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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중심에 두고 인류의 질적인 삶의 향상을 위한 디딤돌로 작용할 인문학 강좌 열풍은 텔레비전 방송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종교관과 종족 보존과 생식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행동의 덧없음에 깔려 있는 허무주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시대에 미적거리다가는 뒤처질까 봐 불안해하며 세상 사람들의 속도를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본다.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기 힘든 상황에서 만난 니체 씨의 답변은 정신적 방황을 조금 덜어줄 방편으로 비춰진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동안 속도에 치중하여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고용이 불안한 시대에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을 찾아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다반사처럼 여겨질 정도로 공무원 시험을 보려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인문 사회계열로 진학한 학생의 경우 대학을 다닐 때부터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며 졸업 전에 취직하여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구를 실현코자 한다. 살아갈수록 인생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님을 절감할 때마다 불공평하다고 푸념하며 환경 탓을 하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니체는 가혹하다고 여겨지는 운명과 맞서 싸워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켜 가는 일에 관심을 둘 때 인생은 의미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도우면서 평온하게 살았던 사회를 이상으로 여겼던 근대적가치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니체는 가혹한 운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험하게 살기를 바랐다. 욕망이 충족될 때 만족하면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욕망은 불행을 몰고 온다. 지금 달갑지 않은 일이 벌어졌지만 돌려 생각하면 그 일이 재앙을 비껴가게 하는 일일 수도 있음을 알아차리고 어떤 태도로 현상을 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안락한 가운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였던 쇼펜하우어에 비해 니체는 짧게 살다 가더라도 자신의 힘이 증대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며칠 보이지 않던 이웃 아줌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살이 빠지고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집에서 주변 정리를 하면서 죽음을 예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덧없이 소멸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느끼는 불안이 증폭될 때마다 염세주의적 태도는 특정 종교에 매달릴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만큼 니체는 특정 종교와 정치적 이념에 사로잡히는 일은 자기소외이며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이라고 경고하였다. 자유로운 사고를 막는 확신의 노예에서 벗어나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 대신 자신을 주인으로 삼아 질적인 삶으로 고양하는 일을 예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들 역시 삶의 예술가가 될 때 생을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양분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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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느낄 때가 많다. 솔직히 힘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힘써 생활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서 그렇지 우리는 중력을 버티며 산다. 걷거다 뛰거나 가만히 서 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수록 눕게 되고 꼼짝 못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이미 힘겨운 일이고, 힘겨움을 버틸 정도로 건강하지 못하면 죽음을 맞게 된다. 물론 중력을 버티고 사는 게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적응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아무 힘도 들지 않는 그런 삶이란 없다는 것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힘들게 살고 싶지 않으면 방법은 두 가지다. 힘겨운 환경을 피하던지 내가 아주 강해지던지. 그런데 전자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다. 살면서 어떤 일이 내게 닥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삶이 더 고달파진다. 언제 어떻게 좋고 나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어떤가? 어떤 고난이 나에게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단련이 되어있다면 말이다.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는 일은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역경이 와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 삶이 마냥 고달프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환경을 탓하기 보다는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상태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은 인생이 긍정적일테고 부정적인 사람은 그런 태도로 살아가게 된다. 삶 자체가 좋거나 나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삶을 대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한 책이 바로 이 책 <초인수업>이다. 세계가 어떤 곳인가에 관한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그리고 그 세계를 사는 우리의 정신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니체의 철학에서 찾고 있다.
니체는 세계에서 고통이 사라질 날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로 투쟁하고 갈등하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이런한 모습이기에 우리는 정신력이 크게 강화되고 고양될 때만 그 세계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_(P.066)
아주 가파른 산을 오른다고 상상해보자.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해져있을 때 산을 도대체 왜 올라야 하느냐고 불평불만을 터뜨릴게 분명하다. 이에 반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강한 상태일 때는 산은 오르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인생이 행복의 연속이라면 다행이지만 고난의 파도가 일렁이며 자주 들이치는 곳이라면 거센 파도를 극복하고 잘 타는 사람들이 인생을 더 긍정하며 살 거란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스스로를 강하게 고양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참의미를 깨닫고 만끽하며 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강화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법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_(P.235)
안주하며 편안함을 갈구하는 삶에 생명력과 활기가 넘칠 리 만무하다. 더욱 더 나태해지면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삶이 권태로워지고 살아가는 의미는 퇴색되어 간다. 커다란 기계의 부품처럼 틀에 박힌 일을 하면서 길들여진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한다. 그냥 소박한 삶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에게 깨어있으라고 외치는 셈이다. 이 책 <초인수업>은 어렴풋이 알고 있던 니체 철학의 핵심을 우리 일상에 접목해 소개한다.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틀에 박힌 일상에 무력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니체 철학의 핵심을 접해보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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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정답을 알려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 질문이 떠오를 때에 나의 대답도 그때 그때 달라진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삶이 지속되는 한, 주기적으로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다. 철학자들은 인생에 대해 좀더 깊이 사색하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남겨놓았다. 때로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기도 하고 나의 생각과 근접한 문장을 발견하기도 한다.
무더위의 끝무렵, 날씨가 조금 쌀랑해지기 시작할 때면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 된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책 속의 문장에 좀더 감성적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때에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위험하게 살아라』라는 이 책의 제목은 니체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이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사랑할 수도 있게 됩니다. (13~14쪽)
이 책의 저자는 니체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버겁게 느끼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했을지를 생각해보고 이 책을 집필했다고 이야기한다. 사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순간에 읽어도 좋고, 깊이 생각에 잠기지 않고 바쁘게 살아가는 때여도 잠깐 브레이크를 걸고 함께 고민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니체에게 열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살면서 순간 느끼게 될 질문을 대표로 니체에게 물어보고 그 답을 들려주는 셈이다. 첫 번째 질문: 니체 씨, 제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한가요? 두 번째 질문: 니체 씨, 사는 데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삶에 의미가 있을까요? 세 번째 질문: 니체 씨, 저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요?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네 번째 질문: 니체 씨, 사람들은 왜 싸우는 것일까요? 싸움 없는 세상은 과연 이루어질 수 없나요? 다섯 번째 질문: 니체 씨, 저는 한 때 신을 믿었지만 점점 회의가 듭니다. 우리 삶에 종교는 필요한 걸까요? 여섯 번째 질문: 니체 씨,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 체계는 없을까요? 일곱 번째 질문: 니체 씨, 저는 예술가를 꿈꾼 적이 있습니다. 예술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여덟 번째 질문: 니체 씨, 저는 가끔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잘못된 걸까요? 아홉 번째 질문: 니체 씨, 당신은 '그대 자신이 돼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열 번째 질문: 니체 씨, 당신은 '그대 자신이 돼라'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를 극복하라'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각각의 질문이 무게감이 있어서 질문만 보았을 때에는 약간 부담감이 느껴졌지만, 꼭 한번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기에 계속 읽어나가게 되었다. 편안하게 기술된 내용을 보니 읽는데에 부담이 없었다. 철학자에 대해, 니체에 대해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편안한 에세이를 읽으며 삶, 운명, 경쟁, 종교 등에 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왜 산에 오르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유명한 답은 '산이 그곳에 있으니까 오를 뿐이다'라는 것이지요. 니체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내 힘을 느끼고 싶어서, 험난하고 높은 산을 겁내지 않고 올라가는 나의 강한 힘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답하겠지요. 니체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안락한 생존과 쾌락에만 연연해하기 때문에 병약한 인간이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39~40쪽) 이 문장이 지금의 내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생각에 잠기기 좋은 계절이다. 화두처럼 던져지는 책을 계기로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어려운 주제를 쉬운 언어로 접해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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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책의 제목치고는 그렇게 끌리지는 않는다 차라리 원래대로 "니체 씨 인생이란 무엇인가요~'라면 적어도 눈길이 머물고 한 번은 손을 뻗어 책을 빼 볼 생각은 들텐데 만일 내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이 두 제목의 책을 본다면 위험하게 살아라는 글쎄 요즘 너무 흔하디 흔한 처세술에 책일 거라 단정 짓고 아마 서가에서 꺼내보지도 않을 것이다 왜 제목을 이렇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예전에도 니체에 대한 책을 몇 권인가 읽은 적이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그건 아마도 나날이 아픈 내 몸 상태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천재 중 한 사람인 니체는 25세에 문학 교수가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이렇게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니체는 병에 걸렸고 평생 그 병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잘 나가던 천재 대학교수님이 몹쓸 병에 걸려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병원을 전전하다가 빈곤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병에 걸려 대학교수직을 그만둔 것을 기점으로 철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니체의 육체적으로는 가엾은 인생의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정신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이 남겨진 것은 문학 교수님이 아닌 철학자, 사상가로서의 그의 업적 때문이니 그의 말대로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든 것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10가지 질문에 답변을 해준다 그 10가지 질문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느끼는 의문이라 생각된다 1. 니체 씨, 저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요?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운이 없기로 따진다면 니체 역시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25살 대학교수님이 될 때까지는 그런대로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그 후는 병으로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굉장한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행복의 의미에 대해 고난과 고통을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고 평정과 충일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만약 그가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면 이런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4. 니체 씨, 사람들은 왜 싸우는 것일까요? 싸움 없는 세상은 과연 이루어질 수 없나요?
이 질문에 니체는 전쟁과 투쟁이 있어 인간문화가 발전한다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싸움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전쟁과 투쟁이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들이 없다면 결국 세상은 퇴보한다는 그리고 언젠가는 쇠망이라는 당연한 수순을 밟을 테니 말이다
전설 속의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살레노스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이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살레노스는 미다스 왕의 재촉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그다음은 최대한 일찍 죽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하고 살레노스의 답변 그대로를 말이다 삶을 살아갈수록 괴롭고 힘든 일만 늘어날테니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방법이 아닐까 하고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옛날에도 있었구나~~ 잠시 예전 생각이 났다
5. 니체 씨 저는 한때 신을 믿었지만 점점 회의가 듭니다 우리 삶에 종교는 필요한 것일까요?
역시 니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을 것이다 "신은 죽었다" 하지만 예전에 어느 책에서 니체가 한말이 생각난다 신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에 합리성을 따진다면 신을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면 믿어서 다행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어서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일단은 믿는 것이 득이라고 했던 이 말을 읽고 만약 그 옛날 내게 전도하던 많은 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니체의 이 말을 했다면 지금 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니체가 죽었다고 말했던 그 신은 일반적인 신과는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류의 원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간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믿으라고 협박하는 비호감적인 인물이 아닌 선지자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인간적인 인물로 보였다 몇 달 전에 소크라테스와 붓다와 함께 3대 선지자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이 글을 보니 왜 예수가 선지자라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던 중에 가장 어이없는 말이었다 이게 사람이 할 말인가~~ 종교를 떠나 인간대 인간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한 종교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편협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지금도 종교 문제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많은 이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생각한 거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 낸 종교가 이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라고 생각된다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가 신의 자리에 들어갈 초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 로마 역사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카이사르"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인간형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능력 있고 쿨한 인간형의 대표자가 아닐까~ 이런 카이사르와 모든 것을 보듬어 안은 채 죽어간 예수 같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나 있을까?? 언젠가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인물이라고 하는 "체 게바라"를 니체가 만났다면 그를 초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 카이사르와 체 게바라는 내가 아는 인류 가운데 가장 호감 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
6. 니체 씨,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 체계는 없을까요??
솔직히 이 질문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니체가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라고 해도 이런 것은 무리지 않을까 싶다 삶의 방향이 같지 않을 텐데 무엇보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 자체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나로서는 이런 질문자체를 한다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념이 이념 자체를 넘어 종교화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신념에 사로잡혀 뭉치면 어머어만 집단의 힘을 과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전쟁들이 바로 이 정치적인 이념으로 일어난 경우이다 히틀러~ 개인은 별 볼 일 없는 외모의 독일 장교였던 그는 나치주의라는 것을 이뤄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 어떤 희대의 연쇄살인자도 이 왜소한 독일인을 이길 수는 없다
종교도 이념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고 선택한 것이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닌 스스로 그것을 믿기에 자신에게만은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진리 대신 삶의 위안을 택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것 또한 약한 인간이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생존 방법이 아니었을까?? 니체가 보기엔 가치가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니체처럼 강한 정신력을 가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8. 니체 씨, 저는 가끔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잘못된 걸까요??
아주 오래전에 대학시절에 들었던 사회학 강의에서 뒤르켐이라는 학자가 쓴 "자살론"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자살은 사회적인 타살이다" 그 당시에는 그저 고개만 끄적이던 이 말이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딱 들어맞는 말이 되었다 목숨을 끊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바로 이 사회이다 물른 이런 자살은 니체가 말하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의 자살이다
니체는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자유롭고 의식적인 죽음을 선택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예전에 읽었던 "사과나무"라는 소설에서 연인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여인을 묘지가 아닌 십자로 한가운데 묻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읽은 지 괘나 오래된 책인데도 이 부분은 조금은 충격적이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는 자살에 대해 비판적이다 서양에서는 공동묘지로 생각되는 교회 묘지에도 자살자들은 묻히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9. 10번째 질문에서 '그대 자신이 돼라'라는 니체에 말에 대해 우리가 자신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자기를 극복하라'라는 말에서 '자기극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니체의 10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읽다 보면 저자 개인에 대해서도 또 멀게만 느껴졌던 "니체"라는 철학자에 대해서도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도 한다 하지만 책은 250페이지가 조금 안되는 그리 많지 않은 양임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좀처럼 진도가 나아가지 않으니 읽는 동안에 조금은 인내심이 필요한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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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니체의 작품을 읽은 것이 아니고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책을 읽었다. 서울대학교 박찬국 교수가 쓴 <초인수업>이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발달 단계를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최종으로는 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낙타의 정신에서 머물기도 하고, 사자의 정신에서 머물기도 한단다. 쉽게 풀어쓴 것을 요약하면 낙타의 정신은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로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사자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에 반항하는 시기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최종 아이의 정신은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말한다.
운명에 대한 니체의 견해도 눈길을 끈다. ‘하면 된다’는 자유의지의 철학에 대해 니체는 ‘단죄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실패한 사람은 부모 잘못 만났거나 운이 나빠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사회는 실패한 사람은 성공할 만큼 노력하지 못했다고 단죄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패배주의로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리는 숙명론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사람을 만든다는 점에서 부정한다. 니체가 취하는 것은 운명애(運命愛)의 철학이다.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그렇게 험난한 살았다.
저자는 니체의 운명애의 철학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으로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든다. 그는 일본 경영의 신으로 꼽히고, 자신의 성공 비결을 ‘하늘의 세 가지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난 덕분’이라고 했다. 가난하게 태어났고, 허약하게 태어났으며, 못 배웠다는 것을 세 가지 은혜라고 했다. 가난했기에 부지런한 습관을 익혔고, 허약했기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 깨닫고 부지런히 단련하여 건강해졌으며, 초등학교 4학년 중퇴했기 때문에 상대가 초등학생이라도 무엇인가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려고 한 덕분에 다양한 지식과 지혜를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니체를 가장 유명하게 한 말이다. 이는 니체가 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니체는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본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 신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상징주의자라고 보았다. 지금처럼 신격화된 것은 바울이 성경에 옮기면서 복음(福音)을 화음(禍音)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원래는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니체는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으로 나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대부분 길들이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자신에 대해 자존감이나 긍지 등을 갖지 못해, 부모를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니체가 바라는 방식은 길러내는 방식이었다.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했다. 자신이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니체는 남의 평가에 민감한 이유를 우리 안에 존재하는 노예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언제나 주인의 평가에 기뻐하고 슬퍼했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니 뒤표지에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안일함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 것인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왜 하나도 없을까?’ 한 번쯤은 고민했던 이러한 인생의 질문들. 이 한 권의 책으로 그 고민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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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교수님께
교수님의 책, <초인수업>을 잘 읽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저서가 제 서재에 여러 권 꽂혀 있을 정도로 교수님의 글을 열심히 읽는 애독자입니다. 이번 책도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샀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니체를 알기 쉽게 쓰셨더군요. 니체의 생각들을 잘 분류해주셔서, 몇 쪽 읽지 않았는데도 벌써 니체의 생각들이 제 머리에 자리를 갖춰 차곡차곡 자리잡는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교수님이 이 책을 쓰시면서 니체의 저작물에서 니체의 글들을 여기 저기 많이 인용하셨는데 그 출처를 전혀 밝혀 놓지 않았더군요. 교수님은 책의 앞부분에서 <일러두기>를 통하여 '본문에 인용된 니체의 글 대부분은 저자가 직접 번역했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 출처를 알려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인용된 부분이 다른 번역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하고 또 인용된 부분을 직접 니체의 저서에서 찾아봐 그 앞뒤의 글을 읽어보면서 더 깊게 생각해 보고 싶은데 출처를 밝혀 놓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교수님의 저서를 열심히 읽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출처를 온라인상으로 알려주실 수 있겠는지요?
제가 지금껏 니체와 관련된 책을 읽어오면서 인용문 표시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점을 적어 본 글이 있는데 한번 살펴 봐 주시기 부탁드리며, http://blog.yes24.com/document/7848231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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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박찬국 저 / 21세기북스 펴냄
표지도 없고 어째 밍숭맹숭했던 가제본 상태의 <니체씨, 인생이란 무엇인가요?> 도서로 먼저 만나보았다. 나와 그렇게 첫 대면한 도서가 <초인수업>으로 확정되어 뜨끈뜨끈한 신간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니체에게 고통은 명석한 숙고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고 니체 자신도 두통, 위통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운명의 삶을 살았지만 그런 질병을 통해 자신이 보다 심원해지고 보다 강해졌다고 이야기한다.
아래 10가지 질문들은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하고 생각해보았음직한 것들로 니체의 사상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보니 조금만 힘겹고 버거워지면 많은 이들이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점점 나약해지는 현대인들에게 니체의 정신이 더없이 요구되는듯 하다.
삶의 모든 곳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야 우리.. 그리고 우리 사회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 것인지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니체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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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는 '니체 씨, 인생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 아래 챕터가 나뉘어져 있어요. 그래서인지 더욱 흥미있고 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던. 질문들이 정말 한번쯤 궁금했던 것들 아닌가요? 나만 그런가? ㅋㅋ
사실 니체, 이름은 모두 알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제가 아는 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과 고통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는 것 정도. 그런데 이번 책을 계기로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꽤 많은 부분에서 저는 정말 동감했답니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현실세계, 삶은 어쩌면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 자체이고 그 사람의 생태적, 심리적 상태의 표현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창조해내는 인간이 되자 뭐 이런 개념이 가장 기본이 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안락이나 긴 연명이 아니라 자신이 고양되고 강화되었다는 느낌으로 보고 있어요. 따라서 고통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는 강건한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운명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이용하고 승화시키라는 철학이죠. 그리고 그런 인간상을 초인으로 정의하고 있어요. 요즘 점점 나약해지고 있는 현대인에게 더욱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도 저는 어쩌면 어느부분 꽤 공감을. 기됵교인 분에게는 비추입니다. 강한 반발과 불편함을 느끼실 듯. ㅠㅠ 그리고 자살과 연민에 대한 부분은 저 역시 조금 다른 의견들이 있네요.
그래도 덕분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고자 했던 니체가 보여준 건강한 삶의 모습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게, 꽤 흥미있게 쓰여져 있어서, 철학 관련 책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도 벗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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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초인수업은 인생을 살면서 나처럼 불혹을 넘기는 세월동안 머리속을 맴들면서 고민해왔던, 또는 대학시절 동아리활동 중 마음에 드는 이성이나 후배에게 잘보이기 위해 화두로 던지곤 했던 인생의 질문 아래의 10가지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100여년 전의 천재철학자 니체가 대답해준다. 내인생은 왜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소설, 무협지,만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초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100년전의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내렸다. "초인(超人)이란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고 고난에게 얼마든지 다시 찾아오기를 촉구하는 사람" 내가 <초인수업>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어떻게 하면 초인이 되어 남들과 다른,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였다. 그런데 고난을 사랑하고 얼마든지 고난이 다시 찾아오기를 촉구하는 사람이 초인이라니.....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도대체 니체의 생각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신은 죽었다" 정도의 명언을 남긴 고등학생 시절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람인데, 니체는 과연 나에게 어떤 결론을 줄지가 너무 궁금하다.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라고 니체는 말한다. 인생의 목표가 안락한 삶의 추구가 아니었던가?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고, 더 많은 명예를 구하고자 이유가 이런 안락한 삶을 추구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니체가 말하기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장수와 안락한 삶이 아니라 "힘의 고양과 증대"라고 한다. 이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우리가 요즘의 로또가 아닌 과거의 100억씩 하는 로또시절, 로또가 당첨되면 당장에 회사를 그만두고 신나게 놀아야지 하는 상상을 한번쯤은 했었을 때를 돌아보자 과연 그 행복함과 만족감이 얼마나 지속이 될까? 물론 돈이 없어 하루하루 굶주리는 사람에게야 로또당첨이 무조건 좋겠지만.... 다른 예를 들어볼까? 한번쯤은 해보았을 <스타크래프트>의 비유를 돌아보자 초보시절 열심히 일꾼들을 만들고 건물들을 지어서 공격유닛들을 만들지만 정해진 일정시간 후 쳐들어오는 컴퓨터의 무한 러쉬에서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나 오버웰밍(overwhemling)의 치트키(cheat key)를 최소한 한번쯤은 사용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치트키를 사용하게 되면 정말 안락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트키를 사용했을 때는 더이상 잘 해보고자 하는 의욕은 물론 더이상의 자신의 힘이 성장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수 없을것이다 저글링들이 난입해서 자신의 건물을 파괴하고 일꾼들을 학살하거나 , 발업 질럿이 쌍칼을 휘두르며 커맨더 센터에 칼질을 하거나 스팀팩 머린들이 기관총을 난사할 때의 피가 끓는 고난을 견디지 않고서는 더이상의 자신의 실력을 증진 시킬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제서야 니체의 말에 공감이 된다. "고난을 견디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고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초인이다" 즉, 이 말은 언제나 노력을 해서 고난을 극복하겠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굉장히 긍정적인 마인드이다. 니체는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운명에 대해 부정하는 자유의지의 철학 , 곧 단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데 자유의지란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갈수 있다는 생각으로 반대로 현재의 처지가 불행하다면 그만큼 노력과 재능이 부족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단죄의 철학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처량하리 만치 많다. 둘째, 숙명론 ,이것은 운명이란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가 없는 신이 정해 놓은 터라 극단적 패배주의로 모든 것은 운명탓으로 돌린다. 셋째, 운명애 , 말그대로 운명을 사랑한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 감사하는 태도이다. 니체가 추구하는 운명에 대한 태도는 <운명애>로 가혹한 시련만이 나를 단련시키는 최고의 친구라고 한다. 초인수업의 니체는 혹시라도 힐링을 바라는 자에게 오히려 위로하지 않고 채찍질을 하고 있다. 고달픈 운명에 어쩔수 없이 순종하며 눈물 짓는 사람들에게는 연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그러한 연민은 당사자나 연민을 느끼는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운명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자신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생각하라고 한다. 운명애에 대한 설명은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기조와 유사하다. 이미 100여년전의 니체가 말한것이었군. ;; 아마 더 이전의 철학자가 말했던 것일수도 있겠지 문득 성경에 나왔는지 논어에서 본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초인수업을 통해 니체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알게 되었고, 과거 철학자든, 일반인이든 현재의 우리든 간에비슷한 주제로 고민을 해왔었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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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이 마음대로 된다면 지금과 같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분노와 아픔과 상처로 가득한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다 행복하고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지극히 상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보니 모두 다 행복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으며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은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신이거나 죽은 사람이거나.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늘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인생이 그들 마음대로, 그들 뜻하는 대로 흘러가 마무리 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아! 나는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았어. 만족하는 생의 마지막이야.’라고 하는 사람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 생은,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나’라는 인생, 단 하나밖에 살아보지 못해 성급하게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무슨 수를 써도 ‘나 외의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 진리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그래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성현이나 선생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이 있어왔고, 넘쳐나는 책들도 조금이나마 이정표 노릇을 하려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아무리 책을 읽거나 성현들의 글귀를 마음에 새겨 살아도 도무지 내 일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지 않은 것’이다.
웰빙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힐링’ 열풍이 도래했다. 수년 째 지속되고 있는 힐링, 힐링, 힐링은 꽤 매력적이지만 지극히 패배주의적이고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부족으로 한정시켜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으로 유폐’시키는 사디즘적 폭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힐링’이 특정 사회에서 일정 정도 희구되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병들어 있다는 방증이다. 병들어 있지 않은 사회와 개인들에게 ‘힐링’은 무의미하고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힐링, 힐링, 힐링의 대상이 되는 주요 세대는 젊은 세대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20-30대 젊은 세대는 정말 열심히 산다. “더 노력하세요! 자신을 더 갈고 닦으세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벌써 그렇게 살고 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산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의 특수성이 주된 이유이지만, 충분히 열심히 치열하게 산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또 다시 ‘더 열심히 살아라.’ 라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 내 노력이 부족한 가 보다. 남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자. 나를 발견하자.’ 이러고 있다. 문제가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힐링’은 없다. 그런 자기계발서도 없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p.248)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니체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에서 고유명사 정도로 자리 잡은 ‘힐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 왜 나를 강하게 만드나? 나는 그 전제부터 동의할 수 없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지만 나를 더 괴롭힐 수도 있고,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 전반에서 저자가 말하는 주제는 ‘고통을 참고 오히려 즐기라.’라는 것이다. 철학자이자 교수인 저자는 니체를 전공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주로 니체의 책을 통해 주제를 피력한다. 니체 또한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시대적으로도 가혹한 시기를 지났지만 그의 책에서는, 그 고통을 오히려 즐기고 이겨낼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쏟아내고 아주 작고 불편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떱니다. 이렇게 자극에 민감하면서 안락만을 탐하는 인간을 두고 니체는 ‘말세인’이라 일컫고, 이런 유형의 인간에 대해 ‘초인’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고귀한 인간’ 혹은 ‘기품 있는 인간’이라고도 부릅니다.” (p.41)
니체가 말한 ‘초인’ 개념이 책에서 자주 등장한다. 나는 니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책 한 권을 읽으려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했던 전과가 있는 터라, 저자의 니체 소개를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인’개념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니체가 그리스 철학에 심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니체가 왜 인간의 희로애락과 고통과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말세인’이라 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초인’을 주장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초인’이 과연 고귀한 인간인지, 기품 있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사회와 기득권이 정해놓은 규칙과 명령에 순종하거나 순종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저항이나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는 것이 ‘초인’으로 해석된다.
“니체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정신력을 강화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p.68)
전형적으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자기계발서적의 패턴이다. 나는 그렇게 읽힌다. 왜 문제가 우리 자신의 정신에 있는가? 니체가 역사를 통틀어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니체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사, 세상이 무의미하고 황량해 보이는 이유가 왜 우리의 정신력의 세기에 달려있나? 말도 되지 않는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더 노력해야지! 젊은 놈이 패기가 없어!!!’ 라는 사디즘에 다름없다.
“모든 사람이 고난과 고통을 겪을 때 인격신에 의존하기보다는 강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닌 초인이 되어 어떠한 고난과 고통도 혼연히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p.139)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허탈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여겨졌다. 예수와 카이사르가 어떻게 종합될 수 있나? 니체는 카이사르는 물론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하는데, 저자의 간략한 소개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니체의 책의 일부분을 발췌해 옮겨 적용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첨부되었겠지만 정말 니체가 내린 초인의 모델과 정의가 저렇다면 나는 앞으로 계속 니체의 책은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게는 너무 유치하고 황당한 논리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깨달으며 겪었던 황홀경의 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p.60)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도 저자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요양 차 머물던 곳 가까이에 있는 호숫가에 높이 솟아 있는 바위를 지나던 길에 갑자기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영원회귀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뭐 니체가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기독교의 경전에서 자주 나오던 기적과 비슷해 보인다. 나만 그런가? 철저하게 이성과 합리를 추구하며 실존철학의 선구자가 된 니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그대의 운명이 평탄하기를 바라지 말고 가혹한 것을 바라라’라고 외치며, 그런 운명과 투쟁하면서 장렬하게 죽을지언정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p.16)
‘가혹한 것을 바라라.’ 정말 너무 가혹하다.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더 가혹한 것을 바라라는 것인지. 지금은 장렬하게 죽을 수 없는 시대다. 죽고 싶어도 그렇게 죽을 수 없다. 패배하면 바로 탈락이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서 패배는 바로 Ou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