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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전 PC통신 시절 한 여행 동호회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그를 기억한다. 지금처럼 초고속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가 올려놓은 새 글을 읽기에 바빴던 그 무렵, 언제나 나는 그의 가방이, 신발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의 새 책이(그것도 한 출판사에서 공모한 논픽션 상을 수상했다는)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주문을 한 까닭이. 게다가 이번 여행은 '용'을 찾아 떠난 '모험'이라지 않는가.
발리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무심하게 그저 집으로 갈 뿐이라고 말하는 노인에게 그는 '용'을 찾아 코모도 섬에 갈 거라고 이야기하며 길고긴 그의 모험의 운을 뗀다. 그리고 그가 소녀 시절 미용실에서 우연히 접하고 가슴 벅차게 바라보았던 우붓의 사진과, 집보다는 길 위에서의 시간을 더 사랑하게 된 시절과, 동남아시아를 처음 방문하게 된 친구 G와의 파라다이스 같은 휴가, 가난 때문에 질시의 눈으로 외국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현지인들, 객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진실로' 친절한 사람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한없는 동경의 눈으로 그를 따라 발리와 우붓과 수마트라와 롬복과 길리메노를 떠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 그가 찾으러 떠난, 내가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기 전에 꿈꾼 '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의 이번 모험은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실패한 모험이다. 그러나 그냥 그저그런 실패담으로 치부하기엔 그가 길 위에서 건져낸 이야기와 용의 정의 속에는 가슴 한 구석을 아려내는 서늘함이 있다.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은 용을 일컬어 이 세상에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모두들 단 한 번도 그 동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세상 어느 구석진 곳을 찾아가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흔히들 없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 루쉰의 말대로 희망과도 같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땅 위의 길과 같아서, 사실 땅 위에는 애초 길이 없으나 걸어가는 사람들이 생기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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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트래블스>의 박정석씨가 새로 펴낸 여행기이기에 광고를 보고는 바로 구입했었다. 그러나 바쁜 여정을 따라 속도감 있게 읽히던 <쉬 트래블스>와는 달리 이번 책은 좀 더 문학적 사색이 가미되어 그런지 기대에 비해선 재미가 덜 한듯 싶었고 읽을 책 목록에서 뒤로 밀리다 이제야 읽게 되었다.
막상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읽어보니 빠른 전개의 글과는 다른 글맛이 있었다. 본격적인 트래블로그라고나 할까. 그간 영어로 된 가벼운 트래블로그 몇 편을 재미있게 읽은 바 있던 차에 우리나라에도 이런 류의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내가 박정석씨의 팬을 자처하는 것은 많은 국내 여행기 작가들 중 그처럼 3박자를 고루 갖춘 작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현지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제공하는, 주로 '전문가'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의 경우 지식을 좇느라 여행의 즐거움을 놓치는 경우가 많고, 여행의 즐거움을 간접체험하도록 해주는 젊은 여행가들의 책들은 읽고 남는 것 별로 없이 너무 가볍거나 평이한 문장력으로 글맛이 달린다. 그런데 박정석씨의 경우 여행의 즐거움, 현지에 대한 지식 (의미를 도출해내는 insight), 좋은 문장력의 세가지를 고루 제공하는 작가로, 특히 이번 책에선 최근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이력에 걸맞게 한 편의 수필작품이랄 수 있는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선보여주시길 기대한다.
내용면에서 별 하나를 깎은 것은 다소 주관적이랄 수 있는 이유에서였는데, 인도네시아를 다루면서, 코모도와 플로레스 섬까지는 다루면서 그 옆의 동 티모르 얘기를 쏙 빼놓았다는 데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글에 빠져 작가와 함께 파라다이스를 꿈꾸던 나는 지도에서 동티모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꿈이 싹 깼는데 작가는 그 이름에 끝까지 눈을 감았다. 물론 동티모르의 비극을 논하자면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저자의 파라다이스 꿈꾸기에 온전히 동참하기에는 깨어난 양심이 계속 걸려 했다. 사실 이런 책을 읽으려는 것 자체가 그런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기 위함이었는데 파라다이스에도 현실은 존재했던 것이다.
한편 책상태에서도 별 하나를 깎았는데 책 가격이 overpriced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300페이지 미만에 텍스트 위주로 된 글임을 감안하면 적당한 가격이 아니라 생각된다. 기껏 좋은 취지로 수상제도를 마련해 놓고 독자들로 하여금 상금을 지불하라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인상깊은구절] 여행기란 떠나본 자가 떠나보지 못한 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