에 숨으려는 노력없이 신나게 조소해 대던 그녀의 글이 20대의 내게 어떤 느낌이었기에 지금처럼 이렇게 그녀를 열망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나는 또 얼싸안는 기분으로 며칠을 들끓었다. 사실 그 시(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서울대 재학 중이던 그녀가 최루연기 속에 던진 20대의 열정을, 80년대의 그 신산스런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해-90년대를, 자신의 30대를 시작하면서 썼던 글인데, 어떤 것에도 거침이 없던 그녀의 냉철한 용기로 인해 내안에 쏟어져 오던 그 엄청난 속도감으로 그녀는 늘 내게 신선함이었던 것은 아닐까...? 훨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 무기정학, 이른 나이의 동거와 이혼 등...평범할 수 없는 독특한 불온성에 끌렸을까...? 불혹의 나이의 중반에 만나는 그녀의 소설은, 시인이라는 벽에 대한 그녀의 도전이 얼마나 큰 고민을 넘는 일이었을까를 자꾸 되묻게 하는 노력이 역력하다.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과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언니, 그 곁에 나란히 자리하면서도 철저히 방관자였던 주인공. 한 인물의 성장을 다루고, 한 가정의 생활사를 다룬 자칫 흔하디 흔한 소설류로 묶일 위험을 알았을까. 그녀의 인물터치는 섬뜩하리만큼 객관성을 띄고 있고, 대충 미뤄짐작으로 마치게 할 수도 있었을 아버지의 이력을 들추는 작업으로까지 너무나 친절한 그녀는, 독자에게 어떤 짐작도 허락지 않는다. 분명, 목소리를 높여-다짐의 도장을 박듯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즉 허구이며 현실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는 언어의 구조물입니다. 아버지 정일도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작가의 머리에서 창조되었습니다."라고 밝히며 자전소설로 분류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만, 난 내가 짐작하는 최영미와 너무도 흡사한 주인공 정하경은 분명 작가자신일 거라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나만의 대단한 아집이며, 독자의 작가를 향한 말도 안되는 폭력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처럼 허구의 스토리를 현실과 억지로라도 꿰맞춰가며 혐의를 거두지 않는 우매한 독자들로 인해 소설류를 쓰는 창작인들이 겪는 속터지는 창작의 부작용이라고 포화를 맞을 각오도 되어 있다. 하지만 정말이라면, 그녀가 진정으로 정하경과 전혀 닮지 않았다면...내겐 너무 머리아픈 일이 되고 만다. 소설가들의 자잘한 경험이나 생각들이 점토처럼 녹아서 뚝뚝 떨어진 덩어리로 책이 한권씩 출간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나를 어떻게든 다시 설득해야 하며, "지금, 이 21세기에 진정한 창작이 있을 수 있어?" 라며 표독스런 질문을 앞세운 오만한 독자로, 작가들에게 눈 흘기던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꿇어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지만, 창작이든 창조이든...그 여부를 차치하고라도...이상하게 그녀의 문체는 나의 것과 닮아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보잘 것 없는 내 글들인 만큼 그녀의 글도 박완서처럼 인생을 통째로 관조하며 써내는 글들에 비해, 젊은 사람 특유의 기지와 기교와 독자를 향한 테크닉이 발휘된 독특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엄청난 작가라고, 문단을 뒤흔들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지 않지만...적어도 내게는, 문체를 논하기 전에 그속에 숨은 이상한 에너지만으로도 최영미는 한동안 마약이 될 것만 같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당신은 맛깔나는 음식이 차려진 깔끔한 밥상에, 예기치 않았던 주안상까지... 발견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
| 라디오 음악캠프를 인터뷰를 통해 들은 작가는 무척이나 당당하고 솔직한 매력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고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소설을 썼다는 말에 책에 대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책 내용의 진부함에 많이 실망 했다... 주인공의 삶이 사실이든 허구이든 주인공의 아픔들... 개인마다 처한 환경이나 고통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 하루도 나름대로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포장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의 일상처럼 삶속에 스며진 아픔과 고통을 우리는 다 안고 걸어가고 있으므로 인해.. 주인공의 어린시절의 불우한 환경, 이혼등등등 그리도 별다름이 없어 아쉬움을 남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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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을 읊조리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가 쓴 장편소설이다. 90년대 초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논쟁으로 촉발되어 김인숙, 공지영 등을 거치며 트랜디한 비평 용어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후일담 문학’, 시 장르에서의 ‘후일담 문학’이라는 비평적 찬사(?) 혹은 후광을 업고 베스트셀러의 고지에 올랐던 시집을 냈던 시인이 들고온 장편소설...
후일담 문학에 대한 왠지 껄끄러운 감정(그것이 올바르게 80년대라는 시대 정신의 계승과 발전이 아니라 일종의 정리와 절연으로 읽혔으므로)과 함께 시집에서 보여지던 이가 빠져 바람이 새는 듯한 모더니즘의 어색함이 얼른 그녀의 소설에 손에 가도록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들추어본 작가의 소설은 그녀가 시인으로서 발현시키고자 하였으나 헛디딘 발처럼 삐끗한 듯하던 감수성이 제자리를 찾은 듯 맛깔스럽다. 시에서 보여지던 도발은(물론 이미 십여년 전의 일이고, 작가는 그만큼 세월을 보냈다) 냉동실에서 꺼내진 각진 얼음처럼 스스럼없이 녹아버렸다. 세상을 향해 까칠하게 들이대는 대신 다소곳하고 풍요롭게 뒤를 돌아보는 데에 공을 들이고 있는 소설은 근래에 읽은 장편들 중 가장 아름답고 정제된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소설은 시인에서 소설로 전업을 선언하는 자의 (그녀는 자신의 전업을 두고 ‘소설 쓰는 노동자’가 됐음을 자축한다) 겸손함인지 두려움인지 백서른여섯 개의 작은 장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백서른여섯 개의 새털처럼 가볍게 나뉜 소설은 그 수많은 새털로 인해 가볍게 날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내러티브의 어려움을 상쇄하고자 부러 나눈 챕터들이 아니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이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나눈 알찬 꾀부림 같다.
“...오래된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아는가? 침묵할 힘이 없으면 잘게 부수어 발설해야 한다.”
아버지 정일도의 맏딸 정하경이, 실은 맏딸이 아니라 정윤경이라는 이름의 심장병으로 짧은 생을 병마와 싸우는데 모두 소진하고 그만 스러져 시들어야 했던 병약한 언니를 가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음에 스스로 놀라, 자신의 과거를 고통과 회한 속에 찬찬히 회고하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어느날 나는 인사동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맨처음 기억이 뭐예요?” 그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식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태어나 최초로 기억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대요.”』
그리고 지워진 듯 사라졌던 정하경의 삶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분명히 존재했던, 정윤경의 미열처럼 아련했던 삶이 점차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어머니는 민둥산처럼 듬성듬성 흙이 보이는 무덤 위에 웃자란 풀을 뽑고, 장맛비에 쓰러진 개나리를 일으켜 세웠다. 무덤의 흙이 장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당신이 심었던 꽃나무였다. 가을인데도 개나리 가지 끝에 노릇한 망울이 도톰했다. 9월에 개나리가? 강산을 열두 번도 더 할퀸 수마를 이겨낸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하는 딸에게 엄마가 빙그레 설명을 달았다. “지는 해를 받아 핀 거야.” 서쪽으로 지는 해. 솟는 해가 아니라 스러지는 해. 피기도 전에 시든 무덤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꽃 아닌가...』
아버지 정일도의 어처구니없는 패기와 한국 현대사의 무지한 순발력이 발을 맞추고, 그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는 듯했지만 언제나 꿋꿋했던 어머니의 올바름과 한국 현대사 속에 스치고 할퀴며 지나간 많은 상처들이 짝을 이루고 있는 듯한 소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세월의 쓰라린 힘을, 죽어서 잊혀진 것이 아니라 잊음으로써 죽인 자신의 하나뿐이었던 언니를 반추하여 스스로 자신의 흉터를 드러내는 무모함을 보이는 주인공이 이뻐 보이는 소설이다.
“사십해의 비바람에 상처의 톱날이 무디어졌다. 어느덧 하나둘 늘어난 잔주름에 묻히는 손톱자국이 때로 아쉬우니 - 감추고 싶었던 흉터가 지금은 뭇 얼굴들 속에서 번쩍, 나를 알아보는 무늬가 되었다. 어디에서건 나를 드러내는 서명처럼.... 흉터가 무늬가 되도록 나는 사랑하고 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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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기간 : 3/1~3/3
2005년도에 읽었던 이 책의 작가인 최영미님은 내가 대학교 1학년 국어와 작문 시간에 처음 접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시집의 내용을 이해하기엔 난 너무 어렸으므로(사실 20살의 풋풋한 새내기가 나이 서른의 의미를 알리가 없겠지만..) 시집에 감동받았다기 보다는 대학교 1학년 첫학기에 들었던 수업에서 다뤘던 책이라 기억에 생생한 것 같다. 이 책은 시인은 작가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이다. 제목부터 으스스한 '흉터와 무늬'..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절대 끝나지 않을 긴 이야기, '가족'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정하경은 딸 넷인 딸부잣집의 둘째로 태어난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언니를 누르고 집안의 장녀 행세를 하며 자란 정하경은 어린 시절을 천방지축으로 설치며 돌아다닌다. 동네를 주름잡았던 골목대장에서 책에 탐독하는 시기를 지나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대학 재학중 학생 운동을 하다 중퇴를 당하며 젊은 나이에 결혼과 이혼까지 겪은 하경은 한참이 지난 뒤 자신의 아팠던 언니를 추억하며 자기 가족에 대한 기억을 하나 둘 끄집어 내기 시작한다. 언니는 16살때 고아로 위장되어 미국에 입양된다. 미국에 가면 심장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가족과의 연을 끊고 미국에 간 언니는 심장 수술의 후유증으로 먼 타국땅에서 한줌의 재로 고국에 돌아오나 법적으로 정씨집안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장례는 쉬쉬하면서 치러진다. 하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와중에 자신이 언니에 대해 얼마나 무심했으며 가족들에게 얼마나 매몰차게 대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괴로움에 빠진다. 자기 자신만 알고 늙으막에 외도를 하여 아들을 낳은 뒤 이혼한 아버지,딸 넷을 건사하며 처절하게 살아온 어머니,그리고 아웅다웅 다투며 컸던 동생들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데 자기 언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낼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컸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읽을 당시에는 별 다섯개를 주어도 모자랄 것처럼 감동의 파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아..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질 않는다. 주인공인 하경과 같은 상처는 아니지만 나름 유년시절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2005년에서 4년이 지난 지금은 그 부분이 많이 치유되었나 보다. 그래서 공감 능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족이나 들여다보면 아픈 가족사 하나 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아픔은 희석되고 마음의 흉터도 무늬로 보일 수 있게 되나 보다. 나도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아마 지금 가지고 있는 흉터도 무늬로 보게 될 수 있을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