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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와 웹스터, 아마도 전자는 잘 알런지 모르지만 후자는 잘 모를 듯 하다. 웹스터는 세익스피어 후대의 사람으로 아마도 영국문학사상 가장 비관적인 작가에 속할 것이다. 그는 어린애의 밝은 웃음 속에서도 해골을 보는 작가였다고 했다. 세익스피어는 전기에 유쾌한 희곡에서 후기에는 점차로 어두운 성향을 띠게 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네델란드 정물화의 시기도 얼추 아마 이 시기와 겹쳐질 것이다. 무역의 급속한 진전과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이어 30년 전쟁과 페스트, 기근이 휩쓰는 시대였다.
예전에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찮게 해괴한 싸이트를 발견했다. 마카브로 동호회라는 것이었다. 마카브르란 중세 말의 죽음에 관련된 여려형태의 미술을 일컫는 말로 죽음이란 문제를 둘러싼 집요한 집착을 그려내는데 심지어는 아름다운 여인이 길거리에 쓰려져 죽어가다가 시체로 버려져서 서서히 썩어가는 과정을 끔찍하게 그린 길다란 그림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정물화는 그래서 재미있다. 그 시대는 마치 인간의 삶의 한 단면을 농축시켜 놓은 시대같았고, 동시에 그 정물화도 그런 인간의 삶을 정지된 순간에 집약시켜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즉물적인 세계 속에 숨겨진 인간의 한계, 즉 죽음의 명령이 깃들어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모든 정물화들에는 아무리 그것이 사물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어딘지 그림자가 느껴진다.
"vanitas vanitas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인상깊은구절]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한다. 아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역사상 가장 현명한 자인 솔로몬은 시종일관 '이 세상에 대한 경멸contemptu mundi'을 피력한다. 바니타스는 17세기의 모든 정물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전도서이 말처럼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덧없음과 헛됨을 나타낸다. 모든 정물화의 공통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바니타스는 특별히 기독교의 교훈적인 성격과 관계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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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미술 사조 중 가장 좋아하는 것 3가지를 꼽으라면 신고전주의, 바로크와 함께 17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정물화를 꼽는다. 신고전주의는 차가운 느낌을 줄 정도로 엄밀하고 정교한 묘사에 흠뻑 빠져서, 바로크는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좋아했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정물화는 너무나 정교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는 하는데, 난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그 시기의 정물화에 빠졌다.
그런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다룬 미술서적은 거의 없었다. 신고전주의와 바로크도 대중적으로 그리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단행본이 있는데,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정물화는 단행본조차 찾기 힘들었다. 혹시 너무나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는 점 말고는 딱히 이야깃거리를 찾아볼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이 책은 그 드문 네덜란드 정물화 서적 중의 하나다.
소비시장을 의식하는 예술품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네덜란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근세까지만 해도 미술 시장의 '큰 손'은 교회와 왕실 및 귀족이었다. 때문에 성화나 부유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의 거대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네덜란드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애초에 네덜란드는 시민 중심의 상업국이었던데다가, 종교 개혁까지 겹치면서 '큼직한 주문'은 거의 끊겼다. 대신 상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 계층이 새로운 미술시장의 고객으로 떠올랐고, 그들이 선호하는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상인 계층은 전통적인 귀족 계층을 동경하거나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당당하고 자긍이 강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설프게 귀족들의 생활방식을 따라하려고 했을 것이고 미술품 역시 전통적인 주제와 도상의 작품들을 원했으리라.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네덜란드 정물화에 주로 나온 도상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정물화 정중앙에 놓여 있는 사물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열된 사물에는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쳐 지나가는 대상에 시대가 있고, 사상이 있고, 사회의 분위기가 있고,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 정물화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사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세부 묘사는 사진보다도 더 정교하다. 사진은 카메라의 빛이 구석구석 균일하게 비치지는 않고, 어딘가에는 그늘이 지거나 희미한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정물화에는 그런 곳도 없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진다. 개인적으로야 아이러니한 비현실성 때문에 오히려 그 시기의 정물화를 좋아하지만, 너무나 사실적인 세부 때문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는 건 역설적이다. 문득 <디테일>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너무 지나친 세부묘사는 전체 그림의 흐름과 통일성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고 했었던가. <디테일>에서는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회화성은 떨어지는 작품을 일러 한 말이었지만, 네덜란드 정물화에서도 부분적으로는 적용되는 말이다. 하기야 네덜란드 정물화는 처음부터 그런 점을 의도했다고 할 수 있으니, 결점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 네덜란드시대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물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미술시간에 교육받을때에는 정물화란 한낱 '묘사력의 연습'에 불과하였고, 아마도 대체로 고대로부터 그렇게 인식되어온 모양이다. 그러나 정물화가 발달하였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이르려 정물화도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우주관으로 발달하였음을 이 책은 말해준다. 이 책을 읽고나서 비로소 내게는 마치 무의미한 사물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한듯한 느낌을 주던 네덜란드의 정물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과 허무와 우주의 신비와 조화를 한순간의 형상에 담아두려했던 것은 분명 하나의 프론티어정신일 것이다. 한순간에 영원이 있다. 그 영원을 잡아내기 위하여 화가들은 수많은 시간동안 연마해온 붓질에 심혈을 기울였으리라. 그래서 예술인 것이리라. 좋은 책이다. |