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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주체가 중얼대는 발랄한 언어 -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분열된 주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수많은 사물들이 환유적으로 맞물려 있는 세상이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공통적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세계는 그만큼 ‘서정’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연’을 근대적 주체의 시선으로 동일화하는 (신)서정의 세계나, 존재의 아픔을 자연(사물)의 아픔과 연관 짓는 ‘다른 서정’의 세계는 젊은 시인들에 이르러 분열된 주체가 바라보는 조각난 세계로 일그러진다. 세상을 구성하는 눈이, 또한 서정을 인식하는 시인들의 눈이 더 이상 ‘자연’에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발랄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시적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사물 혹은 주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언어로서 서정적 언어를 이들의 시에서도 기대할 수 있을까?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시를 보자. 자물쇠 단단한 철창 안에서만 잠들 줄 아는 날 내다 팔기 위해 아빠는 포수를 그림자로 갈아입는다 나는 도망치지만 발빠르게 헛돌아가는 외발자전거는 땅속 깊이 층층 계단으로 쌓아내린 뼈 마디마디를 뭉그러뜨리며 또 다른 사각의 메인 스타디움 안에 발 빠진다 끝도 없이 페달을 감아대는 레이스 끝에 홈스트레치에 접어들자 관중석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나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내 나침반을 겨냥한다 어서어서 속력을 더 내렴, 너만 도착하면 완성된 퍼즐 속에서 우리들 되살아날 수 있을 거야 숟가락 들어 한 입 떠낸 아이스크림같이 희게 휜 등뼈로 사격용 표적 하나 전광판에 부조되어 있다 포물선을 타 넘어가는 장외 홈런볼에 올라탄 내가 엿 같이 찰싹 하고 내 실루엣 위에 달라붙는 순간, 탕! 소리와 함께 아빠의 눈알이 10점 만점의 놀라운 사격 솜씨를 자랑하며 과녁 정 중앙을 홉뜨고 들어온다 아빠가 마스카라 칠해 달군 속눈썹을 깜빡거릴 때마다 내 몸에 바숴져 내리는 퍼즐 조각들이 까만 섬유소의 꼬임 안으로 쏟뜨려진다. 그러나 낄낄거리며 인조 속눈썹을 떼어내는 아빠, 그걸 방비 삼아 내 키만 한 007가방 안에 나들을 싹싹 쓸어 담고는 자물쇠로 채워버린다. -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1장 김민정의 시적 주체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마침표는 없고 쉼표들만 간간이 눈에 띄는 말들의 세상에는 분열된 주체가 있고 그 주체를 철창 안에 가두려는 아빠가 있는데, 그들이 이루어내는 풍경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풍경이다.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나’를 향해 철창 안에 갇힌 주체는 탈출을 시도하지만 아빠의 눈알(총알)에 맞은 ‘나’는 조각난 ‘나’와 함께 007가방 속에 갇혀버린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낯설게 배치하여 철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체의 삶을 드러내고 있는 이 시를 과연 기존의 서정시 문법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이 시는 “지하에 계신 淫父와 淫母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화살이었다가 우산이었다가 낚싯대였다가 장대높이용 장대로 키 자라는 한 마리의 거대한 고슴도치가 되어”(같은 시) 음부와 음모의 세계에 반역하는 작가의 상상력을 기발하게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발한 상상력은 실제로는 상상의 너머, 요컨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현실로 되돌려지지 못한다. 고슴도치의 가시는 음부와 음모의 세계에 저항하는 유력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의 세계에 유폐되어 타자들이 사는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주체의 뚜렷한 한계를 내포한다. 고슴도치가 된 화자는 음부와 음모의 세계와 변함없이 싸울 것이고, 그 싸움은 상상 속에서 더욱 격렬한 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미 죽은 내가” ‘엄마아빠’의 살집을 뜯어내 살수제비를 끓인다는 끔찍한 상상력(「살수제비를 끊이는 아이」)이 그러한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김민정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는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을 시화하는 과정이 부재한다. 상상은 있지만 그 상상은 사물들을 ‘통해’ 펼쳐지는 상상이 아니라 작가의 관념 속에서 빚어진, 철저하게 ‘계산된’ 상상으로 나타난다. 끔찍함이 더해갈수록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뇌리에 끔찍한 이미지만 남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끔찍한 이미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끔찍함이 끔찍함으로 끝나버릴 때 시는 해석의 다양한 길을 스스로 막아버린다. 다른 세계로의 탈출이 미래의 긍정성을 창출하지 못하고 미래의 담론 속으로 닫혀버릴 때, 시의 미래 역시 관념 속의 미래로 닫힐 수밖에 없다.
시인이 가장 끔찍해하는 것은 ‘아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빠의 눈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상상이 반-아빠(반-오이디푸스)의 끔찍한 상상으로 변용된다고 해서 새로운 시의 미래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 세계를 향한 저격수가 되든, 음부의 세계에 저항하는 상상력의 투사가 되든, 시인은 다시 자신이 살아야 할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은 경계를 탐험하는 자들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2000년대 ‘미래파’ 시인들이 펼쳐내는 세계에는 이미지 자체의 끔찍함 때문에 ‘새로운’ 이미지가 넘쳐나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의 아픔이 제거되어 있다. 미래파 시인들의 ‘새로운 서정’을 미래의 서정으로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없는 이유는 현실의 아픔을 포기하는 순간, 시는 이미 문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업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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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민정 시인을 하게 된 것은 한겨레 신문에 나온 칼럼 때문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세한 묘사와 관찰을 통해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시인 김민정이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어떤 시를 썼을까 궁금하게 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었다. 사실 많이 놀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